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66
66
에이네 님 만세 만만세
과학의 목적은 진리의 자연과학적 서술이고, 그 끝은 예상할 수 없는 모든 요소의 배제다. 과학의 이상향에 기다리는 건 변수가 사라진 세상이다. 세속에선 그걸 멸망이라 불렀다.
과학에게 생명은 불경한 것, 없애야 할 것이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연구도 덜 되었다. 물론, 그 상대적인 기술로도 지구의 수준은 아득하게 넘어섰지만 과학의 기술을 생각하면 미진했다. 그러나 그게 형편없다는 건 아니었다.
전쟁 당시 과학이 썼던 전술 무기 중 하나가 생화학 병기였다.
“지성체의 건강에 대한 믿음은 대단해. 집착을 넘어 광기라 불러야 할 정도지. 특이한 건 아니야. 생존은 유전자, 생물의 최소 단위에서부터 각인된 본능이니까. 그래서 생화학 병기는 다른 무기에 비해 재미를 보지 못했지. 어떤 병이 든 마법과 주술로, 그야말로 마법같이 치료해 버리니까.”
그래서 과학은 안 그래도 등한시하던 생물학을 더 등한시했다. 천문학적인 에너지를 투입해 만든 독과 바이러스가 마법 하나에 정화되어 버리니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았다.
“그래도 지금은 아니지. 마력을 쓰느냐 마냐는 신자의 자유야.”
종교의 조교가 죽으면 그 제자들이 흩어져 계파를 만드는 것과 같이, 과학의 화신이 죽으며 과학의 상층부는 과학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상실했다. 과학의 신자들은 근원 세계 각지에 자리 잡았으며 개인의 소신대로 살 자유를 얻었다.
“말해들을 놈들도 아니니 과학에 마력을 더해보려는 놈들도 생기겠고.”
그 대표가 에이네였다. 에이네는 메인 컴퓨터, 과학의 성인의 묵인 아래 만들어졌고, 이렇게 살아있다. 과학과 마력을 합치려는 시도는 근원 세계에서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이건 아마 그 결과 중 하나일 거야. 마력을 가진 독. 그런데 그 성질은 절대 자연에서 나오는 게 아니야. 독 자체는 과학의 작품이야.”
저건 그냥 독이 아니었다. 특정 조건을 만족하면 독은 반응, 증식을 반복한다. 이론상으로는 한 방울로도 바다를 오염시킬 수 있다. 저런 액체는 자연적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다른 누구도 만들 수 없다. 저런 액체를 만들 기술력을 가지고 있는 건 과학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에이네의 머리에는 이 독의 베이스가 되는 기술의 지식이 있었다.
“독을 써 사람을 중독시켜도, 식수를 오염시켜도. 마법 한 방, 조율의 신자의 현실 왜곡 한 번에 전부 정화되니 병기로써의 쓸모는 없었지. 그런데 그걸 마력과 합쳤어. 마력이 마법과 권능에 저항력을 주었고, 이건 한 방울, 분자 구조 하나만 남아도 다시 증식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셋 모두 마법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짧은 설명으로 여인의 몸에 있는 독이 어떤 독인지 감을 잡았다.
마법은 간섭하는 영역이 좁아질수록 드는 마력이 제곱으로 커진다. 해독 마법의 작용점은 광범위하다. 사람 하나, 오염된 수질 전체, 일정 범위의 공간. 해독, 정화 마법은 범위 안에 있는 독을 정화하지만, 분자 단위로 독을 정화하려는 사람은 없다.
마법으로 독을 없애도, 마법 저항을 가진 독의 일부, 적어도 분자 하나는 몸에 남는다. 평범한 독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체내의 면역력이 해결해줄 테니까. 그러나 이 독은 아니다. 분자 하나에서 시작해 다시 증식한다.
여인이 중독된 독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해독할 수 없다.
“최후의 안드로이드는 대단하군요.”
“날 알아?”
“몰랐다면 처음 만났을 때 소개부터 요구했겠지요. 당신 두 사람에 대해 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최후의 안드로이드와 다회차 회귀자. 특히 이성철 씨, 당신은 김우현 님보다 더 유명인입니다.”
“무슨 의미지?”
이성철의 얼굴이 무섭도록 딱딱하게 굳었다. 그냥 회귀자도 아니고 다회차 회귀자, 그가 가진 정보는 일개 회귀자가 가질 수 없는 양이었다. 자신이 회귀할 것을 모르는 사람과 그걸 알고 회귀를 준비하는 사람, 누가 더 양질의 정보를 많이 알고 있을지는 생각하지 않아도 나온다.
프라그하와 김우현에게 들킨 건 어쩔 수 없었다 치더라도 많은 사람에게 알려졌다면 그건 목숨이 걸린 일이 된다. 정보를 원하는 사람에게 잡히기라도 하면 의미 없이 한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다. 이성철은 고통과 고문보다 그게 더 두려웠다.
현과 프라그하에게서 얻은 기연만으로도 이번 생이 의미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이대로 현을 따라 다니면 훨씬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현이 지나가듯 던져주는 조언으로도 그는 상당한 성취를 이루고 있었다.
“무섭게 노려보셔도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습니다. 현퀴벌레는 어련히 알아서 할 거니, 그놈보다는 옆에 있는 다회차 회귀자가 훨씬 신경 쓰인다. 그게 위원회 간부들의 여론입니다.”
“저건?”
이성철이 에이네를 가리켰다. 사람한테 저게 뭐냐고 에이네가 이성철에게 달려들었지만, 진심은 아니었던지라 이성철은 어렵지 않게 회피했다.
“개체명 에이네. 최후의 안드로이드는 조금 예외입니다. 저게 알려지는 날에는 세계가 한 번 뒤집어지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닌지라. 재앙보다 더 지독한 일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김우현 님께서도 최후의 안드로이드에 대해선 되도록 비밀로 해주셨으면 합니다.”
마력을 쓰는 최후의 안드로이드, 마력과 과학의 성공적인 융합 예시. 이건 단순히 과학과 마력으로 나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과학과의 전쟁에서 근원 세계가 뭉칠 수 있었던 이유는 마력 때문이다. 과학은 마력을 철저히 배제한다. 근원 세계에 살던 사람들 입장에선 산소를 빼앗기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근원 세계는 뭉쳤고, 전쟁에서 이겼다.
그게 다 과학의 진리성 덕분이다. 과학의 목적인 진리의 자연과학적 서술, 이념 변환적 에너지를 부정하는 그 신념이 과학에게 패배를 안겼다.
전쟁에서 패하며 과학은 절대적으로 진리만을 외치지 않게 되었다. 현실과 타협했으며 마력을 암묵적으로 허용했고, 과학은 무섭게 실생활에 스며들고 있었다. 과학의 유용성은 과학과의 전쟁 당시에도 부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이제 상황이 변했다. 전쟁은 끝났고, 과학은 근원 세계에 받아들여졌다. 과학 산물의 향유가 배족背族행위가 되지 않는다.
과학은 누구나 탐내는 과실이었고, 과학과 마력의 융합을 위해 발 빠른 자들은 이미 움직이고 있다.
“과학과 마력의 조화, 위원회를 비롯한 세계 모든 세력의 숙원과 같은 겁니다. 누가 사용해도 같은 결과를 내는 과학, 사람의 차이는 심하지만 그 위력은 과학마저 누르는 마법. 두 가지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면 세계의 패권을 쥐는 것도 꿈은 아니다. 그런 춘몽을 꾸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니 에이네의 존재는 세계를 뒤흔들고도 남는다. 단순히 마력을 다루는 안드로이드가 아니다. 최후의 안드로이드, 잃어버려 재현할 방도도 없는 기술이 사용된 안드로이드. 심지어 그 결과는 성공적이다.
“…… 그놈들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지 않아? 마력과 과학은 작동 원리부터가 다르다고.”
에이네가 눈살을 찌푸렸다. 과학과 마력의 융합, 그게 말처럼 쉬우면 그녀가 현에게 구박받으며 마력 조작과 마법을 배우고 있을 이유가 없다. 에이네도 마력을 다룬다는 것에 대해 아직 감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었다. 마력과 과학은 뚝딱 하고 합쳐지는 것들이 아니다. 물과 기름보다 섞이지 않는 것, 그게 마력과 과학이었다.
“세상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으니 문제인 겁니다. 모쪼록. 최후의 안드로이드에 대해선 비밀로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게 모두에게 좋은 일일 겁니다.”
“결국, 위험한 건 나밖에 없다는 거군.”
이성철이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호르스의 말대로 현은 혼자 둬도 잘 살 거고, 에이네가 안드로이드란 사실은 보통 눈썰미론 구분할 수 없다. 구분한다 해도 그녀가 최후의 안드로이드라는 사실은 누가 직접 말해주지 않는 이상 밝혀낼 수 없다.
실상 위험한 건 이성철 혼자였다.
“그런데 에이네에 대해선 어떻게 알아낸 거지? 내가 직접 떠들고 다닌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아니, 그걸 알고 있는 사람은 과학의 신자를 빼면 여기 이놈하고 천마뿐이다만. 천마가 떠들고 다녔나?”
“천마께선 놔두는 게 재미있을 것 같으니 떠들고 다니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아는 사람은 정말 극소수뿐입니다. 그나저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난 것 같지 않습니까?”
호르스가 에이네를 보았다.
“독의 정체를 알았다면, 해독도 가능한 겁니까?”
엣헷. 에이네가 가슴을 내밀었다. 부풀어 오른 흉부는 남성의 눈길을 끌 만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셋은 성욕보다 다른 것들이 앞서는 인간들이었다. 호승심이라거나, 자기보존이라거나, 일행 두 명을 어떻게 놀려먹을까라거나.
가슴을 내민 에이네는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 번 주물거리더니 쌀알 크기의 광택이 나는 물건을 내밀었다.
“요걸로 끝.”
“나노 머신?”
현이 말했다.
“내 거랑 비교하면 수십 세대는 뒤떨어진 물건이지만, 의료용으로는 차고 넘치지. 성분 하나를 완전분해 하는 건 일도 아니야.”
“마력을 가진 독을 분해하는 게 가능한 겁니까?”
“정화 마법에 버티기 위한 용도지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니까 그냥 분해해버리면 끝.”
에이네가 쌀알을 여인의 입에 넣었다. 꿀꺽. 나노 머신이 침과 함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사흘? 나흘? 독이 분해되길 기다리기만 하면 돼.”
백모왕이 해결하지 못하고, 위원회도 손대지 못하고 있던 문제를 1분도 안 되어 해결하는 에이네를 보며 호르스는 에이네의 가치를 재인식했다.
위원회라고 과학에 자문을 구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위원회에는 튜토리얼에서 뽑은 이공계 박사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으며, 그들 중 과학의 영혼을 받아들여 과학의 신자가 된 이들도 있다.
과학 연구에 평생을 투자했던 사람들이 과학의 신자가 되며 지식과 직관까지 얻었다. 그런 사람들도 독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다.
에이네의 말처럼 과학과 마력의 융합은 쉬운 게 아니었다. 화학의 산물인 독에 마력을 조금 더했을 뿐인데 과학의 신자들도 두 손 들었다.
‘정확히는 마력의 산물이라는 걸 알고 분석을 포기한 거지만.’
분석했다 해도 에이네처럼 정확한 분석이 가능했을지는 미지수였다. 에이네는 과학과 마력을 연결하는 근원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안드로이드다. 그 가치는 근원 세계 전체와 비교해도 못하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이군요. 결과가 나올 때까지 머물러 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알다시피, 이쪽은 추적당하는 몸이거든.”
현이 말했다.
“추적자들에 대한 대응은 이쪽에서 맡도록 하겠습니다. 사자대에 더해 믿을 만한 요원 몇을 더 부르도록 하죠.”
“부탁할게.”
“제가 할 말입니다.”
호르스의 일 처리는 확실했다. 세 사람은 별채의 빈방을 받을 수 있었고, 누구에게도 간섭당하지 않았다. 또 별채 근처에는 아무도 얼쩡거리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감각을 밖으로 뻗으면 삼엄한 경비가 그대로 느껴졌다.
이틀이 지났다. 백모왕의 손녀의 안색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에이네에 따르면 사흘 내로 눈을 뜰 거라고 했다. 추적자들은 보이지 않았다.
모든 일이 무난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뜬 낮, 호르스는 별채 지붕에 섰다. 그 건너편에는 현이 있었다.
“전하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라서 말이야.”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라면 성심성의껏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리센하고 천마는 사이가 나쁘지도 않지만 그래도 사이가 좋지도 않거든? 그리고 천마는 별로 친하지도 않은 놈한테 이것저것 떠들 놈이 아니란 말이야. 또 천마는 윌리엄과 꽤 죽이 잘 맞았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군요.”
호르스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영업직원 같은 미소가 한결같았다.
“리센이 제자는 참 잘 뽑았어. 그놈 단점이 표정이 너무 없다는 거였는데. 능청스러운 것 좀 봐.”
“사부님이 좀 딱딱하시긴 하죠.”
“리센과 윌리엄이 파벌을 갈랐고, 천마가 리센에게 정보를 줄 리는 없다. 그럼 윌리엄에게 전해진 정보를 리센이 알았다는 건데… 위원회 내부에서 첩자까지 쓰고 있냐?”
“동양의 손자병법에 이런 말이 있죠. 전쟁은 속임수다.”
“그래서 쓴다고?”
“누군지는 제가 죽어도 말 못 해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