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323
323화 농담이었습니다
석탑 앞에 선 혈월사시는 이곳저곳이 부서진 다보천륜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강렬한 의지로 불타오르고 있었다.
잠시 후, 다보천륜이 가까워지자 석탑 꼭대기에서 마기가 흘러나왔다.
마기는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풍기며 주위를 휩쓸기 시작했다. 마도의 위압과 함께 깊게 잠들었던 이성이 천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혈월사시는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순간, 혈월사시의 머리가 쭈뼛 섰다. 새까만 그의 눈에 두 개의 붉은 보름달이 비추기 시작했다.
강한 바람이 불어오며 먼지가 일어났으나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마치 이 세상 전체가 호박 속에 갇혀버린 벌레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다보천륜의 능침 안에서 자소도군의 손이 뻗어졌다.
모여든 힘은 손바닥의 형상을 이루며 다보천륜에서 튀어나와 석탑 꼭대기로 날아갔다.
손바닥은 빠른 속도로 날아가며 멈춰버린 세상을 가로질렀다.
손바닥이 석탑 쪽으로 절반 정도 날아갔을 즈음 혈월사시가 움직였다.
원래 있던 자리에서 모습을 감춘 혈월사시는 손바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온몸의 힘을 끌어모아 그것을 막아내려 했다.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닿는 순간, 그의 미간에 새겨진 혈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콰과광-!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가볍게 바람이 불어오며 피어올랐던 흙먼지를 가라앉히기 시작했다.
손바닥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손바닥에 서려 있던 힘은 폭발과 동시에 자색 빛을 뿜어내며 하늘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완전히 소멸되어버렸다.
눈 부신 빛이 사라지고 나자 하늘 위로 수십 리 넓이의 구멍이 생겼다.
거미줄과 같은 검은 균열이 구멍 위로 수백 리는 뻗어져 있었다.
하늘이 부서졌다.
공간에 균열은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했다.
대지에는 길게 뻗어진 산맥을 따라 하늘에 만들어진 것과 같은 균열이 수십 리 이어지고 있었다.
산맥 전체로 이어진 균열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반듯하게 갈라진 균열 표면으로 용암 비슷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허공에는 머리만 남은 혈월사시가 둥둥 떠 있었다.
그는 완전히 해탈한 얼굴이었고, 이마에 새겨졌던 혈인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그는 멀리 다보천륜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대인과 겨를 수 있는 절세의 강자답군. 감히 나 따위는 막을 수 없는 건가…….”
이 말을 마지막으로 혈월사시의 머리는 먼지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져버렸다.
석탑 꼭대기에 서 있던 자소도군은 평온한 얼굴로 혈월사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끝이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알고도 끝까지 싸우다니. 참으로 충직한 자로구나. 장해, 내가 왔다. 네가 믿지 못하던 녀석까지 처리해 주었는데. 언제까지 기다릴 셈이지?”
석탑 꼭대기에서 피어오른 마기는 사기와 얽히며 짙은 먹구름을 만들어냈다.
검은빛이 솟구치며 먹구름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맹렬한 포효성과 함께 피를 뚝뚝 흘리고 있는 마룡이 모습을 드러냈다.
놈의 몸은 쇠사슬로 칭칭 감겨있었다.
그 뒤로 백골로 만들어진 왕좌가 마룡의 끝에 매달려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엔 준수한 외모의 한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는 편안하게 눈을 감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의 옷은 잡티 하나 없이 새하얀 옷이었고,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머리가 바람에 따라 조금씩 흔들렸다.
고생 한 번 해 보지 못한 귀족 집안의 자제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순한 겉모습과는 달리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만약 이러한 위압감마저 뿜어내지 않고 있었더라면 마도의 강자다운 패기조차 느껴지지 않는 그를 장해도군이라고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난 또 겁이라도 집어먹은 줄 알았지.”
“자소, 오랜만이군. 우리 모두 더 이상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나의 안면(安眠)을 방해하러 온 겐가? 서로의 은원은 이제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나의 목숨으로 갚은 걸로 기억하는데. 어찌하여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단 말인가?”
어느새 눈을 뜬 장해도군이 자소도군을 바라보며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분명 자소비경을 빼앗은 건 장해도군이었으나, 그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과연 소인배는 다르구나!”
자소도군이 잔뜩 인상을 쓰며 일갈했다.
“나의 선천홍몽자기를 지니고 있던 자가 이곳에서 죽었다. 자네, 설마 내가 모를 거라 생각하는 겐가? 이런 일을 벌일 자가 자네 말고 또 누가 있단 말인가!”
“뭐라고?”
순간 장해도군의 눈으로 의아함이 스쳐 지나갔다.
“왜 그러지? 갑자기 감당되지 않는다고 느껴지기라도 하는 것이냐?”
장해도군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내가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장해도군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여유롭게 보좌에 앉아있었고, 자소도군은 그런 그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어차피 모두 죽은 마당에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완전히 배 째라는 식이었다.
“장해. 우리의 은원은 오늘 이 자리에서 풀도록 하지. 자네가 나의 자소도경을 노리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았을 걸세.”
“말이 많군.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나의 마지막 남은 생기조차 소멸시키려고 해놓고선 이제 와서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니. 장해비전을 갖고 싶다고 했었지? 좋다. 할 수 있으면 어디 한 번 가져가 보거라. 세 권의 책은 모두 석탑 안에 있다. 그래. 난 네 자소도경이 필요하다. 허나 내가 언제 이 사실을 부정한 적이 있던가? 마치 치졸하게 군자의 행세를 하는 누군가와는 다르다 이 말이지!”
“소인배 자식!”
“그래서 어쩌라는 거지? 어쨌든 위군자에 비하면 낫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들까지 버린 놈이 할 말은 많은가 보구나!”
“그게 자식끼리 싸움을 붙인 네놈이 할 말이라고 생각하느냐?”
“못 할 건 또 뭐 있겠나? 약하다면 한시라도 빨리 죽어야지. 살아남는 건 강한 사람 한 사람이면 족해. 하지만 난 당당하다. 이것이 나의 자식 교육 방식이니까. 허나 자네는 어떠한가? 눈앞에서 죽어가던 아들을 저승에서 마주한다면 고개나 들 수 있겠느냐?”
“보옥이는 날 이해할 거다. 이 모든 희생은 오직…….”
“퉤! 자소, 여전하구나. 모든 사람들을 속인 것으로도 모자라 자기 자신까지 속이다니. 참으로 대단해! 헛소리는 여기까지다. 이렇게 된 이상 우리 두 사람 모두 여기서 완전한 죽음을 맞는 거다. 어차피 죽은 놈들끼리 더 이상의 입씨름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잔뜩 날이 선 대화는 갑작스럽게 끝이 나버렸고, 두 사람은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살기가 어찌나 강했는지 주위는 순식간에 고요해졌고, 하늘은 어두워졌다.
* * *
같은 시각.
진양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의 공간은 심하게 구겨져 있었고, 마치 누더기처럼 찢어져 있었다.
그 사이로 바깥의 풍경이 보였다.
그때, 소녀가 갑자기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이어서 한 걸음 내딛는가 싶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붉은 그림자만 남긴 채 갈라진 틈으로 몸을 던지며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갈라졌던 틈은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진양은 자신의 어깨와 등을 만져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이대로 소녀가 떠나버리다니!
‘안 돼! 가면 안 된다고!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남았는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었다.
방금 전 갈라진 틈을 통해 바깥의 풍경이 아주 살짝 보였었다.
한쪽엔 자소도군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 마주하는 사람은 처음 보는 얼굴이긴 했으나 아마도 장해도군일 것이다.
‘그 말은 장해도군의 이성이 다시 깨어났다는 거잖아? 그럼 소녀는 설마 복수를 하러 간 건가?’
“진 형, 축하하오. 마침내 완전히 벗어났군요.”
소마불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명 축하한다고 하고 있긴 했으나, 왠지 진심으로 축하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확실히 좋아할 만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축하는 개뿔. 장해도군만 처리하고 나면 어차피 다시 돌아올 텐데…….”
진양은 기뻐하긴커녕 오히려 걱정거리가 하나 더 늘어난 기분이었다.
“좋은 기회도 왔겠다. 이제 절 죽일 셈인가요?”
“역시 혜안이 있으십니다.”
그는 감탄과 함께 합장했다.
얼굴에 가득하던 분노는 모두 사라지고 없었고, 어느새 평소와 같은 자비로운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남길 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지요. 제가 진 형의 사람들께 대신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허! 이봐요, 대머리씨. 우리 분명 방금 전까지만 해도 같이 힘을 합친 사이 아니었나요? 곧바로 이렇게 나오기 있어요?”
“물론 함께 힘을 합쳤던 순간은 잊지 않을 겁니다. 매년 기일마다 진 형의 성불을 위해 경전을 읽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진지한 소마불의 모습에 진양은 기가 찼다.
당신을 죽이는 건 고통에서 해탈시켜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
이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니까.
‘개소리도 이런 개소리가 따로 없군.’
전혀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뭐,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겠습니다만. 당신, 과연 절 죽이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양이 씨익 웃으며 손가락을 미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장검의 허상이 손에 나타났다.
“광폭!”
광폭 공법이 발동하자 진양의 눈빛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이어서 몸 주위로 진원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난폭한 기운이었다.
“일한재인무행!”
짧은 외침과 함께 검이 휘둘러졌고, 검 끝에서 일어난 파동이 소마불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광폭하게 날뛰는 기운에 한의(恨意)가 더해지며 기름과도 같은 끈적한 검은 기운이 연기처럼 진양의 몸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마불은 굳은 표정으로 곧바로 응수했다.
“자비로운 마불이여!”
험상궂은 얼굴을 한 새까만 부처의 허상이 그의 몸 뒤로 나타났다.
부처는 손을 뻗어 파동의 물결을 막아내려 했다.
“마, 마도의 금법(禁法)!”
짧은 신음과 함께 소마불의 눈에 붉은 실핏줄이 올라왔다.
소마불은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소리쳤다.
“진 형, 진정하시오!”
그러나 진양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진 형, 소승은 그저 농을 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진 형께 입은 은혜를 어찌 악으로 갚을 수 있겠습니까? 이만 고정하시지요.”
“하지만 전혀 재미가 없는 농이군요.”
진양은 그제야 손을 멈추었다.
물론 진짜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은 없었다.
여기서 목숨을 걸고 싸워봤자 얻는 것도 없이 잃기만 할 것이다.
진양의 목적은 그저 그에게 겁을 주는 것이 전부였다.
“진 형 말씀이 맞습니다. 소승에겐 그럴 만한 재능이 없습니다. 그러니 이만 신통력을 거두시지요.”
그래도 협박이 제대로 들었던 것인지 그는 자세까지 낮추었다.
“한 번 힘을 합치기로 한 이상 절대로 뒤통수를 치지 않습니다. 방금 전의 그건 그저 가벼운 농담에 불과했었으니 이만 잊어주시지요.”
치고 빠질 줄 아는 그의 모습에 진양은 다소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