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perienced Newbie RAW novel - Chapter 84
84
걸어서 함정 속으로
“함정, 아니면 함정보다 더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다.”
현도 이성철의 말에 동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리센이 조건 없는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었다. 분명 꿍꿍이가 있다.
“교습 값으로 한 번 이용당해주느냐, 아니면 그냥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찾느냐인데…….”
에이네를 가르칠 사람으로 리센만 한 인물이 달리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현은 이왕이면 에이네에게 좋은 교육을 시켜주고 싶었다. 학부모의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에이네는 특별한 일이 없다면 현이 앞으로 계속 품고 갈 사람이다.
에이네가 강해질수록 현에게도 좋았다. 에이네의 성장 가능성은 현도 끝을 짐작할 수 없었다. 어디서 재능이 개화할지 모르니 해보고 싶다는 건 전부 시켜보고 싶었다.
“이봐 회귀자. 리센의 약점 같은 건 없어?”
“있긴 있지만, 이 시점에서 통할지 모르겠군. 미래가 너무 바뀌어서.”
“그럼 됐어.”
자신이 가진 것과 이성철이 가진 것, 어느 것 하나만 통해도 된다. 그게 아니더라도 상대가 리센이라면 유효한 ‘약속’이 있었다.
“가혁이한테 인사나 하고 갈까.”
“아, 잊고 있었다.”
에이네가 얼빠진 소릴 했다.
***
현은 우가혁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8급 몬스터가 죽은 사건으로 위원회에서 말이 많았다. 우가혁도 위원회에 가서 할 일이 많았다. 증언을 하고 자신의 무력을 내세워 더 많은 지원을 얻어내고, 그다음 더 위험한 현장에 투입된다.
앞으로 기다릴 모험에 우가혁은 들떠 보였다.
“늘 마시던 자리가 어디지? 장소에 따라선 준비가 필요하다.”
공간이동 스크롤을 손에 든 현에게 이성철이 물었다. 현은 하늘을 보았다. 하늘이 푸르게 맑았다.
“정식 명칭은 모르겠고. 우리는 거길 에베레스트라고 부르는데.”
“에베레스트란 말이지.”
“뭐야 알아?”
현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에베레스트는 현을 포함한 지구인들이 임시로 붙인 지명이다. 남에게 알려질 명칭은 아니었다.
“에베레스트 사변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그 일로 위원회 관계자 중 에베레스트라는 지명을 모르는 사람은 없게 되었지. 말해 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다.”
에베레스트 사변, 대형 플라즈마 폭탄으로 산 하나와 산에 있던 위원회 간부 몇이 죽은 사건이다. 몇이라고 우습게 봐선 안 된다. 그 몇은 모두 초월자, 사람의 형상을 한 재해들이었다.
과거 두 번 일어났던 사건이며 범인은 회귀를 반복한 이성철도 잡지 못했다. 그러나 정황상 리센이 범인이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에베레스트 사변으로 가장 많은 이득을 본 것이 바로 그였다.
‘보험을 들어두어서 잘 했군.’
이성철은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여러 귀금속을 얻으며 이성철은 짬짬이 에이네에게 물건을 만들어줄 것을 부탁했다. 에이네의 호언장담대로, 그녀는 재료만 있으면 과학의 자료에 있는 모든 물건을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과학의 신도들 수백이 붙어도 못 만드는 물건을 에이네는 수 초, 수 분 만에 뚝딱 만들어냈다.
플라즈마 재머도 이성철이 에이네에게 부탁해 만든 물건 중 하나였다.
“에베레스트 사변, 절대 좋은 일이 일어났을 것 같지는 않은데, 가도 괜찮은 거지?”
“대비는 되어 있다. 그리고 여긴 에이네도 있다.”
“나? 에베레스트 사변은 과학이 벌인 일이야? 그거라면 뭐. 내가 어떻게든 할 수 있어.”
“벌써 한 번 과학을 상대로 물먹었던 사람이?”
현의 말에 에이네가 분개했다.
“야, 그걸 과학이라고… 걔들 전자 기기 하나도 안 썼거든. 그리고 인공 태양을 부순 건 나잖아! 그리고 너희가 평소에 쓰는 물건들, 그게 얼마나 높은 수준의 기술이 사용된 건줄…….”
“네네, 이야기는 가서 계속하시고요.”
에이네의 팔을 붙잡은 현이 아공간 스크롤을 찢었다.
“은 알기나 하……. 우와.”
변한 풍경에 에이네가 입을 쩍 벌렸다. 현과 다니며 다양한 풍경을 봐왔다. 공업 도시부터 시작해 다양한 도시의 모습을 봤고, 이성철과 어울리며 여러 험지와 오지를 가봤다.
사람의 손이 닿은 미경美境과 닿지 않은 미경. 에이네는 둘을 잔뜩 봐왔다. 그러나 이건 차원이 달랐다.
탁 트인 시야, 지평선 끝에서 서로 마주치는 하늘과 땅의 경계는 흐렸다. 하늘과 땅이 섞여 하나 된 듯한 광경. 하늘에는 구름이 떠 있고 땅은 광활하다. 조금만 고개를 아래로 내리면 만년설이 쌓인 산들이 있다.
그 모든 게 벼락처럼 그녀를 때렸다.
“와아…….”
인세의 풍경이 맞나 의심되는 그림에 에이네의 입이 다물어질 줄 몰랐다.
“멋진 곳이지. 정말로 멋진 곳이야.”
에이네는 목소리가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마법사가 있었다. 에이네는 남자에게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마력 적성이 뛰어난 그녀는 무공과 마법을 익히지 않은 사람의 몸에 있는 미약한 마력마저 감지할 수 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경우는 하나였다.
바로 격의 차이가 너무 심할 때.
금발의 미청년이 걸어와 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시 한번, 오랜만이다.”
현이 손을 맞잡았다.
“그래, 오랜만이다.”
“얼굴은 왜 그 모양이냐? 늙은이 기분이라도 내보고 싶었나?”
“평생 늙지 않는 외모라는 것도 재미없잖아. 나이에 어울리는 얼굴을 가져보고 싶기도 했고.”
리센이 손가락을 튕기자 산의 정상에 식탁이 생겨났다. 식탁 위에는 이미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선 들지. 그쪽도 앉아라.”
리센의 말에 따라 모두가 의자에 앉았다. 에이네는 오랜만에 본 술에 들 떠 있었고, 이성철은 음식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현은 리센이 따라주는 술을 받았다.
“무슨 일을 시키려고 이런 거창한 대접을 다 해주시나.”
“미끼다.”
짠. 건배를 하고 술이 들어갔다. 현은 안주를 집어 먹었다.
“그레이트 다운타운의?”
“그건 해도 좋은 일이고 굳이 안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반면, 이건 해야만 하는 일이지.”
“구체적으로는?”
“대규모 쓰레기 청소.”
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여기서 말하는 쓰레기가 그냥 쓰레기일 리는 절대 없다. 쓰레기 청소, 사람 청소다.
“척 봐도 위험해 보이는 일인데.”
“넌 그냥 한 자리에 가만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신만만하군. 그래서 더 불안해. 약속까지 하게 할 셈이냐.”
한두 잔 마시기 시작한 술이 한 병이 되었다. 리센이 허공에서 술을 한 병 더 꺼내 현에게 따랐다. 현도 잔을 받아 리센에게 똑같이 술을 따라주었다.
“원한다면 약속해주지. 공수표로. 넌 그냥 내가 마련한 장소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한다.”
“나한테 오는 위험은 전혀 없다?”
리센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많이 죽었군. 현.”
“그래, 많이 죽었지. 한 번 죽었다 살아나기까지 했으니 죽지 않을 리가 있나.”
현이 들고 있던 잔이 조각났다. 현은 웃으며 리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죽고 4년간 네가 뭘 했는지 나는 몰라.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지. 네 시간은 4년이 지났고, 내 시간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내 싸움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서 ‘약속’이라도 해주길 원해?”
“…… 아니, 관두지. 여기서 죽을 순 없으니까.”
현이 ‘약속’을 사용해도 죽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치명상을 입는 건 확정이다. 현이라면 그에게 회복 불가능한 상처를 입히는 것도 가능했다. 힘을 잃었어도 김우현은 김우현이다. 그 말에 잘못된 건 없다.
리센은 죽음이 무섭지는 않았지만, 현과 대적해 치명상을 입는 건 사양이었다. 현이 자작했다. 술잔은 천마신공으로 만든 검은색 강기 잔이었다.
“죽은 건 너야, 리센. 난 분명 위험은 없냐고 물었어. 네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이 일어날 일은 없느냐고 말이야.”
현은 평범하게 술을 마시고 안주를 씹었다. 자연스러운 동작에 에이네가 손을 멈췄고, 이성철이 침을 삼켰다. 변한 건 없다. 그러나 어쩐지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둘은 새삼 다시금 깨달았다. 평소엔 잘생긴 중년 아저씨에 불과한 이 사람이 한때 지구 최강이라 불렸으며, 근원 세계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인간이었다는 것을.
“세월에 유해진 건 네가 아니라 나였군. 근원 세계에 안전이 존재할 리가 없는데…… 정정하지. 위험할 거다. 그러나 마땅한 대가를 치를 것이고, 목숨이 위험해질 일은 어지간해선 없을 거다.”
“무얼 믿고?”
“내가 가진 달 사용권 일회. 그거면 충분하겠지.”
“콜.”
이때까지의 분위기가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현이 유쾌하게 말했다. 달 사용권 일회. 그건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
리센이 시킨 미끼란 실로 간단했다. 숲속에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일주일만 지내면 되었다. 다른 일들은 그동안 리센이 알아서 한다고 했다.
그 ‘알아서 한다.’는 부분이 불안했지만, 현은 그가 붙여준 호위를 보고 걱정을 덜었다. 호위랍시고 숲속 집에 찾아온 사람은 호르스와 한 명의 마족이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우라누스라고 한다. 천마 님의 명령을 받아 네 수발을 들게 됐다.”
두 사람은 마법에 의해 일주일 동안 집을 기준으로 일정 반경 이상 벗어날 수 없었다. 천마의 부하가 왜 여기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호르스가 인질이라는 건 현에게 믿음을 줬다.
제자라 칭하며 직접 키운 놈을 쉽게 미끼로 버리지는 않을 테니까.
집 내부는 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딱 갖춰져 있었다. 여기서 남자 셋이 일주일을 지내야 했다. 에이네는 리센에게 마법을 배우러 갔고, 이성철은 숲으로 들어갔다.
집에서 미끼가 되어야 하는 현과 달리 이성철은 마음껏 움직일 수 있었다.
현은 우라누스의 외형을 살폈다. 검은색 피부에 등에 달린 박쥐의 날개, 그리고 머리에 난 뿔. 영락없는 악마였다.
“우라누스라고 했던가. 뭐라고 부르면 되지?”
“편하게 부르면 된다. 일주일 동안 네 노예나 다름없다.”
“그러면 편하게 우라누스라고 부르지. 우라누스. 마족은 어떻게 지내고 있지? 네가 느낀 그대로를 말해라.”
마족, 마신이 만들어낸 새로운 종족. 그러나 그 본질은 기존의 종족들이 변한 것이다. 마신의 힘으로 영혼이 변질된 종족. 그게 마족이다. 영혼이 변했다는 건 맞지만, 재앙에 오염된 건 아니다. 그래서 마족은 재앙이 아닌 하나의 종種으로 분류되었다.
날개와 뿔을 제외한 특징이 없는 걸 보면 우라누스도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이다.
기존 종족과 같지만 다른 마족의 탄생, 위원회는 마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 마족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두고 고민했다. 결론은 두고 보자는 쪽이었다. 혼이 변질되었을 뿐 그들은 재앙의 신자가 아니었으며 자기 의지도 명확히 가지고 있었으니까.
현은 마족의 처우에 대한 결과만 알고 그 뒤는 알지 못했다. 마신을 죽인 그날 자신도 죽었으니까. 그래서 마족이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궁금했다. 위원회 어플에 나오는 피상적 정보가 아닌 마족에게 직접 듣는 정보가.
“당연하게도 여러 장소에서 핍박받고 있다. 특히 북대륙이 심한 편이다. 북대륙을 직접 멸망시킨 게 우리 마족이니까. 다른 대륙은 차별이 있긴 하지만 버틸 만하다더군.”
“그게 네가 느낀 건가?”
“나는 차별을 경험한 적이 없다. 날 차별한 놈들은 모두 죽었으니까.”
참으로 해괴한 논리에 현은 그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