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173
1173화 어렵지만 적합한 길
진양과 냉정한 진양은 비록 같은 몸을 공유한 사이이긴 했지만, 냉정한 진양은 아무런 감정 없이 오직 한 가지 일에만 집중했다.
모든 것이 효율적이었고 심지어 일말의 지친 기색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동안 진양이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들, 그리고 일 처리에 도움이 되지 않던 나쁜 습관까지도 그에게선 찾아볼 수가 없었다.
냉정한 진양이 강해질수록 두 사람 사이에 느껴지는 거리감은 한층 더 명확해져 갔다.
일단 상황이 큰 문제 없이 일단락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진양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눈을 뜬 진양은 새로 얻은 서적을 살펴보았다.
최대한 빠르게 일념의 바다 안에서 고심주에 관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고심주를 해결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 * *
다시 눈을 뜬 영제.
계속해서 수련을 이어가려던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의 팔을 바라보았다.
눈빛이 옷깃을 뚫고 그의 피부를 살폈다.
조금씩 옅은 흔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먹물에 담갔다가 다시 씻어낸 것처럼 자세히 살피지 않는다면 볼 수 없는 미세한 흔적들이 남아있었다.
영제는 자신이 그 승려를 너무 과소평가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겉으로는 자신의 일념을 말살시키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원한과 사념을 그의 몸에 남겨 위치를 확인하기 위한 징표로 삼으려고 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건 영제의 착각이었다.
그는 비록 이성을 잃을 정도로 극도의 분노에 휩싸인 상태였지만 그의 행동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눈속임에 불과하다.
사념과 원한 그 자체는 그가 남긴 징표가 아니다.
진짜는 사념과 원한이 휘감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흔적이었던 것이었다.
마치 바람이 지나가면 소리라는 흔적을 남기듯, 비록 그 흔적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순 없는 것이다.
지금 그의 팔에 남아있는 흔적은 승려가 자신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남겨둔 징표가 확실했다.
영제의 눈에서 흘러나오던 빛이 흩어지자 미약하게나마 보이던 흔적들도 완전히 사라졌다.
현재 그의 실력으로는 이런 흔적을 완전히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영제는 그것을 무시한 채 계속해서 수련에 전념했다.
이번 일은 그에게 원한을 진 누군가가 기묘한 공법으로 자신을 엿보다가 그에게 들키면서 일어난 일이 분명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죽여야 할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했다.
* * *
상아처럼 새하얀 궁전 내부.
혈라마가 깨어났다.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이성에 상처를 입은 탓인지 눈 주위가 퀭해 보였다.
그는 천천히 진원을 흘려 회복을 하면서도 잃어버린 부분을 보전하는데 애썼다.
그가 해야 할 일부터 영제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기까지의 과정까지.
부서진 기억 조각들이 머릿속 한곳으로 모이며 영제의 모습을 만들어냈다.
이 모든 것은 진양을 기준으로 찾아낸 것들이다.
대영 신조의 대제라는 신분이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억의 일부를 통해 지난 윤회에서 어쩌면 그가 영제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기억 조각이 한곳으로 모이고 합쳐지는 과정은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비록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대략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지금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분명 심연에서 진양과 관련된 기억을 파내려고 했는데, 어째서 깊은 곳에 다다르자 영제에 관한 기억이 발견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히 그가 쫓아간 것은 진양에 관한 흔적이었지만, 허무 중에서 마주한 것은 영제의 이성이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진양은 영제의 화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영제가 신조를 벗어나 천하를 돌아다니기 위해 만들어진 화신말이다.
즉, 그의 이성은 사실상 영제인 것이다.
그래서 진양을 찾으려다가 자연스럽게 영제를 찾게 된 것이다.
지금으로선 이게 가장 유력한 가설이었다.
그가 발굴해낸 조각 속에서 본 진양은 결코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절대 그가 진양과 관련된 것들을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느꼈을 리 없다.
흩어진 조각들 중 대부분은 그가 어딘가에 봉인해두었던 조각들이다.
그는 조금도 저항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어느 한 조각 안에는 하나 이상의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봉인되어있는 게 느껴졌다.
지금까지는 어째서 이것들이 진양 같은 일개 수도사 따위와 연관되어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진양이 영제의 화신이다’라는 가설을 기반으로 살펴본다면 이 모든 게 충분히 설명이 되고도 남는다.
기억의 공백이 너무 컸기 때문에 완전히 회복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저 이런 식으로 추측하며 결론을 내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이러한 과정 중에서 오류가 발생할 수도 있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얻은 결론을 제외하고는 심연에서 진양에 대해 파내다가 돌연 영제를 만나게 된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완전히 회복한 혈라마는 남겨두었던 흔적을 느끼며 동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먼 극동 지역, 그곳에 영제가 있다.
혈라마의 마음속에서 진양, 진유덕이라는 이름은 점점 더 희미해져 갔다.
겨우 화신 하나 파내자고 위험을 감수할 가치는 없다.
심연 깊은 곳, 진양에 대한 조각들은 점점 더 빠르게 파괴되어가기 시작했다.
이 외에 불필요한 다른 정보들도 빠르게 심연 속에서 소멸되어버렸다.
아직 혈라마가 파내진 않았지만 중요한 정보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정보도 소리 없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다른 조각들처럼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반대로 영제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나씩 발굴되며 점점 더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현재 그가 주목표로 삼는 대상도 진양에서 영제로 바뀌었다.
혈라마는 고개를 들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극동 지역에 사악한 존재가 나타났다. 그는 지금 무시무시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속도를 높여 동쪽으로 진격한다. 부처님의 자비로움으로 악을 처단할 것이다.”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대한 코끼리가 우렁찬 포효성을 내질렀다.
혈라마 군대의 진군 속도는 한층 더 빨라졌다.
대전에서 불광이 피어올라 사방으로 흩뿌려졌고, 진군하는 군대의 앞길에 있던 생명체들을 뒤덮었다.
빛에 뒤덮인 이들은 소리 없이 전부 도화(渡化, 도화하여 선한 길로 인도하다. 이곳에서는 일종의 세뇌를 가리킴)되어버렸다.
* * *
며칠 뒤.
진양은 한창 도사를 뒤쫓고 있었다.
진양은 더 이상 소문을 퍼뜨리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도사는 마치 뭐에 쓰이기라도 한 것처럼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고 있었던 것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심지어 화사의 자첩(字貼)까지도 동원하여 소문을 퍼뜨리는 데 열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도사를 쫓는 길에 서쪽에서 도망쳐온 수도사들로부터 새로운 소식을 입수하게 되었다.
혈라마의 군대가 돌연 진군 속도를 높여 동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이 지나려는 곳마다 완강한 저항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혈라마의 힘은 점점 더 강해지며 무자비하게 저항하는 자들을 짓밟으며 진격하고 있었다.
진양의 시선이 동쪽으로 향했다.
‘마침내 냉정한 진양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있는 걸까? 그리고 영제는 결국 동쪽 어딘가에 있었던 건가?’
확실하게 알 순 없었지만 일단 영제와 관련된 일은 한시름 놔도 무방할 듯했다.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보단 혈라마가 나서서 움직여주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일 듯했기 때문이다.
지금 진양은 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아있다.
각종 서적이란 서적은 전부 다 긁어모으는 것이었다.
* * *
혈라마의 진군 속도는 점점 더 빨라졌다.
그럴수록 마주하는 저항의 강도도 점점 더 강해졌다.
혈라마는 진군하며 눈앞에 보이는 이들을 인정사정없이 전부 도화시켜버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죽음 아니면 도화 둘 중 하나였다.
중간이 없었던 것이었다.
이 중 일부는 혈라마의 수하가 되길 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혈라마가 이들에게 내놓은 선택지는 죽음 아니면 도화 두 가지뿐이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죽는 것도 못 하게 사느니 차라리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죽는 쪽을 택한 것이다.
각 문파들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든지, 아니면 도망을 치든지, 그것도 싫다면 혈라마 앞에 무릎을 꿇든지.
* * *
한편, 진양은 난리통을 휩쓸고 다니며 온갖 전적이란 전적은 다 긁어보았다.
지식은 곧 힘이다.
이런 기회에 바깥에서 얻을 수 없는 수많은 전적을 손에 넣는다면 전부 미래를 위한 양분이 되어줄 것이다.
이것은 진양이 선택한 길, 곧 권력을 얻는 일이었다.
혈라마나 영제와는 사뭇 다른 길이었다.
혈라마는 자신의 유리한 점을 십분 활용하여 전 세계의 생명체들을 전부 도화시키고자 했다.
이렇게 하면 자연스럽게 일념의 바다의 모든 권력이 그의 손에 들어오게 된다.
그러나 영제는 힘을 선택했다.
압도적인 힘으로 모든 것을 짓눌러버리는 길이었다.
이는 가장 어려우면서도 제일 단순한 길이었다.
모든 성공 여부는 오직 하나, 힘에 달려있었다.
반면, 진양이 선택한 길은 이들과는 완전히 다르면서도 진양 자신에게는 상당히 어울리는 길이었다.
만약 일념의 바다에 있는 모든 것을 신의 권력으로 본다면, 권력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지식은 완전히 이곳에 녹아있는 것이다.
구상화할 수는 없지만 모든 사람에게 연관되어있는 가장 핵심적인 기초였다.
더욱 강하고 희귀한 지식을 가지는 자가 곧 더욱 많은 권력을 손에 쥐게 된다.
과거의 몽사가 그렇다.
그는 이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일부 지식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게다가 그가 쥐고 있는 지식은 다른 이들의 손에는 없는 독보적인 것들이었다.
때문에, 영제가 마지막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반드시 몽사를 죽여야만 했었다.
진양은 혈라마가 일으킨 난리 통을 이용하여 수많은 전적을 손에 넣었고 이를 통해 더욱 많은 지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단순히 고심주를 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다.
영제와 혈라마 몰래 또 다른 각도에서 세계의 권력을 탈취할 수 있을지 시도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뿌리부터 파내 모든 기초를 취하는 것이다.
지금 상황으로만 보면 가장 어려운 길일 수도 있지만, 당장 진양에겐 가장 적합한 길이기도 하다.
현재 진양은 한 거점 안에 있었다.
사방에 피와 불의 흔적이 가득했다.
이미 도망친 자도 있었고, 죽은 자도 있었고, 도화 당한 자도 있었다.
진양은 이곳 문파 장경각에 있던 모든 전적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이 외에 비석과 같이 무언가 기록되어있는 것이라면 남김없이 전부 쓸어왔다.
정 가져갈 수 없는 것들은 그 자리에서 기록으로 남겼다.
그때, 대문 밖에 있던 요괴들이 문을 부수며 안으로 들어왔다.
진양은 조용히 허공으로 몸을 숨겼다.
괜히 혈라마의 부하들과 마주해야 좋을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