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17
외전 3. 안식처의 새
가끔은 내가 너무 바라는 게 없는 건가 싶기도 하다.
손바닥에 놓인 종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원 종이라고 닉시가 준 종이였는데 며칠째 무슨 소원을 적어야 할지 고민이던 것이었다
마을 광장으로 가자, 종이를 나무에 매달고 있는 사람이 보였다. 목수, 빅토리아였다.
손에 묻은 흙을 털며 그녀가 서 있는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비티.”
“좋은 아침이에요, 길버트. 소원 나무에 소원을 적으러 오셨나요?”
“뭐 그렇죠. 비티는 무슨 소원을 빌었어요?”
“제가 작업한 조각함이 유명해지길 빌었답니다.”
“좋은 소원이네요.”
마을 한가운데 세워 놓은 크리스마스용 트리. 때가 지났는데도 거두지 못한 나무였다.
그것을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담은 종이가 눈송이처럼 수북하게 매달려 있었다.
남의 소원을 엿보는 건 실례인 줄 알면서도 종이 몇 개를 뒤집어 봤다. 마을 이장이라면 마을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함께 생각해 줄 줄 알아야 하니까.
‘이건 분명 매튜 할아버지고.’
‘저런, 엘리 아버지가 힘내셔야겠네.’
‘괜찮은 소원이네. 에이린 아주머니, 아니면 콜레트 씨? 나도 이걸로 빌어 볼까.’
“닉시가 마을 사람들의 소원을 다 들어줄 때까지 이 나무의 철거를 보류해 달라 우겼다면서요?”
“네. 이러다가 이 나무를 평생 여기 세워 두게 되는 건 아닐지 걱정이에요.”
“후후, 그거 걱정이네요. 이런 나무는 벌레들이 갉아 먹기 쉬워서 금방 굼벵이들의 숙소가 될 텐데.”
무슨 일이 있어도 봄이 오기 전엔 철거해야겠다. 닉시가 안 된다고 나무 밑동을 붙잡고 울면, 벤자민을 미끼 삼아서 떼어 놔야지.
“닉시가 제 소원을 어떻게 이뤄 줄지 궁금하네요.”
비티의 말에 문득, 소원 나무를 세우던 농부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닉시. 대체 같은 소원을 어떻게 들어준다는 건데. 그러자 그녀가 못 할 거 같아? 물으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닉시, 미리 경고하는데, 사람을 좀비 같은 생명체로 만드는 건 금지야.
“제 생각엔 닉시가 비티의 조각함을 전부 살 것 같아요. 그리고 그걸 가지고 고향 사람들에게 자랑하는 거죠.”
“어머, 그럴싸하네요. 파리 친구들이 제 조각함을 마음에 들어 해 준다면 정말 보람 있을 거예요.”
“……닉시가 비티의 소원을 이뤄 줄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이죠.”
하긴 그런 사람이지. 이상해서 이상한 힘을 가진 사람.
농부는 같은 자잘한 소원부터 같은 거창한 소원까지 차근차근 이뤄 냈다.
물론 이뤄지기 힘든 소원들의 경우는 당사자와 원만한 합의를 보는 평화로운 협상을 거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1월의 산타가 된 게으름뱅이 농부는 파리에서 돌아오자마자 소원을 핑계로 마을을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마을에서 나만 유일하게 소원을 적지 않았다며 종이를 들이밀었다.
철거할 때가 지난 나무 아래 서서, 남들의 소원 종이를 엿보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그래서 길버트는 어떤 소원을 적을 생각이에요?”
“글쎄요…… 아까부터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데 마땅한 게 생각이 안 나네요.”
‘뭘 적지. 대충 마을 사람들의 소원이랑 비슷한 걸 적으면 되려나.’
“생각해 놓은 건 있고요?”
“음, 감자 농사 대성공. 아니면 어깨 근육통 사라지기. 아침에 일어날 때 덜 피곤해지기?”
그보다 너무 거창하지 않아? 소원이라는 거.
나의 소원 후보들을 들은 비티가 작게 웃었다.
“길버트답네요.”
“그래요?”
“네. 귀엽고, 소박해요.”
“왠지 그런 말을 들으니까, 귀엽지 않고 소박하지 않은 소원을 적고 싶어지는데.”
하하. 그렇게 말은 하지만 거창한 걸 적을 마음은 없었다. 생각나는 것도 없고.
‘나다운 것.’
귀엽고, 소박한 것……이라.
사람들은 종종 내게 너무 소박하게 사는 것 아니냐고 말하곤 했다. 넓은 밭, 큰 집, 혼자 쓰기에 과할 정도로 많은 재산. 그런 것들을 갖고 있으면서 왜 쓰질 않냐고.
사실 난 인생에 바라는 게 그다지 많지 않은 사람이었다. 부자 되기, 아프지 않기 이런 것들은 있으면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지 않은가. 사는 데 문제 될 것도 전혀 없고.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어 봐야 그다지. 소원이라고 말할 거라곤 딱히. 거창하기만 하잖아. 약간…… 유치하기도 하고.
“그래도 바라는 게 있다면…….”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옅은 제비꽃 향이 실린 포근한 바람. 동생의 희미한 웃음소리가 실려 오는 듯한, 그 여느 때의 평범한 소풍날 같은 바람.
“바라는 게 있다면요?”
비티의 질문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역시 농사 성공?”
뒤늦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비티는 그게 뭐냐며 키득거렸다.
“정말 바라는 게 없어요? 길버트는 작년에도 농사를 잘 해냈잖아요. 좀 더 거창한 걸 바라도 될 것 같은데.”
“역시 잘 모르겠네요. 원래부터가 인생에 크게 바라는 게 없어서.”
“그래요? 이럴 때 보면 길버트는 저보다 한참 나이 든 어르신 같다니까요. 후후. 원래 그런 성격인 거예요?”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내가 지금의 이 모습이 될 수 있었던 건 전부 아버지와 가족들 덕분이었다.
그를 닮고 싶은 계기 하나. 인성의 모서리를 깎아내리는 노력 둘. 소풍날의 그리움 셋. 그렇게 완성된 성실한 마을 이장, 길버트 그레이스.
“변한 편이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요? 원래는 어떤 느낌이었는데요?”
비티는 상상이 안 된다며, 어려운 문제를 본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난 내가 그레이스 가에 들어오지 않았을 때, 지금의 내 모습을 생각한다.
지금보다 날카로웠겠지. 성격도 거칠었을 거고. 어쩌면 친아비 따라 사냥꾼이 됐을지도 모르겠다.
산속에 틀어박혀서 사람들과의 교류를 끊고 사는,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그런 사람. 지금과는 여러모로 정반대의 이미지.
“어……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살았을 그런 사람 같은 느낌?”
“어머, 그래요?”
“아마도요.”
다행히 아버지와 가족들을 만났으니 망정이지. 어쩌면 저가 그렇게 살았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고 나면, 지금의 이 소박한 삶이 괜스레 기특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모습이 훨씬 좋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소소하긴 해도 평화롭잖아요.”
이 소소한 삶에 아쉬운 게 하나 있다면, 내가 사랑하는 것들은 보답하기도 전에 사라진다는 것 하나뿐.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도 외사랑이네.’
갑자기 태평한 농부의 얼굴을 떠올리고 나니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튀어나왔다. 이런 것까지 소박할 필요는 없었는데. 괜스레 아쉬워져서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역시 너무 거창했다, 소원이라는 거. 내가 정말 바라는 건 적을 수 없는 소원 종이.
빈 종이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수많은 소원이 적혀 있는 나무를 올려다봤다.
“내가 바라는 것이라…….”
그건 아버지 같은 사람 되기, 가족들과의 소풍,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일.
소원을 들어줄 사람과 원만한 합의가 필요한 소원들.
진정 원하는 건 이뤄지지 않는 것뿐이라는 걸 알아서 애초에 바라지 않다 보니 소박한 사람이 됐다. 묻어 둔 게 너무 많아서 무엇에도 절박한 게 없는 것 같은 느긋한 사람이 됐다.
내가 바라는 건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래도 안 쓰면 닉시가 혼내겠죠?”
“그럴걸요.”
“그럼 어디 한번 이것도 이뤄 보라 해 볼까요?”
종이 위에 펜을 댔다. 비쭉 솟은 심술과 장난기를 섞어서.
일부러 이뤄지지 않을 것을 적는다. 하지만 진심으로 내 소원이라고. 난 늘 마을의 안녕을 바라고, 늘 심신의 평화를 바라니까.
비티가 그의 종이에 적힌 소원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보기 좋네요. 소소하지만 아주 거창한 소원이에요.”
“그래요?”
이걸 보고 심각하게 고뇌할 그녀의 얼굴을 생각했다. 절로 만족스러운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 정도 심술은 괜찮겠지. 본인을 좋아하게 만들어 놓고, 고백도 못 하게 만들었으니까. 안 그래?
“네, 길버트다워요.”
비티가 말했다. 나는 큭큭 웃으며 나무에 소원을 매달았다.
부디 이걸 본 게으름뱅이 산타클로스의 머릿속이 복잡해지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