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514
1514화 생각했던 것보다 큰 이득
진양이 눈을 뜨는 순간 십방 대제도 눈을 떴다.
진양은 온 세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로부터 수 다경의 시간을 훔쳐 갔다.
겉보기엔 큰 영향은 없는 듯한 모습이었다.
“사숙님, 먼저 돌아가세요.”
진양은 현재 자신이 밟고 있는 호량 조각과 연결된 다른 호량 조각의 힘을 모두 빌려왔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가볍게 십방 대제의 위압감을 밀어냈다.
덕분에 통로가 다시 열릴 수 있게 되었다.
몽의는 군말 없이 진양이 시키는 대로 곧바로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십방 대제는 막고 싶었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
찰나의 순간만으로도 진양은 몽의를 안전하게 대피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십방 대제는 자신이 막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 그만한 힘이 있었다면 진작 진양을 처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의외로 분위기는 평온했다.
팽팽한 긴장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핵심이 될 만한 정보 없이 십방 대제를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건 진양도 잘 알고 있다.
설령 당장 눈앞에 있는 대제를 죽인다고 해도 큰 의미는 없다.
기껏해야 자신이 가진 최후의 보루만 하나 더 보여주는 꼴이 될 것이다.
반대로 십방 대제 역시 마찬가지다.
진양을 죽이는 건 고사하고 그럴 기회조차도 노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다.
그동안 십방 대제는 뚫어져라 진양을 쳐다보았다.
진양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 말대로였나 보군요.
또다시 상고 전쟁과 같은 전투가 벌어진다면 결국은 승리자 없는 싸움으로 이어지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번엔 당신에게도 부활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게 되겠죠. 만약 또다시 그런 싸움이 벌어진다면 모든 세계가 함께 얽히게 될 테니까요.
이제 조금 있으면 대황의 군대가 몰려올 겁니다. 일전에 제안했던 내기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죠. 어떻습니까?”
“좋다.”
십방 대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인 듯했다.
두 사람의 내기가 어떤 식으로 구속력을 갖게 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 어떠한 힘도 두 사람을 구속할 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극히 일부에 대해서만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진양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두루마리 한 장을 꺼내 허공으로 던졌다.
두루마리가 스스로 펼쳐지며 간략하게 적혀있는 몇 가지 조항이 나타났다.
내기가 시작되면 진양과 십방 대제는 절대로 직접적으로 전투에 간섭을 할 수 없다.
승자는 모든 것을 독식하고 패자에겐 오직 죽음뿐이다.
딱 두 개의 조항뿐이었다.
“이건 도문의 누군가 찾아낸 물건입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과거 도문의 문주였던 분께서 아주 오랜 예전에 남아있는 재료로 만드신 물건이라고 하더군요.
천존과 마존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과거 두 사람이 계약을 맺을 때 썼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제는 계약 내용보다는 두루마리부터 살폈다.
그것이 어떤 재료로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살아있는 생명체가 남긴 물건은 아닌 듯했다.
두루마리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규칙과 죽음을 거스르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광폭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규칙이 가진 정갈함만이 느껴졌다.
다른 계약서와 크게 다른 점은 없어 보였다.
다만 죽음에 대한 제약이 조금 더 클 뿐이었다.
일말의 흠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공평한 계약서였다.
관찰을 마친 십방 대제는 이것을 통해 서로가 공평하게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될 건 없다.
기껏해야 계약서 한 장 따위가 그를 죽음에 이르게 만들 수는 없으니까.
진양은 아무 말 없이 먼저 계약서에 자신의 징표를 새겼다.
십방 대제 역시 군말 없이 자신의 징표를 새겼다.
두 사람의 징표가 모두 새겨지는 순간.
두루마리는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은연중에 하나의 연결고리가 추가된 것이 느껴졌다.
이 순간 십방 대제는 죽음의 부름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군말 없이 조용히 모습을 감췄다.
진양은 제자리에 선 채 무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에 십방 대제가 이런 협박 따위에 쉽게 넘어갈 거라고는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들은 바에 의하면’, ‘무엇일 수도 있다’ 등.
자주 남을 속여본 사람이라면 이러한 문장이 포함된 말은 진실 아니면 거짓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진양의 경우 후자에 속했다.
이것이 바로 진양이 사전에 준비한 것이다.
두루마리는 가죽으로 만든 게 아니다.
망자의 세계에서 얻은 나무껍질을 적당히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내용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계약이라는 건 전부 거짓이다.
사실상 망자의 세계로 향하는 편도표나 마찬가지다.
일단 서명을 했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망자의 세계로 가게 되어있다.
진양이 아무렇지 않게 징표를 새긴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망자의 세계는 이미 안방과도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경우 결코 그렇지 않다.
진양은 비록 아직 십방 대제를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지만,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 십방 대제를 죽일 수만 있다면 그가 남겨둔 부활 등의 대비책들은 전부 물거품이 되어버린다.
망자의 세계로 향하는 편도표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다.
계약서는 겉보기에는 큰 위력이나 제약이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건 단지 계약 자체가 십방 대제를 죽일 수 없다는 점에만 국한된다.
하지만 십방 대제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면 진양은 직접 망자의 세계로 가서 그를 극진하게 대접해 줄 생각이었다.
만약 이런 상황마저도 십방 대제가 모두 버텨낸다면 진양도 더 이상은 방법이 없다.
자폭을 하고 망자의 세계로 가는 수밖에.
어쨌든 십방 대제를 꺾을 수 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니 말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느껴졌지만, 또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다.
상황은 그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진양은 자신이 십방 대제를 죽일 방법을 전혀 찾지 못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십방 대제가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불리한 계약’에 자신 있게 서명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단 한 번의 성공으로 지금까지의 모든 실패를 만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문득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십방 대제의 권력을 봉인하고 이성을 완전히 소멸시킨 뒤 산 자의 세계에서 완전히 제거한다.
이어서 만약 망자의 세계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대로 완전히 소멸시켜버리면 모든 상황은 끝난다.
원래대로라면 이것이 정상적인 순서였을 것이다.
십방 대제를 성불시켜 망자의 세계로 보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를 망자의 세계로 보낼 유일한 방법은 그의 모든 대비책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리는 것뿐이다.
이 점은 진양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진양이 십방 대제가 되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또 모를까.
그러나 생각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앞서 지나야 할 과정은 전부 건너뛴 채 가장 핵심이 되는 과정을 먼저 밟게 된 것이다.
한참을 생각해봐도 십방 대제가 흔쾌히 결정을 내린 사실에 대해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감이 다소 과도했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진양을 안심시키려고 그런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아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어쩌면 이것이 엄청난 함정이라는 것 자체를 깨달을 만큼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종합하여 추측한 뒤 십방 대제의 입장이 되어보니 대략적으로 이해할 순 있었다.
앞서 벌였던 자잘한 일들이 기반이 되어준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앞서 벌였던 일들은 결코 작은 일들은 아니었지만,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쨌든 생각했던 것보다 큰 이득을 얻게 되자 진양은 기분이 좋아졌다.
당장이라도 박장대소를 하고 싶었지만, 최대한 꾹 눌러 참았다.
진양이 자리를 떠나려는 순간.
허공에 돌연 문이 하나 나타났다.
이어서 문이 열리며 목사가 걸어 나왔다.
“마침내 실물로 보게 되는군.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친구구만. 넘치는 기백은 나조차도 가늠이 안 될 정도야.”
목사가 진양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그의 기상을 보고 있으니 마치 거대한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도무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기상을 살펴보는 것쯤이야 크게 문제가 될 것도 없었지만, 첫 만남부터 상대를 꿰뚫어 본다면 그건 대놓고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때문에 목사는 그를 세세하게 꿰뚫어 보지는 않았다.
진양도 목사를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역시나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기상이 느껴졌다.
단 한 번의 손짓만으로도 수많은 도와 법을 발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는 상처를 입은 듯했다.
미세하긴 하나 약간의 허약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아직 최고봉의 힘을 모두 회복하진 못한 듯했다.
단지 기상만 살폈을 뿐인데도 진양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목도인이라는 칭호를 감당해낼 수 있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본질만 놓고 본다면 태호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과찬이십니다. 오히려 대인을 보고 있으니 상고의 찬란함이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입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참으로 영광입니다.”
진양은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십방 대제와 직접 싸워본 소감이 어떻나?”
“그가 상당히 강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제가 목숨을 걸고 덤벼들더라도 절대로 죽일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맺으며 모든 것을 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계약은 맺어졌으니 말을 한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오히려 이러한 일에 대해 자주 얘기를 해야 자신이 승리할 확률이 더 높아진다.
“죽음의 계약 하나만으로 충분하겠나?”
“구속력은 충분합니다. 하지만 반서(反噬)로 죽도록 만드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진양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목사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선 이게 최선의 결과인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