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3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31화 >
“지휘라니까―!”
애석하게도 수화기 너머 상대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애덤, 말이 되지 않잖아.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지휘자라니?
아무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였지. 애당초 애덤 자신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바이올린 파트로 무대 위에 오를 줄 알았으니까. 낡은 지휘봉을 들고 무대 위에 올랐을 때 그 또한 얼마나 놀랐던가.
-애덤, 자세히 좀 말해봐. 베를린 필에서 바이올리니스트 현을 만난 것도 신기한데 지휘자로 무대에 올랐다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샤론이 참지 못하고 재촉했다. 것도 그럴 것이 그녀 또한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열렬한 팬이었기 때문.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라모폰의 악마라 불리는 냉철한 편집장이었지만 현의 선율 앞에서는 단 한 명의 청중이 될 수밖에 없었으니. 그나저나 자세히라.
“짙은 색의 연미복이었어. 지휘봉의 끝은 색이 바래고 껍질이 벗겨져 낡고 오래되어 있었지만 마치 장인이 만든 명검처럼 빛이 났지.”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콘서트홀이었다. 하지만 선율을 타고 펄럭이는 연미복의 끝자락과 폐부를 휘젓듯 매섭게 선율을 가로지르는 지휘봉의 모습은 뇌리에 아로새겨졌다. 하물며 지휘는 어떠했는가.
꿀꺽―!
다시 돌이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애덤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마치 감정의 파도가 치밀어 오르듯 가슴을 두드리지 않았던가.
비창이라는 단어를 가장 잘 이해한 것처럼 단원들은 차이코프스키의 마지막 모습을 선율로써 그려 내려갔다. 서글픈 낭만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마지막 열화와 같은 포효 속에서 온몸이 장대비를 맞은 것처럼 식은땀이 흘러내렸으니.
수화기를 잡고 있는 지금까지도 애덤의 손바닥에는 진땀이 가득했다.
“과장을 더해 말하자면 베를린의 사자가 생각나지 않는 무대.”
-뭐?
“마치 오래전부터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지휘를 했던 것처럼 베를린 필의 아이덴티티가 바뀌어져 있었어.”
백 년이란 시간 동안 악상을 써 내려간 전통 있는 교향악단의 아이덴티티가 어린 소년의 손끝에서 바뀌었다.
비창의 마지막 악장이 써 내려가는 동안 눈물을 흘리는 청중이 부지기수였다. 주제를 관통하는 통렬한 감정의 끝에서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방증으로 가슴을 휘젓는 깊은 여운에 쉽게 박수조차 칠 수 없었으니. 지휘봉의 끝이 내려갔음에도 비창의 선율이 청중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애덤, 지금까지 한 말이 정말 다 사실이야?
베를린의 사자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청중의 심장을 두드리지 않았던가. 어린 마에스트로의 손끝에서 청중들이 전율했고 환호했다. 그리고 그의 선율에 거미줄에 걸린 것처럼 사로잡혔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퇴색되고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매섭도록 날카로운 지휘봉의 끝이 계속해서 떠올랐으니. 그 옛날 베를린을 뜨겁게 달궜던 전설적인 마에스트로의 손길처럼.
“어린 마에스트로의 재림.”
특종의 헤드라인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첫 지휘는 어땠나.”
텅 빈 무대 위에 홀로 서 있을 때였다. 마에스트로 유리가 천천히 다가오는 것이었으니.
연마복도 입지 않았고 손에 지휘봉도 들려 있지 않았지만 그의 등장만으로도 콘서트홀이 감응하고 있는 듯 전율이 흘렀다.
“마에스트로께서 제게 이 같은 기회를 주신 것에 너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아직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거든요. 콘서트홀이 제 심장을 잡아두고 있는 기분입니다.”
“내가 작센의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했을 때 난 머릿속이 백지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지. 내가 뭘 어떻게 지휘했는지 생각이 안 날 정도로 떨었으니까. 그에 비하면 자넨 청중들을 감동시켰네. 그것도 자신만의 지휘로 말이야.”
“마에스트로, 과찬이십니다.”
얼굴에 피어오른 홍조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단 한 번의 지휘였지만 여태껏 그 어떤 경험보다도 값진 일이었다.
마치 바이올린을 처음 켰을 때처럼 선율이 온몸을 휘감았고 청중들의 시선과 오케스트라의 모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지휘봉을 내려놓았음에도 아직도 손끝이 전율에 타오르고 있지 않은가.
“지휘봉의 끝에는 수많은 단원들을 통솔해야 하는 감정과 결단력을 담아야 하지. 그런 점에서 현은 타고났어. 저 비어 있는 객석을 보게.”
수천 개의 객석이었다. 방금 전 공연 때까지만 하더라도 수많은 청중들로 가득했던 자리였다. 아직도 그들의 열기와 시선이 머릿속에 생생하다.
“비창의 마지막 악장이 끝나고 한참 후에야 기립박수가 터져 나왔지. 왜 그런지 알고 있나?”
“사실 경황이 없어서 박수가 뒤늦게 나온 걸 몰랐습니다. 심장이 마치 터질 것 같이 요동치고 있었거든요.”
“그래? 난 현이 모든 것을 끝내고 관망하듯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말이지. 그만큼 대단했어. 청중들이 뒤늦게 여운에서 벗어날 만큼 차이코프스키의 비창을 뚜렷하게 나타냈으니.”
주름진 눈가에 깊은 감정이 가득하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가슴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으니. 오죽하면 연미복의 끝자락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은 느낌일까.
“오늘 무대에서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움직인 건 내가 아니라 바로 현이었어.”
“감사합니다, 마에스트로.”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쉽사리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바이올린과 지휘, 그 둘 중에서 무엇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어불성설이었기에.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확실한 건?”
“단 한 명의 청중을 위해서라도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
과거와는 다른 포부였으니. 청중들이 내게 보내는 감정의 물결을 고스란히 느끼지 않았던가.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진한 감동이었다. 내가 만든 선율로 단 한 명의 청중이라도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 무엇이 중요할까.
마에스트로 유리는 그제야 엷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였다.
“현―!”
단원들이 무대 위로 올라오는 것이었으니. 다들 고된 공연에 지쳤을 만도 하건만 그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때 단원들 틈바구니에서 케이크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오늘이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그냥 보내면 섭섭하지.”
“갑자기 무슨 케이크예요?”
“오늘이 네 생일이잖아, 지휘자로서의 첫 생일.”
어찌 보면 졸업식 날 학생들을 지휘했던 것이 있었지만 여기서 감동을 깨서 무엇하겠나. 어느새 초에 불을 붙이는 알베르토였다. 내가 불을 끄지 않는 이상에야 모두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케이크를 향해 다가가는 그 순간 누군가 내게 물었다.
“현, 베를린에서의 경험은 어땠어.”
“잊지 못할 최고의 나날이었습니다.”
과장이 아니었지. 런던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이와 같은 경험을 할 것이라곤 예상치도 못했으니.
케이크 위에 바람이 불어옴과 동시에 마에스트로 유리의 볼이 실룩였다.
* * *
“어머니, 이게 다 뭐예요?”
임금님 수라상 부럽지 않은 십이 첩 반상이 아닌가. 타지 생활을 한 달 동안 하고 왔다고 어머니와 가정부 아주머니가 합심해 팔을 걷어붙인 것이었으니. 누가 보면 군대에서 백일휴가라도 나온 줄 알 정도였다.
“현이 덕분에 할애비가 호강하는구나.”
“할아버지 그래도 고기는 많이 드시지 마세요. 몸에 안 좋아요.”
“암, 누구 말이라고 흘려 듣겠누.”
할아버지는 정정하시다 못해 얼굴에 활기가 가득했다. 오랜만에 보는 손주라고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이럴 줄 알았다면 지난 삶 그토록 허망하게 보내지는 않았으리라.
후회해 봐야 부질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강 서방, 이제 현이도 왔으니 시간을 봐서 중국에 다녀오게나.”
“할아버지, 중국이라니요?”
“요 녀석이 모르는 척을 하기는, 네가 등소평에게 매번 편지를 보냈던 것을 할애비가 모를 줄 알았더냐.”
나이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더니만 등정과 등소평에게 매년 선물과 편지를 보낸 효과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 아닌가.
중국인들은 외지인에게 쉽사리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큰 선물로 꽌시를 맺을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이토록 정성스럽고 시간이 많이 가는 선물이 끈끈한 신뢰를 선사한 것일 테다.
“할아버지, 이거 잡수세요.”
난 쌈을 하나 정성스럽게 싸서는 할아버지에게 드렸다. 누구 말마따나 있을 때 잘해야 하니까.
할아버지가 기분 좋게 쌈을 받아 드셨고 어머니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계셨다.
“현아, 오늘은 할애비와 함께 회사에 가자꾸나.”
“동주에요?”
“그래, 김 비서도 그렇고 직원들도 오랜만에 네가 보고 싶은 모양이니. 그리고 보여줄 것도 있고 말이다.”
보여줄 것이라니, 과연 무엇일까.
* * *
“도착했습니다, 회장님.”
김 기사 아저씨의 말에 차 밖으로 내리니 이미 임원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나도 익히 얼굴을 알고 있는 인물들이었지. 그리고 가장 앞에는 큰 삼촌이 우뚝 서 있었다.
“회장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할아버지는 큰 삼촌의 말에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침부터 할아버지가 작업복을 차려입고 공장을 순회하는 것이 아닌가. 임원들이 그 뒤를 바짝 쫓았다.
할아버지는 일흔이 넘으셨지만 이따금씩 직접 현장을 감독하시곤 하셨다. 항상 내게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경영가는 사업지의 긴장을 돋우게 하는 역할이라고.
“아버지, 앞쪽은 길이 험합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웬걸, 큰 삼촌이 앞장서 군홧발로 돌부리들을 쳐내는 것이 아닌가. 누가 보면 비포장도로라도 걷는 줄 알겠다.
저토록 과장된 표현이 나와 아버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이 자리의 그 누구도 모르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괘념치 않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셨다.
그때였다.
“현아, 저기가 바로 그라이핀과 관련한 신소재 공장이 들어설 자리란다.”
앞으로의 동주를 바꿔나갈 장소가 아닌가. 감회가 남달랐다.
지난 삶에는 외국계 자본에 흡수당해 사분오열되었던 동주였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 있는 큰 삼촌을 쫓아내고 싶었지만 어쩌겠는가. 동주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던 지난날은 나만이 알고 있었으니.
신소재 공장 부지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눈에는 진한 흥분과 설렘이 뒤섞여 흐르고 있었다. 앞으로 저곳에서 동주가 다시 태어나리라.
“이제 티호노프 박사의 연구실로 가 보자꾸나.”
티호노프 박사의 연구실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십여 분쯤 걸어갔을까. 연구소 앞에서 누군가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티호노프 박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글쎄. 좀 들어가 본다니까―!”
아뿔싸, 멀찍이서 목소리만 들었지만 누구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일전 이마가 두 번이나 깨진 작은 삼촌이 아닌가. 때마침 등장한 할아버지의 모습에 작은 삼촌이 언성을 높이던 것을 멈추고는 눈을 크게 떴다.
“범경이, 네가 아침부터 여긴 웬일이냐.”
“아, 아버지. 그게 아니고 제가 잠시 신소재 연구소에 볼일이 있어서.”
“그러니까 무슨 볼일―!”
할아버지가 노성을 터뜨리자 작은 삼촌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표정을 시퍼렇게 질려 들어갔다.
아무렴, 좋은 이유로 신소재 연구소를 찾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예컨대 과거처럼 대외비 문서를 빼돌리려는 것이라 봐도 무방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참에 작은 삼촌을 대마도가 아니라 저기 남태평양의 무인도에 떨어뜨려 버리는 것이 나을 정도였으니.
“아버지, 너무 편애하시는 거 아니십니까?”
“편애?”
“그래요. 강 서방하고 현이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말입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진한 핏줄은 저와 형님이 아닙니까. 아버지 자식인데 말이에요.”
누가 저 칠푼이를 두고 마흔이 넘었다고 할까. 대화만 보자면 사춘기 중학생의 투정 같았으니. 마음 같아서는 작은 삼촌의 머리를 있는 힘껏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유진석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그때였다.
“이놈이―!”
할아버지가 성큼 다가가서는 크게 손을 들어 올리는 것이었으니. 웬만해서는 손찌검을 하지 않는 할아버지가 그만큼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올랐다는 방증이었다.
작은 삼촌이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자신의 이마를 두 손으로 감싸 쥔 모션을 취한 그때.
쿵―!
쓰러진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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