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7_5
“녀석들이 살아 있다고 믿고 있는 한, 달링의 몽유병은 고쳐지지 않을 겁니다.”
제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는 말은…….’
그녀가 찾는 전우들을 모두 구마시키면 몽유병이 낫는다는 건가?
드디어 실마리를 찾은 벤자민의 머리 위로 커다란 느낌표가 떠올랐다.
“……그래서 궁금한 건 다 해결되신 겁니까?”
“어느 정도는요. 이젠 뭘 해야 할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본인의 새벽잠을 지키기 위해 닉시가 찾는 원혼들을 전부 퇴마한다.
벤자민이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흐음…….”
그 모습을 보던 제키의 한쪽 입꼬리가 샐쭉하게 올라갔다.
때마침 창고가 있는 문 쪽에서 쿠당탕하는 소리가 들렸다. 작물로 테트리스 하던 게 드디어 무너진 모양이었다.
머지않아 안쪽에서 으아악 하는 단말마의 비명도 함께 울렸다.
벤자민과 제키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다녀와 봐야겠습니다.”
“그럼 차 대접도 받아봤겠다.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도와주고 가시죠.”
“……눈치가 빠르시군요. 도망치려 했는데.”
제키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창고 쪽으로 향했다.
“아 참.”
막 소매를 걷은 벤자민이 그녀의 작은 감탄사에 그녀를 바라봤다.
“닉시가 아직도 꿈에서 노엘 대장을 찾습니까?”
* * *
노엘.
그는 처음 듣는 생소한 이름이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이름.
“화가! 오늘은 고구마 순 따다가 볶아먹을까? 술안주로 딱인데.”
테라스에 이젤을 놓고 앉아 있던 그가 그 목소리를 듣고 고갤 들었다. 저 멀리 넓은 고구마밭 한가운데에서 닉시가 손을 흔들었다.
봄부터 고구마가 풍년일 거라고 떵떵거리더니, 그녀의 말대로 고구마 이파리들이 해바라기밭 못지않게 무성했다.
닉시가 풍성하게 꺾은 고구마 줄기들을 한 아름 짊어진 채 웃었다.
그는 네 맘대로 하라는 의미를 담아 고갤 끄덕였다.
멈춰있던 연필을 다시 들었다.
―사각사각.
캔버스 위엔 그가 끄적인 닉시의 집 마당이 스케치돼 있었다.
마당이 농기구니 비료니, 잡동사니들로 워낙 엉망진창이어서 스케치만 했을 뿐인데도 그림이 여백 없이 꽉 차 있었다.
마치 꽉 들어찬 그녀의 집같이.
닉시의 의뢰를 마치고 당분간 그림은 그리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의도치 않게 불편한 이웃의 집에 유폐된 후, 유감스럽게 폐관 수련하게 된 그였다.
모든 게 다 낯선 가운데 캔버스 앞이 그나마 저가 안심할 수 있는 제 자리였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기도 했다.
‘대장……이라면, 상관이었나.’
그는 고구마밭의 넓적한 이파리를 따라 그렸다. 닉시가 꼼지락거리는 장소였다.
‘아니면 동료? 아니,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지.’
고구마밭에 있지도 않은 이삭 줍는 사람이 스케치 됐다.
벤자민은 저도 모르게 스케치해 버린 닉시를 벅벅 지웠다.
그렇게 지운 닉시만 벌써 다섯이었다.
애초에 제가 왜 신경 쓰는 걸까. 고작 사람 이름. 꿈에 나오냐 어쩌고 그런 식으로 물어봤단 건 이미 죽은 사람이란 말일 텐데.
닉시, 본인은 살아 있다고 믿는, 이미 죽은 사람.
그는 가만히 아침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닉시가 아직도 꿈에서 노엘 대장을 찾습니까?] [……노엘?]그가 그렇게 반문하자 제키는 괜한 걸 말했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 별거 아닙니다.]별거 아니라고 말하는 것치고 별거 아닌 건 드물다. 별거니까 물어본 걸 테니까.
그런 경우는 보통 두 가지. 첫째론 얼버무리기 위한 변명이거나, 둘째론 감춰야 할 비밀이거나.
“……가.”
‘아니면 별거가 별거했다는 의미의 별거라든가.’
“……화가?”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역시 잠을 못 잤더니 머리가 맛이 갔군.’
“화가!”
벤자민이 귓가에서 외치는 낭랑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그곳엔 언제 왔는지 흙투성이의 닉시가 서 있었다.
“뭘 그리 곰곰이 생각해? 인류의 미래에 도움이 되는 진지한 생각?”
“아니.”
“그럼 방해해도 되겠네. 이것 봐! 엄청나게 큰 블루베리를 수확했어! 그것도 돌연변이인 하얀색 블루베리.”
“그건 블루베리가 아니라 굼벵이야.”
닉시가 빛의 속도로 굼벵이를 던져 버렸다. 그녀의 턱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 아무튼. 뭐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는 거야? 이렇게 가까이 와도 눈치 못 채고 말이야. 평소엔 내가 스컹크인 거처럼 굴었잖아, 너.”
닉시의 지적에 벤자민이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신경 쓰이는 거? 있다. 왜 신경 쓰이는진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그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거.
노엘, 노엘. 성탄절의 딴따라 캐럴을 떠올리게 하는 이름.
어릴 때부터 산타가 도망치고 없던 벤자민으로선 기분 나쁘기만 한 날짜를 생각나게 하는.
그래, 영문 모르게 불쾌한. 그 이름의 주인.
“노엘.”
“…….”
“네 직장 동료…… 그러니까 제키 마티아스가 묻더군.”
[달링이 찾는 그 녀석들, 사실 이미 다 죽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달링은 녀석들의 죽음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 녀석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죠. 그래서 계속 찾는 거고.]제가 몽유병을 앓는 건 모르는 눈치고, 그자들이 살아 있다고 믿으니까…….
“노엘…… 그 사람은 뭐 하고 지낼 거…… 같냐고…… 물어보던데.”
그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저렴하고 뜬금없는 변명이었다. 그는 고갤 들어 닉시를 바라봤다.
“노엘?”
닉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마치 왜 그런 쓸데없는 걸 물어보느냐는 듯이, 의아한 기색으로.
“선배는 이미 죽었어.”
“…….”
그녀는 뺨에 소름이 돋았던 자리를 긁적였다.
“제키가 그런 걸 물었다고? 거참. 이상한 놈인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그런걸 왜 묻는지 모르겠네. 최근에 천국이라도 보고 왔나? 아니면 강령술이라도 했대?”
그는 이상한 기시감 같은 걸 느꼈다.
“죽은 걸…… 알고 있어?”
“어?”
닉시는 잠시 그를 빤히 바라보다, 하늘을 잠깐, 땅을 잠깐. 그리고 다시 그를 응시했다.
“당연하지. 내가 죽인 셈이니까.”
그는 문득 그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냈다.
닉시는 그 이름이 나왔을 때부터 무표정이었다.
* * *
저녁으론 닉시가 말했던 볶은 고구마순과 오믈렛. 설탕과 소금을 잔뜩 넣어 극단적으로 달고 짠 당근 스튜였다.
식사 후, 평소처럼 닉시가 테이블을 닦았고, 벤자민이 엉망이 된 부엌을 정리했다.
“차 마실래?”
“커피.”
“무슨 밤에도 커피야, 불면증도 있으면서. 캐모마일 마셔.”
“……그럴 거면 대체 왜 물어본 거야.”
늘 그랬던 것처럼 차를 마시고 벤자민은 원서 번역을 마무리하고, 닉시는 그 옆에서 십자말풀이를 풀었다.
한 달 치 십자말풀이를 몽땅 해치워 버린 그녀가 미동도 없는 그를 콕 찔러 봤다.
“무슨 생각해?”
“……무슨 생각을 해. 그냥 일하는 거지.”
“그런 거 말고. 지금 어떤 걸 떠올리고 있냐고.”
이렇게 상대의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은 애매한 질문을 받으면 벤자민은 늘 곤혹스러웠다.
‘뭘 떠올리냐니. 아무것도…….’
그는 잠시 고뇌하듯 미간을 좁혔다가 닉시의 새빨간 눈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너 오밤중에 간식이 먹고 싶다는 거지.”
“정답.”
벤자민은 그녀의 블랙홀 같은 위장도 익숙해져 갔다.
“그럼 잘 자!”
간식을 억지로 먹임 당하고 더부룩함이 익숙한 밤이 되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 밤 인사를 받는다.
그는 인사하지 않았다. 잘 자, 혹은 안녕해도 그녀는 인사가 무색하게 그의 새벽을 방해할 테니까.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은 자고 만다.
벤자민은 피곤한 눈을 꾹 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약은…….’
먹지 않은 채로.
‘됐어. 이런 거 없어도 지금처럼 피곤하면 지쳐서라도 자겠지…….’
괜히 구구절절한 핑곗거리를 찾으며 그는 소파에 몸을 뉘었다.
어차피 새벽이면 그 녀석 때문에 깰 테니까. 약 같은 거 없어도 괜찮을 것이다.
[당연하지. 내가 죽인 셈이니까.]어차피 언젠가는 알기 싫어도 알게 될 테니까. 그런 거 몰라도 괜찮겠지.
“…….”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그는 영문 없이 불편한 잠자리에서 편한 자세를 찾아 이리저리 뒤척였다.
그렇게 이상하게 꼬인 생각들과 어영부영 잠든 새벽.
“…….”
“…….”
“……하아.”
벤자민은 제 몸에 올라타 제 목을 꽉 끌어안고 있는 불청객을 보곤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괜찮지 않았다.
그녀의 몽유병은 더 심각해졌다.
* * *
“와……. 진짜 와 주실 줄은 몰랐어요.”
정기적으로 열리는 마을 회의를 위해 사람들이 모이는 마을 회관 앞.
길버트는 벤자민과 닉시를 신기하단 눈으로 바라봤다.
진녹색으로 포인트 컬러를 맞춘 모습. 누가 봐도 커플룩이었다.
벤자민은 목 끝까지 잠근 단추를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길버트가 닉시에게 다가가 조용히 속삭였다.
“뭐야 닉시. 벤자민 씨를 어떻게 설득한 거야?”
“나도 몰라. 그냥 며칠 기분이 안 좋더니 갑자기 마을 회의에 참석하겠다더라? 사춘긴가?”
“무슨 심경의 변화인 거지……? 나 좀 무서운데. 닉시, 너 혹시 벤자민 씨를 죽이겠다거나, 아니면 벤자민 씨의 인생을 망가뜨리겠다거나, 벤자민 씨가 이 세상에 서 있지 못하게 하겠다고 말한 건 아니지?”
“내가 그렇게까지 쓰레기로 보여?”
길버트는 구석 중 가장 빛이 들지 않는 음침한 자리를 바라봤다. 언제 도망친 건지, 그곳엔 벤자민이 찌그러져 있었다.
평소에도 음울한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음침했다. 며칠은 못 잔 사람처럼 피곤해 보이기도 했다.
“혹시 이곳을 테러하실 의향이 있는지 물어봐.”
“응.”
“그게 아니면 누구를 죽이고 싶으신지.”
“쟤가 그렇게까지 미친놈으로 보…… 아니 잠깐. 혹시 마을 사람들이 다 모인 장소에서 날 처단하고 공개적으로 돌아온 싱글이 되려는 셈인가.”
화가의 등장에 놀란 건 마을 이장뿐만이 아니었다.
마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또한 원치 않는 상견례 자리에 온 것처럼 아주 가시방석이었다.
물론 마을 사람들은 오베르 실세 길버트에게 ‘사정이 있어서 둘이 사기 결혼을 했다’는 자초지종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을의 최고 광대가 또 무슨 일을 쳤구만, 껄껄! 하고 웃기까지 했다. 하지만.
“……길버트, 우리 회의는 언제 끝나오?”
“유감이지만 아직 시작도 안 했어요, 매튜 할아버지.”
“이상하게 뒷머리가 뜨거워서 물었다오……. 허허…….”
하지만 저렇게 험상궂은 표정의 독일인이 맨 뒤에 앉아 저들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오길 원하진 않았다.
이건 뭔가, 설마 비밀을 누설하면 저들을 어떻게 해 버리겠다는 암묵적인 시위인가.
이러한 불편한 눈치싸움이 이어지는 가운데, 마을의 이방인들이 도착했다.
“뭐야. 왜 이렇게 조용, 앗 씨 깜짝아.”
마구간 주인인 파스칼이 문 옆에서 무거운 분위기를 풍기는 벤자민을 보고 흠칫했다.
그의 뒤로 연구원, 교수, 상인으로 이뤄진 세 명의 관광객이 참관을 위해 들어왔다.
그들의 뒤로 짙은 붉은 머리칼의 여성과 은빛 머리의 청년도 고갤 내밀었다. 닉시의 전 직장 동료들이었다.
“저희도 참관 가능하다면서요! 조용히 구경만 하고 있겠, 앗 씨 깜짝아. 벤자민 씨, 왜 그리 죽상이에요. 나라 망했습니까?”
그 녀석의 나라는 아마 그럴걸.
마을 사람들의 소리 없는 아우성이 이어졌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의 잇따른 등장에 분위기는 어색하게나마 풀렸고, 길버트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회관에 온 걸 확인한 뒤 큼큼 말을 이었다.
“크흠. 그럼 마을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주요 안건은 네 가지였다.
기각. 사유, 마구간의 말이 두 마리뿐이라 힘들다.
결론. 마구간 말 토르는 종족 번식과 헥토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
헉, 주인이 있었어요? 그거 제가 서리했는데요……. 죄송합니다!
결론. 닉시, 프릭 아저씨에게 벌금 70유로 지급.
미리 준비 안 했다가 한해 농사 망하는 사람이 매년 있었으니, 재깍재깍 대비하도록!
결론. 강풍 주의 요망!
“……일단 이건 보류할게요. 의견이 너무 분분하네요.”
길버트가 막 활활 타고 있는 토론을 진정시켰다.
마을 이장이 임시 종결의 의사를 내비쳤지만, 회관 안은 여전히 의견이 쟁쟁했다.
“파는 게 낫지 않겠어? 어차피 그 밭은 여태 쓰지도 않았잖아.”
“맞아. 만약 저 사람들 말대로 판 땅에 병원이나 기차역 같은 게 생긴다면, 마을이 발전할 좋은 기회고.”
넓고 평탄한 제비꽃밭을 팔지 않겠느냐 하는 안건. 마을에 관광 온 세 명의 이방인들이 꺼낸 문제였다.
“하지만 건물이 들어서면 분명 나무나 풀들을 다 헤집어 놓을 거 아닌가. 지저분한 쓰레기들도 나올 거고. 그럼 그런 건 결국 우리가 처리해야 할 걸세.”
“그건 그렇죠.”
의견은 딱 반반으로 떨어졌다. 팔자, 팔지 말자.
서로 의도는 명백했고 또 납득이 안 가는 것들도 아니었기에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닉시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땅에 좋은 거 만들어 주겠다는 건 알겠는데. 좋은데, 나쁜 걸 만드는 거면 어떡하려고요?”
“좋은데, 나쁜 거?”
마을 사람들이 닉시의 말에 반문했다.
“예로 들면 마약이나 불법 수입품 밀거래상이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의견은 꽤 뜨악스러웠다.
마을 사람들이 경악하든지 말든지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사람들이 은밀히 많이 올 테고 돈도 술술 잘 돌아갈 테니 좋은데, 음……. 도덕적으론 나쁘잖아요? 애들 가르치는 학교라고 짓다가 완성되고 보니, ‘마약 카르텔이 만들어졌어요.’ 할 수도 있는 거고요.”
닉시의 말에 발끈한 교수와 연구원이 자릴 박차고 일어났다.
“지금 우리가 그런 걸 만들겠다고 말하는 건가?”
“말이 그렇다는 거죠. 인생은 원래 의도치 않게 요상한 곳으로 흘러가는 법이니까.”
닉시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자자.”
길버트는 박수를 두 번 짝짝 쳤다. 닉시도 씩씩거리던 교수와 연구원도 마을 이장을 바라봤다.
“이건 나중에 다시 회의할게요. 두 분 다 앉으세요. 닉시 너도.”
옛썰, 롸져. 닉시가 파리 쫓듯 대충 경례하곤 자리에 앉았다.
팽팽했던 공기가 어영부영 흩어졌다.
“자자, 그보다 회의 끝나고 티 파티 있는 거 아시죠? 저 뒤에 있는 닉시의 친구분들께서 준비해 주신 자리니까 재밌게 즐기다가 돌아가세요!”
길버트가 마을 회관 밖을 가리켰다.
언제 놔둔 건지 회관 밖 넓은 공터엔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올 게 왔다. 마을 이장이 미리 단단히 입막음해두었던 사기 결혼을 위한 티 파티.
마을 사람들은 닉시의 친구인 제키와 필립이 결혼정보회사에 다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오랜 시간 솔로였던 닉시를 회사에 팔아넘겨 본인들의 실적을 올리려 하는 극악무도한 도시 사람들.
그들은 각자 긴장 반, 설렘 반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이 빠져나가는 회관을 보며 길버트가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흘긋 회관 입구 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마을 사람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길버트에게 땅을 파는 건 어떻냐 물었던 교수와 연구원.
겉으로 봤을 때 무척 선량한 인상의 사람들이었다. 똑똑해 보이기도 했고.
뭐, 아무튼 이런 일로 사기를 칠 것 같은 사람 같아 보이진 않았다.
‘겉으로 판단할 순 없지. 나도 꽤 잘생기고 선량한 인상이지만 속이 시커머니까.’
암암. 길버트는 고갤 끄덕였다.
분명 좋은 기회긴 한데…….
“길! 뭘 혼자 끄덕이고 있어!”
동시에 그를 부르는 닉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회관 앞에서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그는 알겠다는 의미를 담아 손을 마주 흔들어 주었다.
‘이상하게 찜찜하단 말이지……’
제키와 필립이 준비한 회관 앞, 티 파티장은 마을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화려하고 그럴싸했다.
회관 꼭대기에서부터 건너편에 있는 나무까지 전구와 흰 천을 연결해 꾸민 뒤, 테이블들 위엔 표면이 반질반질한 흰 식탁보를 덮어 두었다.
서서 먹을 수 있도록 마련해 놓은 긴 테이블 위에 간단한 다과와 홍차들이 있었고, 어르신들을 위한 테이블엔 푹신한 의자와 부드러운 식감 위주의 디저트들이 놓여 있었다.
호두 타르트와 잘 구워진 스콘. 생크림을 듬뿍 얹은 마들렌. 머핀인 척하는 브라우니. 쿠키인 줄 안 브라우니, 그냥 브라우니. 단 걸 싫어하는 사람들을 위한 뜬금없는 메뉴, 미트볼 맥주 세트.
그야말로 작정하고 준비한 티 파티장이었다.
“지금 마리 앙투아네트 여왕 시대야?”
투박한 시골관 거리가 있는, 마치 중세시대 귀족 영애들이 쓸 법한 다과회장 같은 분위기에 닉시가 머릴 긁적이며 말했다.
마을 어르신들도 휘황찬란 준비된 디저트들에 눈이 휘둥그레져 있었다. 그냥 일터에서 입던 바지 앞치마들을 덜렁 입고 왔는데, 이건 무슨 베르사유 박물관의 귀족 옷들이라도 주워 입고 와야 할 것만 같지 않은가.
“내 취향이거든. 불만 있냐?”
“……네가 이런 고상한 취향이 있었는지 몰랐네, 제키. 어쩐지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더니.”
“라울이랑 그레타 양. 샬롯 어르신이 한 솜씨 해 주셨어.”
제키가 오늘 다과를 만들어 준 세 명의 셰프들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오베르 주민 여러분. 저는 이 마을 주민인, 저희의 친한 친구 닉시를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제키가 맥주잔을 들고 간단하게 파티의 시작을 알리는 멘트를 날렸다. 상투적인 인사가 끝나고, 각자의 티 파티가 시작됐다.
명색이 결혼 축하를 위한 자리인 만큼, 닉시와 벤자민은 가장 소란스럽고 시끄러운 중심에 있었다.
그녀의 테이블엔 닉시의 첫 친구 길버트와 벤자민의 친구……? 라울. 그런 라울을 짝사랑하는 그레타, 닉시가 애정하는 비티가 앉았다.
“이 많은 파이를 라울이 다 만들었다구요? 힘들었겠는데요?”
“그레타 양이 도와줘서 그렇게 힘들진 않았어요. 그리고 돈이 되는 거면 뭐든 다 하는 게 제 인생 철칙이랍니다.”
“하긴 제키가 돈이 많긴 하죠. 솔직히 말해 봐요. 얼마나 받았어요?”
라울은 웃으며 손가락 몇 개를 들어보았다. 히엑, 정말요? 저 미친놈. 친구의 씀씀이에 기겁하는 표정이 웃겼던 건지 닉시 옆에 앉아 있던 비티와 길버트가 키득대며 웃었다.
벤자민은 그런 닉시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가……’
[……이봐.] […….] [……뭐라고 말 좀 해 봐.]저 걱정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여자가 어딜 봐서 새벽녘의 제 잠을 방해하는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건지.
[……울지만 말고 제발.]벤자민은 사흘 전부터 시작된 기묘한 새벽녘을 떠올렸다.
정확히는 ‘노엘’이라는 이름을 들은 직후. 닉시에게 그가 누군지 물었던 날부터 시작된 새벽을.
그날부터 닉시는 이상해졌다.
물론 평소엔 이상하지 않았단 말은 아니었다. 평소에도 이상했지만, 이번엔 뭐랄까. 좀 더…… 그녀답지 않았다.
창 앞에 서서 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건 여전했다.
그날도 그랬다. 거기까진 똑같았다.
그래서 벤자민은 조금이라도 일찍 잠들기 위해, 그녀가 찾는 죽은 동료들을 차근차근 성불시키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잠꼬대에 가까운 닉시의 중얼거림이 끝나면 그녀는 늘 끈 떨어진 연처럼 까무룩 잠이 들었으니, 그때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는 그 누구도 찾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을 뿐. 숨소리는 평소처럼 조용했기에 울고 있단 사실도 뒤늦게야 알아차렸다.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크게 당황해 숨을 들이켰다.
“이봐.”
그가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어디 아프냐고 묻기도, 악몽이라도 꿨냐며, 아니면 꾸는 중이냐 물었지만, 대답은 없었다.
그렇게 길잃은 애처럼 우는 닉시를 앞에 두고, 그는 깊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잠은 이미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고, 눈물을 흘리는지도 모른다는 듯 멍하니 우는 꼴을 계속 보고만 있을 순 없었다.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아도 그녀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어깨를 흔들어 봐도, 이름을 불러도 그녀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천천히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어린아이를 달랠 때 그러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어쩔 줄 모르게.
“이유라도 알면 달래라도 볼 거 아냐.”
그가 중얼거리며 품에 안은 그녀의 머리를 어색하게 토닥였다.
조용한 방 안, 그는 제 심장 소리가 가장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안 하던 짓을 하니 죽을 것만 같단 본능적 거부감을 꾹꾹 눌러 참으며.
“울지 마.”
그와 그녀 둘 중 하나라도 제정신이었다면 하지 않았을 법한 말을 꺼냈다.
그 뒤로 닉시는 창문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에 귀를 대고 숨죽여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벤자민은 죽어도 오기 싫었던 티 파티에 오게 된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잠을 못 자서 죽을 거 같았으니까!
그동안 시달렸던 새벽을 떠올리자 괜스레 심장이 또 쿵쿵대기 시작했다.
귓불과 이어진 목 언저리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그는 깊게 심호흡했다.
그래. 이건 분노다. 혹은 그동안 잠을 못 잔 스트레스가 쌓여서. 그것도 아니라면 원망. 증오. 저를 매일 밤 이 꼴로 만들어 놓고 정작 본인은 잘만 잔, 반질거리는 얼굴을 향한 질투.
‘제키 마티아스는……’
휘휘 주윌 둘러보던 벤자민의 시선에 저 멀리 시끄럽게 웃고 있는 제키가 들어왔다.
그녀는 마을에 놀러 온 관광객들과 포커를 치고 있는 듯했다.
그러니까 노엘이 누군지 알아낸다. 반드시.
알아내서 반드시 성불시키든, 구마를 하든, 퇴마를 하든……
벤자민은 결심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유령 퇴…… 화장실.”
“응? 뭐 그래, 쾌변!”
조만간 본인의 무언가가 물리적인 퇴마를 당할지, 초자연적인 성불을 당할지도 모르건만, 닉시가 해맑게 인사했다.
벤자민은 푹 자서 뽀얗기만 한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휙 고갤 돌렸다.
* * *
“어차피 그 밭은 쓸모 없었잖아. 이참에 팔아 버리는 게 낫지.”
“이야. 자네하고 모처럼 의견이 같구만.”
흐으음. 제키는 저가 들고 있는 빨간 하트 에이스 패를 지그시 바라봤다.
이 순박한 마을 사람들은 내기 포커를 해도 몇 푼 안 되는 짤랑이들을 판돈이랍시고 걸었다. 늘 몇백 유로가 왔다 갔다 하던 것만 봐 왔던 그녀로선 소꿉놀이나 다름없었다.
“그 제비꽃밭은 폭격 때문에 관광지로는 못 쓰게 되었잖소. 농사를 짓자니 주인이 없는 땅이라 지분을 나누는 데 어려울 거고.”
“폭격?”
제키가 고개를 갸웃했다.
“하긴 도시 사람들은 몰랐겠군. 여긴 5년 전 폭격이 있었던 곳이라오. 나치 놈들이 마을이 있던 곳에 무차별적으로 폭탄을 투하했지.”
그때를 회상하는 건지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우악스럽게 구겨졌다.
“그때 폭탄 몇 개가 마을 근처에도 떨어졌다오. 다른 마을에 비하면 큰 피해는 없었지만, 그날 제비꽃밭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소.”
‘5년 전 이 근처라면…….’
쿠키를 먹던 필립이 곰곰이 생각했다. 옆에 있던 제키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봐 도련님. 5년 전에 남부에 있던 공습이라면……”
“응. 우리가 생화학 무기를 개발해서 녀석들을 기습했던 때야.”
“아하……. 닉시 녀석이 자기가 군인이라 밝히지 않은 이유가 있었네.”
궁지에 몰렸던 국군이 화학 무기를 개발해서 기습했고, 나치는 그 무기로 인한 피해가 꽤 막심했다.
결론적으론 그 생화학 무기가 나치를 자극한 셈이 됐고 나치는 본보기랍시고 프랑스 남부의 민간인들이 사는 곳을 폭격했다.
“숨길 생각은 없었는데, 우리가 군인이었다는 걸 말하면 여러모로 곤란해지겠네.”
제키는 저가 들고 있는 패들을 테이블에 던졌다. 마을 사람들은 그녀의 여덟 번째 승리 앞에 도박꾼이냐며 야유를 보냈다.
“하하! 그렇게 억울들 하시면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곳에서 6년간 포커만 쳐 보시죠!”
제키는 웃으며 푼돈을 수거해 갔다.
“허허. 전쟁통 내내 포커만 쳤다는 겐가?”
“그럼요, 영감. 참고로 절 이길 수 있는 라이벌들은 이 세상에 없다고요. 다 저세상 갔수다.”
“나랑 똑같구만. 나도 내 체스 친구들은 전부 죽어 버렸지.”
“오호 그럼 영감님이 제 라이벌 해 주시겠습니까?”
“죽으라는 말을 참신하게 하는구먼, 젊은이.”
제키와 마을 사람들이 농담하는 동안 필립은 바람을 쐬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새 하늘은 어슴푸레했다. 해가 저무는 들판은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고 하늘은 남색도, 보라색도 아닌 애매한 빛으로 얼룩덜룩했다.
필립은 시끌벅적한 티 파티장에서 조금 떨어진 소나무 아래로 가 밀밭을 바라봤다.
그가 주머니에서 시가 하나를 꺼내 물었을 때였다.
“……하실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그는 마른 갈대 같은 머리칼을 가진 남자에게 물었다.
벤자민은 흩뿌려지는 뿌연 담배 연기를 흐트러뜨리며 필립에게 다가왔다.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겠죠. 저도 마침 묻고 싶은 게 있었는데.”
필립. 그가 닉시를 처음 본 것은 그가 11살 때였다.
저와 겨우 한 살 차이. 부모가 어릴 때 죽어서 길바닥 거지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의 눈에 든, 굴러온 돌.
첫인상은 말라빠지고 볼품없는 놈이었다. 머리도 쥐 파먹은 것 같은 아주 짧은 단발이어서 그녀가 여자라는 것도 나중에야 알게 됐다.
1년 뒤. 학교를 한 번도 안 다닌 주제에 3살 위의 형과 함께 사관학교 리쎄(*고등학교) 과정을 배우게 된 천재라는 이상한 녀석.
그 녀석은 존재만으로 자존심을 긁어댔다.
“형! 형은 짜증 나지도 않아? 말이 안 되잖아! 글도 제대로 못 쓰는데 형이랑 같은 학교, 같은 학년이라니!”
그럼 형은 그냥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만 했다.
건방진 놈. 그런 주제에 저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하는 놈. 알고 보니 진짜 나이프질도 못 하는 띨띨한 놈이어서 사람 속을 더 뒤집어지게 만드는 놈.
언젠가 그 잘난 척하는 콧대를 꺾어 줄 거다.
그러니까 죽었다 깨는 한이 있어도 내가 저 녀석을 인정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그녀의 ‘선배’에 대해서 알고 있으십니까.”
벤자민이 물었다.
필립은 속 깊이 매캐한 박하 연기를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노엘 휴거 말씀이십니까.”
그의 말에 벤자민이 내심 놀란 눈을 했다.
그는 반 박자 늦게 고갤 끄덕였다.
필립이 눈을 들어 벤자민을 바라봤다.
그 푸른 눈이 그걸 물어보는 이유에 대해 가늠하듯 시리게 빛났다.
그녀의 몽유병 때문에 잠을 못 잔다고, 매일 밤 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운다고. 그래서 그 이유를 알기 위해 물어본다 했으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왠지 그 이야기는 지금 꺼내면 안 될 것 같았다.
눈앞의 이 남자도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지만 왠지. 어쩐지.
닉시의 닉시답지 않은 모습을 굳이 떠벌리고 싶지 않았다. 진짜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랬을 테니.
벤자민은 그냥 침묵했다.
필립은 어련히 알아서 그 침묵을 이해했다. 그도 어쨌든 닉시와 오래. 아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였고, 그녀의 선배가 죽은 이후 그녀를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되었으니까.
필립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언제 어디서 보더라도 늘 그랬듯 푸른 빛이었다.
노엘 휴거.
과거 23사단 8소대의 소대장.
사격이면 사격. 통솔력이면 통솔력. 뭐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대단한 남자였다. 키는 저보다 훨씬 컸고, 강직해 보이는 푸른 눈을 가지고 있었으며, 늘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제 형입니다.”
“…….”
벤자민은 왜인지 모르게 상념에 젖은 듯한 필립의 옆얼굴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야 그렇겠지. 노엘 ‘휴거’라고 했으니.’
그리고 제 옆의 남자는 첫 만남에 저를 ‘필립 휴거’라고 소개했다. 같은 성을 가지고 있으면 가족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래서 아까 노엘이란 자의 풀네임을 들었을 때 내심 ‘그랬군……!’ 하기도 했다.
‘형이라는 말에 놀라워해야 할 타이밍이었나.’
그가 뒤늦게라도 놀란 척해 줘야 하나, 진지한 고뇌에 잠겨 있을 무렵, 필립이 다시 입을 열었다.
“2년 전, 콩피뉴 공방전에서 죽었습니다. 유해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
“마지막에 함께 있던 게 닉이었는데, 닉이 제 입으로 죽었다고 말했으니 그런 거겠죠. 그런 데에 형을 두고 농담할 사람은 아니니까.”
필립은 다 피운 담배꽁초를 재떨이에 넣었다.
“그래서 이걸 물어보는 이유는 뭡니까.”
“…….”
필립의 눈이 가늘어졌다.
“……닉이 찾든가요.”
벤자민이 지난 새벽을 떠올렸다.
제 품에 얼굴을 묻고 숨죽여 울던 그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늘 돌아 있는 모습만 보여 준 여자였다. 우는 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뭐 때문에 우는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바보가 아니라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노엘이라는 이름을 들은 뒤부터 저러기 시작했으니, 노엘이겠지.
그는 왠지 모를 불쾌감을 느꼈다.
“뭐…… 비슷합니다. 꿈에서 찾더군요.”
“닉이 꿈에서 형을 찾았다고요?”
벤자민은 필립의 반문에 건성으로 고갤 끄덕였다. 이건 또 뭐에서 오는 불쾌감인지. 바닥에 눌어붙은 껌을 밟은 것만 같았다. 무시하고 싶어도 자꾸 발을 붙잡아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
‘만약 그녀가 우는 게 노엘이라는 자 때문이라면. 그 녀석은 그 사람을…….’
그 사람을 좋아한 건……가?
‘어?’
벤자민은 문득 떠오른 상념의 끝에 살포시 입을 벌렸다.
덕지덕지 붙여 놓았던 이유와 합리화 속, 저조차 자각하지 못했던 아주 작은 본심이었다.
제가 노엘에 대해 궁금했던 이유.
그건 그 남자를 알아서 그 남자인 척 닉시의 몽유병에서 벗어나려 했던 게 아니라, 그녀가 그자를……
“그것참 이상하네요.”
어딘가 모르게 차가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벤자민이 고갤 들었다. 필립의 무표정한 얼굴에 스산한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그 녀석이 누군가를 좋아했던 건지 알고 싶었던 건가?’
“닉은 본인이 죽은 걸 본 적 없는 사람만 찾는데, 형이 꿈에 나왔다니. 그것참 이상하네요. 닉의 입에서 나온 말이 확실합니까?”
비꼬는 게 역력한 필립의 말투에 벤자민이 그제야 저가 말실수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모르고, 그만이 아는 새벽.
그녀는 그저 소리 없이 울기만 했을 뿐, 단 한 번도 누굴 찾지 않았다.
애초에 울기만 했던 그녀가 ‘누굴 찾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라고 추측했던 건,
[……몽유병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우연히 그녀가 몽유병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서. 그녀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비밀을 엿봐서. 그 사실에 괜히 우쭐해져서.
찾는 자가 노엘이라는 사람이라고 성급히 결론지었던 건, 그 사람이 그녀에게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알아 버려서.
[선배는 이미 죽었어. 당연하지. 내가 죽인 셈이니까.]좋았던 사람이든, 싫었던 사람이든 그 한마디에 그자가 그녀에게 큰 존재였음을 짐작하게 돼서.
그녀가 ‘선배 때문에 우는 거냐’라는 사실을 묻고 싶었던 건, 그저 보잘것없는. 하찮은. 유치한. 저도 영문을 모를 질투였다.
“묻고 싶었던 게 있었는데 물어볼 필요도 없겠네.”
필립이 짤막한 비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어지간한 적의엔 무감각해진 그도 날카롭게 벼려진 필립의 악의를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빈정거림과는 별개로 벤자민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다.
질투? 내가? 누굴? 왜?
이어지는 물음표들의 향연에 가뜩이나 잠을 못 자서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 아파 오는 것을 느꼈다.
“당신. 닉에 대한 건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모른다. 모르는 게 당연하다. 몰라야 한다.
제가 왜 그 녀석에 대한 걸 알아야 한다는 건지. 왜 알아야 해서. 왜 사람 속을 뒤집어대는 건지.
“몰라.”
벤자민이 짧게 중얼거렸다.
그 성의 없는 대답에 필립이 눈을 찌푸렸다.
“하, 지금 그걸 자랑이라고…….”
“그래, 모른다고.”
모른다. 그 녀석이나, 눈앞의 이 남자나. 그 녀석이 매일 새벽 질질 우는 이유나, 이 남자가 제게 적개심을 품는 이유나, 제 마음이나.
“……당신의 형이니, 그 녀석의 선배니.”
얼굴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노엘 휴거라는 사람이 싫어졌다.
“애초에 알고 싶지도 않았어.”
그와 그 사이, 긴 침묵이 일었다. 시끌벅적 화려한 티 파티장을 등진 채 그와 그가 있는 곳만 유난히 그림자가 짙었다.
벤자민의 중얼거림을 똑똑히 들었을 텐데도 한참을 입 다물고 있던 필립은 주머니에 넣어 둔 시가를 다시 하나 꺼내 물었다.
―칙.
불을 붙이고, 깊은 한숨과 같은 가느다란 연기가 새어 나왔다.
필립이 입을 열었다.
“당신. 닉과 결혼한 사이 아니지?”
* * *
해가 들어간 뒤, 시골 사람들은 해가 떨어지면 잠자리에 들어야 했기에 아쉽지만 티 파티가 끝나게 됐다.
호화로웠던 디저트 파티에 사람들은 각자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에게 ‘이런 파티를 열어 줘서 고맙네!’ 따위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마을 사람들을 배웅하던 제키 뒤로 필립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왔어? 담배를 대체 몇 개나 피웠길래 이제 와? 폐암 걸려 죽는 게 소원이냐.”
그는 제키의 인사를 무시한 채 빈자리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라. 표정이 안 좋네, 도련님. 담배에서 곰팡이 맛이라도 났어?”
“제키 마티아스.”
“오……. 나 풀네임으로 불리는 거 안 좋아하는데. 꼭 혼날 타이밍 같잖아.”
필립이 얼굴을 구긴 채 제키를 바라봤다.
“네가 그자에게 형에 대해 말했나?”
“누구. 아, 달링의 남편?”
제키가 머리를 긁적였다.
“어. 그랬는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필립은 제키의 멱살을 잡아 쥐었다.
“어이쿠.”
전혀 놀랐다는 느낌 없는 감탄사와 함께 제키의 고개가 필립 쪽으로 기울어졌다.
“형으로 그 남자를 떠봤어? 그 남자가 닉시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형의 이름을 들먹여?”
“진정하라고, 필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