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155
155
종족의 언
성인, 하나의 재앙에 한 명만이 존재하는 최고최강의 존재.
그 위엄을 표현하는 데는 많은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들의 힘은 쉽게 요약된다.
성인은, 화신에게만 허락된 극히 일부의 권능을 제외한 재앙의 모든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신자 중에서 사도급으로 권능을 활용하는 자들은 드물지 않게 나오지만, 사도가 성인급으로 권능을 활용한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기록된 역사에는 그랬다.
수많은 권능과 본신의 무력을 함께 행사하는 성인들은 재앙이 어떻게 세계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갔는지를 보여주는 재앙의 상징이다.
그 상징 중 하나가 눈앞에 있었다.
투신의 성인 오르가.
그는 오크였다. 갈색 피부에 다른 오크보다 머리 하나는 큰 키. 그리고 생물의 한계를 벗어난 근육을 가진 오크.
그는 오크였지만, 그 근육을 보고 있자면 오우거 같았고, 우직한 눈을 보고 있자니 트롤 같았다. 또 날랜 몸놀림과 손재주는 고블린을 떠올리게 했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의 장점만을 합쳐놓은 듯한 생명체.
전투에 특화된 종족에서도 한층 더 진화한 전투 병기 그 자체.
그게 현 투신의 성인 오르가였다.
“보고 있었나?”
“새롭게 태어난 네가 싸우는 모습을 봐두려고 했지. 그런데 그것보다 흥미로운 존재가 보이더군.”
“그럼 왜 이제야 나타났지?”
“네가 그년을 죽이지 않았으니까. 더 실험할 게 있는 거 아니었나?”
“맞아. 그리고 실험이 끝났으니 죽였지.”
투신의 신자들은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현은 그게 아님을 안다. 투신. 싸움의 신이다. 머리가 나쁘면 싸움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초월자조차 천문학적인 돈과 인력을 쏟아 만든 함정에 빠지면 죽는다.
힘만 강한 놈들은 계속되는 싸움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힘과 지혜를 모두 갖춘 자들이다. 그리고 투신의 성인은 싸움의 신에게 선택받은 자였다.
투신의 성인은 머리가 나쁘지 않다. 냉정하게 싸울 줄 알며, 심계가 깊지는 않지만 편견이 없어 모든 상황을 유연하게 받아들여 대처할 수 있으며, 이성과 직감으로 승리로 통하는 길을 찾을 줄 안다.
“말해라. 그년은 뭐였지?”
그게 오르가, 투신의 성인이었다. 모두 계획이었다. 수천의 정예 병력을 던져주며 현이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판을 깔아준 다음, 현이 모든 걸 알아내자 찾아와 알맹이만 빼먹으려는 계획.
마음에 들지 않지만 현에게 주어진 선택은 하나다. 오르가가 직접 나섰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을 터였다. 그뿐이랴, 그가 원한다면 힘으로 정보를 얻어낼 수도 있다.
대화는 멀고 폭력은 가까웠다.
지금 전력으로는 죽었다 깨어나지 않는 한 오르가를 이길 수 없다.
현의 입이 열렸다.
“새로운 종류의 권능. 몇 번째 재앙인지는 불명. 능력은 세뇌. 권능이라는 점만 빼면 세뇌 마법과 다르지 않음. 발동 조건은 신자의 인식. 이거면 됐나?”
“방금 나온 그 석문은 뭐였지?”
“기억의 방. 추측이지만, 그 여자는 권능을 대가로 기억 장애를 얻었다. 47살 이후의 일을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한다더군. 그 석문은 그 이후의 기억을 기록해둔 기록 저장고였다.”
오르가는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현이 슬쩍 스크롤을 찢으려하자 반쯤 찢긴 스크롤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현은 오르가의 손에서 나온 힘이 종이만을 찢고 사라지는 것을 봤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은 끝난 것 같은데.”
“기다려라.”
“누구와 달리 난 시간이 없어서. 이것 봐.”
현의 말이 떨어지고 사방에 천에 달하는 부대가 소환되었다. 같은 문양이 들어간 무기와 방어구를 입고 있는 것을 보면 어딘가의 부대 같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들은 현을 향해 노골적인 적의를 내비치고 있었다.
“역천자 김우현, 우리와 같이…….”
가장 많은 마력을 가지고 있던 기사의 목이 꺾였다. 기사는 시작이었다. 우드드득. 뼈 부러지는 소리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을 에이네는 처음 알았다. 980명의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모두 목뼈가 부러져 즉사했다.
1분도 안 되어 부대 하나를 시체 덩어리로 만든 투신의 성인은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팔짱을 끼고 섰다.
‘괴물.’
에이네는 상대가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것을 한발 늦게 파악했다. 투신의 성인은 빨랐지만, 피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표적이 된 자들은 귀신에 홀린 것처럼 반항 하나 하지 못했다. 에이네는 그저 기사와 마법사들 주변에 어떤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만 알아챘다.
본능이 말했다. 저거에 덤비면 안 된다. 덤비면 뼈도 못 추리고 죽는다.
“김우현, 같이 가 줘야겠다.”
“이유는?”
“말대답을 할 입장인가?”
“최선을 다해 도망칠 수는 있겠지.”
오르가가 진심으로 현을 죽이고자 하면, 현이 살아날 확률은 반반이다. 그러나 오르가는 그러지 않는다. 그는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투신의 신자였다. 전투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에도 거리낌이 없지만, 그게 전투로도 성립하지 않는 학살이라면, 투신의 성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맹수가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한다면, 오르가라는 맹수는 같은 맹수를 잡을 때밖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현 일행은 오르가에게 맹수로 인정받기엔 한참 부족했다.
“내 영역에서 내 명령을 듣지 않는 종족이 있다.”
“네 지배력이 떨어진 거겠지.”
“그게 종족의 언으로 내린 명령이라면?”
종족의 언. 나올 수 없는 말이고, 나와서도 안 되는 말이다. 현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부릅뜬 눈은 오르가에게서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투신의 영혼과 잘 맞는 건 알았지만, 종족의 언까지 배웠나.’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을 한 번 정리해 줘야 하나 현은 고민했다.
“종족의 언의 위험성을 알고는 있는 거냐?”
“최고의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최고의 수단.”
“누구의 손에 들어가도 제 위력을 내는 폭탄이지. 그 어떤 무기와도 비교가 안 되는 절대적인 폭탄. 피에 전의가 흐르는 종족 전체가 멸종할 수도 있다.”
조율의 성인 뤼필이 종족의 언을 알고도 사용하지 않는 건 종족의 언이 가진 위험성 때문이다.
종족 하나를 지배할 수 있는 말. 종족의 언은 그 자체로 세계의 세력 구도를 뒤바꿀 수 있으며, 차별주의자의 손에 들어가는 날에는 종족 하나가 세상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세상에서 제일 효율적인 무기. 종족의 언이란 그런 것이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래도 상관없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이란 본디 그런 것이다.”
독선적이고 오만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오르가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투신의 성인,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의 꼭대기에 있는 자. 종족의 언까지 얻은 그는 한 종족의 신이나 다를 바 없었다.
현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었다.
“원하는 건, 종족의 언이 듣지 않는 원인을 밝히는 건가.”
“그렇다.”
“보상은?”
후웅. 바람이 불었다. 현의 눈앞을 바위 같은 주먹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르가가 주먹을 거뒀다.
“방금 그 일격이다.”
“투신의 성인은 좋겠어. 세상 모든 무인을 공짜나 다름없이 부려먹을 수 있으니.”
현이 불평했다. 날아오는 주먹에는 한 동작에 담을 수 있는 모든 무리가 담겨 있었다. 무인들이 추구하는 이상적인 주먹이다. 오르가는 그걸 알기 쉽게 풀어서 보여주었다.
무인에게 있어 천만금의 가치를 가진 일격이었다.
“부정하진 않겠다.”
오르가가 땅을 강하게 디뎠고, 다음 순간 세 사람은 피에 전의가 흐르는 종족들 사이에 있었다.
에이네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야? 투신의 신자들이 공간도 다룰 수 있었어?”
“전투의 개념을 생각하면 불가능하지는 않지. 전쟁에서의 지리. 전투에서의 간격. 모두 공간과 관련된 거니까. 공간이동에 가까운 짓이 가능한 건 성인뿐이겠지만.”
“완전 사기잖아.”
“재앙이 괜히 재앙이겠냐.”
사방에서 쏟아지는 호승심 넘치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현이 오르가에게 말했다.
“딴 놈들은 물려줬으면 하는데.”
오르가의 눈빛 한 번에 주변은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호르카.”
오르가가 부르자 땅에서 그림자처럼 오우거가 솟아났다. 높은 수준의 잠행술에선 마력 말고도 다른 힘이 느껴졌다. 투신의 신자, 그것도 사도급이었다.
“네가 이들의 안내를 맡아라.”
“알겠습니다.”
오르가는 나타났을 때처럼 사라졌다.
“소개받은 호르카라고 합니다. 부족하지만 투신의 사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기 머무시는 동안 여러분의 안내와 호위를 맡게 되었으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호르간과 아는 사이인가?”
“제 동생을 아십니까?”
“튜토리얼에서 내 교관이었다.”
“잘 지내고 있나 보군요.”
이성철과 호르카의 대화에 에이네가 현을 보았다. 현이 한숨을 쉬며 설명했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은 부족 단위로 생활해. 그러나 국가를 이룰 정도로 규모가 커지면 집단의 단위도 달라지는데, 그 단위가 바로 용병이다.”
“용병?”
“마음이 맞는 사람끼리, 종족을 가리지 않고 모여 용병단을 구성한다. 그다음 싸움을 찾아다니지. 그렇게 만들어진 용병단은 바깥에선 최고급 인력으로 대우받아. 전투를 위해 태어난 종족이 마음 맞는 사람끼리 모여 역할에 따라 기술을 갈고 닦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용병단은 약할 수가 없어.”
“잘 아시는군요.”
호르카가 감탄한 듯 말했다.
“자신 없는 전투에서도 용병단 뒤에만 붙어 있으면 목숨은 건질 수 있으니까. 젊었을 적 자주 써먹었지.”
즉, 용병단을 방패로 살아남았다는 뜻이다.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군요. 우선 이동하겠습니다.”
오우거의 그림자가 세 사람을 감쌌다.
‘척후계 권능.’
투신의 신자가 가지는 권능의 종류는 모두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전투, 전쟁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은 모두 투신의 분야이며, 투신의 권능 또한 그 모든 분야를 아우른다.
호르카의 권능은 알기 쉬운 편이었다. 그림자. 척후와 스파이가 자주 쓰는 권능이다. 차이점이라면 빛에서 몸을 숨기게 해주는 게 전부인 그들의 권능과 다르게 호르카의 권능은 그림자를 통한 이동까지 가능했다.
“이것도 공간이동 대신 쓸 수 있어?”
에이네의 질문에 호르카가 고개를 저었다.
“긴급 탈출이나 기습을 위해 쓰는 기술입니다. 그리 멀리 가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림자가 사라지자 사람이 많은 번화가가 보였다. 전의가 피에 흐르는 종족도 엄연히 문명을 이루고 살아가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싸움은 야만적이고 원시적이지만, 그들의 문명까지 그런 건 아니었다.
투박하긴 해도 제대로 된 집과 성을 짓고 생활하고 있었다.
“저기가 그 용병단의 구역입니다.”
호르카를 따라 들어간 구역은 다른 구역과 사뭇 달랐다. 은은한 살기와 투기가 공기 중에 감돌던 다른 구역과 달리, 이쪽은 들어오자마자 술 냄새가 확 풍겼다. 다른 쪽에서도 술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이어 현은 믿기 힘든 광경을 보았다.
근원 세계의 오크는 숨만 쉬어도 키가 크고 근육이 붙는다. 관리하지 않아도 나이 때문에 약해지기 전까지는 근육이 쇠하지 않는다. 몸을 망치는 술과 음식도 오크의 힘이 될 뿐 그들의 체력과 근력을 약해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런데 현의 눈앞에는 잔뜩 취해 알딸딸한 얼굴로 한 손에는 거대한 술잔을 들고 있는 배불뚝이 오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