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ree that lives for many years RAW novel - Chapter 10
03. 하얀 나무 위의 불새
마당비 끝이 다 닳아빠졌나 보다. 영 눈을 치우는 게 시원치 않으니. 만선을 노리던 어부도 옛말이었다. 눈을 치우다가 잠시 앉아 쉬고, 치우다가 딴청을 피우고. 요새는 눈이 침침하기까지 하질 무언가. 뻐근한 허리를 돌리며 텃밭 위에 쌓인 눈을 바라만 보는데. 옆집 바둑이 짖는 소리에 고개를 쭈욱 내미니, 오라는 딸은 오지 않고 어려운 인사가 발걸음을 했다.
“아이, 어쩐 일로 여기까지.”
“이제 내달이면 겨울이 끝나는데. 다 녹을 눈을 뭣 하러 치우십니까.”
딸의 스승인 이영임이었다. 꾀돌이 같은 첫인상 때문인지, 그의 호화로운 옷차림 때문인지. 매번 나는 대하기가 껄끄러운 사람이었다. 딸아이의 스승은 난처한 눈치를 모르는 척, 넉살 좋게 웃으며 인사했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아이, 그게. 저 딸아이가 오면 같이 먹으려고…….”
“자경이는 늘 늦게 들어오지 않습니까? 그.”
딸아이의 스승은 무엇을 말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뒷간에서 그냥 나온 듯 찜찜하게시리. 안 그래도 저녁 시간을 훌쩍 넘긴 딸이 걱정이었다. 나는 더 떠벌리기를 기다렸지만 저쪽은 세월아 네월아 뜸을 들였다.
“음…… 여하튼. 자경이에게 좋은 소식이 당도해서 이리 찾아왔습니다.”
“아이, 그럼. 어르신께서 자경이를 찾지 않으시고.”
“도통 제가 자경이와 단둘이 만날 기회를 주지 않아서요.”
“예? 아니, 우리 자경이가 말씀입니까?”
딸아이의 스승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내게 서신 하나가 건네졌다. 나는 글을 모르는지라 받아도 알아먹지 못한다. 내가 멋쩍은 시선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인자하게 구제해줬다.
“자경이가 전에 큰 공을 세웠지 않습니까.”
“아이, 뭐 그렇다고는 들었는데…….”
“하여 무녀청에서 자경이를 받아들이고 싶다더군요. 그것도 대무녀(샛무녀 서른 명을 밑에 둘 수 있는 자)로 말입니다.”
이럴 때는 무식이 한이었다. 좋으니 좋은 거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좋은지 알 수가 없으니 크게 기뻐할 수도, 자경이에게 장하다고 해 줄 수도 없었다. 이럴 때면 한없이 개미 마냥 작아지고 싶었다.
“어르신께서 그리 말하시면 좋은 것이겠지요.”
“예. 나라에 네 명밖에 없는 지위입니다. 것도 자경이처럼 어린 나이는…….”
자경이의 스승은 실없는 사람이었다. 말을 하다가 말고 빈 골목길을 멀뚱멀뚱 본다. 나는 서신을 받아든 채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 어르신은 혀를 차고서는 다시 내게 돌아왔다.
“저 아버지께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예? 무슨…….”
“이거. 자경이한테 꼭 전해주십쇼. 반드시 둘이 있을 때만.”
또 다른 서신이었다. 간단한 안부를 적은 서신도 중간에서 몽땅 훔쳐 가곤 하니, 이리 은밀하게 오는 수밖에 없다고 중얼중얼. 나는 알 수 없으나 저들끼리 무언가 있는가 보다 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어르신에게 마주 굽신거리며 배웅하고 나니 콕콕 쑤셨던 어깨가 더 쑤셔오는데. 아랫목에 등이나 지지면서 한숨 자두어야겠다고 하자마자, 이게 웬걸, 귀신이 곡할 노릇이지. 우리 자경이가 때맞추어 대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
“아이고, 자경아.”
내가 대문 앞에 있자 자경이는 놀란 눈치였다. 나는 자경이에게 스승의 방문을 전하고, 자경이는 태연한 얼굴로 그러냐며 물었다. 그리고 어르신에게 받아둔 서신을 건네었다. 어르신이 은밀히 전해달라던 것도.
“네가, 그 뭣이야, 그 태무녀가 된다고 하던데…….”
“대무녀.”
서신을 읽으면서 자경이가 대답했다. 스승의 은밀한 뭐시기는 아직 뜯지 않은 채였다. 나는 자경이에게 어떤 식으로 축하를 건넬까 싶었는데. 정작 공에 대한 치하를 받은 자경이의 얼굴이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별로 좋은 일은 아닌 겐가.
“별 좋은 건 아니야?”
“음.”
나는 대청에 올라가면서 힐끔힐끔 딸의 얼굴을 보았다. 딸아이는 싱긋 웃더니 화롯불에 그 귀한 서신을 던져버렸다. 저래도 되는 것인가. 나는 경악스러운데 자경이는 싱겁게 답했다.
“무녀는 처녀가 아님 안 된다고 해서.”
“아이, 너 처녀 아녀.”
시집도 안 간 애가 무슨. 한데 자경이의 뺨이 물오른 복숭아처럼 불그스름했다. 아무리 눈치가 물고기와 동급이라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가 자경이 아비였다. 역시 먼젓번 가락지가 보통 가락지는 아니었는데. 워낙 칠색 팔색을 하니 물을 수도 없었고. 아이고, 이보시오. 우리 자경이에게도 쨍쨍한 봄날이 오는구나.
“어떤 사내여? 아야, 말 좀 혀.”
마음 같아서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추고 싶었다. 오늘은 기필코 떡이고 고기고 저 입에 물려서 대답을 얻어내겠다 싶었는데. 뒤에서 바람이 불어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아차차. 문을 안 닫았지 싶어 뒤돌아선 그때였다.
우리 집 마당인가 저 건너편인가. 눈이 침침한 것인지, 벌써 노망이 났는지. 눈의 종착지처럼 하얀 나무가 보였다. 그 고매함에 넋을 뺏겨 서 있었더니, 뒤에서 우리 자경이가 큰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허실하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한겨울에 이파리가 싱싱한, 하얀 나무라니.
“자경아, 아야!”
더 노망이 들기 전에, 우리 자경이 짝이 누구인지나 알아내는 게 뭣보다 중요했다. 한데 자경이는 아무리 꼬치꼬치 캐물어도 웃기만 할 뿐, 나중에, 나중에, 하며 나를 지나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시무룩한 얼굴로 따라다니자, 기어코 단서 하나를 흘려주기는 하였다.
“아버지.”
“그래.”
“말해주긴 할게.”
“언제, 으이? 모레? 글피?”
“미안하고.”
“으이?”
갑작스러운 사과였다. 딸아이의 미소가 처량하게 걸려있다가, 제 손에 끼인 가락지를 보고 흩어졌다. 그리고 말없이 걸어가 부엌으로 들어간다.
아무래도 가락지를 보아하니 있기는 있는 모양인데. 아직 말하기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인내를 사골 끓이듯 끓이기로 했다. 아무렴 우리 자경이 눈이 하늘 끝에 닿았는데, 오죽 좋은 사내로 골라두었으려고.
가락지를 소중히 쓰다듬는 얼굴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자경이가 보통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것을. 아직 때가 되지 않아 보여주지 않았지만, 찾아온다면 여타 장인들과 다르게 대해 줄 작정이었다. 사윗감이라고 술을 먹여 골리는 것들과는 다르게.
뭣보담 자경이가 좋다고 한 사람이었다. 그게 제일로 중했다. 사지만 멀쩡하게 달려있으면, 아무렴. 제 친자처럼 궁둥이 두들겨 줄 자신이 있었다.
자경이만 다복하면, 일생 그 미소를 지킬 놈이라면 말이다.
[여러 해를 사는 나무여 외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