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elds of Auber RAW novel - Chapter 7_4
“…….”
자는 건가?
오밤중에 뜬금없이 일어나 좀비처럼 걸어 다니는 것도 당황스러울 상황이건만, 그녀는 심지어 선 채로 자고 있었다.
[달링 이 녀석. 손버릇이나 잠버릇도 요상하고 말이야.]‘잠버릇이 나쁘단 말이 이건가.’
닉시는 흐린 시선으로 창문 너머를 응시했다. 불빛 하나 없는 새카맣기만 곳.
벤자민은 혹시라도 그녀가 잠결에 물건 같은 걸 쳐서 깨트릴까, 창틀에 오밀조밀 전시해 두었던 작은 화분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억울하게 달아나 버린 잠기운. 의도치 않게 알아 버린 정신 나간 이웃의 정말 정신 나간 밤 사정.
설마 이대로 날이 밝을 때까지 이렇게 창가를 지키는 건 아니겠지. 그가 내심 찜찜함을 내비쳤다.
가정집에 그 흔한 시계도 없다. 덕분에 적막한 집 안에는 소음 하나 들리지 않았다.
기껏 해봐야 선 채로 잠든 이상한 여자의 고른 숨소리.
그녀의 정수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벤자민이 벽에 기대섰다.
“……난 네가 도무지 이해가 안 가.”
무슨 생각으로 저랑 친해지겠다고 난리였는지. 또 무슨 생각으로 저한테 남편이니 허니니 하는 덤터기를 씌운 건지. 무슨 용기로 저를 제 곁에 두고 있는 건지.
“군인이었다면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 죽이겠다 발광했던 사인데.”
저가 증오스럽지도 않은가.
“……이상한 녀석.”
“……디디에.”
그때 멍하니 창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디디에…… 알랭…… 에디……”
“…….”
“아직…… 없어……?”
“그건 누군데.”
“미셸…… 폴…….”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그가 고갤 숙여 닉시를 바라봤다.
정면만을 바라보는 반응 없는 눈동자엔 여전히 그가 비치지 않았다.
‘아직 잠들어 있는 건 맞는데.’
어쩐다.
피곤한 화가에겐 세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같이 사는 부인이 알고 보니 몽유병 환자든 말든 간에 그냥 다시 누워 자는 거고. 두 번째는 살살 달래서 다시 침대로 기어 들어가게 만드는 것. 나머지 하나는 그냥 냅다 깨워 버리는 것.
화가는 그중 세 번째를 선택했다. 가장 빠르고 쉬우니까.
“닉시.”
그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 * *
“들었어? 후퇴 명령이 떨어졌어.”
그녀의 소대에게 주어진 명령은 바다와 인접해 있던 적의 보급로를 기습한 뒤, 그대로 샛길을 돌파하고 나와 연합군과 합류하는 것.
적의 보급로 기습은 성공적이었다.
이제 샛길을 따라 연합군과 합류하면 됐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소대에게 들린 것은 절망적이게도 연합군이 나치 놈들의 미스텔 전투기가 무서워서 이곳까지 돌파하지 못한단 소식이었다.
우린 벌집이 될 각오를 하고 여길 기습했는데. 그놈들은 겨우 하루살이란 이름을 가진 종이비행기에 벌벌 떨고 있다니.
그녀가 하하 웃으며 농담했다. 받아 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뒤로는 바다. 앞으로는 보급로 기습소식에 열불 나서 달려오고 있는 나치의 지원군.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죽는 시시한 상황이었다.
그녀의 선배 노엘 휴거는 “보급로를 탈환했으니 시간을 끌면 우리가 유리하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닉시가 지시한 자리로 비척비척 이동하며 코웃음 쳤다.
정말이지 저 선배는 어쩜 저렇게 짜증 날까. 뭐 저렇게 태연해? 나폴레옹의 피라도 흐르는 건가.
절망이라곤 모르는 사람.
죽는 시간을 하루 정도 벌자는 것뿐인 말을, 왜 그렇게 뭐라도 있는 것처럼 위풍당당 말하냐고. 사람 기대하게. 안 그래?
닉시가 그렇게 투덜거리며 반파된 건물에 숨어 적군한테 총을 갈기고 있을 때였다.
“들었어? 방금. 안 들렸냐고. 뱃고동 소리.”
후퇴 명령이 떨어졌다.
고래가 우는 것처럼 긴 뱃고동 소리. 소리가 들린 곳은 바다 쪽이었다.
노엘 휴거는 곧장 해안가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들이 지휘하는 소대는 명령대로 해안을 향해 필사적으로 뛰었다.
저 멀리, 그들을 구조하기 위한 작은 함선이 보였다. 화물을 싣는 배의 하단을 열어 두고 그들이 그곳에 올라타면 해안을 통해 빠져나갈 모양이었다.
모두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작은 배 하나 눈앞에 보였다고 각오한 절망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발목, 허벅지, 가슴께. 물 때문에 자꾸만 느려지는 걸음을 살겠다고 허우적거리며 옮겼다.
겨우 배 안으로 기어 올라갔다. 제키가 축 처진 닉시의 목에 팔을 두르며 외쳤다.
“살았다. 시발 닉시 우리가 살았다고!”
살았다는 안도도 잠시. 배가 크게 흔들렸다. 해안까지 쫓아온 적군이 발포한 포탄 때문이었다.
“빨리 기어와! 헤엄 못 치면 바닥에 가라앉아서라도 배에 붙으라고!”
그녀는 아직도 배에 타지 못한 전우들을 향해 소리쳤다. 하지만 그 소리보다 배의 합판 위로 쏟아지듯 박히는 소리. 그리고 금속끼리 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와 펑펑 터지는 소리가 더 크게 울려 퍼졌다.
“어? 어! 왜 닫는, 아직 멍청이들이 다 못 탔어! 문 닫지 마!”
—끼익.
뭐? 지금 후퇴 안 하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아니, 뭐 총알 몇 번 맞았다고 배가 구멍 날 거면 기술력이 병신인 거지, 고작 이런 걸로 가라앉을 거면……!
닫지 말라니까? 아직 멍청이들이, 애들이!
미쳤어? 다들 열심히 헤엄쳐오고 있잖아! 이 녀석들 여기 놔두고 가면 죽어!
이거 안 놔? 시발! 놓으라고! 야! 닫지 말랬지!
야 이 병신 새끼들아! 뒤지고 싶냐? 빨리 헤엄쳐 와! 멍청이들아!
디디에! 알랭! 에디!
“닉시.”
그녀는 멍하니 돌아봤다. 그곳엔 멍청이 삼인방 중 한 명이 서 있었다.
“디디에……?”
맨날 정신 놓고 다니던 디디에. 그런 주제에 웃음이 헤퍼서 매일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만든 고기 파이를 배 터지게 먹을 거라며 실실거리던 멍청이 부하.
“이, 이…… 하아. 야, 인마. 내가 너 정신 놓고 있지 말랬지? 하마터면……”
배에 못 탈 뻔했잖아. 널 두고 갈 뻔했다고. 닉시가 작게 속삭였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나른한 분위기의 디디에가 태평히 입을 열었다.
“뭐…… 그랬을 수도…… 있었겠지.”
“그랬을 수도?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어쨌든 난 여깄다고. 그럼 됐잖아.”
“……근데 너 말이 짧다?”
“됐잖아……요.”
하아. 그녀가 벽에 기대 주르륵 주저앉았다.
그래 살았으면 됐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지친 기색이 만연했지만, 다행히 죽은 녀석들은 하나도 없었다. 멍청이 알랭도. 더 멍청이 에디도. 멍청이 계의 제왕 디디에도.
“그래……. 살았으면 됐지.”
뭔가 모르게 이상한 환상을 본 것 같기도 했다.
[우리만 두고 가지 마요! 아직 저 여기 있어요! 가지 말라고! 제발……]그건 뭐였을까.
“……문틈 사이로 네가 애원하는 걸 본 것 같았는데.”
“……예전부터 고약한 취미를 갖고 있었군.”
“뭐?”
“있었군요.”
어휴. 내가 이런 멍청이를 후임으로 둬서.
“넌 내가 첫 후임이라 많이 봐주고 있는 거야. 알지?”
“……많이 힘들었겠군. 요.”
힘들었지. 이번에야말로 진짜 죽는 줄 알았으니.
울렁거리는 선실 안에서 닉시는 벽에 기댔다.
이제야 쌓여 있던 피로감이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디디에.”
“네.”
“……디디에.”
“……네.”
디디에. 그녀가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네. 뒤늦게지만 그녀의 멍청한 부하는 꽤 인내심 있게 대답했다.
이상하지. 디디에는 저가 괜히 이름을 부르곤 하면 늘 얼빠진 촌뜨기처럼 “네, 넵!” 이렇게 대답했는데.
“어디 가지 마.”
“어디 안 갑니다.”
“내 옆에 있어.”
“네. 알겠습니다.”
“넌 좀 바보지만, 착한 녀석이니. 내가 지켜 줄게.”
그러니까.
그녀는 밀려오는 수마 속에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알겠으니까. 푹 주무세요. 감긴 눈꺼풀 위로 그의 부하가 나직이 대답했다.
다음 날 아침. 닉시는 침대 위에서 멀쩡한 모습으로 일어날 수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바닥에 떨어져서 자고 있거나, 집 안 구석에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일어났을 텐데. 멀쩡히 침대에서 일어났다니.
집안에 저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걸 인식해서 저도 모르게 긴장하고 잔 걸까.
닉시는 헝클어진 머릴 하고 비척이며 거실로 나갔다.
“어이 화가 좋은 아침.”
거실에 나오자마자 고소한 버터 냄새와 빵 냄새가 물씬 났다.
닉시는 식욕을 돋우는 향긋한 냄새에 식탁으로 달려갔다.
“뭐야 이 사치스러운 아침 식사는?”
진하게 탄 커피 두 잔과 감자 같이 생긴 빵. 그 옆에는 네모나게 잘린 버터와 얇게 썰어둔 햄이 놓여 있었다.
이게 바로 남편이란 건가. 무보수 아침 식사 제조기.
“일찍 깨서.”
벤자민이 막 삶은 달걀 두 개를 빵 옆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닉시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녀가 곧장 따끈한 빵을 반으로 가르면서 그를 바라봤다.
평소보다 시커먼 색의 진한 커피를 홀짝이는 남자. 그러고 보니 눈 밑도 약간 시커멨다.
“악몽이라도 꿨어? 피곤해 보이네.”
“그럴 일이 있었지. 넌 푹 잔 것처럼 보이는군.”
“응. 웬일로 침대에서 얌전히 일어났거든.”
얌전히? 그가 설핏 눈썹을 치켜들었다. 누군 누구 때문에 잠을 설쳤는데. 얌전히라니.
그러거나 말거나 닉시는 버터 바른 빵에 햄 조각을 길게 놓은 뒤 토마토잼을 발랐다.
‘설마 어제 있었던 일을 기억 못 하는 건가.’
크게 한입 베어 먹는 그녀의 얼굴이 평소처럼 태평했다.
물론 몽유병이란 게 그래서 병이라고 불리는 거긴 하다만……. 그는 커피를 홀짝였다.
“아, 참. 오랜만에 옛날 꿈을 꾼 것 같기도 해. 난 원래 꿈을 잘 안 꾸거든.”
“옛날 꿈?”
“어. 군인이었을 때. 그리운 얼간이들 꿈을 꿨지.”
그녀는 빵을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그동안 꿈에도 한 번 안 나와 주더니, 무슨 바람이 불어서 저를 찾아와 준 건지.
“내가 버리고 갔다고 원망스러워서 안 나와 주는 건가 싶었는데. 그렇게라도 얼굴 보니까 좋더라.”
“……그렇군.”
“한편으론…….”
역시 그때 죽었구나 싶었다.
죽은 사람들은 늘 꿈이나 환상으로 그녀를 찾아왔다. 지키지 못했던 마지막 시간의 모습이기도, 오늘처럼 있을 수 없는 시간의 형태로라도 말이다.
멍청이 삼인방을 그렇게 버린 뒤에 녀석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방법은 없었고, 꿈이나 환상으로도 영 찾아오질 않으니, 혹시라도 살아 있진 않을까 믿었다.
살아 있는 거겠지. 어딘가에서 잘살고 있겠지. 그렇게 여겼다. 꿈을 꾸기 전까지.
“근데 이상한 거 있지.”
“뭐가.”
“디디에 그 녀석은 내가 말만 걸면 굳어서 말을 더듬었거든? 근데 또 오랜만에 내 꿈에 찾아왔다고 아주 시니컬하게 변했더라고. 완전 다른 사람 같았어. 아니, 다른 유령이라고 해야 하나?”
닉시의 조잘거림에 벤자민이 조용히 커피를 홀짝였다.
“아무튼. 이제야 죽었단 게 실감 나.”
아쉽네. 닉시가 중얼거렸다.
* * *
“땅을 파는 게 어떻겠소?”
콧수염 난 연구원 그렉이 입을 열었다.
길버트는 마을의 관광객들과 함께 아침 식사를 들던 참이었다. 마을 이장 길버트가 씹고 있던 호두 파이를 꿀꺽 삼켰다.
“땅을요?”
“어제 봤던 땅 말이오. 폭격이 있어서 놀리고 있다지 않았소.”
‘제비꽃밭을 말하는 건가.’
“오베르가 작은 마을도 아니고, 조만간 철길도 놓인다는 큰 마을에 제법 넓은 땅인데. 그대로 놔두기 아깝지 않습니까?”
아침부터 뜬금없이 무슨 말이지. 길버트는 사과를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연구원 그렉과 인문학 교수 로버트는 꽤 진지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지질학 개론, 마을 발전법, 넓고 좋은 땅이란 무엇인가 등등에 관한 논평을 시작했다.
‘도시 사람들은 다 이런가.’
급기야 정복왕 윌리엄의 연대기까지 나왔다.
그러니까 그 땅이랑 그런 거창한 것들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어제 보니까 땅도 경사 없는 평지에 흙도 무르지 않은 좋은 곳이더군요. 보는 눈이 없는 사람도 좋은 땅이란 걸 알 수 있었소.”
“그럼 그럼. 부지라는 건 아주 중요하지. 좋은 아침, 스위티.”
제키와 필립도 회관 1층으로 내려왔다.
그제 한 번 밥을 샀다는 이유로 제키의 호감을 산 길버트는, 제키의 ‘허니’ 애칭 라인에 들 수 있었다. 곱슬곱슬한 갈색빛 머리가 초콜릿같이 달콤하다며 붙은 별명이었다.
제키는 길버트 옆에 앉아 요거트 그릇을 시원하게 들이켰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티아스 씨. 근데 그거 제 아침인데요.”
“에이,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하긴 섭섭한 사인 아니긴 하죠. 근데 5유로예요.”
“참나. 여기 있수다, 깐깐한 도련님.”
“크흠.”
길버트는 제 이마에 붙은 지폐를 떼어 내며 헛기침의 근원지인 관광객들을 바라봤다.
“그래서 마을 이장님인 그레이스 청년에게 물어보고자 하오만……”
“두 분께 땅을 파는 게 어떻겠냐고요?”
“그렇소. 값은 후하게 쳐 드리지.”
그래 봐야 그제 제 옆에 앉은 붉은 포니테일 누님 품에서 나온 금괴값만 할까. 길버트는 제 빵을 한입에 집어넣은 제키를 흘긋 바라봤다.
“어떻소. 그레이스 이장.”
“흐음. 글쎄요…….”
확실히 땅은 주인 없는 빈터가 맞다. 오래전엔 제비꽃 때문에 마을에서 지키고 있던 땅이었지만, 폭격 이후엔 혹시나 불발탄이 있을까 얼씬도 하지 않았기에 누구도 땅의 주인이 되겠다 나서지 않았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겠지만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 그곳에 학교나 병원 같은 시설을 세우는 게 어떨까 한데.”
로버트 교수가 인심 좋게 웃으며 말했다.
“학교……요.”
길버트가 중얼거렸다.
학교. 교육다운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 제법 솔깃한 말이었다.
확실히 오베르는 주변 마을들보다 큰 것치고 학교랄 곳이 없긴 하다. 끽 해 봐야 작은 교회의 나이 많은 목사 부부가 운영하는 소담한 불어 교실뿐.
마을 이장이 마을의 발전을 위해 고민할 무렵, 제키가 불쑥 끼어들었다.
“난 뜨끈한 온천 같은 게 있었으면 했는데. 안 그래 필립? 피레네 산맥의 차가운 산바람을 맞으며 뜨끈한 물에 몸을 지지는 맛이 아주 좋았잖아. 크…….”
“온천은 땅만 판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냐, 제키.”
주인 없는 빈 땅을 팔면 마을 자금으로 쓸 수도 있고, 마을의 발전을 위해서도 학교나 병원 같은 곳을 만들어 준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못 배워먹은 내가 봐도 좋은 조건임이 틀림없긴 한데……’
하지만 뭘까. 내키지 않는 찜찜함이 있었다.
‘……역시 그곳이 제비꽃밭이라서?’
“그레이스 씨?”
“아. 죄송해요. 딴생각을 하고 있느라. 아무래도 그건 제 독단으로 처리할 순 없는 내용 같네요.”
“그럼……?”
길버트는 회관 벽에 걸린 달력을 바라봤다. 적당히 날이 시원해지는 가을의 도입부.
때마침 마을에 ‘그 행사’가 열릴 무렵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마을 정기회의’를 열도록 하죠. 그때 마을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정하겠습니다.”
* * *
‘오베르 마을 정기회의’.
마을의 큰 절기 중 하나인 포도 수확 전에 마을 사람들을 모아 일손이 필요한 곳이 있는지 미리 정리하고, 날이 추워지기 전에 정비할 것, 필요한 것들을 나누는 연례행사였다.
안 그래도 언제 해야 할지 생각 중이었는데, 마침 잘된 일이었다.
이번 연도는 ‘제비꽃밭 팔기’라는 특이한 안건 하나가 추가된 셈이니, 마을 사람들도 회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테고.
“오호 재밌겠다. 간부 회의의 시골 마을 버전인가?”
제키가 입안 가득 빵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흐음. 좋소. 그렇다면, 마을 인원은 아니지만 나와 로버트 교수도 그 회의에 참석해도 되겠소?”
“그럼요.”
연구원 그렉의 말에 길버트가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제키가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럼 나랑 필립도 참석하게 해 줘!”
“흐음…… 마티아스 씨와 휴거 씨는…….”
그렉과 로버트는 안건을 냈으니 마을 사람이 아니어도 참여할 수 있었지만, 제키와 필립은 닉시의 친구일 뿐 회의 대상도, 마을의 일원도 아니었다. 이장으로서 들어주기 어려운 요구에 길버트가 난감함을 표했다.
그때 조용히 물만 마시고 있던 필립이 입을 열었다.
“저희는 당연히 회의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외부인이 마을에 대해 논할 자격은 없죠.”
“응, 응 그렇지. 그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고. 걱정하지 마, 스위티.”
“다만 마을 회의라 함은,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빠짐없이 모이는 행사이지 않습니까.”
“응, 응!”
“네. 그렇죠.”
필립이 물컵을 달그락 내려놓았다.
“저희가 마을에 계신 모두를 위해 티 파티의 장을 마련하고 싶습니다. 물론 비용은 여기 제키 마티아스가 지불할 거고요.”
“응, 응?”
“제 친한 친구가 결혼했다는 소식도 모르고 축하도 못 해서 마음에 걸리던 참이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서 마을 분들께 좋은 자리를 마련해 드리고 싶은 바람이니, 부탁드립니다.”
필립은 깍듯하게 고갤 숙였다.
결혼? 결혼이라고? 그렉과 로버트만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로 웅성거렸다.
“그래서 수락해 버렸어. 미안, 닉시.”
길버트는 하트가 붙어 있는 신혼부부의 의자에 앉아 말했다.
방금 마을 이장이 전해 온 소식으로 닉시의 얼굴이 고뇌로 가득했다.
마른하늘에 티 파티라니.
“그러니까…… 이번 주에 마을 정기회의가 열리는데, 거기에 제키놈과 필립도 참여한단 거지?”
“참여가 아니고 참관.”
“근데 그 녀석들이 우리 결혼식을 챙겨 준 마을 사람들한테 고마움을 표시하겠다고 성대한 티 파티를 열어 준다 떵떵거렸다고.”
“응. 비용은 다 마티아스 씨가 지불하고. 마티아스 씨 파산 안 해?”
“엉. 집안이 고리대금업자 출신이라 프랑스가 멸망하지 않는 한, 안 해.”
“괜히 걱정했네.”
그녀의 신혼 생활에 두 번째 위기가 찾아왔다.
눈치 없는 친구들이 마을 사람들 다 모이는 자리에 제 결혼 축하 파티를 열어 주겠다고 선언해 버린 것.
지금 이 순간. 닉시는 코가 길어져서 슬퍼한 피노키오와 늑대를 맞닥뜨린 양치기 소년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엿됐다는 건 처음부터 느꼈지만 산 넘어 산. 엿 넘어 엿이다.
“어떡하지. 마을 사람 중 한 명이라도 우리가 결혼한 적 없다 하면 망하는 거잖아.”
“일단 마을 어르신들 풀었어. 오늘 오후까지 대충 다 입 맞출 수 있을 거야.”
“옹알이 시작한 비비한테도 우리가 결혼했다고 알려 줘. 제키 그 또라이 새끼는 앞니도 안 난 아기한테도 물어볼 놈이거든.”
“마마보다 메리란 말을 더 빨리 가르쳐야겠네.”
“역시 우리 마을의 비선 실세. 말이 잘 통해서 좋아. 고마워, 그럼 이제.”
길버트와 닉시는 동시에 창밖의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 화가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련한 제페토이자 양치기의 양.
그녀의 거짓말에 휘말린 불쌍한 화가가 왠지 모를 오싹함을 느끼고 고갤 들었다.
* * *
결혼했다고 인생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었다. 닉시는 오늘 온종일 수확한 작물들을 상자에 집어넣으며 생각했다.
집에 누가 있다는 것 빼곤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저는 평소처럼 밭을 일구고, 다 익은 작물을 수확하고, 마을을 돌아다녔다.
화가는 커피를 마시면서 멍하니 하늘을 보다가, 새로 의뢰를 받아왔다며 원서를 번역하다가, 그림을 그렸다.
바뀐 게 있다면 부엌의 램프가 꺼지지 않는다는 것과 제 잠버릇이 얌전해졌단 정도일까.
‘나 혼자 있을 땐 밥 같은 건 아무렴 상관없었는데. 짝꿍이 생기니까 굶기진 않아야 한단 사명감 같은 게 생기게 된단 말이지…….’
“화가. 밥 먹어.”
닉시는 테라스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방금까지도 사각거리며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의 캔버스엔 닉시의 집 마당이 스케치돼 있었다. 화가는 이젤을 치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론 절인 체리를 넣어 찐 단호박 체리찜과 버터 두른 팬에 살짝 구운 빵이었다.
불을 못 쓰는 닉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합적인 요리였다.
주황색 붉은색 얼룩덜룩한 단호박을 노려보던 벤자민이 속는 셈 치고 그것을 입에 넣었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맛이었다. 달콤하고 상큼한, 짠 피클이 필요한 맛.
“있잖아. 아까 그건 생각해 봤어?”
“아까 그거?”
“응. 마을 정기회의 말이야.”
닉시의 말에 벤자민은 끔찍한 런치 타임을 떠올렸다.
[마을 회의에 참석해 주십시오!]무릎 꿇고 고갤 박은 농부와 그것을 보고 흥미진진해하던 마을 이장.
거절하면 농부가 이마로 집안 바닥에 구멍을 낼 것 같아 무서워, 생각해 보겠다고 얼버무린 그.
“……아직.”
“그, 그럴 수 있지. 아, 아직 마을 회의까진 시, 시간이 남았으니까.”
그렇게 말하곤 닉시는 처연한 표정으로 다시 비척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벤자민이 질색하며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애초에 난 이 마을 일원이 아냐.”
“나보다 여기 오래 눌어붙어 있었으면서 일원이 아니라 하면 섭섭하지.”
“누가.”
“세금 걷는 사람이.”
“……나는 국적 불문이라 세금을 안 냈는데.”
“내 남편이 불법체류자라니.”
닉시가 딸기잼 뚜껑을 여느라 낑낑거렸다. 헬렌이 설탕을 너무 많이 부어버려서 보통 잼보다 끈적이는 바람에 뚜껑이 잘 열리지 않았다.
“내가 가는 걸 좋아할 사람도 없고.”
“적어도 셋은 좋아할 거라 장담할게.”
“누구.”
“마을 이장님이랑, 네 친구 술집 사장님이랑, 나.”
벤자민이 닉시에게서 잼을 뺏어갔다. 그는 어렵지 않게 뚜껑을 열었다. “오오. 이게 바로 남편. 잼 뚜껑을 열어 준다.” 닉시가 작게 감탄했다.
벤자민은 잼을 약간 덜어 제 빵에 발랐다. 닉시가 다 자란 자식을 보는 듯한 흐뭇한 표정으로 벤자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는 도로 잼 뚜껑을 닫은 뒤 닉시에게 건넸다.
“이것도 남편이라고…….” 닉시는 다시 낑낑대며 잼 뚜껑을 열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번엔 전보다 헐겁게 잠겼기에 금방 열 수 있었다.
“마을 사람이 몇 명인데, 고작 세 명 좋을 일 해서 뭐 한다는 거지. 공산국가도 그 정도 소수는 모른 척 넘어가.”
“어허. 너 자꾸 스탈린 같은 발언 할래? 확 민주주의로 만들어 버린다? 무서운 소리 하고 있어. 경고야, 경고.”
닉시의 레드카드에 벤자민이 어깨를 으쓱했다.
“알겠으니까 생각이 끝나면 말해 달라구. 가, 가급적 긍정적으로 거,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알겠으니까 무릎 그만 꿇고 일어나.”
“넵.”
저녁을 다 먹자 벤자민은 자연스럽게 접시를 치워 설거지를 위해 부엌 안쪽으로 향했고, 닉시는 그의 눈치에 못 이겨 테이블을 벅벅 닦았다.
평소 같았으면 싸늘하거나 지저분하거나 냄새나거나 하던 테이블 위가, 사람 하나 더 생겼다고 말끔했다. 게다가 이 미묘한 뿌듯함까지.
이게 바로 부부!
단지 깨끗해서 기분 좋을 뿐인 걸 거창하게 착각한 닉시였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옷을 갈아입은 닉시가 막 씻고 나온 벤자민과 마주쳤다.
그가 자주 쓰는 너도밤나무 향이 났다. 그녀의 집에선 찾아볼 수 없는 향기였다. 정오쯤에 잠깐 나갔다 들어오더니, 저걸 가져오기 위해 집에 갔다 왔나 보다.
‘언제 들고 온 거람.’
안 그래도 오늘 종일 그의 머리칼에서 저와 같은 레몬 냄새가 나서 은근히 속이 울렁거리던 그녀였다.
“……절간 수도승 냄새.”
“터진 레몬 향보단 나아.”
“취향 참 독특하네, 잘자.”
“……글쎄.”
벤자민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닉시가 손을 흔들다 말고 그를 올려다봤다.
“왜. 혼자 자기 무서워? 같이 있어 줄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만 사선으로 까닥이고 말았다. 헛소리 말고 얌전히 방에 들어가란 몸짓이었다.
소파에 누운 그는 곧장 잠자리에 들 사람처럼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닉시는 그 모습을 왠지 꿈에서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방으로 향했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에 벤자민이 눈을 떴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 그는 졸린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
“닉시.”
그곳엔 어제와 똑같이 서늘한 맨발에 잠옷 차림, 창문가에 서서 어딜 보고 있는 건지 모를 시선으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그녀가 있었다.
‘본인이 이러는데 어떻게 잘 자라는 건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어떤 꿈을 꾸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할 순 있었다.
오래전. 전쟁이 한창이던 때, 그녀가 어쩌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꿈.
“이번엔 또 누군데.”
“……조제.”
“그래.”
조제. 그가 창가에 등을 기댄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달빛에 창백해진 붉은 시선이 천천히 그를 향했다.
“그래. 여기 있어.”
“조제……?”
“응. 여기 있다고.”
* * *
이제 죽을 때가 다 된 건가.
제 동료들이 하나둘 제 꿈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디디에를 필두로 에디와 미셸. 최근엔 군대가 지긋지긋하다고 국경을 넘어 탈출한 조제까지.
“그렇게 떵떵거리고 탈영한 거면 죽지나 말지. 왜 죽어 가지곤.”
조제는 꿈에 안 나올 줄 알았다. 그 녀석은 약삭빠르고 발도 빨라서 작정하고 탈영하면 저 어디 알프스산맥 근처에서 잘살고 있을 사람이었으니까.
닉시는 가만히 흐릿한 지난밤의 꿈을 더듬었다.
[아무도 원망 안 해. 그땐, 그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테니까.]그는 그렇게 말했다.
건방진 조제. 저보다 한참 어린 주제에. 군에 들어왔을 때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송이였으면서.
본인이 탈영하는 겸, 폭탄으로 전차 경로를 막을 테니 이대로 자기 탈영은 모른 척해 달라고. 그렇게 발발 떨며 제멋대로 뛰쳐나갔던 소년이었다.
하지만 꿈에서 만난 조제는 제법 어른 흉내를 내며 저를 달랬다.
“귀신 놈들은 위아래가 없나. 아니면 걔들도 나이를 먹는 건가.”
닉시는 침대 아래 벗어 둔 슬리퍼를 찾았다. 희한하게도 슬리퍼는 이불 속에서 발견됐다.
“이건 또 왜 여기 있어.”
잠버릇이 얌전해졌나 싶더니 이상한 곳에서 난리였다.
갑자기 찾아온 오랜 전우들. 산 놈들이고 죽은 놈들이고, 아주 제 신경을 건드리려 작정한 것만 같다.
“아무튼…… 하루를 시작해야지.”
그녀는 쭉 기지개 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똑똑.
닉시의 척추뼈가 우드득 소릴 내고 있을 때, 현관문 쪽에서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침부터 누구지?’
그녀는 잠옷 위에 얇은 겉옷만 걸친 뒤 방을 나섰다.
“야호! 좋은 아침 달링!”
이른 아침 등장한 손님은 산 놈들에 속하는 제키였다.
누가 군인 아니랄까 봐. 휴가를 와서도 꼭두새벽부터 난리였다.
불청객으로 인해 막 잠에서 깨어난 듯한 화가가 부스스한 몰골로 제키가 건넨 자두 한 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해도 안 떴는데 웬일이야.”
“너 지금까지 자? 농부인데 너무 게으르다. 근데 벤자민 씨는 왜 거실에서 자고 계십니까?”
“저 녀석 잠버릇이 고약해서요.”
제키가 이해한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억울하지만 말은 할 수 없는 닉시는 그저 입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난 이거 창고에 두고 올게.”
닉시가 자두 바구니를 들고 지하 창고로 내려갔다. 남겨진 제키와 벤자민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
“…….”
“……일단 왔으니 차라도 들까요?”
“……그런 말은 보통 집주인 쪽에서 하는 말일 텐데요.”
“하하. 당장이라도 내쫓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뻔뻔한 건 친구끼리 똑같군.
벤자민이 들고 있던 이불을 차곡차곡 갠 뒤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에는 닉시가 손수 말린 캐모마일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꽃들을 적당히 몇 개 쥔 다음, 거름망에 넣어 두고 물을 끓였다.
“……몽유병은 언제부터 있었습니까.”
벤자민은 금방 끓어오른 뜨거운 물을 찻잔에 부었다. 그럴싸한 향기가 피어올랐다.
그의 질문엔 주어가 없었음에도 제키는 그게 누굴 의미하는지 한 번에 알 수 있었다.
“보자……. 44년도 겨울쯤부터였고 지금이 46년이니, 2년쯤 됐네요.”
그럼 매일 밤 저런 식이었다고? 벤자민의 눈꼬리가 설핏 가늘어졌다.
벤자민은 제키 앞에 찻잔을 내려놨다. 물이 애매하게 남았다.
그는 제 몫의 차 하나를 만든 뒤, 제키 맞은편에 앉았다.
“눈치 보니까 달링은 아직도 자기가 몽유병을 앓고 있단 걸 모르는 눈치던데. 비밀로 하셨나 보네요. 그럼 그쪽이 힘들어지실 텐데.”
제키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쪽들이야말로. 저 녀…… 닉시가 아직도 모르고 있던 거 보면 말해 준 적 없단 것 아닙니까.”
“그땐 저나 필립도 달링이랑 비슷했거든요. 누가 누굴 신경 쓸 때가 아니었죠.”
―달그락.
공통분모라곤 없는 화가와 군인 사이. 찻잔 소리 위로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닉시는 창고를 새로 짓고 있는 건지 영 감감무소식이었다.
‘하긴. 그땐 나도…….’
그땐 벤자민도 별반 다를 거 없었다.
44년 여름, 8월 1일. 그때 손이 찢겼고, 군을 탈영했다.
그 무렵은 누구든 으레 그런 때였다.
“…….”
“차가 맛있네요, 하하.”
화가는 제키 마티아스와 굳이 말 섞을 생각이 없었다.
그건 벤자민이 절망에 가까운 사교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가장 컸지만, 말을 이어갔다가 괜히 상대가 친해졌다고 생각하고 계속 말을 붙이게 될 앞날이 성가셔서도 있었다.
하지만 벤자민은 그 생각을 무릅쓰고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제 가짜 결혼 생활에, 그래도 남편이라고.
[미안해. 너만 두고 가서, 미안…….]간밤에 제 가슴팍에 고갤 기댄 그녀의 중얼거림이 계속 신경 쓰여서.
“닉시가 꿈에서 찾는 사람들은 동료들입니까?”
“아, 그랬죠.”
과거형.
벤자민은 차를 홀짝였다. 애매하게 남아서 털어 버린 마지막 찻물은 씁쓸한 맛이었다.
“다 죽었어요. 전쟁 때문에.”
“그렇군요.”
대충 눈치로 그들이 동료고, 이 세상에 없을 거란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옛 동료를 말하는 닉시의 말투는 평소와 다르게 차분했으니까.
“뭐, 녀석들 이야긴 귀에 딱지 앉도록 들으셨겠죠? 디디에, 알랭, 에디, 미셸……”
“폴과 조제까지 들었습니다.”
“이야, 거의 다 들으셨네요. 그 녀석들이 달링의 몇 안 되는 쥐꼬리만 한 인맥들입니다.”
제키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닉시는 녀석들이 아직 살아 있을 거라고 믿는 모양이지만.”
닉시의 몽유병. 제키가 그것을 눈치챈 건 종전 이후, 부러진 다리 수술을 마친 직후였다.
제키 마티아스는 닉시의 냄새나는 연구실로 쳐들어왔다. 수술이 끝났으니 몸속도 알코올로 소독해야 한다고 이유였다.
쌓여 있는 서류들 사이에 썩어가는 필립을 끌고 오고, 창고에서 전쟁 기간 내내 썩도록 익어 간 와인을 털어 닉시의 집에서 술 파티를 연 그날 밤.
닉시는 새벽에 디디에와 알랭을 데려와야 한다고 제키와 필립을 깨웠다.
[무슨 개소리야, 달링.]제키는 창문 앞에 서 있는 닉시를 바라봤다. 그녀는 잠긴 창문을 열려 낑낑대고 있었다.
[아직 애들이 안 탔어. 놔두고 가면 쟤들 다 죽는다고.]이 새끼가 노엘 대장 걱정대로 드디어 약에 손댔구나! 올 게 온 줄 알았던 제키가 푹 한숨을 내쉬며 닉시의 팔뚝을 잡아 걷었다.
주사 자국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럼?
제키는 심드렁히 하품했다.
[…….]디디에, 알랭? 아직까지 잠이 덜 깬 그녀의 머릿속에 닉시가 중얼거린 이름 몇 개가 들어왔다.
하품하느라 설핏 벌린 입 사이로 익숙한 이름 몇 글자가 중얼거리듯 튀어나왔다.
디디에, 알랭, 에디……
제키의 가을 낙엽 같은 붉은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는 닉시의 어깨를 꽉 부여잡았다.
[대체 그게 무슨 소리야, 닉시.]“달링이 찾는 그 녀석들, 사실 이미 다 죽은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달링은 녀석들의 죽음을 직접 보지 않았으니 녀석들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고 믿고 있죠. 그래서 계속 찾는 거고.”
[제키. 조제는 지금쯤 알프스에 있겠지? 그 녀석, 고산병 있는데 어떻게 알프스를 간댔지? 혹시 마조히스트 아닐까? 하하.]“닉시는 제가 직접 눈으로 본 것만 믿는 사람이니까.”
그들이 어디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는 닉시는, 잠든 이후에 그때 그들이 죽은 시간으로 돌아가 그들을 찾았다.
그럼 바보인 저도 알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