Exclusive maid of honor of the evil empress RAW novel - Chapter 15
Chapter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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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태녀와 올로고스 왕제는 떠났다. 바로 어제까지 근원의 섬에 있었던 게 언제냐는 것처럼.
파레사도 더 이상 그 일을 생각할 수 없었다. 다른 문제가 온통 파레사의 신경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어서 와요, 파레사 멘젤. 아니, 벨로나 나이트시라고 했던가요. 이번 사태에서 크게 활약하셨다지요?”
파레사는 황후를 뵈러 가는 길에 마주친 눈앞의 여인을 세세히 살폈다.
눈에 띄지 않는 생김새에 어딘지 고집이 있어 보이는 입술. 황후보다는 나이 들어 보이지만, 엇비슷한 연령대이리라.
“내 이름은 하이디예요.”
역시. 새로 온 전속 시녀를 맞이하는 전속 시녀의 심정이란 묘했다.
하지만 불쾌할 것은 없는 일이었다. 파레사는 흔쾌히 인사해 보였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간 내 빈자리를 훌륭히 채워주었다고 들었어요. 고마워요. 들었으니 알겠지만, 황후 폐하와 나는 어린 시절부터 벗으로 자라 왔어요. 비록 결혼하면서 황후 폐하의 곁을 비웠지만, 늘 그분의 행복을 빌고 있었답니다.”
“그러셨군요.”
“최근의 사태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나는 더 이상 폐하의 곁을 비워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아무렴요. 그렇게나 힘든 일을 겪으셨다니, 세상에!”
“…….”
파레사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왜 까맣게 몰랐다는 듯이 이야기할까.
파레사가 알기로는 하이디가 있을 때도 니시아나는 황후를 괴롭혔건만.
하지만 하이디가 말을 마구 쏟아내고 있어서, 파레사에겐 입을 열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하이디는 종내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그간 수고했고, 앞으로도 황후 폐하를 위해 힘써주세요.”
“예.”
그 자리를 떠나면서 파레사는 자신이 느끼는 불편감의 정체에 대해서 생각했다.
답은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녀는 어딘지 파레사를 견제하는 듯한 기색이었다. 견제라니!
하이디는 선배로서 파레사에게 가르치는 듯한 태도로 해야 할 일들을 일러주었다.
파레사는 단순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황후의 뜻대로 하기로.
전속 시녀가 꼭 하나여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둘이서 역할을 나눠 함께 황후를 보좌하면 될 게 아닌가.
자유도가 떨어지는 건 안타깝지만, 어찌 보면 혼자 할 일이 둘로 나뉘는 것이니 더 편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 했다. 잠시 후, 파레사는 황후를 독대했다.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느냐? 안 그래도 황태자가 네 포상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아직 네 의견이 반영될 것 같은데 작위는 어떠냐.”
작위라니. 뒤나미스 인으로 살아온 파레사로서는 반감이 느껴지는 일이었다.
완전히 제국으로 편입되는 것 같지 않은가. 계속 머물려면 그게 낫겠지만.
“그보다 제 봉급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또 올려달라고! 돌아와서 한다는 게 돈 이야기냐!”
황후는 어김없이 화를 냈다. 화를 내는 것을 보아하니 기력은 완전히 회복됐다. 파레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먼저 돈 이야기를 꺼내신 건 황후 폐하시잖아요? 포상이니 어쩌니.”
“안 올려줄 거란다!”
“안 올려주는 건 그렇다 치고, 그럼 줄어들지도 않는 거지요?”
“왜 줄어들어? 아, 하이디 때문에 네 몫이 줄어들까 봐 염려하는 것이라면, 그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그녀는 곧 돌아갈 테니까.”
“돌아간다면, 전속 시녀직을 그만두게 하신다는 말씀인가요.”
“그녀에겐 돌봐야 할 아이가 있어. 마냥 유모에게 맡겨둘 수는 없지 않겠니.”
“하지만 하이디는 그만둘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요.”
그러니까 이건, 황후가 하이디를 그만두게 하고 싶다는 소리……인가? 파레사는 조금 놀란 눈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 이내 한숨이 그녀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아버지가…… 아직 제도에 계신다는 건 알고 있니?”
“제가 떠난 뒤에 영지로 돌아가실 예정 아니시던가요?”
“그랬었지. 하이디가 오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거야.”
“어린 시절부터 친구라고 하셨으니 자작과도 아는 사이시겠군요.”
“그래, 그러니 황후궁에 계속 머무시는 건 안 될 일이지만 연세도 있으신 아버지의 상태가 나빠질지 모르니 제도에서 머무시는 게 어떠냐고 했지. 자작가의 저택이 제도에 있어서, 그곳에서 머물기로 하셨어. 제도로 올라온 어머니와 함께.”
“그리고 자작께서는 황후궁에 자주 방문하시겠군요.”
“그렇지. 이제 내가 너를 찾았던 심정을 이해하겠어?”
황후가 암울한 눈으로 파레사를 쳐다보았다. 파레사는 말을 삼켰다.
하이디가 자작을 들여보낸다면, 다른 시녀들로서는 그것을 막기는 어려울 터.
황후도 보아하니, 하이디를 제지할 수는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은 해주셨어요?”
하이디가 황후의 아버지를 챙기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자작이 벌인 짓을 몰랐다면 말이다.
“하이디는…… 내가 아버지의 진정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해.”
황후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기가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바로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시라고 하지. 전부 나를 위한 행동이고 혹여 그분의 언사가 마음에 차지 않더라도 딸인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자작께서는 자신과 가문의 이득을 생각하는 동시에, 황제 폐하께 밉보였을 때 얻을 불이익을 더 우려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그 또한 귀족의 사고방식이니 흠은 아니지.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걸. 아버지가 황제 폐하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였는지 안다더라도.”
“하이디는 이혼에 대해선 뭐라던가요.”
“하이디는 말도 안 되는 일이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아버지가 그걸 수습하려 했던 건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듣는 파레사도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그것참 답답하셨겠네요.”
“내가 평생 둘러싸여 살던 태도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
“진작 미쳐버리지 않으신 게 용하세요.”
“그러니 난 네가 필요했어. 간절히도.”
황후에게 파레사는 황제와 이혼해도 좋으니, 너를 위한 삶을 살라고 말해주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간 그 유일한 지지를 박탈당한 것처럼 느꼈던 것이다.
“글쎄요, 사실 이건 제가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제 권한 밖이니까요.”
하이디를 내치면 된다. 파레사는 그 말을 하는 대신 그렇게만 말했다.
“그녀가 나를 무척 걱정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야. 그리고 과거, 나와 함께 힘든 시간을 견뎌낸 적도 있었지.”
“그렇다면 경제적으로 보상해 주세요.”
“그런 문제가 아니야. 그녀는 내 곁에서, 나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 누구보다 날 잘 안다고 생각하지.”
파레사는 황후의 괴로운 표정을 보며 깨달았다.
평생 자신을 위하는 사람이 주변에 별로 없었던 황후로서는 그나마 아군이라고 생각되는 하이디를 쳐내는 게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머리가 다 아프구나.”
“차를 드릴까요.”
“티룸은 하이디가 맡겠다고 하더구나.”
“잘되었네요. 제 일이 줄어서.”
일은 줄고, 월급은 줄지 않고. 바람직한 사태였다. 어쨌든 파레사 자신에게는 나쁠 게 없는 일이다.
“간단히 생각하세요. 마음 편한 쪽으로. 저는 어떤 결정을 내리시든 따를 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파레사란 지지자를 확보하고도, 황후는 당장 행동하지 못했다.
그날 오후 들이닥친 것은 패터스 자작 부부였다. 그들은 하이디의 안내를 받아 제집처럼 복도를 지나 황후에게로 왔다.
“두 분 모두, 이리 빈번히 궁에 드나드시면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어머나, 매정하시기는. 황궁에서 한 차례 사건이 있었다고 온 사방에 소문이 다 났답니다. 위험한 일을 겪으셨다고 들어 봉쇄령이 풀리는 대로 바로 찾아뵌 거예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황후의 어머니는 황후와 닮았지만 무척 유순한 생김새였다.
그 성녀 같은 얼굴에 대고, 모진 소리를 해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황후는 더 무어라 말하지 못했다. 패터스 자작이 엄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부상을 입으셨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곧 회복하실 거예요. 염려 마세요.”
“어서 가서 살펴드려야지요. 그것이 아내 된 도리입니다.”
황제는 지금 치료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으며 황궁 의원이 오후 늦게나 찾아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고 말하는 대신, 황후는 성질을 냈다.
“아내 된 도리라니요! 이혼한다니까요!”
내심 황제가 자신을 감싸느라 죽을 뻔해서 물러진 터. 하지만 자작의 간섭은 도리어 반감을 부르고 있었다.
그가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할 때마다 황제가 콱 죽었으면 할 정도로.
“이혼이라니요. 자녀분들이 계신데,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하이디.”
“예, 자작 부인.”
비틀거리는 자작부인을 하이디가 재빨리 부축했다. 그녀는 황후에게 힐난하는 듯한 눈길을 건넸다.
“황후 폐하, 두 분께서는 황후 폐하를 생각하셔서 이리 달려오신 것인데 그리 모질게 말씀하시다니요.”
“모진 소리를 유발하고 계시잖아요, 지금!”
“황후 폐하,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부모님께 언성을 높이는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여서는 안 됩니다.”
보다 못한 파레사가 나섰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문제가 있군요. 황후 폐하께서 두 분의 방문을 허락하신 적은 없습니다만.”
하이디가 그녀를 휙 돌아봤다.
“파레사, 그게 무슨 말이죠? 부모가 여식을 방문하는데 어찌 허락이 필요하다는 말인가요.”
“그 여식되는 분은 황궁의 안주인이자 제국의 황후 폐하십니다. 이곳은 그분의 처소고, 누군가의 방문을 허락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분의 권한이지요. 여기 있는 분들은 그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군요.”
파레사는 단호한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또한 황제 부부간의 관계에 관여하는 것은 대단히 오만하고 무례한 일입니다. 지금 두 분은, 마치 황후 폐하를 여전히 품 안에 둔 아이 취급하는 것처럼 보이는군요. 황후 폐하는 성인으로 이미 결혼까지 하신 몸인데도요.”
“그런, 당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에요!”
윗사람이라도 되는 양 반응하는 하이디를 똑바로 쳐다보며 파레사는 냉정하게 지적했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 험한 사건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고도 두 분 모두 전혀 그 사실에는 관심이 없으신 것 같군요. 아니, 두 분만은 아닐 테지만요.”
파레사의 시선이 적나라하게 하이디에게 꽂혔다. 하이디는 노골적으로 화난 기색을 보였다.
“당신, 주제넘게 말하는군요. 황후 폐하와 저는 오랜 우정을 쌓아왔어요. 헌데 어떻게 제가 폐하를 생각지 않는다고 단정 짓는 거죠?”
“부모라 한들 감히 황후 폐하께 훈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속 시녀인 당신은 자작 내외분들을 편들고 있지 않은가요?”
“자식의 일에 부모님이 나서신 거잖아요! 옳은 말씀을 하고 계시고요. 황후 폐하께선 지금, 위기 상황이라고요. 이럴 때 부모님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가 나서겠어요?”
기가 막힌 듯 도리질 친 하이디가 파레사를 노려봤다. 적의 가득한 눈빛.
“듣기로는, 당신이 들어온 이후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의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 이유를 알 것 같네요!”
“부부 사이에 균열이 가는 것은 한 사람이 말라 죽는 것보다 더욱 사소하고, 감당할 만한 일이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심지어 그 남편이 가해자에게 동조한 사람이라면.”
파레사는 반문했다.
“이혼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지 않겠어요?”
내면으로부터 비롯된 변화에 촉매는 되었을지라도, 파레사는 제가 황후를 바꿨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녀 마음에 있던 것을 끄집어냈을 뿐이다.
그것은 독이었다. 독을 품고 있으면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파레사는 그것을 꺼내놓게 한 것뿐이다.
비록 그 독이, 다른 이들에게 달갑지 않거나 심지어 그들에게 해를 끼치더라도.
그러나 하이디는 그 독을, 황후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황후는 본디 가벼운 자리가 아니고,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부를 누리고 계세요. 황후가 되실 때부터 예정된 어려움이었어요. 그것을 버티고 서는 게 왕관의 무게랍니다. 스스로와 두 아이를 생각하셔야지요! 누구나 부러워하는 자리에 계신 것을!”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파레사와 하이디 사이에는 긴장된 공기가 흘렀다.
자작 부부는 하이디 쪽에 격려의 시선을 주고 있었다. 너무나 잘 말하고 있다는 듯이.
그때 황후가 입을 열었다.
“하이디, 네 마음은 잘 알았어.”
충격을 받은 듯 희게 질린 얼굴에 서서히 표정이 살아났다.
그녀는 무언가를 억누르듯 턱에 잔뜩 힘을 주었다. 그리고 이내 토해내듯 말했다.
“너는 항상 내가 과분한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구나. 만약 네가 나와 같은 것을 받았다면 기꺼이 다 견뎌냈을 거고 내가 투정을 부리고 있다고 말이지.”
하이디는 변명하려는 듯이 입을 달싹였다. 하지만 황후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는 떠나기 전 내게 말했었지. 이젠 지긋지긋하다, 벗어나고 싶다.”
목소리는 미세한 떨림을 머금고 있었다. 그 안의 격동을 나타내듯이.
“내가 그 말에 수긍했던 것은 나 역시 그렇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어.”
“황후 폐―”
“그런 내가 결심하여 나섰다면, 그만큼 어려운 결심이었다는 것을 이해해주기가 어려운 거니? 너는 마치 타인처럼 내 처지와 심정을 바라보며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교정하려고 하고 있구나.”
황후는 차분히 결론을 내뱉었다.
“나를 위한다기에는 너무도 객관적이니 타인이라고 보는 게 맞겠어.”
그 말이, 하이디뿐만 아니라 황후 역시도 관통한 것 같았다. 황후는 다음 순간 차가워진 표정으로 내뱉었다.
“내게는 네가 필요 없겠구나. 하이디, 오늘부로 궁을 나가거라.”
“황후 폐하!”
“네가 있는 것이 더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할 것 같구나. 내 편이랄 수 없는 사람이니 말이지.”
내 편이기를 바라고 믿었지만, 그럴 수 없다면. 이쪽에서도 포기할 때가 되었다. 오랜 정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황후는 단호하게 등을 돌려 자리를 떠났고, 자작 부부는 뒤이어 곤혹스러운 얼굴로 회피했다.
“우, 우리는 이만 가보아야겠구나.”
“여보, 당신이 너무 폐하께 말씀을…… 아니에요.”
자작 부부가 떠나간 자리에는 하이디와 파레사만이 남았다. 하이디가 충혈된 눈으로 파레사를 노려보았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는 거죠? 이혼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잖아요. 그간 어떻게 버텨내셨는데! 아니, 황제 폐하께서는 모르셨다면서요. 지금이라도 잘 수습하여 살면 되지. 니시아나는 죽었잖아요!”
하이디는 적나라하게 속내를 드러내며 언성을 높였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시는데, 당연히 부모님이 나서야 하지 않겠어요? 황후라는 지위를 누리려면, 그 정도는 감당하셔야지요! 당신은 대체, 전속 시녀란 사람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기가 막혀서!”
“당신 잘못이 뭔지, 말씀드려야 알 만큼 당신은 어리석은 것 같군요.”
싸늘한 눈빛이 제게 꽂히자, 하이디는 움찔 떨었다.
위압적인 기세로 파레사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내뱉었다.
“황후 폐하께 당신의 욕망을 대입한 거요. ‘나였다면’이라는 망상으로 폐하께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강요한 거요. 폐하의 의사에 반하여 그분을 거스르고 기만한 거요.”
“그, 무슨.”
“친구라는 호칭은 당신에게 과분한 것 같군요. 전속 시녀라는 직함과 마찬가지로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파레사가 물었다.
“당신이 황후 폐하께 비난을 일삼았던 사교계의 귀족들과 근본적으로 무엇이 다른가요? 전 모르겠군요.”
자기들의 입장에서 판단하고 비난하는 것과 상대의 편을 들며 교정하려 드는 것.
전자와 후자 모두 황후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하이디는 오랜 친우라는 명목을 무기로 삼아, 과도한 짓을 벌였다.
무엇보다 하이디는, 황제가 불러내 말 한마디만 걸어도 기꺼이 그에게 복종을 바칠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만약 황제가 보약이라고 독약을 건네면 그걸 의심 없이 황후에게 먹일 만한 인물이다.
그래서 황후가 죽더라도 자기는 속았을 뿐이라며 피해자처럼 굴 것이다.
그 후에 붙이는 ‘당신을 위해서’라는 말만큼 허울 좋고 어리석은 핑계는 없다.
그런 이를 황후의 곁에 둘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악의건 선의건 그녀는 황후를 배신할 수 있기 때문에.
차라리 마음으로는 어떻든 철저히 황후를 따르며 본분을 지키는 것이 나았다.
파레사는 자신이 황후가 하이디를 쫓아내도록 유도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황후에게는 그저 쐐기가 필요했을 뿐이다.
파레사는 얼마든지 쐐기를 박아줄 수 있었다. 그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어서 떠나주었으면 해요. 당신은 황후 폐하께 필요 없는 사람 같으니까.”
하이디의 두 눈이 충격으로 바르르 떨렸다. 그녀는 몇 마디 악을 쓰듯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떠나야 한다는 결론은 명확했다. 황후가 그것을 명령했기 때문에.
짐을 싸는 데 채 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하이디가 떠나고 나자, 마리가 파레사에게 달려들어 덥석 손을 붙잡았다.
“어머, 어쩜! 골칫거리가 사라졌네. 저 여자. 폐하와 아주 가까운 관계라는 걸 과시하면서 그간 얼마나 까다롭게 굴던지. 눈꼴 사나웠는데 잘 됐지 뭐. 정말 잘 돌아왔어, 파레사!”
“너는 왜 가만히 있었던 거야?”
시중인들이 순순히 하이디에게 복종하기에, 그녀 쪽인 줄 알았더니 마리는 도리어 하이디를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야, 황후 폐하의 오랜 친구분이라잖아. 게다가 전속 시녀시니, 서열에 따른 거지 뭐. 황후 폐하께 뭐라고 말씀드릴 만한 신뢰는 내게 없잖아. 나도 여기 가까스로 붙어 있는 처지인걸.”
“다른 시중인들은?”
“그들도 마찬가지야. 황후 폐하의 오오오랜 친구시라니 어쩌겠어. 따를 수밖에. 그냥 네가 돌아오길 다들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파레사는 짤막하게 대꾸했다.
“그거 다행이네.”
자작 부부를 들인 것도 그렇고, 만약 시녀들이 자발적으로 하이디가 옳다고 생각하여 복종을 바친 거라면 전부 갈아치워야 할 뻔했다.
그런 번거로운 사태를 피할 수 있어서 진심으로 다행이었다.
마리는 가슴을 탕탕치며 말했다.
“내 말 믿어. 저 여자가 나갔으니 이제 황후궁에는 평화가 찾아들 거야.”
“……나도 그러길 바라. 아직 남은 일이 있지만.”
자작 부부는 말 그대로 골칫거리였다. 그들을 영지로 보내버리는 편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황후라고 해도 그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문제였다.
제도에 머무는 자작 부부가 새삼 그들의 환심을 사려는 귀족들과 교류하며 황후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것 자체가.
이 대립에 황제는 어떤 식으로든 끼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다음날, 하이디를 내보낸 뒤 머리가 아프다며 일찍이 잠자리에 들었던 황후는 우중충한 얼굴로 파레사를 맞이했다.
“간밤에 잠을 잘 못 주무셨나 봐요.”
“머리가 아파서 말이지. 알잖니.”
“우셨어요?”
황후가 눈을 흘겼다. 눈이 조금 붓기는 했으나 아침이라서 그런 건지 애매했다.
“그런 사적인 질문은 하지 말거라. 난 어떤 대답도 하지 않을 거야.”
“저는 폐하의 사적인 것을 살피는 전속 시녀인데요?”
“내가 울건 안 울건 그게 뭐가 중요하겠니. 정말이지, 어제는……. 모처럼 한계에 치달은 기분이었단다.”
“그러셨군요.”
파레사는 조금도 죄송하지 않은 말투였다. 그리고 황후도 파레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분개한 얼굴로 내뱉었다.
“하마터면 하이디의 목을 치라고 명령을 내릴 뻔했어! 내가 그만큼 미치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거 재밌었을 텐데…….”
“뭐라고?”
황후가 눈을 부라리자 파레사는 급히 수습했다.
“그랬다면 제가 말렸겠지요. 단지 그녀를 감옥에 가두라는 정도였다면, 괜찮았을 거예요. 그녀는 황후 폐하의 명령을 거역했고, 자작 부부를 함부로 황후궁에 들였으니까요.”
냉정한 말투였다.
“이왕 일을 치실 거, 자작 부부도 함께 감옥에 가두셨다면 다시는 그렇게 무단으로 들이닥치지 않을 텐데요. 그 점은 아쉽군요.”
황후는 할 말을 잃은 듯이 파레사를 쳐다봤다.
“……그랬다간 부모도 감옥에 가두는 독한 여자라 소문만 더 나쁘게 날 게야. 이제 사교계가 내 수중에 떨어졌는데, 대외적인 면은 갖추어야 하지 않겠느냐.”
파레사는 선뜻 동의했다.
“그것도 그렇죠. 하지만 대책은 생각해야 해요. 하이디가 없어도 저분들은 다시 황후궁에 찾아올 수 있어요.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면 그 앞에서 진을 치고 계시면서 구경거리를 자처하실지 몰라요.”
그건 무척 가능성 높은 사태였다.
“적어도 감옥에 가둬놓겠다고 위협하면 그 꼴은 안 보실 거 아니에요.”
“너는 종종 내가 감당하기 힘든 말을 한다고 생각해 왔지.”
“하지만 내심 통쾌해 하신다는 것도 알아요.”
두 사람은 곧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파레사는 잠시 뒤 덧붙였다.
“그리고 황후 폐하께서는 내 사람이 아니면 무심한 편이시지요. 틀린가요?”
하이디를 내쳤고, 자작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전자와 후자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들에게 무심해지는 것은 가능했다.
무심해진다는 것은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그들에게 대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나는 확실히 알겠구나. 내가 지금 뭘 해야 할지.”
황후는 결심한 듯 하급 시녀 한 명을 불러 편지를 한 통 썼다. 황궁 경비를 책임지는 기사단장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거기에는 자작 부부의 황궁 출입을 불허하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자작 부부에게 황궁 입구에서 돌려 세워지는 망신을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 황후는 이내 편지 한 통을 더 썼다.
이번에는 자작 부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황제도 편찮고 이런저런 사건으로 제도도 어수선하니 두 분의 황궁 출입을 금지한다. 자작의 치료가 끝나는 즉시 영지로 돌아가 달라.
나와 가문의 평판에 누가 될 테니, 괜히 귀족들과 어울려 구설을 자처하지 말라는 조언도 달았다.
편지를 보낸 그 날 오후, 하이디로부터 편지 하나가 당도했다. 역시 그대로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편지의 반은 자신의 진심을 알아달라는 변명과 파레사에 대한 비난뿐이었다. 어디에도 황후를 생각하는 마음은 찾아볼 수 없었다.
파레사는 황후가 건넨 그 편지를 받아 읽으며 피식 웃었다.
“어때요, 마음이 흔들리시나요?”
“전혀. 나는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러는지 알 것 같구나.”
황후의 눈빛은 싸늘했다.
“결혼 전 내 가문이 미천했던 것은 알고 있지? 나와 어울리던 하이디 역시도 마찬가지였단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게 달라졌지.”
“황후 폐하의 친구이기 때문에 많은 혜택을 보았겠군요.”
황제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해주면 다 된다고 믿는 성격이다. 그러니 패터스 자작가뿐만 아니라 황후의 오랜 친구에게도 후하게 베풀었으리라.
역시나 황후는 긍정했다.
“그래, 지금 남편도.”
“평판이 좋은 분이라고 들었어요.”
“하이디가 지금 남편을 소개받을 수 있었던 건 내 전속 시녀였기 때문이지. 정확히는, 그녀를 내게서 떼어내고 싶어 한 니시아나의 수작이겠지만.”
하이디로서는 나쁠 게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선뜻 결혼하여 황후의 곁을 떠나는 것을 택했다.
“그녀의 남편은 지방의 중소귀족이나 가진 바 능력이 뛰어나 영지를 부흥시켰고, 현재로서는 중앙으로 올라와 황태자를 보좌하며 승작이 기대되는 인재지.”
“얼마든지 제도의 백작이나 자작가의 영애들을 만날 수 있었겠군요.”
“그래.”
황후는 뭔가를 누르듯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녀는 황후가 된 이후로 쭉 내 곁에 있었지. 함께 많은 어려움을 겪었단다. 귀족 여성으로서 사교계에서 멀어진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거야. 그러니 그녀가 받은 높은 봉급과 가문에 대한 지원, 거기다가 좋은 혼처까지. 나는 그것들을 합당한 보상이라고 생각해 왔단다.”
“이제는 이야기가 달라지겠군요.”
“그래, 내 부모와 하이디의 행태를 보노라니 자연히 어떤 생각이 드는구나.”
황후의 입가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내가 황후이기를 간절히 바라고 남편에게 수그리기를 바라는 그들의 모습. 내가 황후가 아니게 되면, 그들이 지금 누리고 있고 앞으로도 누릴 이권을 잃을까 봐 두려워한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지 않겠니?”
“일리 있으신 말씀이네요. 흔한 일이죠.”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더 이상 무엇도 줄 생각이 없단다. 준 것도 뺏으라고 할 거야. 적어도 이혼 전에, 그 같은 과정들은 꽤 매끄럽게 마무리될 것 같구나.”
“지당하신 말씀이에요. 황후 폐하를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그 무엇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나는 솔직하게 이 모든 사실을 황태자에게 말할 것이다. 그 애는 영민하니까 잘 대처해 주겠지. 물론, 철저하고도 교활한 방식으로.”
“그러면서도 조용하게 말이지요.”
파레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들에게 뭔가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황태자는 적정선에서 그들을 차단해줄 것이다.
“새삼 생각하는 건데, 내 남편은 도통 쓸모가 없구나. 황태자 녀석은 재수 없지만 여러모로 쓸모라도 있지. 내 남편은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도리어 착하게 굴라고 타이르려고 들 테니…….”
“늘 착해야 하고 참아야 하는 건 황후 폐하로 만드셨지요. 그게 문제였고요.”
“악녀 소리도 들어왔는데 내가 무얼 참아야 하나 싶구나. 악녀인데 악녀 소리를 들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그럼요. 사람은 두려워하는 이에게 복종을 바치기 마련이니, 철저히 악녀가 되셔서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도 좋겠네요.”
벨로나 나이트는 경외의 대상. 파레사는 누군가가 자신을 두려워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었다.
만만하고 친근하게 보인다면 어떻게 벨로나 나이트로서 사람들을 다스리겠는가.
“정말로 불운하다고 느끼게 되는 요즘이란다. 어찌 이리 다들 자기 잇속만 챙길까. 돈과 권력은 쉽사리 사람의 눈을 멀게 만드는구나.”
“원래 가지지 못한 자들이 가지게 되면 더욱 욕망에 눈이 어둡게 되어 있지요.”
“너는 날 때부터 부유했느냐?”
“그건 아닌데, 저는 제가 잘났잖아요. 아무나 벨로나 나이트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재능과 노력, 그리고 운까지. 모든 것이 다 따라주지 않는다면 벨로나 나이트가 될 수 없다.
파레사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이미 스스로 원하는 것을 성취해낸 자였다.
자신이 이룬 것과 능력이 확실하기에 다른 누군가를 통해 얻는 데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황후는 다른 쪽으로 납득해버렸다.
“하긴 너도 벨로나 나이트씩이나 되면서 그렇게 돈을 밝히니까. 틈만 나면 그놈의 봉급 올려달란 소리를 해대지!”
“하이디가 나갔으니 저는 다시 유일한 전속 시녀가 되는데요. 그만큼 업무도 과중해질 테고요.”
기회를 엿보는 파레사에게 황후가 눈을 치켜떴다.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 말렴. 네 포상은 황태자가 준다지 않았니?”
“그랬죠.”
파레사는 목을 가다듬었다. 사실 그렇게 욕심나는 건 아니었다. 그냥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못하는 습성일 뿐.
“인간은 본디 악하다고 생각하시면 마음에 위로가 되지 않겠어요? 저도 벨로나 나이트가 되고 나서 그런 종류의 일들을 겪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단지 그 와중에도…….”
파레사는 떠오르는 말을 늘어놓았다.
“흔하지 않지만, 빛을 발하는 진심이란 것도 있겠지요.”
그 말이, 황후에게 어떤 영감을 가져다준 모양이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래, 황태자가 그랬지. 그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늘 나를 도왔어.”
“그, 그렇군요.”
절대 황태자를 의도하고 한 말은 아니었건만. 파레사는 제가 넌지시 황태자를 치켜세운 것 같아 불편해졌다.
“그리고 황제 폐하도, 마지막 순간에는 그리하셨지. 그분이 니시아나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 난 정말 놀랐단다. 내게 황제 폐하는 늘 황제셨거든. 누군가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었어.”
“하지만 그 순간 황제 폐하는 그저 아내를 지키는 남편이었던 거죠.”
황후는 작게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모습을 그때야 보여 주시더구나. 폐하는 목숨 바쳐 나를 구하셨지. 정말로, 죽음을 각오하면서.”
“그건 진심 없이 할 수 있는 행동은 아니지요.”
잠시 그들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내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의식이 돌아오셨다고 하는구나.”
“가보실 건가요?”
“그래야지. 사실 어제 이미 그러려고 했어. 그 일만 벌어지지 않았다면.”
황후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폐하는 지난 세월 늘 강건하셨지. 그 모습이 내겐 강렬해서 저번 암습 때도 그랬지만 편찮으시다는 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구나. 하지만 내가 응당 살펴야겠지. 아직 나는 그분의 아내니까.”
어쨌든 결론은 자작 부부가 바라던 대로 났다. 대화의 끝에서 황후는 바로 황제궁으로 향했다.
등 떠밀 것 없이 황후는 제가 해야 할 일을 스스로 분간할 줄 아는 이였다.
파레사는 잠시 제가 대화를 통해 황후의 심경 변화를 유도한 건 아닌지 고심했다.
“잘 된 거겠지?”
어떻게 되든 황후는 스스로를 위한 선택을 할 것이다. 파레사 역시도 그것을 원하니까.
* * *
전날, 황후궁에서 쫓기듯이 나온 패터스 자작 부부는 제도에 있는 저택으로 귀가한 터였다.
자작부인이 자작에게 슬며시 원망을 던졌다.
“여보, 그러게 마음을 달래주며 슬슬 구슬려야지 그렇게 강하게 말하면 황후 폐하께서 마음이 상하시지 않겠어요?”
자작은 이러한 지적을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겼다. 그는 도리어 눈을 부릅떴다.
“시끄럽소, 부인은 대체 여식을 어떻게 키운 거요? 저리 고집 세고 독해서야, 누굴 닮았는지!”
당신을 닮아서 그렇다고 말하려다가 패터스 자작부인은 입을 다물었다. 소심한 그녀로서는 자작의 말에 토를 단 적이 거의 없었다.
자작은 서재 안을 서성이며 분통을 터뜨렸다.
“제도에 이렇게 번듯한 저택을 얻게 된 것도 황제 폐하 덕인데! 제가 누구 덕에 그런 부귀를 누리는 줄 알아!”
“워낙 그간 맘 상할 일이 많아서 그래요. 그렇게 닦달했다간 오히려 상황이 악화되기라도 하면 어째요.”
자작 부인도 자작의 입을 통해서 그날 있었던 대화에 대해서 들었던 터였다.
부부싸움을 하는데 자작이 나서서 무조건 네 잘못이고 사위에게 용서를 빌라고 하니, 딸의 입장에서는 반발심이 일만도 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는 없잖소. 폐하께서 마음이 돌아서기라도 하면 어쩐단 말이오! 이제 그 애도 나이를 먹었고 시들어가고 있는데 말이지!”
자작은 분통을 터뜨렸다.
“사교계에는 꽃처럼 어여쁜 영애들이 한가득인데 제가 뭐 잘났다고 콧대를 세운단 말이오. 교태부리고 아양이라도 떨어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지.”
“아낌없이 가꾸어서 그런지 여전―히 예쁘기만 하던걸요. 그런데 그 말씀은 제가 늙었으니 이제 젊고 예쁜 다른 여자에게 눈이 돌아가기라도 하신단 뜻인가요?”
그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아무리 소심한 자작 부인이라도 용납할 수 없는 소리였다. 자작은 당황했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곡해 마시오. 폐하가 에리카를 데려갈 때 무엇을 보셨겠소? 무도회에서 첫눈에 반하셨다는데, 그저 어리고 예쁘니 눈에 들어왔겠지.”
“……그건 그래요.”
자작 부부도 내심 황제가 어리고 예쁜 여자를 밝혀 제 딸을 데려갔다고 생각하는 터였다.
그런 남자는 언제든 더 어리고 예쁜 여자에게 눈이 돌아갈 수 있었다.
원래 밝히는 놈은 변치 않는다는 공식대로.
“조만간 다시 찾아뵈어야겠소. 그 애한테 현실을 주지시켜 줘야지. 애비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 일을 할까. 당신도 함께 가야 하니, 할 말을 생각해 두시오.”
“에휴, 그래요.”
그러나 다음날 도착한 황후의 편지는 자작을 격앙시켰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어찌 여식이 부모의 황궁 출입을 막아!”
“어머, 세상에나.”
“어떻게 이리 모질고 독한 것이 다 있나.”
자작은 한탄했지만, 그들은 황후에게 편지를 쓰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들에게 마침 손님이 찾아들었다.
“하이디, 어서 오려무나.”
몹시 분기에 차 있던 하이디는 곧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세상에, 제가 얼마나 황후 폐하를 위해서 헌신했는지 아시잖아요? 절대 이렇게 될 수는 없어요!”
“그럼, 알지. 알고말고. 네가 우리에게도 황후의 소식을 들려주지 않았더냐.”
자작 부인도 안쓰러운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리 오랜 친구를 한순간에 내쳐! 세상에 에리카 이 애가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지.”
하이디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황후 폐하는 본디 마음이 약하고 정이 많으신 분인데……. 누군가가 부추기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실 리 없지요. 그 시녀가 문제인 것 같아요. 보셨잖아요.”
하이디의 눈빛에 독기가 드러났다.
파레사라는 그 시녀. 그녀가 돌아오기 전에는 황후도 제게 크게 나무라지 않았었다. 하이디가 강력하게 주장하면 황후는 대개 그것에 따랐다.
그런데 그 시녀. 파레사가 나서서 제 의도를 곡해하고 도발하여,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그 시녀는 교활한 방식으로, 황후를 움직이고 조종하고 있었다.
표적이 파레사에게로 돌아가자, 자작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귀족들이 넌지시 그런 말을 하더구나. 그 여자가 황후 폐하께 안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 같다고.”
“제가 알아본 바로도 그래요. 심지어 그녀가 황태자 전하를 노리고 궁에 들어온 게 아니냐는 말이 돌고 있더군요.”
“심지어 황태자 전하도 그 여자에게 넘어간 기색이라더군. 어리석기는. 어찌 그런 간교한 것을 곁에 둬.”
자작이 혀를 찼다. 황태자와 파레사에 대한 소문은 꽤나 만연한 것이었다.
황태자가 무도회에서 파레사와 첫 춤을 춘 데다가, 함께 참석한 일도 여러 번.
이번 임무에서도 함께 했고, 종종 서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황태자는 제가 파레사를 특별대우하고 있다는 것을 숨기려 들지 않았다.
그 이상 그녀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지도 않았지만.
더군다나 요즘, 파레사가 뒤나미스 출신의 기사, 심지어 벨로나 나이트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그런데 황태자가 수용하다니. 첩자라면 그럴 리 없다.
그렇다는 건, 뒤나미스에서 황태자비 자리를 노리고 그녀를 보내온 건 아닐까.
물론, 다른 의미로도 황태자의 눈에 들어 제국에서 출세해 보겠다는 의도로도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파레사가 벨로나 나이트라는 것은 사교계에서 중요치 않은 일이었다.
제국에서는 여자가 개인의 능력으로서 누릴 수 있는 영화보다는 남편을 잘 둬서 얻을 수 있는 영화가 더 컸다.
그러니 자연히 파레사가 황태자를 노리고 있다고 의식이 흘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식을 제국식으로 고스란히 받아들인 하이디는 창의적인 생각에 이르렀다.
“그녀가 황후 폐하에게서 사람들을 떼어놓는 이유가 짐작이 가요.”
“무언데?”
“황궁의 안주인이 되기 위해서요. 그걸 위해서 황후 폐하를 조종하여 그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어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황후 폐하를 조종하기 쉬울 테죠.”
자작은 눈을 부릅떴다.
“그렇지. 그녀의 의도대로 황후 폐하께서 물러나기라도 하면……. 황태자비가 된 그녀가 그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구나. 황궁을 손아귀에 넣는 거야!”
“황후 폐하께서는 황태자 전하의 친모가 아니시잖아요? 황후 폐하의 소생이신 두 분 전하가 거슬리기도 할 테죠. 만약 황후 폐하께서 이혼하셔서 궁을 떠나게 되면, 그녀는 두 분 전하께 손을 뻗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이혼하고 나면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의 소생이신 두 분께 소홀해지시기 쉬우니 말이다. 황태자 전하도 그런 쪽에서 믿을 수는 없지. 암암, 황족이 제 배다른 형제에게 관대해질 수 있더냐.”
“그걸 막으려면 이혼을 막아야 해요. 그녀를 황후 폐하께 떼어놔야 한다고요!”
하이디는 강하게 주장했고, 자작도 동의했다.
“정말로 무서운 일이로구나. 일리가 있어. 그렇게 간교한 것이 황후 폐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니!”
“아아, 정말이지. 제가 없는 새 그런 여자가 황후 폐하의 곁에 붙어 있게 되리라고는…….”
“생긴 건 착하게 생겼잖아요. 제가 곁을 지켜드렸어야 하는 건데, 외로우시다 보니 그런 여우 같은 것한테 홀리신 게지요.”
“역시 그렇구나!”
둘은 파레사 악녀설에 심취되어 대화를 나누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자작 부인은 뭔가 그들이 과도하게 몰아간다 싶었지만, 자신의 의견에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말을 꺼내지 못했다.
잠시 듣고만 있던 그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황후 폐하는 그녀를 신뢰하는 듯이 보이던데, 어찌하시려고요. 우리는 황궁 출입도 금지당했잖아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하이디는 은밀한 모의를 입에 담았다. 자작 부부는 그녀의 말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파란의 조짐이었다.
* * *
황제를 병문안 온 황후는 곧 황태자와 마주하게 되었다.
“기사단장이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 언급하더군요.”
며칠 만에 얼굴을 비친 황태자는 살짝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권능으로도 부족한 수면 시간을 다 채울 수 없었던 탓이다.
황제는 쓰러졌고, 돌아온 그에게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건 어쩔 수 없이 황태자에게 예정된 삶이었다.
“요새 바쁜 것 같은데, 이야기를 참 빨리도 전해 듣는군요.”
황후가 눈을 흘겼다. 제가 무엇을 하든 황태자에게 소식이 들어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재깍 보고가 갈 줄은 몰랐다.
이는 황태자가 후계자로서 입지를 완벽하게 다져, 황궁을 장악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사단장 평생에 그 같은 편지를 처음 받아 보았을 테니까요.”
황후가 제 부모 황궁 출입을 막아달라는 편지를 보내다니.
기사단장은 편지의 진위 여부나 편지에 담긴 의도가 말 그대로인지 아니면 뭔가의 시험인지 고심했다.
그리고 그는 이내 일단 지시대로 하되 그 내용을 황태자에게 보고하기로 했던 것이다.
“들어 아실 테지만, 부모님과 문제가 좀 있었어요.”
“임시로 들어 있었던 전속 시녀를 내보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 관계된 문제인지요.”
황후는 뭔가를 참아내듯 숨을 들이마시곤 이내, 내뱉으며 말했다.
“나는 더 이상 이용당하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힘주어 말을 이었다.
“다들 황후가 된 나를 통해 이득을 보려고 하지요.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날 이 자리에 꿰어맞추려고 하면서요. 내가 황후이기에, 그들에게 욕심이 생겼어요. 그 욕심이 그들을 나로부터 돌아서게 했어요.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황후의 눈빛이 차갑게 번뜩였다.
“내가 황후이더라도 그들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거겠죠. 그러면 내가 황후이든 아니든 그들에겐 중요하지 않아질 테니까요.”
“그렇다면 그들은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빼앗긴 듯이 여겨, 어머님을 미워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받아들이겠어요. 상관없답니다.”
황후는 오연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이내 씁쓸한 듯이 덧붙였다.
“내가 지금 보는 게 진정한 그들의 모습인지, 아니면 변한 건지 알 수가 없네요.”
“마음에 담아두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그 담담한 말 속에는 많은 것이 깃들어 있었다. 황후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황태자는 평생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하며 살아야 했겠군요. 그래서 나는, 황태자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째서 그녀였는지.”
왜 황태자가 파레사를 원했는지. 그 자신조차도 알지 못하는 이유를 황후는 꿰뚫듯이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녀가 파레사를 선택한 이유이기도 하니까.
정적 속에서 황태자의 입꼬리가 슬며시 깊어졌다.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러니 제가 어머님을 극렬히 질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황후는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다가 후, 소리 내어 웃었다.
“이제야 공평해졌군요. 나도 황태자를 줄곧 질투하고 있었으니까.”
황태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너무 차이가 나면 질투가 아닌 동경을 품게 되지요. 어머님은 질투하실 만한 자격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위안 삼으시지요.”
황후의 눈썹이 꿈틀댔다. 이건 자신이 그보다 처지지만 비교가 될 만은 하다는 인정인지 무시인지. 어느 쪽이건 짜증이 일었다.
“……황태자, 정말 늘 재수 없는 거 아나요?”
“신선한 표현이로군요. 하지만 그렇다 한들 유능한 아들이 겸손하되 무능한 아들보다는 낫겠지요.”
“유능하고 겸손한 아들이 될 생각은 없는 거로군요?”
황태자는 미소 띤 얼굴로,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답했다.
“공교롭게도 황태자에게 겸손은 미덕이 아닌지라.”
황후는 흥, 하고 코웃음 치며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대화는 언제나처럼 화기애애하게 끝을 맺었다.
황후는 병문안을 왔다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황태자에게 불려 나간 터였다.
그녀가 돌아왔을 때 황제는 약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있었다.
상체를 일으켜 세운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의 곁에 앉으며 황후가 말을 건넸다.
“약이 효과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어서 몸을 회복하셔야지요.”
이혼 얘기를 하기 전처럼 다정하지는 않으나 염려 섞인 말투였다. 황제는 황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황태자와는 무슨 대화를 나누었소.”
황후는 잠시 주저했다. 황태자가 그녀를 불러낸 까닭은 황제에게 심려를 끼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부모님이 혹여나 황제에게 접촉하려 할 수도 있으니 숨길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답했다.
“황태자가…… 제 가문을 살펴주고 있어요.”
“아버님과는 화해하지 못한 모양이오.”
“신경 쓰실 것 없어요.”
황후는 저도 모르게 날카롭게 목소리를 냈다. 황제는 가만히 그녀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화제를 옮겼다.
“황태자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군. 잘된 일이오.”
화해를 종용하지 않는 건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황후는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다 화답했다.
“황태자가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어요. 제 동생들도 잘 돌봐 주니, 전보다 가깝게 지내게 되었답니다.”
“황후의 전속 시녀에게 황태자가 호감을 보인다고 들었소. 그는 이렇다 할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부정하지도 않더군.”
“황태자가 그의 입으로 말하기 전에는 제가 무어라 말씀드리기가 어렵군요.”
“벨로나 나이트라고 들었소. 여자 몸으로 검을 익혀 뒤나미스의 고위직에 오르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테지. 의지가 있고 심지가 굳건해 보이니 괜찮은 이라면 나는 반대하지 않소.”
이건 또 의외의 말이었다. 황후는 눈을 크게 떴다.
“물론 검증은 필요하겠지만, 그녀는 이미 공훈을 세웠고 본디 제국 출신이라니 그리 문제가 있지는 않을 것 같소.”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요.”
“황후는 눈이 까다롭지. 황태자비가 황후의 마음에 드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소. 그래야 무탈하게 잘 지낼 게 아니오.”
황후는 황제의 말 속에서 그가 의식적으로 이혼이라는 단어를 배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보다 다른 것이 더욱 신경 쓰였다.
‘폐하답지 않구나. 황태자의 혼사라면 후계자에 관한 일이니 폐하께 대단히 중한 일인데.’
황제는 마치, 그녀의 의사를 살피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황후가 아는 그라면 파레사를 황태자비로 내키지 않아 할 텐데.
그 변화의 조짐이 마음을 혼란하게 흩트렸다.
잠자코 마음을 가다듬은 황후는 원칙적인 대답을 꺼냈다.
“황태자도 슬슬 혼인을 생각할 시기가 되었지요. 저는 황태자의 의중에 맡겼으면 하는군요.”
“그래, 황태자는 영민하니 알아서 잘 판단하겠지.”
그것은 황태자가 감정에 눈이 멀어, 제국에 해를 입히는 선택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황후는 그들 사이에 고인 침묵이 못내 무거웠다.
제게 줄곧 떨어지는 시선도. 하지만 돌이켜 보건대 황제가 편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이제는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지만 사이가 좋았을 때도 황제는 남편이기 이전에 황제였다.
하지만 오늘, 황제는 황제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기묘한 일이었다.
황제는 항상 대화든 분위기든 자신이 황제라는 것을 알리고 끊임없이 그녀에게 그것을 주지시켜 줬으니까.
왜 오늘은 다른지, 황후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어떻게 꺼낼지 몰라, 미루어두었던 대화였다.
황후는 삼키고 있던 질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그때, 어째서 저를 감싸셨나요.”
장밋빛 눈동자가 황제를 직시했다. 시선을 뗄 수 없는 매혹이 깃들어 있다고 칭해지는 눈빛이었다. 향취가 배어나듯 묘한 깊이와 매력이 있는.
황제는 십여 년 전, 저것에 단 한순간에 영혼을 빼앗겼다. 그래서 그는 그 질문에 흔쾌히 답할 수 있었다.
“남편이 아내를 지키는 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겠소.”
“제 목숨보다는 폐하의 목숨이 중해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에요.”
그리고 황제는 미덕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황제로서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을 이성적으로 구분할 줄 알았다.
그는 늘 그렇게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해왔다. 이혼을 말한 아내가 황제 자신의 목숨보다 중하다는 건 황제의 원칙에 어긋났다.
황후는 거기서 퍼즐 조각이 어긋난 듯한 괴리감을 느꼈다.
황제는 차분히 그녀와 시선을 마주하며 답했다.
“내게는 그렇지 않소. 나는 그때 죽었더라도 후회는 없었을 거요. 천 번 만 번이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
“폐하……. 저는 이해가 가지 않아요.”
황후는 도리질 쳤다. 황제는 결혼한 이후 지난 십 년간 줄곧 황제였다. 황후는 단 한 번도 그것이 저보다 우선한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어째서 황제는 이제까지…….
“나는 늘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오. 그러나 그것을 드러낸다면 나의 약점이 되기에, 황제로서의 나를 늘 내세워왔소. 항상 이성으로서 나 자신을 다잡으면서. 다만, 니시아나는…… 그것을 알아차렸지.”
혈육은 혈육이었던 모양이다. 황제는 알 수 없는 감회에 휩싸였다.
“나는 평생을 그리 살아왔기에, 황후에게조차 내놓고 마음껏 황제가 아닌 한 인간에 불과한 나를 보일 수 없었던 것뿐이오.”
그러나 결국, 진심은 가장 중요한 때에 드러나게 되어 있다.
니시아나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황제는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엇을 노릴지 알아챘다. 황제는 즉시 황후에게로 달려갔다.
그녀와의 사이가 틀어졌건 아니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잃은 후에는 결코 돌이킬 수 없기에.
그리고 황제는 제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황제에게 황후는 유일하게, 이성을 넘어 우선순위를 결정짓는 대상이었다. 그 감정은 압도적일 만큼 강력했다.
그래, 죽음조차 불사할 만큼.
“황제에게는 죄를 물을 수 없다고 하나, 책임은 져야만 하지. 이 모든 것은 나의 부덕 탓이오. 다만 황후를 지키려 했던 것은, 그런 책임감 탓이 아니라오. 나는 그래야만 했기에 그리했으니까.”
황제의 손이 움직여, 떨리는 황후의 손을 잡았다. 황후는 눈을 깜빡였다.
이해와 원망이 제 안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말뿐이었다면 이렇게 틀어질 대로 틀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황제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방식으로 제 말을 증명해 보이지 않았던가.
황제는 그녀를 향해 호소하듯 속삭였다.
“그러니 나는, 황후가 무엇을 하더라도 좋소. 그 자리에 있기를 바라오.”
그것은 설령 황후가 진정 악녀더라도 그조차 받아들이겠다는 지지였다.
가장 간절하던 순간에 없었고 어느 순간 파레사가 나타나 주었던 그것을 지금, 황제가 보여 주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진작부터 거기에 있었다. 몰랐던 것뿐이다.
황후에게 사랑과 신뢰는 동의어가 아니었다. 황제를 사랑했지만 신뢰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말하고 바라듯 언젠가 내쳐질지 모른다는 사실을 두려워했다.
황제는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 없다고 알려주지 않았었다. 바로 이 순간까지는.
황후는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늦었어요, 아주…….”
“알고 있소.”
“하지만 폐하, 늦더라도 의미가 없지는 않았어요.”
황후도 자신의 감정이 낯설었다. 제 안에서 어그러지며 통제할 수 없이 변하는 모양새가.
‘어제까지만 해도 아버님이 그리 편드는 꼴을 보느니 폐하께서 그냥 콱 죽어버리는 편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마 제 안 밑바닥에 무너져버렸다고 생각한 감정의 잔재가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폐허라는 건 결국 흔적을 뜻하니까.
“황후…….”
“생각해…… 볼게요. 오늘은 폐하의 곁에 머무르겠어요. 편찮으시니까.”
“그렇다면 기쁠 거요.”
요 근래 들어 처음으로, 그들 사이에 온기가 감돌고 있었다.
황후는 곧바로 황후궁으로 전갈을 보냈다. 준비 없이 온 터라, 필요한 물건들이 있었다.
* * *
황후궁에서 파레사는 황후가 떠넘긴 예산안을 들여다보다가 전갈을 받아들었다.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내신다고?”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일정 변동이었다. 하지만 파레사는 섣불리 넘겨짚지 않기로 했다.
“그보다 곧 퇴근 시간인데…….”
짐을 싸들고 황제궁으로 가서 전해주면 퇴근 시간을 넘길 것 같다. 파레사는 잠시 갈등했다.
다른 누구를 시켜? 아니면 직접 가?
“역시 직접 가는 게 좋겠지.”
왜 황후의 일정이 변동되었는지,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니까 직접 가서 확인해 봐야겠다.
파레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후가 즐겨 입는 잠옷과 몇 가지 물건을 챙기고 나자 준비는 곧 끝났다.
그녀는 바로 황제의 침소를 향해 출발했다.
다만 황후의 부름을 받고 가는 길에 누군가를 만난 건, 또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우연인가, 아니면 운명?”
“우연이겠지요.”
파레사는 딱 잘라 말하며 황제궁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한 황태자를 의심스럽게 쳐다봤다.
조금 피로해 보이는 얼굴은 여전히 근사했고 반짝거리며 흘러내리는 은발은 윤기를 잃지 않았다.
붉은 석양빛이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덮어씌우고 있었다. 따사롭고 온화한 빛이었다.
느닷없이 그림 속 풍경이 펼쳐진 양 이질적인 감각이 밀려왔다.
파레사는 정신을 챙기며 말했다.
“저는 황후 폐하를 뵈러 왔어요. 오늘 황제 폐하의 침소에서 밤을 보내신다고 하더군요.”
“알고 있어.”
많은 추측이 뒤따르는 말이었다. 그만큼 정보가 빠르다는 건지 아니면 그 때문에 파레사가 이리로 올 것도 알았다는 건지.
황태자는 그녀 손에 들린 짐을 유심히 쳐다봤다.
“들어줄까.”
“네? 아니요. 왜 그러시는지.”
파레사는 그의 친절이 이상했다. 황태자 손에 짐을 들리고 저는 빈손으로 갔다간 비난을 면치 못할 터.
안 그래도 온통 파레사를 비난하고 싶어 하는 이들 천지였다.
“다들 그렇게 한다고 하던데.”
“그들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니까요. 이건 제 일이니 개의치 마시길.”
“무거워 보여.”
“제겐 깃털만큼 가벼운데요.”
파레사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갑자기 하얀 손 마디가 쑥 제 앞으로 다가왔다.
움찔거리는 찰나, 파레사는 그 손이 제 머리카락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먼지가 묻었어.”
“아……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파레사는 황태자가 제 머리에 묻은 먼지를 친히 떼어주는 이 상황에 황송해 해야 할지 갈등했다.
황태자의 손은 도통 거두어질 줄 몰랐다. 머릿결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길이었다. 낭랑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이 정도는 허락해주겠지.”
미묘한 긴장감이었다. 숨결 한 번, 함부로 쉬어선 안 될 것 같은.
파레사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가만히 이쪽을 직시하는 그 눈빛. 파레사는 흔한 표현을 떠올렸다. 빠져들 것 같은 눈이었다.
“저 황후 폐하께서 기다리실 테니…….”
“그래.”
파레사는 그를 지나쳤다. 뒤로 따라붙는 시선을 느끼면서. 미묘한 기류가 가시고 나자 당연히 그를 따라야 할 기사들이며 시중인들이 눈에 띄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황태자는 파레사를 보러 홀로 그곳에 나타났다. 의심할 필요가 없는 생각이었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나서야 파레사는 뒤를 돌아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잔상처럼 허공에 반짝임으로 남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도, 결코 잊지 못할 반짝임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아직 유예가 남아 있었다. 아마 길지 않은.
곧 결정해야 할 시간이 온다. 그리고 유예가 남은 것은 그 둘의 관계 뿐만이 아니었다.
파레사가 황후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었으면 해. 나도 어떻게 될지 아직은 모르겠으니까.”
복잡한 상념이 담겨 있는 얼굴이었다.
파레사는 황후가 스스로 이 문제를 다루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그것은 파레사가 바라는 바다. 궁극적으로 황후에게 자신이 필요 없어지는 것.
그것은 황후가 온전히 스스로의 삶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파레사는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녀는 제 가슴 언저리에서 무언가 느슨해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명의 결속이 약해지고 있었다.
그것은, 파레사가 곧 떠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위기를 이겨내기 무섭게 변화가 닥치고 있었다.
파레사는 그 변화를 마주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