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67
67
에이네 님 만세 만만세
“됐어. 딱히 캐물을 생각도 없었고.”
“묻지 않으십니까?”
현이 손을 휘젓자 처음으로 호르스가 관심을 나타냈다.
“물으면 알아야겠고, 알면 움직여야겠고, 움직이면 피곤하고. 그래서 싫다.”
오지랖 때문에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며 현이 깨달은 것이 있다. 끼어들 일이 아니면 관심을 보이지 말자. 자그마한 호기심이 오지랖으로 이어지고, 오지랖이 개고생으로 이어지는 경험은 몸이 바뀌기 전에 질리도록 했다.
피치 못하게 사건에 말려드는 거라면 모를까. 호기심 때문에 사건의 중앙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현에게는 그런 의무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또 어련히들 알아서 하겠지. 근원 세계에서 10년을 넘게 버틴 놈들이니까.”
호르스는 정말 현이 궁금증 하나 때문에 자신을 불러냈다는 걸 알았다. 위원회 일에 관심을 가지고는 있지만, 현이 위원회 일에 개입할 것 같지는 않았다.
현은 그밖에도 위원회의 현황에 대해 이것저것 질문했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에 대한 질문을 빼면 핵심적인 질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것들은 대부분 현이 이미 아는 이야기의 연장에 불과했다. 현은 그것으로 족했다. 갱신되는 정보가 적다는 건 그만큼 그가 위원회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정확하다는 뜻이니까.
현의 질문에서 호르스는 위원회에 개입하지 않으려는 의지를 읽었다. 원인은 모른다. 그러나 확실히 김우현은 위원회에 관심이 없다.
문답이 끝났다.
“이제 우리 사이에 있었던 거래는 끝난 것 같군.”
“더 하실 질문은 없으십니까?”
“딱히.”
현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지붕에서 내려갔다.
현이 있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호르스가 지붕을 내려갔다. 지붕에는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
백모왕의 손녀가 깨어났다. 현은 그녀의 상태를 보기 위해 그녀의 방을 찾았다. 백모왕의 손녀는 수척했지만, 안색은 밝았다. 이미 와 있던 에이네가 그녀의 몸을 살피고 있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도 정리하지 않고 집중하는 에이네를 보며 현은 그녀가 깨어나자마자 달려왔을 에이네의 모습을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자신의 손으로 구한 목숨이다. 그 애착이 남다를 것이다. 현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시선은 멀었고, 그의 생각은 더욱 먼 곳을 향했다. 현에게도 처음이 있었다. 첫 살인, 첫 구인救人, 첫 실패, 처음으로 시작한 것들의 숫자는 이제는 세는 것이 무의미해졌다. 현은 많은 걸 얻었고, 많은 걸 잃었다.
에이네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서 가끔 현은 에이네를 보면 씁쓸해졌다.
여인의 몸을 살피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몸에 있던 나노 머신까지 수거한 에이네가 진단 종료를 알렸다.
“응, 해독 완료. 독은 빠졌고, 몸도 이상 없어. 잘 먹고 잘 자면 앞으로 102년 3개월은 더 살겠는데?”
“묘하게 구체적인 수치네요…….”
“과학적으로 산출한 수치니까. 다치면 줄고, 좋은 거 먹으면 늘 거니까 크게 신경 쓸 건 없어.”
여인이 난감하게 웃고는 에이네에게 고개 숙였다.
“치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휘헌, 이 은혜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응, 그래. 잊지 마. 잊지 말고 나중에 꼭 갚아.”
“쿡쿡, 알았어요. 꼭 갚도록 할게요.”
백모왕이 아끼는 손녀, 그게 휘헌의 신분이었다. 그녀가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이용하려 하거나, 가식적으로 굴거나, 눈치를 보았다. 이토록 편하게 그녀에게 다가온 사람은 에이네가 처음이었다.
노골적인, 그래서 순수한 부탁. 그래서 싫지 않았다.
“아까 과학이라고 하셨는데, 과학의 관계자 되시나요?”
“뭐, 나름 권력자지.”
에이네가 우쭐하며 말했다. 딱히 틀린 말이 아니므로 듣고 있는 세 남자도 가만히 있었다. 최후의 안드로이드는 과학의 역작이며 전쟁 병기이다. 원활한 작전 수행을 위해 최후의 안드로이드에게는 막대한 권한이 부여되었다.
적어도 일반 과학의 신자보다는 월등했다.
“그럼, 제 몸에 있던 독은 과학의 소행이었나요?”
“응, 언제 과학하고 싸운 적이라도 있어? 저거 만들기 엄청 귀찮은 거거든.”
“으음. 전 과학하고는 거리가 멀어서요. 딱히 모르겠는데요.”
“그래? 뭐, 꼭 과학이 했으리란 법도 없으니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금방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현이 조용히 고갯짓했고, 세 남자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다.
“언제 출발할 거지? 용건은 이미 끝나지 않았나.”
현에게 말을 거는 이성철의 시선이 호르스를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는 몰라도, 두 사람이 지붕에서 만났다는 것은 알았다.
“굳이 떠나야 할까? 보고 싶지 않아?”
“무얼 말이냐. 그 독을 만든 자들의 낯짝?”
“그래.”
“여기 있으면 백모왕과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백모왕과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거 아니었나?”
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이라고 위원회 모두와 친분이 있는 건 아니었다. 원수진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와 친하지도 않았다. 현은 백모왕과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까.
“맞아. 그다지 만나고 싶지 않아. 그런데 그보다 저 독을 만든 놈들을 더 알고 싶어. 넌 안 그래?”
현이 백모왕과 남을 가능성을 남기면서까지 이곳에 남으려는 이유였다.
“부정은 못 하겠군.”
이성철의 생각도 비슷했다. 이 일은 위험을 동반한다. 그러나 저 독은 그 위험을 동반하고라도 대처법을 알아야 할 정도로 끔찍했다. 한 번 걸리면 분자 단위까지 없애지 않는 한 해독되지 않는 독. 해독 마법이 개발되려면 몇 년은 걸릴 거고, 아마 만든다 해도 분자를 다루는 마법을 사용하려면 레벨 700은 넘어야 할 것이다. 그마저도 예상일뿐 확실하진 않았다.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에이네 없이도 저 독을 해독할 방법이.
“그럼 당분간 여기 있어야지. 6개월 동안 제대로 쉬지도 못했으니 한숨 돌리는 것도 나쁘진 않고. 아니면, 우리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문제는 없습니다만, 위원회 간부가 찾아오는 것까지 막아드리진 못합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호르스가 대답했다.
“그거면 돼.”
“아니, 내가 괜찮지 않다만.”
현은 어떨지 몰라도 다회차 회귀자로 막대한 관심을 받고 있다는 이성철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다. 간부까지 갈 것도 없이 위원회에는 제정신 아닌 위험한 인물이 잔뜩 있었다.
“새삼 느끼는 건데 왜 이 조합에서 내가 제일 위험한 거지?”
최후의 안드로이드와 죽었다 살아난 지구 최강. 다회차 회귀자도 눈길을 끌지만 저 둘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항상 자신만 물고 늘어지니 이성철은 어쩐지 억울했다. 이건 뭔가 불합리했다.
“억울하면 다음 생에는 어설프지 말던가.”
“큭큭, 다회차 회귀자에게만 할 수 있는 농담이군요.”
“빌어먹을.”
“그래서, 저번처럼 도망갈래?”
“그게 안 되니까 빌어먹겠다는 거다.”
이성철은 떫은 얼굴로 두 사람을 지나쳤다. 이번 생은 모든 게 엉망이다. 전부 엉망인데, 이상하게 그게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회귀를 몰랐던 첫 번째 삶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한 마리 짐승이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목적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인형이었다. 안드로이드, 뒤쪽 방에서 웃고 떠드는 안드로이드보다 더 기계 같은 인간. 그곳에 빛은 없었다.
이번 생은 모든 게 엉망이다. 그래서 심장도 엉망이다. 굳어버린 줄 알았던 안면 근육이 움직였고, 생소한 감정이 피어난다.
‘인간으로 사는 최후의 삶인가.’
다음 생의 계획에는 김우현이라는 변수까지 생각하고 있다. 아마 동요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 그러니 이게 기계 같은 인간의 마지막 인생人生이다.
‘수련이나 해야겠군.’
방으로 가려던 이성철은 걸음을 돌려 저택 밖으로 향했다. 프라그하에게 배운 마력 운용법과 김우현에게 배운 여러 가지를 아직 숙달하지 못했다. 이번이 지구 최강에게 배울 수 있는 마지막이다.
회귀자는 회귀자답게 찾아온 기연을 누리면 된다.
현은 수다 떠는 에이네에게 숙박 소식을 전했고, 에이네는 그 소식에 박수치며 좋아했다.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에이네와 휘헌은 서로 언니 동생하고 있었다.
나이는 휘헌이 많은데 에이네가 언니였다. 묘령의 여인이 태어나고 1년도 안 된 안드로이드를 언니라고 부르는 광경은, 사정을 아는 현이 봤을 때 사뭇 어색한 풍경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이네는 언니라는 호칭이 마냥 기분이 좋은지 연신 방실대며 웃고 있었다.
“떠나실 때 전해드리려 했는데, 머무시겠다니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부님이 통화를 한 번 해봤으면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련이나 하려는 현의 등에 대고 호르스가 말했다.
***
그날 새벽 현은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왔다. 별채에 딸린 작은 정원에 들어가 현은 핸드폰을 들었다.
신호가 가고,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상상 가능한 모든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
-오랜만이군.
“오랜만이다.
근 4년이 지났는데도 리센의 목소리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굳이 불로不老의 마법을 쓰지 않아도 늙지 않는 사람이었다. 목소리도 달라지지 않겠지.
-은퇴할 거냐?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는 그의 화법은 시간이 지나도 여전했다.
“그래.”
-책임감은 필요 없다고 말했을 건데.
“그런 거 아냐. 그냥… 조금 피곤해서. 그리고 누구보다 책임감 강한 사람이 할 말이냐.”
-쓰레기를 청소하는 일에 책임감은 필요 없다.
“그러시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중요한 일이 있으면 꼭 먼저 달려가 현장을 지휘하는 게 리센이라는 인간이었다. 표현의 방식은 달라도 윌리엄이나 리센이나 둘의 근본은 비슷했다. 말해주면 둘 다 극구 부정하겠지만, 현이 봤을 땐 그랬다.
-말리진 않겠다. 다만, 쓰레기들을 조심해라.
“네 제자에게 들었어. 제자 참 잘 들였더라.”
-싸움에 눈 돌아가는 것만 빼면 괜찮은 놈이지. 그대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면,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도 한 번 들러라.
그레이트 다운타운. 세계 최고 규모의 범죄 도시였다. 위원회가 세상의 쓰레기들을 모아놓은 장소. 환영받지 못하는 것들이 모여드는 환락의 도시.
대중의 시선으로 보면 현은 영웅이고 다운타운 인간들은 범죄자였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에는 현을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널렸다.
“미끼나 해라?”
-마력이 형편없다지? 영약을 주마. 드래곤 하트급으로.
“생각 좀 해보고.”
그레이트 다운타운에 가는 건 꺼려졌지만, 드래곤 하트가 보상이라면 고려해볼 만했다. 레벨이 오를수록 영약의 효과는 떨어진다. 레벨 700 이상인 사람에게는 대부분의 영약이 일회용 마력 보충제에 불과했다. 드래곤 하트는 누가 먹어도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약 중에서도 최상급의 물건이었다.
-힘이 필요하면 가겠지. 기다리고 있겠다.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데.”
-네 오지랖에 언제 네 의사가 필요했나? 죽일 놈은 죽이고, 살 놈은 산다. 그렇게 되겠지.
“너는 나를 너무 잘 알아.”
-위원회를 무너뜨릴 생각은 전혀 없다.
뚝. 통화가 끊겼다. 현은 끊어진 양자폰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정말, 나보다 나를 잘 아는 놈들이 너무 많아.”
그건 현이 방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일어났다.
“꺄아아아악!”
귀따가운 휘헌의 비명이 별채를 넘어 저택 전체에 울렸다. 현은 휘헌의 방으로 달려갔다. 진입하려는 사자대와 위원회 요원들을 말리는 호르스의 옆을 몸을 숨긴 채 지나, 휘헌의 방으로 들어간 현은 보았다.
살을 뚫고 그녀의 다리에서 벌레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