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208
208화 너무 많이 먹어!
유령 해적단은 언젠간 호량을 떠날 것이었다.
물론 호량을 떠나 곧바로 대황으로 간다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분명 언젠간 대황으로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무사히 해적선 안으로 잠입해 들어간다면 공짜로 배를 얻어타는 건 물론이고 사해를 건너는 동안에 벌어지는 위험으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었다.
유령 해적단에 타고 있는 자들은 족히 세 성종에 버금가는 실력자들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적선에 잠입할지가 문제였다.
게다가 설령 해적선에 잠입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본인의 목숨을 부지할지도 문제였다.
구석에 가만히 숨어있는 건 불가능할 것이었다.
아무리 배가 크다고 해도 몇 개월이나 고수들의 눈을 피해 숨어 있는다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그건 절대 불가능했다.
하지만 유령 해적단이 나타난 이상 당분간은 바다로 나가는 배는 탈 수가 없을 것이었다.
이대로 기약 없이 기다릴 바엔 차라리 해적선을 타는 게 나았다.
‘골치 아프군.’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땅한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였다.
“멍!”
갑자기 들려온 개 짖는 소리에 진양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나귀도 놀란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풍경이 바뀌어있었다.
주위엔 해안가의 모습 대신 푸른 나무와 풀로 가득한 산이 겹겹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어딘가 상당히 익숙한 풍경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곳은 성해주와 진창주가 맞닿은 곳이었다.
어느새 두 지역의 경계선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보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서 처음 나귀와 만났었지. 그나저나 갑자기 웬 개 짖는 소리지?’
진양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딱히 특별한 점은 발견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푸른 빛이 나귀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이어서 빛은 푸른색 옷을 입은 손바닥만 한 아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아이의 머리에는 두 개의 떡잎이 걸려있었다.
나귀의 머리 위에 나타난 아이는 배시시 웃으며 진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하하! 오랜만이네! 그래도 아직은 날 알아보는구나.”
진양은 큰소리로 웃으며 손가락으로 아이를 간지럽혔다.
이어서 숲속에서 새까만 털을 가진 커다란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어딘가 달갑지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터덜터덜 걸어오고 있었다.
진양은 흑구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그렇지.”
나무 정령은 진양의 손가락에 매달려 불쌍한 표정으로 진양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진양이 아무런 반응이 없다 볼록한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잔뜩 울상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진양은 피식 웃으며 곧장 을목정기 결정을 하나 꺼내 건네주었다.
그리곤 흑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알아서 다 잘할 것처럼 떠나더니.”
흑구는 그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엎드려 있기만 할 뿐, 진양의 말에는 일체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어느덧 을목정기 결정 하나를 전부 먹어 치운 나무 정령이 다시 진양을 바라보며 불쌍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
진양은 한숨과 함께 한 번에 일곱 개의 을목정기 결정을 꺼내 나무 정령에게 건네주었다.
아무 말 없이 나무 정령과 흑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던 진양이 물었다.
“설마 그때 줬던 거 다 먹은 거야?”
흑구는 대답 대신 미간을 한층 더 강하게 찌푸렸다.
“허……”
진양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주머니 하나에 을목정기 결정을 가득 채워서 줬던 것 같은데.
‘그 정도면 나무 정령이 족히 일 년은 먹고도 남을 양이었을 텐데 그걸 벌써 다 먹어치웠단 말인가?’
진양은 조용히 나무 정령을 흑구의 머리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잘 들어. 난 이제 유령 해적단의 배를 몰래 얻어타고 호량을 떠날 생각이야. 아쉽지만 아주 위험한 여정인 만큼 두 사람을 지켜줄 만큼의 여유도 없어. 그러니 이만 서로 갈 길 가자고. 자, 그럼 이만! 나귀야, 어서 가자!”
진양이 나귀를 툭툭 건드리자 나귀는 곧바로 진양의 말대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쌩-!
눈 깜짝할 사이에 진양은 나귀를 타고 사라져버렸다.
한편 배불리 먹고 마신 나무 정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흑구의 머리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그러나 흑구는 입을 살짝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진양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았다.
한동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나자 흑구의 얼굴은 아까보다 한 층 더 찌푸려지기 시작했다.
진양은 혹여나 두 사람이 위험할까 봐 이곳에 두고 간 것이 아니다.
나무 정령의 엄청난 식성에 놀라 도망친 것이 분명했다.
“쿨쿨……”
나무 정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세상 모르게 잠들어버렸다.
그러나 흑구는 어깨가 한층 더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그는 지금까지 나무 정령이 배가 고파 깊은 잠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최대한 아껴서 을목정기 결정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진양이 주었던 한 주머니나 되는 을목정기결정은 금방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물론 배가 고파 깊은 잠에 빠지도록 놔두려 해도 마땅한 곳이 없어서 난처한 건 매한가지였긴 했지만.
이번에 진양과 만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흑구가 자발적으로 진양을 찾아온 것이었다. 내키진 않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엔 진양이 먼저 떠나버렸다. 뿐만 아니라 그는 곧 호량을 뜰 예정이라고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흑구는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진양을 놓치게 되면 나무 정령은 어떻게 키운단 말인가.
무엇보다 진양과 같이 대량의 을목정기결정을 가진 호구를 어디 가서 물 수 있겠는가.
이대로 도망치게 놔둘 순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한 흑구는 냄새를 맡으며 진양이 사라진 방향을 따라 황급히 추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나귀를 타고 도망친 진양은 어느덧 숲을 가로질러 한 시진이나 달려왔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고 나서야 잠시 쉬어가기 위해 멈춰 섰다.
“유덕, 뭘 그렇게 허겁지겁 도망치는 거야? 게다가 방금 그 나무 정령, 잡아두기만 하면 너한텐 엄청난 이득이잖아. 원할 때마다 선초(仙草)도 얻을 수 있을 텐데……”
닭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진양을 쳐다보았다.
“그건 나도 알아.”
그러나 진양의 얼굴에선 일말의 아쉬움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걸 알면서 도망친 거야? 게다가 그 나무 정령, 널 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던데.”
진양은 대답 대신 피식- 하고 웃어버렸다.
“뭐야 그 웃음의 의미는? 넌 지금 엄청난 행운을 놓친 거라고!”
닭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버럭 소리쳤다.
“그건 나무 정령이 얼마나 먹어 치우는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야.”
“그게 뭐가 중요해? 먹을 거야 그냥 주면 되지.”
“…진짜 닭대가리가 따로 없네.”
“이 자식! 진유덕, 한 번만 더 이 몸을 모욕했다간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진양은 눈을 가늘게 뜨며 씩씩거리는 닭을 쳐다보았다.
그러다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작년에 마지막으로 흑구와 헤어질 때, 주머니 한가득 을목정기 결정을 쥐어서 보냈거든. 무려 한 주머니나 말이야! 근데 그걸 전부 다 먹어 치우고는 이제 와서 또 날 찾아오다니. 난 저런 말도 안 되는 먹성은 감당할 수 없다고.”
“아……”
닭은 순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한마디 했다.
“비렁뱅이 자식.”
“맞아. 나 돈 없어.”
진양은 개의치 않다는 듯 말했다.
“사실 당장 들고 있는 자원은 매우 풍족해. 연달아 여러 사람들을 털고 다니다 보니 팔찌와 반지에 있는 주머니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자원이 모이더라고. 하지만 을목정기 결정은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전부야. 게다가 이건 보리수나무 요괴에게 얻은 아주 귀한 보물이라고. 원한다고 해서 마음껏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이건 어디에 팔아도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전부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귀한 보물이라고.
무엇보다 지금 가지고 있는 양이라면 앞으로 나무 정령을 겨우 몇 년밖에 먹이지 못하고 전부 동이 나고 말 거야. 그럼 그 이후엔 어떻게 되겠어?
게다가 나무 정령은 아직 초생유체(初生幼體) 상태라고. 마냥 자원을 쏟아붓는다고 해서 선초를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건 전설에 불과하니까. 재수 없으면 내가 죽을 때까지 자원을 쏟아붓는다고 해도 선초는 구경조차 못 할걸.
그리고 우린 지금 해적선을 몰래 타고 대황으로 가야 한다고. 여기에 나무 정령까지 데리고 간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의 인연은 이만 여기까지인 거야. 무엇보다 녀석도 호량에서 천천히 성장하는 게 나와 함께 가는 것보다 안전할 거라고.”
진양이 인상을 팍 쓰며 닭을 쳐다보았다.
“이제 알겠냐? 이 닭대가리야.”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진양의 말에 닭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진양의 말 중에는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진양의 말대로 전설은 전설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누군가 나무 정령에게 선초를 얻었다는 역사적인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없지 않았던가?
게다가 나무 정령이 선초를 재배할 수 있다는 전설 역시 출처가 불분명했다.
어쩌면 단순한 거짓 소문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무 정령이 영약을 지배할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이건 무려 정확한 기록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진양의 상황과 도문의 상황을 고려해 보면 나무 정령을 돌볼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종문의 주둔지조차 몰래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나무 정령에게 영약을 재배할 수 있는 안정적인 공간을 제공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영약으로 잔뜩 깔린 밭에 누워 실컷 원하는 만큼 퍼먹을 수 있을 줄 알았건만.
닭의 꿈은 완전히 깨져버리고 말았다.
“흥, 어쨌든 네가 빈털터리에 약골이라 감당할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잖아.”
진양은 대꾸 대신 피식 웃으며 조용히 넘겨버렸다.
현재 진양의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해적선에 몰래 잠입할 수 있을지, 그리고 무사히 대황까지 도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사실 배에 타고 난 다음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됐다.
지금은 배에 몰래 잠입하는 방법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그렇게 한참 생각에 잠겨있을 때, 갑자기 숲속에서 흑구가 숨을 헐떡이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흑구의 머리에서 튀어 오른 나무 정령이 진양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진양은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어차피 나랑 가기 싫어했었잖아. 나도 너랑 같이 다니기 싫다고. 그러니까 서로 갈 길 가자니깐. 아, 알겠다. 이게 필요한 거구나.”
진양은 곧바로 을목정기 결정이 가득 든 주머니를 하나 꺼내 툭- 하고 흑구의 발 앞으로 던졌다.
그러나 흑구는 혀를 내민 채 수상한 미소를 짓기만 할 뿐, 주머니를 챙기지 않았다.
진양의 머리카락에 매달려 놀고 있는 나무 정령의 모습을 바라보는 흑구의 얼굴에 더욱 진한 미소가 퍼지기 시작했다.
“야! 이거 너무한 거 아니야?”
순간 흑구의 속셈을 알아차린 진양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망했다! 제대로 호구 잡히게 생겼어.’
녀석은 진양을 단단히 물고 놓아주지 않을 생각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