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7_6
보아하니 벤자민이 필립에게 노엘이 누구냐고 물어본 것 같았다. 그럼 필립이 머리꼭지가 돈 것도 이해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잠잠한 그의 역린은 단 하나.
그의 죽은 형, 노엘 휴거뿐이었으니까.
그렇단 말은 그자는 결국 노엘에 대한 걸 닉시에게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아예 물어보지조차 못했거나.
‘필립이 아니라 날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서 노엘의 이름으로 미끼를 던졌던 건데. 그건 의외네. 하필 물어봐도 이 브라콤 녀석한테 물어보다니.’
그녀는 본인이 친화적인 성격을 발휘해 사람들을 몰고 다녔던 게, 본의 아니게 벤자민을 철벽 쳤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쪽이 먼저 나한테 달링의 몽유병에 관해서 물어보잖아. 어디까지 알고 있냐 떠보는 것 같아서 기분 나빴다구. 내가 말이야, 달링과 몇 년 지기 친군데.”
그녀는 사실 배알이 꼴려 있었다.
고작 만난 지 반년도 채 안 된 것 같은 사람이 남편이랍시고 옆에 딱 붙어 있지 않은가.
제 친구에 대해 잘 아는 척하는 것도 그렇고.
저가 모르는 친구의 모습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앞으로도 알아 갈 것 같은 그런 짜증.
그래서 유치한 싸움거리를 던져 본 것이다. 네가 남편이라면 노엘 휴거라는 사람이 누군지 아냐고.
당신은 겪지 못한 우리만의 과거를 알고 있냐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하루하루, 서로만이 세상 전부였던 시간을 이해하겠냐고.
“그렇다고 형의 이름을 팔아?”
“그래, 솔직히 노엘까지 끄집어낸 건 유치했다고 인정할게. 하지만 결혼까지 했다면 당연히 노엘에 대한 건 알고 있어야지.”
필립은 옷깃을 움켜쥐었던 손을 탁 털어냈다.
“거짓말이었어.”
“응?”
“닉이 결혼했다는 거. 거짓말이었다고.”
* * *
가짜 결혼을 축하하는 티 파티가 끝나고 닉시와 벤자민은 집으로 돌아와, 때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벤자민이 가지 그라탱을 먹다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네 친구한테 들켰어.”
뭔 생뚱맞은 소리람. 벤자민의 말에 닉시는 고갤 들었다.
“뭘?”
“…….”
“뭔데? 내 친구라면 제키랑 필립? 내가 걔들이랑 친하게 지내지 말랬지.”
“…….”
“뭔데 그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걔들한테 들킬 게 뭐 있…….”
갑자기 스치는 불길한 생각에 입안 가득 그라탱을 집어넣던 그녀의 손이 우뚝 멈췄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말하는 건 아니지?”
“…….”
“왜, 왜 말을 안 할까……?”
벤자민은 말없이 빈 물컵에 술을 따랐다. 그리곤 그득 채워진 술이 차라도 되는 양 쭉 마셨다.
―달각.
컵을 내려놓음과 동시에 닉시가 마른침을 삼켰다.
“들켰다고. 우리 결혼이 가짜인 거.”
그 말을 닉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어쩌다?”
“그렇게 됐어.”
그는 죽어도 ‘네가 좋아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궁금해서 물어봤다가 들켰다’곤 말할 순 없었다. 말 못 하지. 죽어도. 이유를 말하느니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을 것이다.
“그렇게가 대체 뭔데. 길게 설명해 보라구.”
“그으러어엏게.”
“진짜 죽고 싶어?”
닉시의 협박에도 벤자민은 태연했다. 태연하다 못해 대체 무슨 타격을 입은 건지 눈빛이 공허했다.
그녀는 잠시 현실을 부정하듯 머리를 짚었다가 ‘아니 대체 왜?’ 같은 제스처를 취했다. 말문이 막히고 속이 답답한지 가슴을 쳤다가, 화가가 따라 주는 술을 쭉 비웠다.
당황과 현실 부정, 의문, 외면, 분노의 단계를 거쳐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에 가까운 체념에 이르렀다.
짧은 순간 모든 번뇌가 스쳐 지나간 그녀의 머릿속엔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재입대.
“그래. 결국 이렇게 될 운명이었다 이거지?”
더러운 운명. 빌어먹을 세상. 개같은 군대. 날 때부터 세상이 절 피곤하게 한단 건 알고 있었어도 도대체가 자유롭게 놔주질 않는다. 지랄 맞은 천재의 숙명.
“화가. 군대 들어가서 제대하는 게 빠를까, 아니면 친구, 아니 원수 두 명 저세상 보낸 사람이 감옥에 들어갔다가 석방되는 게 빠를까.”
“둘 다 안에서 썩을걸.”
“젠장.”
닉시가 쥐고 있던 술병을 다시 내려놨다.
방금까지 먹고 있던 버터 맛이 나는 가지 그라탱도 지옥에서 올라온 최후의 만찬으로 보였다.
그녀는 다시 컵에 술을 따랐다.
“그래. 이왕 끌려가서 죽을 거면 오늘 안에 할 수 있는 거 다 하고 죽는다.”
“어떻게?”
닉시는 오늘 죽어버리겠다며 떵떵거린 뒤, 창고에 보관해 놨던 담금주들을 몽땅 마셨다. 그냥 옆에 있으면서 담금주 코르크 따개 역할을 해 주던 벤자민도 그녀의 성화에 못 이겨 몇 잔 얻어먹을 수밖에 없었다.
설산에 사는 에스키모인들도 이런 온도의 술을 마시진 않을 것이다. 버드나무 껍질로 담갔다는 담금주는 이게 술인지, 알코올램프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독했다.
겨우 한 모금 삼킨 벤자민이 얼굴을 오만상 찌푸렸다.
한잔 마셨는데도 목구멍이 화끈한데 그걸 병째 들이켜는 사람이 멀쩡할 리 없었다.
“그만 마셔.”
벤자민은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현실을 부정하고 있는 그녀의 귀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세 병의 술을 비운 뒤 화장실에 가고 싶다며 마당 밖으로 나갔다.
비틀거리며 술병을 줍던 벤자민이 뒤늦게 ‘화장실이 가고 싶은데 왜 마당으로 간 거지?’라는 의문을 품었고, 부랴부랴 마당 밖으로 나갔지만 닉시는 없었다.
큰일 났다.
그냥 풀어놔도 위험한 여자를 술까지 먹인 뒤 풀어놨다. 걸어 다니는 폭탄에 불을 붙여서 방생한 것과 다름없었다.
불길함을 직감한 벤자민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닉시!”
그는 빠른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오솔길로 향했다.
등불 하나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달빛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닉시!”
어두컴컴한 해바라기밭을 지나 밭고랑 사이. 개울가 아래. 설마 하고 개집까지 들여다봤다.
이윽고 곧 수확을 앞둔 밀밭에 도착했다.
“제길……. 어디 있는 거야.”
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턱언저리의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설마 발이라도 헛디뎌서 어디 처박혀 버린 건 아니겠지. 마을 이장을 깨워야 하나.’
극단적인 생각을 하던 그의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흥얼거리는 목소리. 술에 취한 사람 특유의 목소리 큰지 모르는 뻔뻔함이 묻어나는 콧노래 소리였다. 밀밭 한가운데서 들리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안도가 밀려왔다.
그는 그제야 저가 거실 슬리퍼를 신은 채 뛰쳐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벤자민은 노랫소리가 들리는 밀밭을 향해 걸어갔다.
“이봐.”
급하게 뛰쳐나온 저보다 그녀가 더 가관이었다.
닉시는 잠옷에 가까운 얇은 원피스 차림에 맨발로 밀밭 위에 누워 있었다. 머리는 풀잎에 엉겨서 엉망진창이었다.
눈이 감겨 있는 걸 보면 역시 제정신은 아닌 듯했다.
“일어나.”
“싫어.”
“그럼 계속 있든가.”
벤자민이 뒤돌았다.
“야, 야 세 번은 물어봐 주는 게 예의 아니냐?”
닉시가 벤자민의 소매를 덥석 붙잡았다.
그 손길에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그는 어쩔 수 없이 닉시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새까만 하늘 위. 구름이 많이 낀 건지 아쉽게도 별은 보이지 않았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은근히 묻어나오는 물비린내를 맡으며 닉시가 중얼거렸다.
“앞으로 외로워서 어떡한대, 벤자민 리히터 씨? 조만간 부인이 사라지게 생겼잖아. 사람의 빈자리는 말이야. 없을 땐 전혀 모르는데, 있다 없으면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는 법이거든. 자자, 곧 아내를 보내게 된 소감은 어떠신가요?”
“말이 많아.”
닉시는 그의 옆구리를 퍽 쳤다. 그가 옆구리를 부여잡았다.
“감상이 그거밖에 안 돼?”
성가시긴. 그가 혀를 찼다.
제 옆에 누워 있는 사람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진상도 이런 진상이 따로 없다.
벤자민은 자꾸만 제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닉시를 질색하며 밀어냈다.
“너 말이야. 응?”
“왜.”
“사랑하는 사람이 조만간 군대로 떠나게 됐는데…….”
“…….”
“아무렇지도 않냐고오…….”
보내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는 남동생 외에 사랑하는 사람도 없었고, 떠난다고 이렇게 징징댈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그가 떠나는 쪽이기도 했고.
“듣고 있어, 화가? 자꾸 그렇게 섭섭하게 굴면 나. 나…….”
‘내가 입대한댔을 때, 테오는 어떤 얼굴이었더라.’
그는 저보다 네 살 어렸던 동생을 떠올렸다.
늘 누워만 있어서 말랐던 얼굴과 그럼에도 늘 반짝이게 빛났던 두 눈.
그는 동생을 위해 군대에 가기로 했다. 동생은 몰랐겠지만.
[형. 정말이야? 자원입대한다는 거.]‘아니, 몰랐으면 했지만.’
“화가. 듣고 있어?”
[나…… 나 때문이야?]“나……. 나 토할 것 같……아우웨에엑…….”
어렴풋이 떠오른 것 같기도 했던 동생의 표정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는 분명히. 분명히 가슴 한구석이 쓰리고 아련했었다. 조금 전까진 말이다.
벤자민은 옆에 있는 사람이 수도꼭지를 잠그지 않아 퍼덕이는 고무호스 같든지 말든지 그저 하늘만 가만히 올려다봤다.
“군대든 어디든 빨리 가 그냥.”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한바탕 속을 비워내고 난 뒤, 닉시는 이제 술기운이 올라온다며 땅바닥에 드러누워 잤다.
‘이제 술기운이 올라오는 거면 아깐 대체 뭐가 올라왔다는 건…… 아니다. 생각하지 말자.’
뻗어버린 사람을 그대로 놔둘 순 없어서 벤자민은 닉시를 둘러업었다. 지금 놔뒀다가 내일엔 초상을 치르게 될 수도 있으니.
등 뒤에서 승차감이 안 좋다느니 개소리가 들려왔지만 싹 무시했다.
그는 축 처진 닉시를 업고 조용한 밀밭을 걸어갔다.
샐녘의 쌀쌀한 바람. 숲에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
벤자민에게 익숙한 시간이었다. 몽유병 환자가 깨우든, 술에 취한 병자가 깨우든, 늘 잠을 방해받던 시간이니까.
오히려 이제 이 시간에 자라고 하면 어색할 정도였다.
집에 돌아가면 씻어야지. 흙과 풀로 엉망이 된 슬리퍼를 물에 담가놓고, 물을 끓여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는 거야. 오밤중에 술래잡기하느라 몸이 피곤하니 약을 안 먹어도 잠은 잘 오겠지.
벤자민이 등 뒤에 붙어오는 온기를 무시하기 위해 집에 돌아가서 할 일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그때였다.
―콰아앙!
커다란 폭음과 함께 마을 쪽에서 큰 불길이 치솟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불이 치솟는 곳을 바라봤다. 모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느낌이었다. 어느새 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이쪽이야 이쪽!”
“대체 무슨 일이야?!”
“갑자기 여기서 큰 소리가 들렸는데 와 보니 밭이 불타고 있지 뭐예요.”
폭음이 들린 곳은 제비꽃밭이 있는 마을의 동쪽.
마을 사람들이 혼비백산 뛰어다니며 제비꽃밭에 붙은 불을 끄고 있었다.
다행히 불은 크지 않았고 금방 꺼질 수 있었다. 불이 잘 붙지 않는 젖은 잡초밭인 게 한몫했다.
“어우 멀미나…….”
닉시는 비척거리며 걸어왔다.
목덜미를 섬찟하게 만드는 폭음이 들리고, 벤자민과 닉시는 서로 뭐라 말하지 않았지만, 폭음이 들린 곳을 향해 뛰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큰일은 아닌 듯싶었다. 마른 땅에 갑자기 폭음이 들렸다는 건 아주아주 수상한 일이 맞았으나, 다친 사람도 없었고, 밭이 엄청 많이 탄 것도 아니었으니까.
닉시는 저 멀리서 등불을 들고 웅성거리는 마을 사람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뭔 일이래, 화가? 별이라도 떨어졌다면 이해 가겠는데.”
“글쎄. 사람들 말론 여기서 갑자기 뭔가 터졌다고 하던데, 달링.”
닉시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벤자민이 아니었다.
닉시는 파자마를 입은 채 권총을 들고 있는 제키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녀의 옆엔 정복을 말끔히 차려입은 필립이 서 있었다.
어지간히 군인스럽고 빈틈없는 모습들이었다. 딱 봐도 갑작스러운 폭음에 즉시 전투태세를 갖추고 튀어나온 듯했다.
그 지겨운 모습들에 토악질이 나와 혀를 내밀었다.
“지독한 녀석. 이런 깡촌에까지 그런 걸 들고 왔니?”
“혹시 모르잖아. 안전 제일이니까.”
제키는 권총을 겉옷 안쪽에 집어넣었다.
“화가라니. 원래는 그렇게 불렀나 보지? 닉.”
“그러게 이젠 아주 숨기려고 하지도 않네?”
“수, 숨기다니? 화가라는 건 그러니까…… 애칭이거든? 이 얼굴을 보면 화가 났어도 화가 풀리잖아, 화가!”
“필립한테 이미 다 들었어. 거짓말이라며, 결혼한 거.”
제키는 벤자민을 향해 윙크했다.
“아, 아닌데. 거짓말.”
“그럼 벤자민 씨, 달링 성이 뭔지 알아요?”
팔짱을 끼고 있던 벤자민이 조용히 머릴 굴렸다.
“여자.”
“아니, 성별 말고, 성이요 성.”
“…….”
“거봐 모르네. 요즘은 서류도 안 써놓고 결혼하는 거야 달링? 너무 구시대적 혼인이잖아.”
“자연 친화적 결혼 몰라?”
“그딴 소리 하고 자빠졌네.”
제키와 닉시가 의미 모를 투닥거림을 시작했다.
불이 다 진화된 건지 저만치 뭉쳐 있던 인파가 해산하기 시작했다. 등불 든 사람들은 각각 집을 찾아 흩어졌다.
벤자민은 불길이 전부 진화되고 나서야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진정되지 않는 숨을 차분히 억눌렀다.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건지에 대해 웅성거리고 있었다. 벤자민이 그 무리의 중간에서 갈색 머리 청년을 발견했다. 길버트였다.
그는 마을 어르신 몇몇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벤자민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닉. 우리가 파리로 돌아갈 때 같이 가.”
필립이 말했다.
“안 그래도 네 짐 챙길 캐리어도 잔뜩 가져왔어. 네가 딴소리할까 봐 그 안에서 자도 될 만큼 큰 것들로 챙겼으니, 빨리 짐이나 싸 두라고.”
길버트가 무언가를 들고 닉시 일행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낙시가 군인이라는 걸 모르는 마을 이장의 등장에 닉시와 파리 친구들은 잠시 임시 휴정을 맺었다.
“다들 깨버리셨군요. 심장들은 안전하시죠?”
“떨어질 뻔했지. 근데 무슨 일이야, 길?”
“잘 모르겠어. 밭에서 갑자기 뭔가 터졌다고 하는데……”
“이거.”
길버트는 보자기로 감싼 무언가를 조심스럽게 풀어냈다.
그곳엔 흙과 검은 파편. 뭔가 터져나간 것 같은 모양새의 짙은 덩어리가 있었다.
그것을 본 네 명의 눈이 동시에 가늘어졌다.
“지뢰야.”
“지뢰네.”
“지뢰요?”
방금까지만 해도 태연했던 길버트의 표정이 굳어졌다.
닉시는 보자기 속 작은 파편을 집어 들었다.
플라스틱으로 보이는 조각이 끓었던 모양새. 지뢰의 모든 파편이 있는 건 아니라 정확히 어떤 종류인진 가늠하기 어려웠으나, 멀리서도 또렷했던 폭음이나 불꽃의 크기로 봐선 사람이 죽어 나갈 수 있는 종류가 확실했다.
닉시가 파편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모양새가 조잡하네.”
“그러면, 닉?”
“군에서 사용했던 건 아닌 것 같아. 자세한 건 더 살펴봐야 알겠는데.”
길버트는 지뢰 파편들을 닉시에게 건네준 뒤, 아직 화재가 진압된 곳을 서성이던 사람들에게 외쳤다.
“안쪽으로 들어가지 마세요! 지뢰가 있었대요!”
길버트의 외침을 들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밭에서 빠져나왔다.
그중 몇몇이 마침 밭 근처에서 죽은 사슴을 발견했다며 소리쳤다.
정황상 제비꽃밭에서 풀을 뜯어 먹던 사슴이 운 나쁘게 지뢰를 밟아 터진 꼴이었다.
“전쟁의 여파가 있었던 곳이니까 지뢰 같은 게 있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너무 갑작스럽네요.”
길버트가 쓴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황량했던 이곳이 보라색 예쁜 빛깔로 바뀔 거란 걸 기대한 게 불과 며칠 전이었다. 누가 봐도 좋은 조건인데, 밭을 팔지 않고 어물쩍거렸던 이유도 다 그것 때문이었는데. 평화로워 보이기만 했던 들판 아래 아직 터지지 않은 과거가 숨어 있었다니.
마을 사람들이 놀란 건 둘째치고, 오래전 일이 떠올라 입 안이 씁쓸했다.
밭에 지뢰가 있단 경고는 마을 사람들에게 삽시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뭐라고? 아직 이 밭에 지뢰가 남아 있단 거야?”
“이런……. 이러면 밭농사도 뭐도 할 수 없는 땅이 된 거잖아.”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한층 걱정스러운 시선들로 웅성거렸다.
“어떡하죠. 비가 많이 오거나 태풍이 불어서 밭에 있던 지뢰가 마을에 흘러들어오기라도 한다면……”
“누굴 불러야 하지 않을까? 경관이나, 군인이나…….”
“군인을 들이자고?”
누군가 꺼낸 한마디에 정적이 일었다. 잠깐 멈칫했던 고요함은 이윽고 더 큰 술렁임을 일으켰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게! 마을에 군인이라니!”
군인과 경관. 전쟁이 끝난지 아직 일 년도 채 되지 않았다. 직접 전쟁의 여파가 있었던 오베르에게 군인이란 금기시 되는 단어와도 같았다. 게다가 경관이라면 불과 몇 달 전에 외부에서 온 미꾸라지 하나가 함께 마을을 뒤집어 놓기도 하지 않았는가.
“맞아요. 군인이라뇨…… 그건 절대 있을 수 없어요.”
마을 사람들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구경하던 제키가 딴청 피우듯 휘파람을 불었다.
“군인들을 마을로 들일 바에, 차라리 내가 지뢰를 찾고야 말지.”
“화가. 귀 막아 줄까?”
군인으로 촉발된 논쟁이 점점 험악해지자 닉시가 벤자민을 툭 건드렸다.
그는 탈영병이라 아무렇지도 않았다.
“딱히. 그럼 너는.”
“난 은퇴해서 아무렇지도 않은데.”
“거봐 달링. 이런 곳에서 네가 뭘 할 수 있겠어.”
“입 닥쳐, 제키.”
닉시가 고저 없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갑작스러운 사건에서 퍼져나간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급기야 경관과 군인을 데려오면 놈들을 삽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발언까지 나오고, 뒤늦게 길버트가 중재에 나섰다.
“진정하세요. 여러분.”
“길버트! 저런 위험한 곳을 그냥 놔둘 거야?”
“일단 이 지뢰가 밭에서 나온 게 맞는지부터 확실하게……”
“아이들이 그곳에 갔다가 다치거나 죽기라도 하면 어떡해!”
“아주머니…….”
그때였다.
―짝짝.
웅성이는 마을 사람들 가운데, 시선을 한곳에 모으기라도 하듯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떠신가요.”
사람들의 시선은 절로 소리가 난 곳을 향했다.
그곳에 서 있는 사람은 마을의 관광객들. 그렉과 로버트였다.
“원래 건물을 세우기 위해선 터를 파내고 땅을 고르죠. 지대를 안정화하고 건물이 튼튼하게 설계될 수 있도록 하는 당연히 거쳐야 하는 과정이랍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드물게 길버트가 경계심 어린 뾰족한 말투로 되물었다.
로버트 교수는 쓰고 있는 안경을 반듯하게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에게 이 지대를 싸게 넘기시죠. 이곳에 마을을 위한 시설을 세우면서, 땅에 묻혀 있는 지뢰도 함께 제거해 드릴 테니 말이죠.”
남자의 손엔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토지 계약서였다.
닉시는 아직도 술기운이 가시지 않는 머릴 흔들었다.
술김 때문인지 뭔지 몰라도 남자들에게서 본능적인 이질감이 느껴졌다.
예를 들면. 놀라 새벽같이 달려온 사람들 사이. 그 남자들만 흐트러지지 않은 멀끔한 차림새라는 점이.
“어떠신가요, 길버트 그레이스 씨.”
로버트 교수는 들고 있는 흰 서류 종이를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길버트가 복잡하고 어려운 단어들을 보곤 눈을 찌푸렸다.
“……닉시, 이것 좀 읽어 줘.”
“응, 어디 봐.”
길버트는 서류를 닉시에게 건네주었다.
토지 계약서.
서류는 하단에 바로 사인만 하면 계약이 체결될 만큼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꼭 지금을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교수란 사람들은 미리 뭘 준비하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는 병에 걸린 사람들이니, 서류를 미리 준비해 놨을 가능성도 있지만.’
우연이란 타이밍이 너무 많이, 자주 들어맞는다면 그건 적의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폭발물에 대해서 잘 아는 전문가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뢰라는 건, 찾기도 힘들지만 찾으면 아주 위험하고, 처리하는 것도 곤란한 것들이죠.”
“그건 그렇지…….”
“맞아. 쓰레기통에 버릴 수도 없고.”
사람은 불안하면 흔들리지 않는 것을 찾아 붙기 마련이었다.
이 난리통에도 여유로운 모습의 교수와 연구원들을 본 사람들은 어느새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다.
“비용이 꽤 많이 드는 작업이긴 하지만, 토지를 저희에게 파신다면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토지 비용에서 제하면 되니까요.”
그럼 이만큼이 되겠지요. 교수가 서류 아래에 숫자가 적힌 부분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몇백만 유로로 시작되던 숫자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닉시가 낡은 폐가집을 산 비용과 맞먹는 비용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다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어…… 지뢰를 처리하는 데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거면…… 어차피 저 땅은 쓰지도 않았잖아.”
“그러게 말이오. 오히려 골치 아픈 땅을 돈을 받고 처리하는 거면, 우리에게 더 득이 되는 거 아니오?”
주위가 웅성거렸다.
뭔가 이상한데. 근데 뭐가 이상한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없었다. 대체 이 찜찜한 느낌은 어디서부터 오는 거지.
닉시는 술에서 깨어나기 위해 머리를 퍽퍽 두드렸다.
“계약해 주시면 다음 달부터 바로 공사에 착수할 수 있을 겁니다. 지뢰 해체까지 하려면 반년은 더 걸리겠지만……”
반년? 닉시의 머릿속에 반년이란 날짜가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는 말은 지뢰 해체가 반년 짜리 사업 기획이라는 말?’
“토지 금액 측정에 대해서 걱정되신다면 생각할 시간을 충분히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런 일은 많이 해 봤거든요. 저희 같은 전문가가 책정한 금액이니, 제일 합리적일 겁니다.”
반년. 반년은 지금 당장 하루라도 오베르에 눌러살 이유가 필요한 닉시에겐 어마어마하게 긴 유예 기간이었다.
제 친구들이 휴가가 끝나고 파리로 돌아가기 충분한 기간. 그사이 다시 잠적하기 아주 좋은 기간. 다시 도망치기 좋은 기회!
“오히려 더 저렴하게 쳐서 놀라실 수도 있……”
“제가 할게요.”
닉시는 교수의 셔츠 주머니에 꽂혀 있던 볼펜을 뽑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서류에서 로버트, 그렉의 이름이 적혀 있던 곳을 벅벅 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인심 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교수와 연구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뭐……?”
“지뢰 해체. 제가 한다고요. 이봐 제키, 필립 이쪽으로 와 봐.”
“왜?”
닉시는 서류 아래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계약 조항이 적힌 부분이었다.
제키와 필립이 의문스러운 표정으로 닉시에게 다가왔다.
“손.”
“응?”
제키가 제게 내민 닉시의 손바닥을 보곤 본능적으로 손을 올렸다.
닉시는 들고 있던 볼펜을 와그작 씹은 뒤, 제키의 엄지를 가져와 터진 볼펜에서 새어 나온 잉크를 발랐다. 그리곤 그대로 종이에 꾹 눌렀다.
불길함을 감지한 필립이 재빨리 종이를 가져가려 했지만, 닉시는 흐느적 피하며 길버트에게 달려갔다.
“이장님, 계약서예요. 이름 쓰는 법은 제가 가르쳐줬죠? 내용은 차차 설명해 줄 테니, 여기 서명해 주세요.”
“응.”
길버트는 아무런 의심 없이 제게 내민 서류에 서명했다. 또박또박 바르게 적힌 이름 옆에 지장도 예쁘게 찍었다.
“달링. 대체 지금 뭐 하는 거야?”
“자네, 지금 대체 뭐 하는 거야!”
지장을 뺏긴 제키와 서류를 뺏긴 교수가 동시에 항의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닉시는 말을 이어갔다.
“이장님. 계약서만으론 성에 안 차는데, 증인 세워도 돼요?”
“어? 아. 응.”
“이봐, 화……려한 외모의 남편님, 이 계약의 증인으로 사시고.”
닉시는 벤자민을 길버트 옆에 세워두었다.
벤자민 씨, 닉시 술 마셨어요? 길버트의 속삭임에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어쩐지.
닉시는 마지막으로 본인의 지장을 꾹 찍었다. 그리고 그것을 펼쳐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 줬다.
“이 몸. ‘닉시’는 이 계약서 조항에 따라 오베르 마을 서쪽에 있는 약 4천 평의 빈 토지에 설치된 지뢰를 해제하겠습니다. 비용은 일절 받지 않겠으나, 지뢰를 처리하지 못할 시, 위약금 4백만 유로를 오베르 사람들에게 지급하겠습니다.”
“4, 4백만 유로?!”
4백만 유로면 오베르에 학교 하나를 지을 수 있는 금액이었다. 수상하리만큼 큰 액수에 마을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저런 정신 나간 불평등 조약이 다 있어? 본인이 지뢰를 해체한다는데, 못하면 벌금을 문다니. 저 녀석이 가지고 있는 특허권을 다 팔아도 남겠네.”
제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게 문제가 아냐, 제키.”
“응? 그럼?”
“저기 네 지장이 찍혀 있어.”
제키가 아직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머릴 긁적였다.
“이봐 화……사한 외모의 증인 들으셨죠?”
닉의 말에 벤자민이 고갤 끄덕였다.
“기간은…….”
“아. 설마.”
닉시의 속셈을 이제야 알아차린 제키가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때마침 닉시가 필립과 제키가 있는 곳을 바라봤다.
“2주예요.”
2주, 필립과 제키의 여름 휴가가 끝나고도 3일 뒤의 날짜.
제키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참고로, 제가 지급할 능력이나 상황이 안 된다면.”
닉시가 방금 뭔가를 적었던 곳을 가리켰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곳에 꽂혔다.
“여기 추가 조항에 따라, 전장에서 피를 나눈 전우. ‘제키 마티아스’와 ‘필립 휴거’가 위약금을 대신 지불할 겁니다.”
그곳엔 제키의 지장이 찍혀 있었다.
“그래, 사고를 안 치면 달링이 아니지.”
2주 안에 제비꽃밭에 심어져 있는 지뢰를 전부 해제하지 않으면, 위약금 4백만 유로. 만약 닉시가 지불하지 못한다면 제키 마티아스와 필립 휴거가 돈을 대신 지불한다.
그러니 혹시라도 2주 사이에 필립과 제키가 닉시를 강제로 파리로 데리고 가 버린다면, 계약을 어긴 셈이 되므로 그들이 오베르 사람들에게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말이 됐다.
저를 파리로 데려가고 싶으면 돈을 내놔라! 그런 뻔뻔한 말이었다.
게다가 돈도 그냥 푼돈이 아니라 정말 학교 하나를 지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 말을 들은 연구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릴 질렀다.
“무슨 순 엉터리 같은 계약이 다 있습니까?”
“제 말이요.”
제키가 거들었다.
둘의 항의를 싹 무시한 닉시는 계약서를 길버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글자는 모르지만, 방금 제 손에 들어온 게 4백만 유로짜리 불평등 계약서라는 걸 아는 길버트가 비장하게 고갤 끄덕였다.
“이봐요, 길버트 이장. 저 주정뱅이 말을 듣는다는 거요?”
“술 냄새는 좀 나긴 하지만, 거짓말할 사람은 아니라서요.”
연구원과 교수는 어이가 없었다. 다 된 계획에 미친년 하나가 날아와 재를 뿌렸으니.
제한 기간 안에 지뢰도 해체하고, 못하면 돈도 준다니. 곱게 미친 것도 아니고, 아예 제정신이 아니었다.
노예도 ‘그건 좀’ 하고 거절할 만한 엉터리 계약이지 않은가.
“지뢰가 장난감인 줄 아시오? 죽을 수도 있는 걸 민간인이 무슨 수로 해체한단 말이오?”
그런데 더 어이가 없는 부분은, 그걸 수긍하는 마을 분위기였다.
“닉시라면 그럴 만도 하지.”
“아, 닉시 양이 밭을 조사해 준다고? 그럼 안심이지.”
‘대체 어느 부분이……!’
그녀의 매운맛을 인중으로 맛본 적 있는 연구원이 코를 씰룩였다.
로버트 교수가 씩씩거리는 그렉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래요. 2주라고 했소?”
“네.”
“그 안에 지뢰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해체하지 못하면 그 이후론 토지 계약에 상관하지 않을 거요?”
“뭐, 그렇겠죠?”
“그렇군.”
교수는 연구원과 눈짓을 주고받았다.
대충 시선 교환을 끝낸 그들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2주만 기다려 보도록 하지.”
그들은 자비로운 악당들처럼 말하곤 마을 회관으로 향했다.
외부인들과 더불어 마을 사람들이 돌아간 뒤, 길버트는 닉시에게 조용히 물었다.
“괜찮겠어? 어쩌자고 이런 계약을 한 거야.”
“괜찮아. 나 지뢰 잘 찾아. 옛날에 별명이 지뢰 탐지견이었어.”
“그래도…….”
길버트의 손에 쥐어진 계약서가 바스락거렸다.
그녀의 말 대부분은 허풍이라는 걸 그도, 마을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닉시가 4백만 유로니, 뭐니 했어도 마을 사람들은 ‘또 시작이군, 허허.’ 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건 싫어.”
길버트나 마을 사람들이나, 그녀가 지뢰 같은 걸 찾는다고 나섰다가 다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길버트는 종이를 건네 주던 닉시의 표정에서 이 계약이 단순한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진짜로 이 밭을 뒤엎어 지뢰를 찾을 생각이었다.
“괜찮아 길. 시간을 벌 수 있었는걸.”
그러나 그런 길버트의 걱정이 무색하게 닉시는 당당하게 외쳤다.
“오히려 내 사적인 일을 해결하려고 마을의 위기를 써먹어서 미안하게 됐어, 이장님!”
이건 닉시에게 지겨운 전우들을 떼어 놓을 좋은 기회였다.
지뢰의 형태, 구조만 미리 습득한다면 지뢰밭 뒤집기는 3일 안에도 해결할 수 있었다.
할 수 있다. 저는 천재니까.
‘거기다 늘상 지뢰밭에서 굴렀던 군인이었고. ……마을이 꺼리는.’
“닉시?”
길버트가 조용해진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닉시는 고갤 들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쯤은 아무것도 아냐. 나한테 맡겨.”
닉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닉시와 길버트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무렵, 벤자민은 지뢰 파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의 시선 앞에 군화와 슬리퍼 신은 발이 멈춰 섰다. 의도치 않게 보증 아닌 보증을 서게 된 제키와 필립이었다.
“벤자민 씨.”
필립이 입을 열었다.
“저흰 닉시를 데리러 왔습니다. 벤자민 씨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사적인 감정 같은 건 싹 빠진 사무적인 목소리. 티 파티에서 봤던 적의 가득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당장이라도 부탁한다고 고갤 숙일 듯 진지한 모습이었다.
벤자민은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제키가 크게 한숨을 쉬며 머릴 긁적였다.
“그렇게 경계할 것까진 없는데. 그냥 부탁할 게 있어서 온 겁니다. 달링이 우릴 뭐라 소개했는진 모르겠지만……”
“결혼 정보 회사 사람들이라더군요.”
빌어먹을 닉시……. 제키가 중얼거렸다.
“일단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다. 저희가 뭐 하는 사람들인지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 나름 국가에서 신원을 보증하는 공무원이고요.”
“알고 있습니다. 군인인 거.”
벤자민의 말에 제키와 필립이 침묵했다. 예상치 못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렇다면, 닉이 군인이라는 것도 아셨겠군요.”
벤자민은 고갤 끄덕였다.
닉시는 과거사를 시시콜콜 털어놓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제키와 필립은 벤자민도 다른 마을 사람들처럼 그저 표면적인 이웃에 불과하다 생각했다.
‘그런데 군인인 걸 알고 있다, 라.’
마을 사람들 전부 모르는 듯했는데, 유일하게 닉시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
‘역시 아예 평범한 사이는 아닌가.’ 제키가 벤자민을 가만히 바라봤다.
“하하. 우리가 가짜 결혼이라고 너무 얕봤네.”
“그래서 부탁이란 건 뭡니까.”
벤자민의 말에 필립이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닉은 우리 부대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부대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화학, 생물 학회에도 필요한 사람이고요. 닉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닙니다.”
필립이 고갤 숙였다.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채 목례하는. 평범한 인간 관계에서는 하지 않는 과하게 정중한 인사였다.
“부탁드립니다. 닉시가 여길 떠날 수 있게 설득해 주십시오.”
벤자민은 닉시에게 그들이 ‘같은 부대에 있던 사이’라고 들었을 때부터 그들의 사이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환경에서 먹고 자고 살고를 함께 한 사람. 서로 꺼져라, 죽어라 하지만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일 것이다.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저희가 해 드릴 수 있는 범위 안의 원하는 모든 걸 다 들어드리겠습니다.”
“……근데 그걸 왜 나한테 부탁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그 절절한 이야기는 벤자민에겐 그다지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왜냐면 벤자민은 그녀의 전우도 아닐뿐더러, 소중한 사람도 아니니.
없어선 안 되는 사람이 아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었으니까.
근데 그런 걸 왜 남에 불과한 저한테 부탁하는 건지. 벤자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벤자민 씨는 그 녀석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겁니다.”
벤자민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내가 그 녀석의 고집을? 소중한 사람일 법한 저들의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인데, 저가 무슨 수로?
“제가 상관할 일은 아닌 것 같…….”
“달링에게 들었습니다. ‘찾으시는 그림’이 있다고.”
제키가 말했다.
그림. 자세한 설명이 없음에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엠마오의 그리스도. 그의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제 상관이 그림 수집을 좋아하시거든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소장하고 계시지만, 박물관에 기증도 꽤 하시는 분이라, 상관의 이름만 대면 웬만한 작품은 다 볼 수 있는 정도죠.”
“…….”
“그걸 찾아드리겠습니다.”
―쿵쿵.
여전히 심장이 요동쳤다. 누군가 옆에 있으면 그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을 만큼.
문득 벤자민은 지뢰 파편을 들고 있는 손끝이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제키 마티아스의 짙은 붉은색의 눈동자는 제 말에 조금의 거짓도 없다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허풍처럼 떠들어대는 누군가와는 달랐다.
벤자민은 왠지 그녀의 올곧은 시선을 바라보기 힘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정의롭고 진실만을 말하고 있었으며, 저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진심으로…… 진심으로 자신이 찾는 그림을 보여 줄 것만 같았기에.
그가 살풋 입을 열었을 때였다.
“벤자민!”
길버트와의 대화를 끝낸 닉시가 달려와 그의 등에 덥석 업혔다.
“집에 가자고! 이대로 날 가만히 놔두면 이 지뢰밭에 잠들어서 마을에 큰 걱정을 끼칠지도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너랑 집으로 돌아가 줄게!”
“……두 다리 멀쩡하면 내려가.”
“으아악, 다리가 말을 안 듣는다……. 어? 근데 이 넓은 등은 뭐지? 들것보다 승차감이 좋은걸?”
닉시가 벤자민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저를 업고 가지 않으면 숨통을 조이겠다는 무언의 항의였다.
“그보다 무슨 이야기 중이었어?”
닉시가 물었다.
제키와 필립은 대답 대신 그냥 벤자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닉시가 그들을 번갈아 봤다. 그녀의 시선은 마지막으로 벤자민에게 머물렀다.
벤자민은 닉시가 매달리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트렸던 지뢰 파편들을 주워들었다.
“그럼 우린 바빠서 말이야! 먼저 갈게, 길!”
“우리도 있는데, 달링.”
“응, 꺼져~”
닉시는 제키에게 중지를 들어 보였다. 보증까지 선 사람들에게 너무한 처사였다.
가자 화가. 닉시가 말했다.
딱히 귓가에 속삭이는 것은 아니었건만 그녀가 제가 딱 붙어 있어서일까, 속삭이는 것처럼 들렸다.
“벤자민 씨.”
“…….”
“닉을, 부탁합니다.”
필립이 말했다.
“뭐야 새삼스럽게. 난 내가 알아서 한다고.”
닉시는 뭐 그런 걸 부탁하냐는 듯 핀잔을 줬다.
그러나 부탁받은 벤자민은 알고 있었다.
이번에 저 부탁은 그녀를 맡긴다는 게 아니라는 것을.
그가 맡긴 건, 제 선택이었다.
벤자민은 고갤 돌렸다.
나무에 매달린 코알라처럼 그의 등에 매달려 졸리다고 웅얼대던 그녀는 정말로 돌아오는 길에 업힌 채 잠이 들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벤자민은 가장 먼저 닉시를 침대에 눕혔다. 그리곤 맨발로 돌아다닌 탓에 그녀의 발이 흙투성이인 것을 보고 얼굴을 찌푸렸다.
몰랐을 땐 몰라도, 알아 버린 이상 가만둘 순 없었다.
벽난로에 불을 지펴 물을 데웠다.
적당히 따뜻한 물에 깨끗한 수건을 적셨다.
그는 그것으로 그녀의 발을 닦았다.
흰 수건이 하얀 발 곳곳을 훑고 지나갔다.
무의식중에도 간지러운 건지 그녀가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러면 그는 잠잠해질 때까지 가만히 지켜보다가 조용해지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링에게 들었습니다. ‘찾으시는 그림’이 있다고.] [그걸 찾아드리겠습니다.]벤자민은 살아오면서 수많은 선택의 기로를 겪었다.
그중에선 물감 색을 고르는 정도의 사소한 것도, 목숨을 부지하냐 잃느냐 정도의 버거운 것도 있었다.
이것도 그 기로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