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180
180화 이제 그만 헤어집시다
일도협 가장자리.
영태성녀가 허공을 밟으며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아래로 백련이 피어났다.
이어서 그녀가 발을 떼는 순간 꽃잎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바람과 함께 소멸했고, 또다시 발을 내딛는 곳에 아름다운 백련이 피어나 그녀를 받쳐주었다.
영태성녀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고, 그녀 주위의 분위기 역시 차분했다.
일도협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녀는 멈칫 멈춰 섰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곧바로 추락했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그녀는 마치 계단을 내려가듯 천천히 일도협 심층부를 향해 걸어갔다.
살아있는 자의 냄새를 맡은 독충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땅과 하늘을 뒤덮었다.
그러나 영태성녀는 본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사방을 뒤덮은 독충 무리가 백 장 가까이 다가왔을 무렵, 한 겹의 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허공을 비추었다.
은색 빛줄기에 닿은 독충들은 저항할 틈도 없이 곧바로 먼지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은색 빛줄기는 차가운 달빛처럼 은은하게 주위를 휩쓸었다.
빛줄기가 휩쓸고 나간 자리에 있던 독충들은 단 한 마리도 예외 없이 전부 먼지가 되어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빛이 사라지고 나자 방원 십 리 내에선 더 이상 살아있는 독충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무자비하던 독충들도 겁을 먹은 탓일까?
영태성녀가 계속해서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더 이상은 독충이 나타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어 어느덧 음하에 도착한 영태성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영태성녀가 조심스럽게 음하에 두 발을 올리자 음하의 물이 흘러가며 그녀를 비경으로 안내했다.
음하엔 수많은 귀신들이 귀곡성을 내지르며 영태성녀를 향해 손을 뻗어대고 있었다.
영태성녀는 하찮다는 듯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의 눈에서 은색 빛이 번쩍였다.
순간 음하에 몰려있던 귀신들은 전부 폭발하며 소멸해 버렸다.
비경 안으로 들어선 영태성녀는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위치와 방향을 파악한 그녀는 강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허공을 가르며 나아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영태성녀는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도착했다.
곳곳의 대지가 붕괴되어 있었고 부서진 돌조각엔 화염에 그을린 흔적이 남아있었다.
거기에 기혈유충이 만들어낸 거대한 계곡까지.
진양과 화상용, 그리고 양범 세 사람이 싸우며 만들어진 흔적이었다.
지면으로 내려온 영태성녀는 화신이 죽은 곳으로 걸어갔다.
그곳에는 마른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영태성녀가 손을 뻗으며 결인을 맺자 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오며 혈흔이 그녀의 손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 갑자기 혈흔이 파괴되며 소멸했다.
평온하던 표정을 유지하던 영태성녀였으나 이 순간만큼은 놀란 듯한 모습이었다.
그녀가 다시 한번 결인을 맺으며 손을 뻗자 방원 십 리 내의 땅에 주름이 생기듯 물결치며 그녀의 손안으로 몰려들어 환영을 이루었다.
그것은 이곳에 남은 흔적과 기운을 모아 교전의 흔적을 환영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그러나 환영을 살펴보던 영태성녀는 돌연 듯 미간을 찌푸리며 환영을 손으로 쥐어 소멸시켰다.
환영 속에선 단 한 사람의 모습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보이는 건 전투의 여파로 인해 파괴된 전장의 흐릿한 환영이 전부였다.
이어서 여덟 가지나 되는 다른 공법으로 다시 시도해 보았으나 허사였다.
영태성녀의 얼굴에 돌연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이군. 이 정도로 깔끔하게 흔적을 지웠을 줄이야. 나와 화신의 연결점을 끊어 기억을 되찾지 못하게 한 것도 그렇고, 무려 여덟 개나 되는 공법을 시전했음에도 화신을 죽인 자의 성별조차 알아낼 수가 없다니. 누구지? 설마 현천성종의 그 늙은이?’
잠시 생각에 빠진 영태성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사악한 기운을 풍기는 걸로 보아 한 사람은 마도의 사람이 분명해. 나머지 한 사람은 영화를 다스리는 자, 아니, 화행(火行) 연체 공법을 익힌 사람이 분명해.’
영태성녀는 계속해서 남아있는 흔적을 살폈다.
이 정도 여파를 남길 정도라면 신해는 아닐 것이다.
기껏해야 귀원, 혹은 삼원 최고봉의 경지일 것이다.
‘누구지? 도대체 누가 한발 먼저 찾아와 이곳의 흔적을 깔끔하게 지워버린 거지? 설마 정말로 현천성종의 그 늙은이가 움직인 건가?’
영태성녀의 얼굴이 굳어지며 눈에 살기가 피어올랐다.
전투로 인한 흔적과 잔해, 그리고 기운이 남아있긴 하나 공법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이곳에서 전투를 벌인 자들 중에 누가 화신을 죽인 것인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육안으로 전장에 남은 흔적을 살펴보며 추측하는 수밖에 없었다.
관찰을 통해 한 사람은 마도, 혹은 사도(邪道) 수도사고 나머지 한 사람은 화행 연체 공법을 익힌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의 단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잠깐 사색에 잠겼던 영태성녀는 자리를 떠났다.
일도협을 빠져나온 그녀는 곧장 북쪽으로 향했다.
일도협은 동서로 뻗어있다.
평범한 실력으로는 절대 일도협을 가로지를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상대는 북쪽으로 도망쳤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물론 일도협 남쪽으로 빠져나와 횡단 산맥으로 갔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그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격전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횡단 산맥으로 들어갔을 리 없을 테니 말이다.
영태성녀가 탄 마차는 북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그렇게 백여 리 정도를 날았을 때쯤, 마차 안에서 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아래쪽 숲으로 흩뿌려졌다.
그곳에는 한 무리의 수도사들이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그중 한 사람에게 삼원 연체 수도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연태성녀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순간 얇은 은색 빛줄기가 번쩍이며 스쳐 갔다.
슥-
빛줄기에 베인 삼원 수도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두 동강이 나버렸다.
조금 더 날아가다 보니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 안에 위치한 농장 은밀한 곳에선 하나같이 사나운 표정을 짓고 있는 수도사들이 몰려있었다.
그들은 피로 물든 제단을 둘러싼 채 알 수 없는 괴이한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
그때, 한 줄기의 은색 빛이 하늘에서 내려쳤다.
빛줄기에 맞은 농장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괴이한 의식을 치르던 수도사들은 상황 파악을 할 여유조차 없이 그대로 혈무가 되어 사라져버렸다.
한편 만영상호의 분점에선 수도사가 법기를 고르고 있는 중이었는데, 방금 전까지만 해도 히죽거리며 흥정을 하던 그는 혈무가 되어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만영상호의 방어조차 은색 빛줄기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차분히 마차 내에 앉아있는 영태성녀의 주위로 무시무시한 파동이 일어났다.
이어서 강력한 힘이 몸에서 뿜어져 나왔고, 마치 그물처럼 방원 수백 리를 뒤덮었다.
그물이 지나간 곳에서 마도 혹은 사도 수도사의 기운, 귀원 혹은 삼원 최고봉의 화행 연체 공법을 익힌 자의 기운이 느껴질 경우, 곧바로 죽음의 기운이 뻗어나가 순식간에 그들의 목숨을 거두었다.
마차는 매우 빨랐기 때문에 단 세 시진 만에 일도협 북쪽으로 삼천 리나 되는 범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영태성녀는 의심이 가는 기운이 느껴질 때마다 거침없이 모두 처치해버렸다.
여섯 시진 정도가 지났다.
영태성녀가 휩쓸고 다닌 범위는 어느새 방원 오천 리 정도가 되었다.
그녀는 종파, 장소 등 어떠한 조건도 가리지 않고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이 가는 순간 곧바로 손을 썼다.
그렇게 한바탕 피바람을 일으키고 나서야 영태성녀는 다시 마차의 머리를 돌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범인을 확정 지을 수 없다면 전부 죽이는 수밖에. 놈이 아무리 길고 나는 놈이라고 해도 이 정도 시간이라면 오천 리도 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영태성녀의 얼굴은 매우 평온했다.
마음속은 일말의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천 리 정도를 움직였을 때, 허공에서 황금빛이 번쩍이며 무언가 날아왔다.
날아온 빛은 곧바로 화가 잔뜩 난 노인의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노인이 소리쳤다.
“영태성녀! 이게 무슨 짓이냐! 아무 이유 없이 나의 제자를, 그것도 산문 안에 있는 제자들을 죽이다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죽이면 죽인 거지. 그게 어쨌다는 게냐?”
영태성녀의 차가운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들려왔다.
한편 노인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으나 마차의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순간 수많은 은색 빛줄기가 뿜어져 나와 날카로운 칼날의 형상을 이루었다.
허공을 뚫고 날아간 칼날은 방원 십여 리 내에 있는 것을 전부 잘게 썰어버렸다.
노인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영기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한쪽 어깨가 완전히 사라진 처참한 꼴로 거꾸로 뒤집힌 채 십여 리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여, 영태 최고봉! 저 나이에 영태 최고봉에 올랐을 줄이야……!”
노인의 얼굴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타오르던 복수의 불꽃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멀어져가는 영태성녀의 마차를 멍하게 쳐다보았다.
그렇게 영태성녀는 일도협 북쪽 일대를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방원 오천 리 내에 있던 사도, 마도, 그리고 삼원 최고봉의 연체 수도사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이 모든 것은 남동쪽으로 도망치고 있는 진양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이러한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 * *
한편.
진양은 자리에 앉아 진지한 얼굴로 얼굴 곳곳에 기름을 묻히며 맛있게 고기를 뜯고 있는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 진지하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그만 헤어지도록 합시다.”
고양이는 ‘무슨 시답잖은 소리야?’라는 표정으로 힐끗 진양을 쳐다보곤 계속해서 고기에 집중했다.
그 모습에 진양은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올랐다.
평소 어깨에 딱 붙어 잠만 자는 녀석은 하는 것도 없이 일정 시간마다 잠에서 깨어나 식량을 축내거나 진양의 피를 빨았다.
이전에 있던 곳에서 삼장거 행세를 할 때는 피조차 빨기 귀찮았는지 종일 죽은 것처럼 잠만 잤었다.
이번에 비경에 들어갔을 땐 그 난리를 피워대도 쥐 죽은 듯 조용히 잠만 잤다.
심지어 처음부터 끝까지 고양이를 발견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영태성녀의 화신과 싸울 때 날카로운 칼날에 베였으나 녀석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렇게 간신히 살아서 비경을 빠져나오자 곧바로 잠에서 깨어나는 게 아닌가?
“양심에 손을 얹고 한 번 생각해 봐요! 필요하다면 먹을 것도 주고 잠자리도 제공해 주는데, 몇 번이나 죽을 뻔했는데 털끝만큼도 도와주지도 않다니! 이거 정말 너무한 거 아닙니까?”
진양이 씩씩대며 소리쳤다.
“나 지금 진지해요. 우리 이만 갈라섭시다! 지금 먹고 있는 그거만 다 먹으면 이젠 서로 갈 길 가는 겁니다.”
그 모습에 고양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토해냈다.
고양이가 토해낸 무언가는 곧바로 진양을 향해 날아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