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271
271
충격과 공포
지네가 죽고, 달이 부서졌다. 골칫거리 두 개를 해결한 위원회는 세계적인 규모의 반격에 나섰다.
재앙들의 진격은 무서웠다. 그들은 끝없이 세력을 넓혀가며 숫자를 불려갔다. 죽음의 무서운 점이 이것이다.
죽음의 군대는 다른 군대와는 궤를 달리한다. 보급이 필요 없고, 쉬지 않고 싸울 수 있으며, 싸울수록 숫자가 늘어난다. 모든 전술과 전략을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죽지 않는 자들의 향연. 전쟁은 죽음의 무대다.
현은 죽음이 지나간 자리를 둘러봤다. 모든 게 무너진 도시에는 핏자국이 낭자했지만, 흐른 피의 주인은 없었다. 그들은 저 앞에 나아가는 언데드 무리의 일부분을 차지한 채 부대끼고 있을 것이다.
현이 이단심문관장에게 물었다.
“얼마나 무력화할 수 있지?”
“반 이상.”
지금 시대의 이단심문관장은 현이 만났던 그녀와는 다른 말수가 적은 남자였다.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군.”
“세 시간이면 혼자서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간에 세계적으로 저 몇 배는 되는 언데드가 다시 생기겠지.”
이성철이 냉정하게 평가했다. 앞에 가는 언데드는 죽음의 한 분대일 뿐이다. 근원 세계 전체로 보면 저런 분대가 십만 단위는 있을 거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네.”
“그렇죠.”
에이네와 휘헌은 어딘가 홀가분해 보였다.
주술의 마지막까지 마녀의 나라를 지켜주었던 로드와 달리, 해가 지는 늪을 지원하던 드래곤들은 최소한의 인원만 남기고 사라졌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몇 번이나 공격이 계속됐다.
성인은 없었지만, 사도가 몇 명이나 끼어 있는 대규모 습격이었다. 둘은 주술이 끝날 때까지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긴장 상태로 있어야 했다.
“어차피 우리가 싸울 것도 아니잖아. 빨리 끝내자.”
에이네의 재촉에 이단심문관장 한 명이 추가된 일행은, 앞서가는 언데드 무리의 바로 앞에 떨어졌다.
시취 풍기는 언데드들이 꾸물거리며 나아가고 있다. 보통 사람이 달리는 정도의 속도였지만, 저 속도로 24시간 쉬지 않고 움직일 수 있다면, 그 기동력은 우습게 볼 수 없다.
이단심문관장이 언데드를 향해 손을 뻗고, 교주에게 받은 권능을 사용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지구에선 심정지와 뇌정지를 논하지만, 근원 세계에서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 영혼의 이탈이다.
죽음의 권능은 그걸 반대로 행한다. 죽은 몸에 영혼을 부여하고, 영혼 없는 것들에게 거짓된 영혼을 선물한다.
영혼 없는 언데드가 마력을 다루는 것도 모두 이 덕분이다.
이름 모르는 이단심문관장이 언데드 무리를 마주했다. 그의 손이 성호를 그렸다.
“거짓되어 가련한 것들아, 우리 주께선 가련한 자는 지옥불에 뒹구는 악인이라 하여도 끌어내 천상의 풍경을 보여주라 하셨다. 그러니 나 주의 대리자로서 너희의 죄를 짊어지고 고통의 연쇄를 끊어내리니.”
언데드들이 쓰러졌다. 언데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위 언데드에게 들어간 영혼이라 해봐야 그리 대단치도 않고, 육체와 영혼의 연결도 약하다.
교주는 자신의 구원을 이용해 만들어진 영혼과 죽은 육신의 연결을 강제로 끊어버렸다.
고위 언데드에게는 효과가 약한 기술이지만, 일반 언데드는 한 번에 구원해버린다.
언데드가 사라지고, 그 사이에 있던 재앙의 신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현 일행에게 살기를 뿜으며 달려왔다.
반지를 장갑으로 바꾸고, 이매망량의 무기를 휘두르려는 순간, 현의 시야가 한 바퀴 회전했다.
사방이 하얀 공간이었다. 흡사 시공간의 틈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에서 현은 뜻밖의, 전혀 생각지 못했던 인물을 만났다.
“그 날 이후 처음이군.”
부서진 시간의 회랑이 아키아의 손에서 흘러내렸다. 그녀는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으로 현을 똑바로 바라봤다.
현이 장갑을 말아쥐었다.
“복수라도 하러 왔나?”
아키아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기억하고 있었군… 잊은 줄 알았는데.”
근원 세계에 살며 그녀도 김우현이라 자칭하던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조금은 알았다. 고금 제일의 정령사는 단순한 하나의 수식어. 그녀가 본 현의 인생사는 단어 하나로 정리되는 단순한 것들이 아니었다.
튜토리얼에서 엘프들을 죽인 것은, 인간 김우현의 손에 담긴 피의 한 방울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작은 죽음을 현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작은 놀람이었다.
“약속을 자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내가 뱉은 말은 되도록 기억하고 있지.”
“싸울 생각은 없다.”
“복수는 포기하는 건가?”
“아니다.”
아키아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다. 모든 건 그 후에 정하겠다.”
아키아가 사라졌다. 그녀의 존재감이 공간 전체에 퍼졌다.
-10년 같은 한 달이다. 그 안에서 널 보여봐라.
아키아의 기척이 사라졌다. 현은 아키아가 어디엔가 숨어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알았다.
흰 공간은 달라진 게 없었다. 사방이 하얀, 정신병에 걸릴 것 같은 공간이었다. 현은 아키아의 손에서 떨어진 가루를 확인했다.
이성철의 목에 걸려 있던 시간의 회랑과 같은 색이었다.
‘시간의 성녀인가.’
시간의 성녀가 아니면 현을 강제로 이동시킬 수 없었다. 힘으로라도 나갈까 생각하던 현은, 아키아의 말을 떠올리곤 주먹에 힘을 풀었다.
10년 같은 한 달. 그 말에 과장이 없다면, 여기서 보내는 10년을 보내도 바깥에는 한 달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시간의 성녀가 무슨 속셈인지는 알겠다. 그러나 아키아가 무슨 속셈인지는 모르겠다.
자신을 보여라? 시답잖은 시험이라고 하고 싶은 걸까? 자기 눈으로 원수를 보고 판단하겠다고? 아직 근원 세계에 덜 물든 사고방식이다.
그렇다면 현은 해야 할 일은 할 뿐이다. 다행히 이 공간에도 마력은 있었다.
이건 벌이 아니라 상이다. 시간이 가장 부족한 현에게 10년이라는 시간을 주는 상.
‘이것도 시간의 뜻인가?’
그럴 것이다. 아니면 시간의 성녀가 이토록 좋은 기회를 줄 리가 없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현이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천마신공의 12성을 보았다지만, 현은 아직 천마신공을 완벽히 익히지 못했다. 그의 깨달음은 천마의 깨달음, 현의 것이 아니다. 가끔 현은 둘 사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느끼곤 했다.
10년이라는 시간은 천마신공을 반추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천마신공 수백 년 역사가 현이라는 개인을 빨아들였다. 눈을 감고 손과 발을 휘두르며 현은 천마신공과 하나 되었다.
***
지진이 끝났다. 엘로렌은 거대한 인지도 하나가 사라지는 걸 보았다. 지네의 죽음은 대단한 것이지만, 그건 그녀에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엘로렌은 멍하니 숟가락으로 아이스크림을 휘저었다. 아이스크림은 이미 녹아 물이 된 지 오래였다.
덜커덩. 작은 진동이 울렸다.
도시가 불길함으로 달아올랐다.
“죽음이다!”
“언데드들이 쳐들어온다!”
비명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청년들이 파발 노릇을 했다. 한 박자 늦게 호각이 길고 다급하게 울렸다.
가게가 아수라장이 됐다.
고기를 자르던 로한이 짜증을 담아 식탁에 나이프를 내려놨다. 쿵 소리가 들렸지만, 사방이 소음투성이라 그 작은 소음은 어떤 파장도 일으키지 못했다.
“이번에 몇 번째야?”
“어쩔 수 없다. 그럴만한 장소만 골라 다니는 중이니까.”
젭크가 말했다. 엘로렌의 권능으로 세상 모든 인식에서 벗어나고 있지만, 무슨 예외가 있을지 모르는 이상 위원회의 영향력이 강한 장소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죽음과 과학이 있는 지역이 셋에게 있어서는 더 안전했다.
언데드와 과학의 눈이라면 엘로렌은 확실하게 속일 수 있다. 그렇다고 재앙들 사이에 들어갈 수도 없으니, 그 절충점이 전투가 일어나는 접경지였다.
“가자.”
“어디로? 언제까지 상황이 바뀌었다면서 도망만 다닐 건데?”
로한이 엘로렌의 팔을 붙잡았다.
로한과 젭크는 회귀하지 않았다. 엘로렌은 둘에게 회귀 사실을 알려줄 마음이 없었다. 그들 일행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 가지고 살아왔다. 하지만 그것도 끝이다.
성공이라 생각했던 계획은 단 한 사람의 계략으로 무너졌고, 이번 생에선 아예 세계의 끝이 사라졌다. 진리와 접촉할 방법 자체가 단절되었다.
그리고 그 인지도, 그녀에게서 모든 의욕을 빼앗아간 인지도가 그 자리에 있다. 그녀가 죽었던 자리에.
보일 듯 말듯 희미한 인지도지만, 한 번 본 인지도를, 그 얼굴을 엘로렌은 잊을 수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그 옆에 천마의 인지도까지 함께 보였다.
도시는 금방 한산해졌다.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모두 도망가고, 움직일 힘조차 없어 덩그러니 남겨진 노인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한탄을 표현했다. 곡소리가 울리고 삶을 포기한 눈들이 허공을 배회했다.
늙은이와 아이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다음 여자가 버려진다.
건장한 남자는 마지막이다.
늘 그랬고, 한 번도 변한 적 없는 전쟁의 법칙이다.
죽음이 들이닥쳤다.
성문을 부수며 들어온 데스 나이트가 기병대를 끌고 대로를 가로질렀다. 덩겅 덩겅 목이 날았다. 힘없는 목은 힘없이 굴렀다. 목이 몸에 붙으나 땅에 붙으나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죽음이 도시를 물들이고 뒤이어 다른 재앙들이 물품을 약탈했다. 엘로렌은 다른 두 사람과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그 모습을 구경했다.
전쟁 통에 태어난 세 사람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가자.”
엘로렌이 망토를 꺼내 몸을 감쌌다. 도시를 관통한 기마대가 피난민을 덮치고 있을 시간이다. 적당히 떨어져 공간이동으로 벗어나면 잡히지 않는다.
여태까지 그래왔다. 그리고 오늘은 달랐다.
언데드가, 역병이, 마족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그녀는 눈을 돌리며 원인을 찾으려 했다. 평범한 눈으로는 잡아내지 못했다. 권능을 보는 눈이 간신히 하나의 인지도를 발견했다. 그러나 너무 빨라 인지도의 주인을 구분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했다.
1분도 되지 않아 도시 안에 있던 재앙이 모두 죽었다. 엘로렌은 도시 밖에 있는 기마병까지 모두 움직이지 않는 걸 확인했다.
엘로렌의 눈이 마침내 인지도의 주인을 찾아냈다. 쥐의 귀와 꼬리를 달고, 수염을 쫑긋거리는 작은 소녀는 그녀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짚어냈다.
“너희들이 밈이구나.”
세상만사를 통달한 깊은 눈이었다. 훌쩍 뛰어 창틀에 앉은 아즈란이 수염을 움직였다. 그녀는 거리를 가늠하듯 시선을 앞뒤로 몇 번 움직이더니, 엘로렌이 있는 방향으로 손을 뻗었다.
머리에 물을 끼얹은 것처럼 몸이 차가워졌다. 엘로렌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피했다. 아즈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렇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는데.”
아쉬운 듯한 말투에 엘로렌은 전신의 솜털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저 재앙은, 본능의 성인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 그녀의 위치를 짐작하고, 그 방향으로 말을 걸고 손을 뻗은 것에 불과했다.
밈의 권능은 존재를 사라지게 하는 게 아니다. 인식에서 벗어날 뿐이고 엘로렌이라는 인간은 분명 여기 있다. 물건에 접촉할 수도 있고, 공격당하면 다친다.
만약 그녀의 위치와 행동을 예측할 방법이 있다면, 그녀를 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인식하지 못하는 걸 예측한다는 게 말이 되는 일인가? 밈의 신자인 그녀조차 알 수 없는 최고의 미지가 앞에 있다. 엘로렌의 몸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떨렸다.
아즈란의 손이 그녀의 머리에 닿았다.
“찾았다.”
아즈란의 뇌가 눈앞의 여인을 잡아냈다. 크게 뜬 두 눈이 공포로 물든 여인을 보며 아즈란은 입술을 우물거렸다.
“뭐, 나쁜 짓이라도 당했어?”
엘로렌의 두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