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d Demo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299
광마전생 (299)
자룡과 천마손 둘이 사라졌다는 천용현의 말에 그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현초월이 깜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천외천의 두 분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씀이십니까?”
“하나는 경계 바깥에서 다른 하나는 경계의 안쪽에서 사라졌다. 아마 놈이 움직인 거겠지.”
“놈이라면…… 하나 그자는 경계에 바깥에서 들어오지 못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내가 비록 명계의 왕이라 하여도 명계의 모든 것을 알 순 없다. 그러니 놈이 내가 모르는 어떠한 방법을 찾아냈을지도 모르지. 흐음…….”
황상에 앉아 잠깐 고민하던 천용현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스승님께선 어디에 계시지?”
“봉신 기문별 님이 태항산맥의 생존자들에게 다시 도전장을 내민다고 하여 잠시 그곳에 구경을 하러 가신다고 하셨습니다.”
“태항산맥을? 기문별 녀석 또 쓸데없는 짓을…… 가만히 놔두어도 알아서 자멸할 것을.”
가볍게 혀를 찬 천용현은 손짓으로 누군가를 불렀고 그 손짓에 곧바로 튀어나온 것은 바로 왕원장이었다.
“부르셨습니까, 명왕이시여.”
“그대는 지금부터 모든 천외천과 명계의 백성들에게 알리거라. 천기린 그자를 마주하게 된다면 절대 상대하지 말고 길을 열어 주어라고.”
“그 위험한 자를 풀어 두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굳이 더 큰 피해를 보지 않겠다는 것이다. 놈은 이 몸이 직접 상대하겠다. 그러니 내가 전하는 말과 동시에 곳곳에 방을 내걸어라. 황궁은 놈을 맞이할 준비를 끝냈고 언제든지 찾아오라고 말이야.”
천용현이 천기린을 직접 맞이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그 시각.
모용진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과 따뜻한 재회를 하고 있었다.
반나절도 걸리지 않아 태항산맥에 도착한 모용진은 곧바로 제갈영을 만났고 그녀는 모용진과 일행들을 보자 눈물을 흘리며 얼싸안고 기뻐했다.
“그런데 당가와 곤륜이 보이지 않는구나.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지?”
다른 이들은 어디에 있냐는 모용진의 말에 제갈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그들은…… 저희가 찾았을 때 이미 시체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 외에 행방은 저희도…….”
제갈영은 행방을 찾지 못했다고 말했지만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당가와 곤륜은 멸문하였고 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있진 않았기에 최대한 둘러 말한 것이었다.
모용진은 그녀의 침울한 목소리에 어깨를 토닥여 주었지만 제갈영의 고개는 들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하나 더 흑제 님께 사죄드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제갈영이 하나 더 사죄해야 한다면서 꺼낸 이야기는 바로 태허 진인에 관한 것이었다.
흑천파에게 잡혀 있던 태허 진인은 정보를 캐내기 위한 고문 중 스스로 단전을 터뜨려 사망했고 제갈영은 이 이야기를 그에게 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무리 정보를 얻기 위해서라고는 하나 아저씨…… 아니 흑제 님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를 엄벌에 처해 주십시오.”
제갈영은 자신을 엄벌에 처하라 했지만 모용진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는 지금 태허 진인에 대한 것은 전혀 생각지도 않고 있었고 오히려 고문을 못 이겨 단전을 터뜨려 죽었다고 하니 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스스로 단전을 터뜨리는 것만큼 괴로운 것이 없지. 나쁘지 않은 복수였다. 그리고 내가 고작 그딴 걸로 여태껏 힘들게 버텨 온 너를 벌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오히려 조금 섭섭하군. 나를 그 정도로밖에 보지 않았다니 말이야.”
모용진의 말에 역으로 당황한 제갈영은 눈물진 얼굴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모처럼의 재회에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져 가는 그때 갑자기 끼어들어 그 분위기를 깨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사마중이었다.
“저는 황궁의 책사였던 사마중이라고 합니다. 지금 재회의 기쁨을 만끽하는 중이라는 것은 알고 있으나 상황이 별로 좋지 않음을 아룁니다.”
정중하게 상황이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마중.
실제로 그의 말대로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왜냐하면 명두(命頭)의 지휘 아래에 명군(命軍)이 모여 당장이라도 진지를 칠 기세였기 때문이었다.
모용진 역시 대충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사마중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경각심을 깨우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흑천파의 수장 모용진이라고 합니다. 사마중 님의 위명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위명이랄 것까지도 없습니다. 황궁이 천외천의 손에 들어갈 동안 책사라는 이는 아무것도 못 하고 제갈영 군사님께 의지만 하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저도 영광입니다, 흑제 님.”
서로 통성명을 나눈 둘은 짧게 악수를 나누었고 사마중은 지금 상황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모두 다 들은 모용진은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저들이 준비하기 전에 저희가 먼저 칩시다. 제 생각엔 그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인 것 같군요.”
“저희가 먼저 저 명군들을 치자는 말씀이십니까?”
“예, 어차피 맞닥뜨려야 할 상대이고 저는 하루라도 바삐 그 천용현이라는 자와 대면하고 싶으니 이게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요.”
절대 지지 않는다는 자신감이 잔뜩 들어간 모용진의 목소리.
단 한 번도 모용진의 무위를 본 적이 없었던 사마중은 진짜로 괜찮을까 걱정했지만, 그가 류성아와 함께 십대제자와 은월령의 사자들을 이끌고 곧바로 적들을 치자 그 의심은 단번에 사라졌다.
“저게 정말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이란 말입니까?”
모용진의 무력을 실제로 눈앞에서 본 그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의 옆에 서 있는 이들은 마치 자신이 칭찬을 들은 것같이 기뻐했다.
“몸만 온전했다면 같이 나갔을 텐데…….”
설백의 못내 아쉬워하는 말에 옆에 있던 조종려 역시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모용진과 함께 나서고 싶었지만 모용진은 이 진지를 지켜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판단했고 다수와의 전투에 능한 조종려와 백리강을 진지에 남겨 두었다.
“저흰 결국 아저씨만 믿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보네요.”
제갈영이 무척이나 분한 듯한 목소리를 내는 그 시각.
난데없는 모용진의 습격을 받은 봉신 기문별은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
마치 두부가 된 것처럼 쓸려 나가는 명군들은 놀랍게도 한번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있었고 숫자가 줄어드는 속도가 비상식적으로 빨랐기 때문이다.
“어디서 갑자기 이런 놈들이…… 설마 천용현 님께서 경고하던 놈들이 이놈들인가?”
아직 천용현의 지시를 내려 받지 못한 기문별은 자신이 나서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여 거대한 추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그가 직접 나설 준비를 하려 자세를 취하려고 하는 순간 은백색의 섬광이 그의 눈앞을 수놓았고 그가 인지했을 때 그의 목은 몸과 분리되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뭣……?”
화륵!
숨도 되돌릴 새도 없이 갑자기 피어오르는 엄청난 불길.
단순한 불이 아닌 그 불꽃은 순식간에 기문별의 육신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고 한때 봉신이라 불리며 추용술(錘用術)로 천하제일인에 올랐던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소멸해 버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천용현의 스승인 절악명이었다.
정작 당한 기문별은 잘 몰랐지만 멀리서 그를 보고 있던 절악명은 그 짧은 찰나의 시간 동안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한 여성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그를 스쳐 지나가며 몸을 삼등분 냈고 뒤이어 모용진이 그의 몸을 다시 사 등분 하였으며 여성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은사가 그 조각들을 다시 또 삼등분 하더니 마지막으로 모용진의 손에서 거친 불꽃이 일며 모든 것을 불태웠다.
이 모든 것이 찰나에 일어난 것도 놀라운데 지금 절악명의 눈에 더 놀라운 것은 모용진과 여성의 존재감이었다.
분명 같은 현경의 고수임에도 불구하고 절악명은 그들을 보는 순간 ‘격차’를 느끼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그 격차를 또 다른 곳에서도 느낀 적이 있었다.
“설마 내가 두려워하는 것인가. 그 천용현을 제자로 둔, 내가?”
손에 잔뜩 잡히는 땀을 보며 절악명이 놀라고 있는 그 순간.
그의 귓가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순순히 내려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그 전음의 주인은 다름 아닌 모용진이었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절악명은 깨달았다.
도망가기엔 이미 늦었다는 것을.
그런 상황에서 절악명이 할 수 있는 것은 딱 두 가지뿐이었다.
전력으로 도망가거나.
전력으로 싸우거나.
하지만 그것은 자존심을 내려 두지 못했을 때의 선택지였고 자존심을 내려 둔 그의 선택지에는 새롭게 고를 수 있는 선택이 남아 있었다.
[본 노구의 이름은 절악명. 너희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천용현의 스승이자 오랜 친우이니라.]* * *
놀랍게도 절악명은 순응을 택했다.
그는 다혈질에 자존심이 강한 이였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행동하는 이였다.
모용진은 천용현을 만나게 해 주겠다는 절악명을 의심치 않고 받아들였다.
천용현의 스승이니 인질이든 뭐든 천용현을 대면하기에 딱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그때 왕원장이 천용현이 한 말을 전하기 위해 직접 절악명을 찾아왔다.
모용진을 본 왕원장은 곧바로 그 자리에서 도망가려 했지만 이를 모용진이 놓칠 리가 없었다.
왕원장은 그의 복수의 대상 중 하나로 공성 대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였으니까.
모용진은 그들을 포박하여 진지로 데려왔고 절악명의 정체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진지가 들썩거렸다.
왜냐하면 절악명은 천외천인 것을 배제하더라도 그 구결이 따로 나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인물이 살아 있는 것도 모자라 그 천용현의 스승이라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날 밤 모용진은 조용히 절악명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왜 당신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저항 한 번조차 하지 않고 이렇게 순순히 잡혀 왔냐고.
그런데 그가 내뱉은 답변은 모용진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 제자인 천용현은 불쌍한 아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나서서 그를 막으려 든다면 말리지는 않을 걸세. 스승이 된 자의 도리로서.”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왕원장은 숨을 거둬 시체로 되살아난 상태로 발견되었고 모용진과 절악명은 마치 귀신처럼 사라져 있었다.
감쪽같이 사라진 두 사람.
싸운 흔적 하나 없었기에 흑천파는 그 행선지조차 짐작할 수 없었고 그렇게 모두를 걱정하게 만든 모용진이 지금 있는 곳은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이었다.
“왔군.”
“그래, 왔다.”
모용진이 있는 곳.
그곳은 바로 북경에 위치한 황궁이자 지금은 천용현이 왕의 자리에 올라 앉아 있는 황제의 알현실이었다.
“이렇게 네놈과 직접 대면한 것은 처음인 것 같구나.”
“그러게 너도 분신보다 훨씬 늙어 보이는 것 같네.”
“비꼬는 말을 잘한다더니 사실이었군.”
“나에 대해 열심히 조사한 것 같은데. 나란 존재가 꽤나 위협이 됐나?”
“그럴 리가. 내게 있어 너란 놈의 존재는 그저 자그마한 흥밋거리일 뿐이다. 내 긴긴 생의 지루함을 달래 줄 인형과도 같은 존재이지.”
천용현의 도발에 모용진이 고개를 양쪽으로 한 번씩 꺾더니 양손에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인형이라. 그럼 그 인형한테 한번 박살이 나 봐야 정신을 좀 차리려나?”
광마전생 (마지막 회)
“검은 들지 않는 건가?”
“너무 빨리 끝나면 시시하지 않겠어? 일단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정신 좀 차리게 만들어 주려고.”
계속되는 모용진의 도발.
하지만 천용현은 그러한 도발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음으로 넘기더니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 손짓에 뛰쳐나오는 두 개의 인영.
한 명은 무척이나 왜소하나 매우 단단해 보이는 몸을 가지고 있었고 그와 반대로 다른 한 명은 거대한 덩치와 함께 엄청난 살로 덮여 있어 굉장히 물러 보였다.
그들은 다름 아닌 천외천의 십 인 중 한 명인 무진(武眞) 양태천과 일격권황(一擊拳皇) 언하평이었다.
“무진과 일격권황이라고 하면 들어봤을 것이다. 네가 쓰러뜨린 천마손과 함께 삼대권황(三大拳皇)이라 불렸던 이들이지. 네가 주먹에 자신이 있다면 이들 먼저 쓰러뜨리는 것으로 증명해 보이는 것은 어떠냐?”
“증명?”
“나를 상대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증명하란 것이다.”
“풋…….”
천용현의 말에 모용진은 코웃음을 쳤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서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주먹을 가볍게 고쳐 쥐더니 미소와 함께 그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슈아아아악!
맹렬하게 몰아치는 돌풍.
순간 언하평은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지 못했다.
진주언가의 방계로 태어난 그는 집안 특유의 거구로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언가권(彦家拳)을 극한까지 익혀 당대 정파 최강의 권법가로 이름을 날렸었다.
하지만 그가 단순히 힘만으로 최강이 된 것은 아니었으니 그의 진정한 강함은 바로 몸.
단순히 지방으로 둘러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속의 근육은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고 엄청난 외공 단련으로 검도 그의 피부를 잘라 내지 못해 한때 소림사의 금강불괴를 우습게 생각하게끔 만들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
그 피부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심장이 있는 가슴 쪽.
그는 현경의 고수였음에도 모용진의 움직임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가슴이 뚫렸고 그대로 생을 마감했다.
쿵!
육중한 언하평의 몸뚱이가 쓰러지며 일어난 소음에 양태천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모용진의 공격을 보지 못한 것은 언하평 혼자가 아니었고 그것은 곁에 있던 양태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그가 사고를 정립하는 데 조금 시간이 걸렸고 그 시간은 아주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모용진에게는 너무나 큰 빈틈이었다.
컥!
어느새 모용진에게 밟혀 있는 양태천의 팔.
당황한 양태천이 발을 빼내려고 했지만 마치 커다란 바위에 깔린 것처럼 발이 옴짝달싹도 하지 않았다.
‘어?’
그 순간 양태천은 또 하나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왜냐하면 그의 세상이 무척이나 느리게 흘렀기 때문이다.
순간 모용진이 견용을 펼친 건가 싶었지만 놀랍게도 그것은 견용이 아니었다.
견용을 한 단계 더 뛰어넘는 무언가.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단순히 느려진 것만이 아니라 공간마저도 많이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일그러진 세상 속에서 쏟아져 내리는 비.
세차게 몰아치는 그 빗방울은 모두 모용진의 주먹이었다.
퍼버버버버버벅!
짧은 시간에 엄청난 속도로 울려 퍼지는 타격음과 사방으로 튀는 충격파.
마구잡이로 흔들리던 양태천의 머리는 그 모용진의 주먹질이 끝났을 때 한 줌의 핏물이 되어 있었다.
거의 사라진 상체.
양태천에게 남은 것은 하반신뿐이었고 모용진이 반 발자국 물러나자 그의 몸은 쓰러졌다.
“후, 끝난 것 같은데?”
모용진의 말과 방금 벌어진 일에 이를 지켜보던 절악명과 현초월 그리고 천용현은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도 모용진의 몸놀림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천용현의 눈에는 살짝 보였지만 그마저도 잔상만이 조금 남았을 뿐.
언하평을 향한 공격은 잔상조차 쫓지 못한 그였다.
“무슨…….”
“놀랐나? 사실 나도 많이 놀랐어. 네가 펼친 이 명계화인지 먼지 그 덕택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몸이 의지에 따라 완벽하게 움직이더라고. 마치 이 세계가 나와 하나가 된 것처럼 말이야.”
모용진의 말에 천용현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커지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어째서 내가 아닌…….”
“그거야 나도 모르지? 네가 알아야 하는 거 아니야? 이건 네가 만든 세상이잖아? 명계도 뭣도 아닌.”
“닥치거라! 감히 네놈 따위가…… 잠깐 그게 무슨 말이지? 명계가 아니라니?”
모용진의 말을 되뇐 천용현이 마지막 말의 의미를 궁금해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모용진은 대답 대신 그의 앞에서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건 조금 있다가 알려 줄게. 그러니 지금은 좀 맞자, 새꺄.”
* * *
새끼라니.
아무리 그래도 자신이 한참 연장자인데 말이 너무 심한 게 아니냐고 생각했다.
하지만 천용현은 지금 아무런 반박조차 할 수 없었다.
커헉!
왕좌에서 일어난 천용현과 모용진의 대결.
그것은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일방적이었고 대결이라고 하기에도 부끄러울 정도였다.
모용진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천용현을 구타하고 있었고 천용현은 검도 꺼내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방적인 공격에 놀라고 있는 것은 비단 천용현뿐만은 아니었다.
이는 모용진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왜냐하면 천용현이 그의 주먹을 전혀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본 그의 분신도 이 정도로 약하지 않았었고 실제로 그가 지금 내뿜고 있는 기운도 앞선 천외천의 이들의 기운에 비해 한참 모자란 것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모용진 그가 생각하고 있던 가설에 딱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어쩌면…….’
빠각!
모용진은 깔끔한 돌려차기로 천용현을 날려 벽에 처박았다.
쿵!
몸이 벽과 부딪히며 일어나는 커다란 진동과 함께 허공에 울려 퍼지는 파동.
그 파동에 최대한 집중한 모용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그랬구나? 그래, 명계라는 곳이 이럴 리가 없지…….”
“크윽,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지?”
“아직 확신까지는 아닌데…… 그러니까 잠시 죽어 볼래?”
그렇게 말하며 모용진이 천일을 뽑아 들자 천용현 역시 자신의 검을 뽑아 들었다.
“창천신검(猖天神劍) 7초식 월아천격(月牙穿挌).”
가볍게 휘두른 검 끝에서 쏟아진 강맹한 검강.
하지만 그것을 보며 천용현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정도는 충분히 막고도 남을 힘이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충분히 막고도 남을 검강이 그의 호신강기를 가볍게 찢어발기더니 천용현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은 것이었다.
상체의 절반이 날아가는 파괴력.
하지만 천용현의 몸은 무서운 속도로 재생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고 그는 무척이나 당황한 얼굴로 모용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냐! 무슨 짓을 했기에 이 몸이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한 것이지?”
크게 놀라며 소리치는 천용현.
하지만 모용진의 대답은 또 같은 검강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이 아냐. 네가 약해진 것이지.”
“뭣이?”
“말 그대로야.”
촤악!
또 한 번의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지만 그 피가 미처 다 퍼져 나가기도 전에 천용현의 몸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이 명계라는 곳을 구축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어?”
“구축? 구축이 아니다. 이곳은 내가 명계를 소환하여…….”
“그래? 그럼 어째서 너는 이렇게 약해진 것이지? 나는 말도 안 되게 강해졌고. 그리고 비단 강해진 것은 나뿐만이 아냐. 아마 너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느끼고 있을 거야. 자신이 무언가의 힘으로 더 강해졌다는 것을.”
“무언가의 힘?”
그 순간 모용진의 손이 그의 두 눈을 향했고 모용진의 근처로 공아(空我)가 펼쳐졌다.
모든 것들의 기가 뚜렷하게 보이는 세상.
그 세상은 천용현의 눈앞에도 동일하게 펼쳐져 있었다.
“이것은 기의 세상이 아니냐. 대체 뭘 보여 주려고 그러는 거지?”
“이걸 보고도 모른단 말이야? 이 충만한 기운들. 익숙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냐는 모용진의 말에 천용현은 대답 대신 인상을 찌푸렸고 이에 모용진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입을 열었다.
“돌려 말하면 잘 모르는 듯하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주마. 지금 네가 만든 이 세상. 너는 명계를 이승에 강림시켜 명계화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 그게 무슨 소리냐.”
“여기는 명계가 아니란 말이다.”
서걱!
또 한 번 잘려 나가는 천용현의 몸.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나? 여기가 명계가 아니라는 것을?”
서걱!
“네가 불러온 것이 진짜 명계라면 어째서 죽었다가 곧장 되살아난 이들에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
서걱.
모용진은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검강을 흩뿌려 천용현의 몸을 마구 가르고 있었다.
그때마다 천용현의 괴물 같은 몸은 무한히 재생성 되었지만 천용현은 이렇다 할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크헉…… 그것은 영혼이 명계에 닿으면 영혼의 소실이…….”
“크큭, 생각은 하고 말하지 그래? 네 눈앞에 있는 나 안 보여? 나는 무려 2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천기린에서 모용진으로 환생했다고? 그런데 이렇게 버젓이 기억이 남아 있는걸? 그것도 어제 일어난 일처럼 아주 선명하게 말이야.”
슈가가가각!
모용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손에서 흩뿌려지는 검강의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무참하게 갈려 나가고 재생되기를 반복하는 천용현.
끔찍한 고통 속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대체 어떤 곳이냐! 쿨럭…….”
“뭐?”
“이곳이 명계가 아니라면 대체 어디란 말이냐!”
천용현의 필사적인 외침에 모용진의 검강은 멈췄고 이에 천용현은 재빠르게 눈을 돌렸다.
비정상적으로 강한 모용진의 무공에 저도 모르게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 들어온 것은 바로 자신의 스승인 절악명이었다.
천용현은 그를 향해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지만 절악명은 그 눈빛을 봤음에도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스승의 거절에 충격을 받아 흔들리는 천용현의 두 눈.
그리고 이를 모용진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사실 나도 잘 몰라. 여기가 어떤 곳인지. 지금 네 눈동자가 열심히 구르고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어. 너무 그렇게 섭섭한 표정을 짓지는 마. 네 스승은 네가 옳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아, 그래도 내가 아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어.”
서걱!
그 순간 모용진의 검이 천용현의 오른팔을 갈랐고 잘려 나간 팔은 그대로 허공을 날아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이 세상이 너로 인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번뜩이는 모용진의 검과 함께 무더기로 뿜어져 나오는 백색의 검강.
그것은 창천신검(猖天神劍) 제 3초식 백야도래(白夜到來)였다.
무수한 검강 다발은 마치 밤에 내리는 새하얀 비처럼 천용현의 몸을 가득 적셔 그의 전신을 마구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무한히 재생되는 천용현의 몸.
여기까지만 보면 또 같은 일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다르다는 것은 천용현의 몸에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이 아니었다.
변화한 것은 그의 몸이 아닌 이 세상이었고 천용현의 몸이 갈려 나갈 때마다 검녹색의 세상은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모용진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실 이 세상은 명계화가 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 세상을 만든 천용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뿐.
지금 세상은 천용현이 꿈꾸던 세상 그 자체일 뿐이었다.
오직 그의 만족으로 탄생한 세상.
이 세상을 만들고 유지한 것은 오랜 세월 동안 가꿔 온 그의 힘이었고 지금 그 주체가 되는 천용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는 힘에 부딪혀 세상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천용현의 몸이 무수히 갈라질 때마다 검녹색의 세상은 미친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고 조금씩 하늘의 구름이 걷혀 나가기 시작했다.
모용진과 천용현의 주변으로 내리쬐기 시작한 한 줄기 햇빛.
검은 구름이 걷힌 하늘은 쾌청한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우연히 이를 본 천용현의 두 눈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럴 수가…….”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군.”
그렇게 말하는 모용진의 손은 높게 들려 있었다.
창천신검을 처음 배울 때 익히게 되는 최강의 초식.
천지개벽(天地開闢).
모용진의 온몸으로 활화산과도 같은 기운이 마구 뿜어져 나왔고 그저 모용진의 존재감만으로도 천용현의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다.
아주 느릿하게 올라가는 검.
천용현은 이를 두 눈으로 보고 있었고 그것이 금왕이 사용하던 최강의 초식임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난생처음 겪어 보는 무기력함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온몸은 이미 모두 회복되었으나 그의 몸에는 겨우 몸을 가눌 정도의 힘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그 상태가 되자 천용현도 모용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전 기의 세상에서 봤던 주변의 모든 기운들.
그것은 모두 자신의 기운이었고 기운이 거의 다 빠진 지금도 계속해서 세상에 기운을 소모하고 있다는 것을.
천용현은 멀쩡할 때는 전혀 몰랐지만, 자신의 내공이 거의 고갈되자 역으로 그것을 선명하게 느낀 것이었다.
그리고 그가 한 가지 더 알게 된 것.
그것은 바로 이상할 정도로 강한 모용진에 대해서였다.
천용현은 단순히 그가 괴물 같은 힘을 길러 왔다고 생각했지만, 이는 반대였다.
그는 변함이 없었다.
바뀐 것은 자기 자신일 뿐.
이 명계화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힘을 써 버렸고 그로 인해 자신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것뿐이었다.
“원래의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천용현.”
하늘 높이 올라간 모용진의 검.
그 검이 살짝 움직이는 순간 엄청난 압박감이 주변을 마구 짓누르기 시작했고 대지와 하늘이 크게 요동치며 검은 구름이 마구 걷혀 나가기 시작했다.
백색으로 타오르는 듯이 모든 것이 하얗게 물들어 가는 세상.
그 세상 속에서 천용현은 두 눈을 감았다.
콰아앙!
* * *
백색의 섬광.
대륙 그 어디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던 그 섬광이 대지에 내려앉는 순간 세상은 다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살아났던 시체들은 다시 흙으로 돌아갔고 검은 구름과 검녹색의 기운들도 거짓말같이 사라졌다.
의외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꽤나 많았으나 그만큼 잃은 것도 많았다.
부모, 형제, 친척, 이웃…….
그리고 대륙의 근간이 되는 황궁이라는 곳까지도.
황궁은 마치 거대한 유성이 떨어진 것처럼 그 전체가 소실되었고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주축이 된 것은 많은 이들을 구하려 했고 지금도 구하고 있는 두 사람.
제갈영과 사마중의 노력 덕분이었다.
황궁이 소멸되고 세상이 원래의 모습을 되찾자 사마중과 제갈영은 끝없이 혼란해질 세상을 수습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처음에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것은 천외천의 부활이었다.
아직 죽지 않은 천외천도 있었고 천용현 역시 죽지 않는 자였으니까.
하지만 대륙의 영웅이 된 한 남성의 말로 그 걱정은 깔끔하게 사라졌다.
“더 이상의 천외천은 없다. 천용현이 쓰러지는 그 순간 모두 사라졌으니까.”
천외천.
사실 그들을 유지하는 힘도 그들이 사용하던 힘도 모두 천용현의 것이었다.
그렇기에 천용현이 쓰러지는 그 순간 그들 역시 함께 쓰러졌다.
그 이후 천용현은 다시 눈을 떴지만, 천외천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였다.
대륙의 영웅이 된 모용진은 그 광경을 두 눈으로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천용현이 일순 사라진 그 순간 뒤에서 절악명의 몸도 신기루처럼 사라지기 시작했으니까.
솔직히 모용진은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수많은 학살을 자행한 극악무도한 놈들이 너무나 편한 죽음을 맞이한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천용현에게 다시 그들을 되살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원래대로 돌아온 세상은 모용진에게 있어서는 또 다른 새로운 세상이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더 이상 복수할 대상이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흑천파는 자연스럽게 해체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모용진이 어디로 홀연히 사라지는 일도 없었다.
모용진은 모든 것을 흑천파와 자신의 제자들에게 떠넘기고 자신이 누려 마땅한 것을 누렸다.
우선 그는 북해빙궁으로가 설백과 정식으로 혼인을 맺었다.
이때 빙제 설운종은 너무 기쁜 나머지 눈물과 콧물을 마구 쏟았고 이에 비목폭포(鼻目瀑浦)라는 우스꽝스러운 별호가 생기기까지 했다.
그 후 하북의 정소촌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모용진은 모용학관을 다시 차리고 후학을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그곳의 정신적 주체는 모용진이 아닌 그의 아버지 모용혁이었다.
모용진은 모용학관 내에서 자신의 아버지인 모용혁을 누읍곡마(淚泣哭魔)의 고수로 거의 신격화하여 떠받들게 만들었고 그의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이는 중원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 모용학관은 개관하자마자 수련생으로 들어오려는 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모용학관이 개관한 지 삼 개월 되던 때에 설백은 회임을 하였고 이듬해에 쌍둥이를 출산했다.
그리고 그 쌍둥이를 출산한 해에 꽃을 세 개나 더 꺾어 쥐었고 그 꽃들의 이름은 류성아와 홍련 그리고 흑련이었다.
은월령을 꺾었다고 말해도 될 모용진의 엄청난 행보에 설백은 크게 분노할 만도 했지만 놀랍게도 그녀는 이를 눈감아 주었다.
몇 년 후 백리강은 호북 녹림채주였던 최양과 혼례를 올렸고 그해에 사마중은 새로운 나라 ‘사마진(司馬晉)’을 세웠다.
사마중 스스로가 황제에 오르며 대륙에는 새로운 태양이 떠올랐으며 황후로 오른 이는 다름 아닌 제갈영이었다.
황후가 된 제갈영은 이제 영결황후라 불리게 되었고 떠도는 소문엔 황제마저 무릎 꿇게 하는 황궁의 실세가 되어 있었다.
조종려는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고 십대제자들은 제갈영의 곁에 남아 황궁의 재건에 도움을 주어 각각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새로운 태양의 주축이 되었다.
이처럼 모두가 제각각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지만 모용진은 달라지지 않았다.
모용진은 예전과 똑같이 제자들을 대했으며 이는 제갈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황후가 된 그녀는 여전히 모용진을 아저씨라 부르며 따랐고 사마중 역시 그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중년의 나이가 된 모용진.
그는 지금 거대한 비석의 앞에 서서 그 이름들을 되뇌고 있었다.
“막첨, 구하선, 왕이운, 당하겸, 당철삼…… 해인 도장과 청인 도장 그리고 진유혼…….”
그 비석은 천용현의 명계화로 죽음을 맞이한 흑천파 영혼들의 넋을 기리는 비석이었다.
한순간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 이들.
그들의 죽음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며 모용진은 이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용진은 그를 이 자리에 불렀다.
“이들을 보면 절대로 당신을 용서할 수 없어야 하는데 말이지. 아니 용서하진 않을 거야. 네가 눈을 감는 그 날까지 말이야.”
진유혼의 이름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린 모용진.
그런 그의 눈에 들어온 이는 놀랍게도 바로 천용현이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천용현.
그의 두 눈에는 더 이상 옛날과도 같은 광기가 서려 있지 않았다.
“소용없는 일이다. 시간만 허비할 뿐이야.”
허무로 가득 찬 천용현의 목소리.
하지만 이에 모용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네놈이 정하는 게 아냐. 내가 정하는 것이지. 그러니까 얌전히 따라와.”
모용진은 새로운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때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주범.
세상을 파멸로 이끌어 갈 뻔했던 자를 위한 여행을.
“하나만 묻지. 왜 그러는 것이냐. 날 도와 네놈에게 무슨 이득이 된다고 말이다. 나는 이미 포기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는 아무런 짓도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천용현의 말에 모용진은 피식 웃더니 그의 어깨를 손으로 토닥였다.
“같은 천 씨라서 그렇다고 해 두지.”
“뭐……?”
“이유를 묻고 싶은 것 아니었어? 딱히 없으니까 그런 걸로 해 두자고.”
모용진의 말에 천용현은 정말 이놈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고 그 생각이 표정으로 다 드러나고 있었다.
“광마(狂魔), 한때 사람들이 내게 걸었던 별호였지. 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었어. 무척이나 내게 잘 어울리는 호칭이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모용진의 두 눈에는 붉은 광기가 어려 있었고 그 광기에 천용현은 섬찟함을 느꼈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생각이야. 그러니까 억지로라도 따라와 줘야겠어. 아직 이 세상엔 내가 모르는 게 많은 것 같거든. 천용현, 꼭 너와 나 같은 것들처럼 말이야.”
모용진의 말에 천용현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고 이내 그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갔다.
“그래도 내가 훨씬 많은 세월을 살아왔는데 경어(敬語)를 쓰는 게 어떤가? 남들이 보기에…….”
“경어 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아는 경어는 경어(京魚)밖에 없거든?”
“큼…….”
* * *
천용현의 명계화가 명계가 아니었던 것처럼 그에 관한 모든 것들은 진짜가 아닌 것이었다.
그것은 천용현이 만들어 낸 ‘인달’이라는 존재도 마찬가지였고 그가 내린 ‘고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로 인해 공성 대사는 죽지 않았다.
만일 제단이 없었다면 그는 죽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고지가 거짓일지언정 일순간 천용현의 기운이 사라지며 모든 천외천들이 사라졌었으니까.
하지만 제단과 공성 대사를 봉인한 진법이 세상과 그를 단절시켰고 그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그 기운으로 살아 있었다.
천외천이 사라지고 세월이 훨씬 흘렀음에도 건재한 제단에 그는 죽지 않았고 그는 여전히 제단에 묶여 고통받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그 제단이 세월의 풍파에 깎여 나가 사라질 만도 했지만 누군가가 이를 지속해서 관리해 주었고 이는 세기가 지나도 계속되었다.
“오늘도 날씨가 좋네.”
악가(岳家)의 어린 장남 악호는 오늘도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가끔 어디선가 비명 소리가 그를 놀라게 만들기도 했지만 악호는 선대로 내려오는 이 사명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을 어지럽게 만들 악귀를 봉인하는 일’만큼 그에게 보람찬 일도 없었으니까.
끄아아아아아악!
그렇게 그는 아직도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지옥보다도 더 지옥 같은 곳에서…….
《광마전생》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