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quisite Repair RAW novel - Chapter 964
964화 소강상태
동쪽 국경지대를 지나는 길.
여기까지 왔으니 오행산에 들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빈손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
장문 사형을 통해 동문들에게 나눠줄 선물도 두둑이 챙겨왔다.
오행산은 혈기 왕성한 연체 수도사들이 잔뜩 모여있는 곳이다.
이들은 항상 몸을 쓰며 수련을 하기 때문에 먹는 것으로 체력을 보충하는 건 상당히 중요한 일이다.
일반적인 곡식만 먹어서는 수련을 하며 소모한 체력을 보충하는 건 무리다.
잡다한 기운들이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려 삼백만 근이나 되는 영양(靈糧)을 챙겨왔다.
다 같은 집안 식구들끼리 선물을 주고받는 건데 불필요한 예를 갖출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그저 실용적이면 그만이지.
장추우는 기가 막힌다는 듯 웃으면서도 진양의 선물을 모두 받아들였다.
사실 오행산은 연체 수도사들이 몰려있는 곳인 만큼 영양의 소비도 어마어마한 곳이다.
오행산에서도 따로 영전을 두고 영양을 기르긴 하지만 이 정도로 소비하는 양을 따라가는 건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비옥한 영전에 옥도를 심는 것도 큰 낭비나 다름없었다.
진양이 가져온 영양은 한눈에 봐도 품질부터 달랐다.
게다가 이 정도의 영양을 기르려면 분명 엄청난 크기의 영전이 필요하다.
장추우는 내심 놀란 기색이었다.
진양이 이토록 많은 양의 영양을 키워낼 만큼의 영전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이다.
동해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영양 거래 중 유령호가 팔 할을 독차지하고 있다.
이건 예전에 소문을 통해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예전에는 대황에서 영양을 수입하여 동해에 가져다가 팔았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동해에서 영양을 가져다가 대황에 팔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만 봐도 진양이 얼마나 큰 영전을 가지고 있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을 정도였다.
사실 진양은 장해가 농사에 이토록 집착했던 이유를 아직까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가 남긴 탑 하층부에는 상당히 드넓은 영전이 펼쳐져 있다.
과거 부도마교가 남만 제일 마도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충분한 재력과 드넓은 인맥 덕분이다.
진양도 마음 같아선 다른 걸 심고 싶었다.
영전에 옥도만 심고 있자니 다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건 쉽지 않았다.
영양은 범인부터 도군까지 모두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게다가 영양에는 온화한 영기가 상당량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소비량 역시 엄청나다.
만약 영양을 모두 뽑아버리고 영약을 심기 시작한다면 동해의 영약 가격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현재의 사 할 정도로 떨어지게 될 것이다.
수익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고, 이 일로 수많은 이들에게 원한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그에 비해 영양은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
직접 먹을 수도 있고, 술을 빚을 수도 있고, 이 외에 다른 재료로 사용할 수도 있고, 심지어 괴수들에게 먹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수도사들 중에 상급 영전에 영양을 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건 영전을 낭비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의 수도사들은 최하급 영전에 영양을 심는 게 일반적이다.
영양은 지금껏 수요보다 공급이 더 많은 작물이기 때문에 가격에 변동이 있다고 해도 큰 영향이 가진 않는다.
애초에 영양을 키워서 내다 파는 걸로 먹고 사는 사람은 몇 없다.
이건 개인이나 세력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때문에, 오히려 조금 더 싼 가격에 질 좋은 영양을 얻게 된다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정도다.
진양은 탑 하층부를 유령호에 놔두었다.
유령호로 모여든 일월성광(日月星光)은 전부 영기가 되어 탑 하층부로 흘러 들어갔고, 덕분에 영전의 등급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아니,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더 기름진 땅으로 변했다.
여기에 나무 정령이 직접 돌보기까지 하니 영전의 등급이 한 단계 더 올라가는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유령호의 소비가 크게 줄어든 것도 한몫했다.
예전처럼 봉인을 강화하기 위해 비경으로 들어갈 일도 없었고, 사해와 같은 위험지대에 들어갈 일도 이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기껏해야 동해에서 활동하는 게 전부이니 소비가 줄어든 것도 이상할 건 없었다.
최근 동해에는 영양의 가격이 크게 하락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량의 영양을 공급한다면 가격이 아예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결국은 고민 끝에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로 결정했다.
품질도 좋고, 그만큼 영기도 풍부한 영양이었기 때문에 남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결코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오행산에 삼백만 근을 나눠준 뒤, 사람을 시켜 남만에도 똑같이 삼백만 근 정도를 더 보냈다.
원래는 황천마종과 여족은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니 삼백만 근이면 너무 많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흘누가 매번 산겸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게 떠올랐다.
게다가 최양평과 오행산 사람들의 사이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혹여나 불필요한 분쟁이 일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공평하게 삼백만 근씩 나눠주기로 한 것이다.
물론 남는 걸 어떻게 처리할지는 스스로 알아서 할 일이다.
이렇게 팔지 못하고 남은 영양의 구 할을 모두 처리하고 나니 몸이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그리고 남은 일 할은 북쪽 국경지대에서 한참 대연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대영 진영에 기부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도에 들러 가희와 만날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아직 폐관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북쪽 국경지대로 향했다.
도착하고 보니 전투는 어느새 소강상태에 접어들고 있었다.
비록 대영 군대가 대연 본토까지 치고 들어가는 건 성공했으나 진격 속도는 많이 느려졌다.
신조의 기운을 받지 못하는 것도 있었지만, 반대로 대연의 병사들이 신조의 기운을 받고 싸우기 시작하니 양쪽의 실력이 비등해진 탓이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영이 이곳까지 진격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복수였다.
가희는 등극하던 날 도군이 되었고, 현재 경지를 안정화시키기 위해 폐관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전쟁을 더욱 크게 만들 일은 거의 없다.
대연의 대제는 수련에 정신이 팔려있느라 전쟁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는 태자와 황태손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만약 전쟁이 국가전으로 이어진다면 상황은 그들이 제어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게 된다.
그리하여 대연 본토로 들어온 이후로 전쟁은 사실상 전쟁이 아닌 훈련이 되어버렸다.
물론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대연의 주장(主將)이 또 바뀐 것이다.
가장 처음에는 황태손이 군대를 이끌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태자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뿐만 아니라 환해 일족까지 전쟁에 끌어들였다.
이어서 환해 일족이 배반을 하고, 강제로 혼사를 맺게 된 연나 일족은 이 틈에 온갖 난리를 부렸다.
거기에 거침없이 진격해오는 대영까지 더해진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연 태자는 물러나게 되었고, 또다시 황태손이 군대를 맡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주장이 바뀌고, 주장이 바뀌면 그 아래의 대장들도 주장의 사람으로 바뀌는 법.
상황이 이러니 대연의 사기가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렇게 대영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이 대연 본토까지 밀고 들어갈 수 있었다.
도착한 진양은 가희의 이름으로 영양을 진영 내에 뿌렸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순천사의 사람들은 보이고 있지 않았다.
청란과 자란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순천사에 어떠한 일이 터졌다고 한다.
한참을 찾고 나서야 아주 예전에 가희에게 의탁했던 편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상황은 좀 어때요? 아무래도 사기가 그렇게 높은 것 같진 않군요. 이건 공을 세울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일 텐데요.”
한 바퀴를 둘러보고 나니 상황이 말이 아니었다.
심각할 정도로 사기가 떨어져 있었던 것이었다.
평소 국경지대를 지키고 있다 보면 크게 공을 세울 기회가 없다.
때문에, 말단부터 상부까지 전부 공에 굶주려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눈앞에 두고도 가만히 있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편장은 다소 난처하다는 표정을 지은 뒤, 진양을 조용히 막사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보시다시피 완충지대 점령은 이미 모두 끝이 났습니다. 거기에 대연 본토 삼천 리 안까지 파고들었으니, 여기까지는 전부 다 완벽하게 점령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조금 더 앞으로 가면 양쪽으로 많은 병사들이 지키고 있는 큰 성이 나옵니다. 게다가 대연은 지휘관이 태자에서 황태손으로 바뀐 이후로 방어 능력이 훨씬 더 좋아졌습니다. 이대로 강행 돌파를 시도했다가 일이 잘못 풀리기라도 하면 참패를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
진양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번 전투에서 첫 패배가 될 수도 있는 싸움이었기 때문에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출전을 명하던 가희의 모습은 매우 단호했었다.
게다가 등극 대전 당시 윤제를 죽이고 도군의 경지에 오르기까지 했다.
이러한 위세 앞에 그 누가 감히 뻔히 패배할 걸 알면서도 공에 눈이 멀어 덤벼들 수 있겠는가?
진양은 한숨을 푹 쉬었다.
“다들 폐하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신 듯하군요. 한 번의 전투에서 패배하는 건 상관없습니다. 결국 전쟁은 우리가 이기게 될 테니까요.”
“그건 소인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그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한 장의 전서(戰書)를 꺼내 진양에게 건네왔다.
“진 대인, 일단 이걸 한번 확인해 보시지요.”
진양은 전서를 받아들였다.
전서를 살펴보니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전서는 북두성종의 제자가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북두성종의 한 장로가 예전에 황태손의 아버지, 그러니까 지금은 폐태자가 된 사람에게 빚을 진 적이 있는데, 이를 빌미로 황태손이 북두성종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이로 인해 북두성종의 대장로는 큰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북두성종은 대연에 거점을 두고 있는 종문이었고, 무엇보다 대장로는 과거 폐태자에게 큰 빚을 진 적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황태손의 부탁을 거절하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종문 전체를 전쟁에 참여시킬 순 없는 노릇이다.
대연의 정국에 너무 깊게 관여를 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왕백강이라는 자를 보내기로 했다.
왕백강은 두 개의 성 사이에 전선에서 가까운 위치에 산천을 기반으로 여러 법보의 힘을 이용하여 소성투살진(小星鬥殺陣)이라는 진법을 펼쳐두었다.
여기서 만약 대영군이 소성투살진을 힘으로 돌파한다면 왕백강은 곧바로 돌아설 것이라고 한다.
북두성종이 패배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진 빚은 갚은 셈이니, 뒷일은 북두성종이 알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설령 대영의 대제가 직접 나서서 대연을 짓밟는다고 하더라도 이는 북두성종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하지만 대영군이 소성투살진을 돌파할 수 없다면 단 한 발자국도 앞을 지나갈 수 없다고 적혀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