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lease stay away from my family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말끝을 길게 끌던 엘프는 결국 뒷말을 잇지 않았다.
어깨를 살짝 으쓱하고서 옷매무새를 정돈하였을 뿐.
식사를 마친 후, 각자가 서로의 일정을 소화하러 흩어졌다.
파베 또한 산트리카로 이동해야 했다. 위나델, 라요테와 샐리온에게 인사한 파베는 세르비투스와 함께 산트리카로 향했다.
“오셨습니까, 대마법사님!”
기다리고 있던 산트리카의 촌장이 반색하며 둘을 맞이했다.
그들은 강을 보러 나갔다.
“여기 강가에 녹조 낀 게 보이시지요? 이쪽엔 곰팡이까지 잔뜩 피었습니다.”
“흐음…….”
“물이 이래 놓으니 물고기가 잘 잡히질 않습니다. 그물에도 녹조가 잔뜩 들러붙고, 몇몇 어부들은 물을 잘못 마셨다가 병까지 났어요.”
그리 말하며 어부들을 흉내 내는 촌장의 얼굴은 실감 나게 일그러져 있었다.
파베는 이끼가 낀 것 같은 수면을 눈으로 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많이 골치 아파 보이는구나.”
“어떻게, 해결이 될까요?”
“아마 가능할 것 같군요.”
대답은 의외로 세르비투스의 입에서 나왔다.
무감한 홍옥빛 눈으로 너른 강을 훑은 엘프가 이었다.
“이 정도 수준이면 마법으로 손을 써 볼 만합니다. 약간의 지원만 받는다면 말입니다.”
“오오! 어떤 지원이 필요하십니까?”
“배를 한 척 준비해 주십시오. 그리고 정화가 진행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이 강 근처에 얼쩡거리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요.”
“애당초 녹조가 낀 후론 고기도 잘 잡히지 않는 데다 보기에도 흉물스러워서 근처에 오는 주민들이 없습니다! 곧 준비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촌장이 신을 내며 날듯이 뛰어갔다.
세르비투스가 말하는 동안 묵묵히 침묵하던 파베가 입을 열었다.
“그런 조건은 왜 건 거냐?”
이 정도 녹조라면 파베의 언령으로 순식간에 걷어낼 수 있었다.
시간도, 배도, 사람들의 접근 차단도 필요하지 않았다. 다만 평소 사람 앞에 나서기를 썩 즐기지 않는 제자가 먼저 입을 열기에,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묵인하였을 뿐.
세르비투스가 파베를 내려다보며 입술을 열었다.
“나도 보답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응?”
“파베의 일에 힘을 보탠 것은 왈라이카만이 아닙니다.”
세르비투스가 손을 들었다. 파베의 뺨을 감싸고서 나직이 일렀다.
“게다가 이곳의 일은 파베가 책임져야 할 문제도 아니었죠. 도우러 따라온 나도 가벼운 보상 정도는 받을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엘프의 고운 엄지가 파베의 입술 가장자리를 스치듯 훑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에 애욕이 들끓었다. 파베는 평소보다 훨씬 노골적인 제자의 시선에 조금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그래서, 뭘 하고 싶다는 거냐?”
“일단은 같이 배를 타는 것부터.”
묘하게 관능적인 어조로 이른 세르비투스가 뺨에서 손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촌장이 배를 끌고 돌아왔다.
“여기, 말씀하신 배 가지고 왔습니다!”
촌장은 노를 저을 사람이 필요하지 않겠느냐 걱정스럽게 말했으나, 세르비투스는 마법을 쓰면 된다며 칼같이 거절했다.
먼저 배에 올라 뒤이어 타는 파베의 승선을 도운 엘프가 마법을 썼다.
배가 사공도 없이 녹조를 헤치며 수면에 미끄러졌다.
강가가 어렴풋이 보일 만큼 멀리 이동하였을 때, 파베가 무슨 말을 하려 입을 열었다.
그보다 한 박자 빨리 입을 연 세르비투스 때문에 하려던 말을 꺼내지는 못했지만.
“같이 배를 타는 것도 오랜만이로군요.”
푸른 수면을 응시하던 시선이 파베에게로 옮겨 왔다.
그녀도 자연스럽게 회상했다.
“그래. 대륙 여행이 끝난 후로는 함께 배를 탈 일이 거의 없었지.”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 배를 탔던 건 토푸스를 떠날 때였다.
세르비투스가 화산 엘프들이 살던 섬을 등지고 고향을 떠났을 때.
그때 작은 배에 의지하여 바다를 항해하며, 그들은 여러 추억을 쌓았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반짝이던 순간들이었는데.
“배 위에서 보는 밤하늘이 참 예뻤었지.”
“맞습니다.”
“왈리가 낚시를 한답시고 까불다가 결국 실패하고 마법으로 고기를 건져 올렸던 것도 생각나는구나. 그때-”
“그 얘기는 됐습니다, 파베.”
파베가 추억을 꺼내려던 순간, 세르비투스의 손가락이 파베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엘프는 동그래진 황금안을 바라보며 나직이 이었다.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은. 파베는 늘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이렇게 둘만 있을 시간은 좀처럼 없지 않습니까?”
세르비투스의 손이 파베의 목 뒤로 미끄러졌다.
풍성한 머리채를 쥐어 어깨 앞으로 모아 넘겨주는 손길은 나긋하면서도 은근했다.
“왈라이카는 이미 상을 받았겠지요?”
“……세르, 그건-”
“반박할 것 없습니다. 파베는 그저 왈라이카에게 그러했듯 내 행동도 묵인해 주면 됩니다.”
세르비투스가 모아 당긴 머리채에 입을 맞추었다.
낮아진 높이에서 파베의 눈을 올려다보며 이었다.
“당신은 공평한 스승이니까요.”
“…….”
맨목덜미에 닿은 손끝이 미묘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파베는 그를 꾸짖을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관자놀이를 누르고, 이마까지 닿았다.
어느새 배 주변엔 녹조가 걷혀 있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강 위에서, 세르비투스는 파베를 안은 채 이마에 길게 키스했다.
“내 욕망은 이 정도가 아닙니다.”
“안다.”
“하지만 오늘도 이 이상은 허락하지 않겠죠.”
“……내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파베가 한숨을 섞어 푸념하자, 관자놀이에 입술을 묻고 있던 세르비투스가 간질간질한 숨을 흘리며 말했다.
“파베가 아니었을 리가 없습니다.”
“…….”
“파베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피부를 머금어 누르는 입술에 진득한 욕망이 묻어났다.
파베는 제자가 스스로 물러서기를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이제 녹조가 많이 걷혔군요.”
“그래.”
“나머지 구역도 정화하고 돌아가죠.”
“오냐.”
그들은 한 시간 정도 배를 더 타면서 녹조를 완전히 걷어내고 산트리카로 돌아왔다.
촌장과 마을 주민들은 깨끗해진 강을 확인하고서 반색했다.
“소문이 과장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축소된 것이었군요! 역시 대마법사님이십니다. 그 지독하던 녹조를 고작 두 시간 만에 이리 깨끗하게 없애 주시다니!”
“당장 낀 녹조는 다 제거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은 아니다. 혹시 문제가 다시 발생하면 또 도움을 요청하도록 해.”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의로 준비했다는 사례금을 마다하고, 특산물만 조금 챙겨서 촌장 집을 나섰다.
이제 해가 지는 시각이었다. 맑아진 강 수면으로 낙조가 붉게 아롱졌다.
“장관이로구나.”
파베가 노을이 내려앉은 강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익숙하게 파베의 머리칼을 그러쥔 세르비투스가 낮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한 명은 강을, 다른 한 명은 사람을 감상하다 쿠프룸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기 위해 상에 앉아 있던 가솔들이 정답게 인사했다.
“와, 파베 님 오셨어여?”
“오늘도 고생하셨습니다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하는 일상이 새삼 소중했다.
파베는 빙그레 웃으며 그들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그래, 다녀왔단다. 너희도 고생했다.”
식사를 마친 후. 파베는 위나델과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파베 곁에 앉아 그날 있었던 일을 새처럼 지저귀던 아이가 불쑥 말투를 바꾸었다.
“그런데, 엄마.”
“응. 말하렴, 아가.”
“얼마 전부터 여기 복도에 가주 초상화를 걸자는 이야기가 나왔는데요…….”
이름 있는 가문들은 대체로 역대 가주들의 초상화를 그려 가문의 역사로 남기곤 했다.
이전 카텐디움의 크로슈에서도 가주 부처의 초상화를 전시해 놓았었다.
파베는 아르카스토의 초상화 가발 부분을 불러 지져 놓았던 일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이전 크로슈의 가주들도 다시 걸어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는 거니?”
카텐디움에서 수거한 초상화는 왈라이카의 창고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꺼내 다시 걸 수 있었다.
“아뇨. 그건 어떻게 할지 이미 논의가 끝났어요. 공간을 분리해서 이전 초상화들과 이후 초상화들을 따로 거는 것으로요.”
“훌륭한 선택이구나. 그래, 그러면 어느 쪽이든 별문제가 없겠어.”
파베가 칭찬하며 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조금 긴장한 얼굴로 엄마의 인자한 얼굴을 올려다보던 위나델이 숨을 꿀꺽 삼키고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엄마 의견이 필요한 문제가 있거든요.”
“응? 어떤 문제?”
“엄마 초상화를 그려서 맨 앞에 걸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파베 크로슈는 가문에 성을 물려준 주인이었으나 단 한 번도 크로슈의 가주인 적이 없었다.
그 때문인지 카텐디움의 가주 초상화에도 파베의 얼굴은 빠져 있었다.
엄마의 대답을 기다리는 아이의 얼굴은 긴장이 어리다 못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절로 웃음이 났다. 파베가 기꺼이 대답했다.
“물론이란다, 아가.”
“와, 정말요?”
“그럼. 우리 딸 옆에 초상화가 걸릴 수 있다니, 더없는 영광이로구나.”
다음 날, 두 모녀는 그란트 화방을 찾았다.
화가는 인생 최고의 열정을 발휘하여 파베의 초상화를 그려 주었다.
두 모녀가 정다이 함께 앉아 있는 그림도 같이.
파베는 예술의 신이 그린 듯 경이롭게 완성된 제 초상화보다 딸과 나란히 앉아 있는 푸근한 그림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마주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이, 지금 이 순간엔 상대를 끌어안을 수 있는 서로가 되고.
예전 그란트가 그려 주었던 그림이 생각났다.
같은 얼굴을 한 두 소녀가 각자 빛과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림.
지금 둘은 함께 빛 속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서.
“엄마.”
“응, 아가.”
“고마워요.”
방에 건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위나델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짧은 말이었으나 그 말에 담긴 깊은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파베는 빙그레 웃으며 그 말에 화답했다.
“나도 고맙단다, 세상에서 가장 예쁜 내 딸.”
두 모녀가 다정하게 포옹하며 체온을 나누는 가운데, 위나델의 주머니에 들어 있던 샐리온이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이어 그림을 구경하러 온 왈라이카와 세르비투스도 모녀 곁에 섰다.
“오, 그림 잘 빠졌는데? 그란트 그놈이 그림 실력 하나는 좋다니까.”
“뭐, 파베와 위나델라를 잘 표현하기는 했군요.”
“조만간 그림 하나 더 의뢰해야겠네. 나도 같이 있는 걸로.”
“어딜 당신만 끼워 넣으려고 합니까? 나도 있습니다.”
[흐음, 특별히 날 그리는 것도 허락해 주겠어.]다른 세 명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들으며, 모녀는 장난스레 시선을 맞추고서 키득키득 웃었다.
아마 며칠 후면 벽에 새로운 그림이 걸리게 될 모양이었다.
이곳에 모인 가족들이 전부 담긴 커다랗고 정다운 가족화가.
그간 많은 시련과 고난에 시달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함께 이겨 내어 지금의 우리가 있고.
함께했기에 힘들어도 찬란했던 기억을 곱씹으며, 위나델은 새로이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앞으로도 어떤 위기가 찾아오든 끝내 행복해질 미래를 그리면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