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14화 >
가슴을 세차게 두드리는 여운에 청중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재벌가문의 일원으로 태어나 사교적인 취미를 위해 클래식은 지겹도록 들어봤던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뭐라 설명할 길이 없었다. 짧은 소나타였지만 영원할 것처럼 지속되었던 봄날.
짝.
그 순간 손유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어린 아이의 작은 손바닥이 마주쳤다기엔 다소 큰 울림. 것도 그럴 것이 연회장은 고요를 머금은 듯 조용했다. 혹여나 또 다른 악장이 연주될까 하나같이 망설이며 기대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감사합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깊은 목소리와 함께,
형형한 시선이 저들에게 닿자 그제야 봄이 끝났음을 알았다.
청중들의 눈동자에 아쉬움이 잠시 서렸지만 이내 진한 감동이 차올랐다. 너나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고 있었다. 나이든 창업주들까지 전부 자리에서 일어나자 기립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사회를 맡았던 머리가 희끗한 지배인은 놀람을 속으로 삼켰다. 엉덩이가 무겁기로 유명한 재벌들이 하나같이 감동의 물결에 흠뻑 취해있었기 때문.
“바이올린을 배운 적이 있더냐?”
할아버지를 대신해 왕회장이 내게 물었다. 손일선은 물론이고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새뮤얼 가드너까지 나에게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부담스러운 시선들이었지만 종전 수많은 청중들 앞에서 연주를 했기 때문인지 오히려 무덤덤하게 느껴지네.
“아직 전문적으로 배워본 적은 없습니다. 할아버지.”
왕회장의 눈이 크게 떠졌다. 저런 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 사실 나조차도 아직 내가 어떻게 그런 연주를 선보였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으니. 바이올린이 심장과 대화를 하듯 움직였다면 누가 믿겠는가. 이와중에도 큰삼촌은 내가 왕회장에게 할아버지라 칭한 것에 더 놀란 듯하다. 교양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유회장.’
왕회장이 놀란 표정을 지워내곤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연주가 끝났을 때부터 말이 없으셨는데 깊은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왕회장은 담담한 강현의 눈동자를 보고는 감탄을 삼켰다. 이 어린 소년이 장차 음악계에 커다란 돌풍을 몰고 올 것이라. 대가의 경지라는 것은 모른다, 다만 음악적 기교를 떠나 일평생 느껴보지 못한 감정의 울림. 늙어버린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며 잊어버렸던 진한 아쉬움을 느꼈지.
‘내 손녀는 이미 자네 손주한테 넘어갔구만 그래.’
손유하의 눈동자는 시종일관 강현에게 닿아있었는데 어찌나 그 시선이 강렬한지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도 이처럼 뜨겁지는 않을 것이다.
“봐요, 현이 오빠 바이올린 연주 엄청 잘하죠?”
마치 제 말이 맞지 않냐는냥 의기양양한 목소리. 그 안에는 동경과 환희가 함께 섞여 흐르고 있었는데 똘망똘망한 그 모습이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얼음여왕 손유하가 분위기 메이커가 될 줄이야 정말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
“현아.”
그때 할아버지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하다 못해 적적한 슬픔까지 손바닥에 배여 있는 것 같다. 봄을 연주한 내 모습에서 어머니의 어린시절이 투영되었으리라. 이럴 때는 어떻게 대답하는 게 좋을지 망설여졌다. 중년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런 처세는 해본 적이 없었으니.
“고맙구나.”
뭐가 고맙다는 것일까. 할아버지의 주름진 눈가에서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감정이 묻어나왔다. 아마도 어머니를 생각하고 계실 테지. 난 필요 없는 대답 대신 할아버지의 검버섯 핀 손등을 양손으로 감싸 안았다. 그리워하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 * *
스피오 스피오 맴맴─!
“강현 학생, 벌써 일어났어요?”
가정부 아주머니가 2층으로 올라왔다가 씻고 나와 수건을 목에 두른 나를 마주했다. 어젯밤 연회가 늦게까지 계속돼 꽤 늦은 시각에 잠을 청했었다. 아주머니는 당연히 내가 아직도 자고 있는 줄 알았겠지. 사실 나도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저 망할 놈의 매미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처음에만 정겨웠더랬지.
“잠자리가 편해서 그런지, 푹 잤어요.”
“아유 더 자도 되는데, 조금 있다 아침식사 먹게 천천히 내려와요. 강현 학생 좋아하는 연근 조림 해놨어요.”
어머니가 매번 해주었던 반찬. 지난 삶 쳐다보지도 않던 연근조림이었지만 지금은 없어서 못 먹는다. 처음 과거로 돌아와서 연근조림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는 눈물을 쏟았더랬지. 그나저나.
아직 대기가 덜 오염돼서 그런가, 매미들의 옥타브가 머라이어캐리 뺨친다. 아유 귀 따가워.
“아버지, 오늘도 회사에 현이랑 함께 출근하실 생각이십니까?”
아침식사자리에 불청객이 떡하니 앉아있었다. 큰삼촌은 할아버지를 모신다는 핑계 삼아 어젯밤 이촌동 저택에서 잠을 청했는데 그 이유야 불 보듯 뻔했다. 내 평생 사법고시를 동차합격 했을 때보다도 더한 관심을 받은 것이 어젯밤이었으니. 꿔다놓은 보릿자루가 되어버린 큰삼촌은 할아버지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초초해졌을 것이다.
‘쯧.’
한참어린 조카를 신경 쓰기보다는, 사업수완에 대해서 더 갈고 닦아야할 텐데. 하긴 말해서 들을 인물은 아니지. 그때 할아버지가 넌지시 큰삼촌을 바라봤다.
“그건 왜 묻는 게냐?”
“어제 보니 현이가 많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한창 클 나이인데 집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푹 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어이쿠, 나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줄 줄이야. 감격이 차올라서 눈물이 나올 뻔한 걸 날숨으로 뱉어냈다. 속이 훤히 보이다 못해 투명하다시피 한 큰삼촌이다. 할아버지의 근심이 십분 이해되었다. 차라리 유진석 만큼이나 어렸다면 머리칼을 틀어쥐고 혼쭐을 내주는 건데. 아쉽다, 아쉬워.
“현이는 오늘 손회장네 갈 것이니, 걱정 말거라.”
“예?”
내가 그곳에 또 간다고? 큰 삼촌은 회사에 함께 간다는 말을 들은 것보다 더 놀란 듯 했다. 할아버지가 더 이상 부연하지 않자 경악에 물든 시선으로 나를 슬쩍 바라봤는데 뭐 어쩌라고? 나도 내가 왜 왕회장의 저택에 가는지 그 이유를 모르는데 말이다. 유하가 내가 보고 싶다고 떼를 쓰기라도 한 걸까?
* * *
“강현 학생, 다 왔어요.”
김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평창동 대저택에 도착했다. 언제 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높다란 담벼락. 지난 삶 손일선이 사업이 잘 안 풀릴 때면 왜 이곳을 찾았는지 알 것 같았다. 저택 자체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기운이 흘렀다. 이런 터는 과연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일까.
“어서오거라.”
뜻밖의 인물이 나를 반겼다. 왕회장도 아닌 제일전자 손일선 사장. 주말도 아닌 평일이기에 당연히 회사에 나가있을 줄 알았다. 왕년에는 주말도 반납하고 일을 하는 노력형 배짱이로 소문난 인물이 아닌가. 그래도 어찌 보면 옛 상사라고 몸에 힘이 들어간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하, 오히려 내가 와줘서 고맙지. 우리 유하가 현이 너를 아주 잘 따른단다. 이번 방학동안 바이올린을 같이 배우게 해달라고 어찌나 성화인지. 유회장님께서 허락 안 해주셨으면 이 아저씨가 아주 곤란할 뻔 했어.”
아아, 사건의 전말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어쩐지 유하가 떼를 썼을 것 같더라니. 이참에 바이올린을 배워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든다. 또 다시 심장이 뛰는 경험을 하게 되면 정말 황홀할 것 같았다. 헌데 손일선이 자신을 아저씨라고 표현하다니, 손유하에게서 오빠소리를 들었을 때만큼 소름이 돋았다.
“오빠!”
양반은 못되는구나. 언제 나타날까 싶었던 손유하가 버선발로 뛰어와 나를 반겼다. 처음에는 이름 난 얼음여왕이 이리도 살갑게 대하는 것에 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거북스러웠지만 어쩌겠는가, 도스토옙스키가 옳았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그래, 유하야.”
“오빠 빨리 이리로 와봐.”
다시 만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았건만 뭐가 그리 할 말이 많은지, 나는 손을 잡아끄는 유하를 잠시 달래곤 손일선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 와중에도 손유하의 목소리가 귓가를 계속 맴돈다. 꼬맹이가 뭘먹고 자라는 건지 힘이 보통이 아니네, 한편 멀어지는 두 아이를 바라보는 손일선의 표정이 오묘하다.
“이거 가르쳐줘!”
수학 문제지다. 어느새 실력이 늘어난 것인지 지난번에 봤던 문제들보다 수준이 꽤 올라가 있었다. 일전 문제를 다 풀어냈던 경험 때문에 모른다고 발뺌을 하기도 힘들다. 졸지에 과외선생이라니. 나는 하는 수 없이 문제지를 집어 들었다. 대충 음악 선생이 오기 전까지 이걸로 시간이라도 때워야지.
“유하야 이해됐니?”
“응!”
한 번 가르쳐보니 정말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빠르다. 처음에는 마냥 아이가 똑똑해서 그런 것인 줄 알았지만.
‘이미 알고 있네.’
손유하는 어떻게 문제를 푸는지 알고 있었다. 이미 배워버린 공식을 내게 다시 배운다는 것을 제 딴에는 감춘다고 열심이다. 아무렴 훗날 까탈스럽고 자존심강하기로 유명한 제일물산의 사장이다. 정말 몰라서 내게 가르쳐달라고 하지는 않았겠지. 혹시,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걸까?
“마지막 문제는 유하가 혼자서 풀어봐.”
“잉, 나 진짜 이 문제는 모르는데.”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말해버렸지만 그조차도 깜빡해버린 유하였다. 이럴 때는 정말 귀여운데. 그래도 핏줄은 어디안간다고 승부욕하나는 타고난 승부사. 내가 도와주지 않겠다고 말하자 혼자서 문제지를 노려보며 풀기 시작하는데 섬뜩할 정도로 몰입하잖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다 풀었어, 오빠!”
손유하가 배시시 웃으며 문제지를 내게 건넸다. 마지막 문제를 보니 지우개가 흑탄가루로 범벅이 되었을만큼 여러번 반복해서 문제를 풀어냈네. 물론, 결국은 정답이지만 삼십분 동안 한 문제에 오롯이 집중하고 있다니 11살 아이라기에는 믿기지 않는 집중력이다.
“유하야 그런데 문제가 어렵지는 않았어?”
아직 11살의 어린 아이가 풀기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어려운 문제들. 재벌가의 교육열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 싶다. 이렇게 치열하게 살다보니 귀여웠던 아이가 훗날 씨니컬의 대명사가 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빠가 그랬어. 포기하는 순간 끝난다고. 그러니 악착같이 붙잡고 놓지 말라고 했어. 그러면 결국 내께 된다고.”
손일선, 이 아저씨는 도대체 어린 딸한테 뭐라고 말한 거야.
설마.
그래 이 맘 때쯤이면.
손일선이 자신의 동생들과 후계 경쟁을 하고 있을 시기. 왕회장은 죽기 직전까지 경영권을 손에서 놓지 않은 채 자식들을 저울질 했지. 말 그대로 약육강식, 자신의 사업철학에 맞춰 결국 강한 놈이 제일그룹을 가지는 것이었으니. 그야말로 총성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하야, 필요 없는 것까지 전부 가질 필요는 없어.”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대가 다가온다. 구시대의 산업들이 사양길로 접어들고 현시대의 새로운 산업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시기. 반도체가 그러했지, 그런 점에서 왕회장은 혜안이 정말 뛰어난 인물. 그는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좋은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을 억지로 가지면 결국 탈이 나게 된 다는 것을 아는 사업가다. 지금의 손일선은 왕회장에 비하면 아직 새끼 호랑이에 불과하지.
“필요 없는 것까지 전부 가질 필요는 없다라.”
그때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팩 돌렸다.
그곳엔.
“좋은 말이로구나, 그럼 현이가 보기엔 이 할애비에게 지금 가장 무엇이 필요 없다고 보느냐.”
왕회장이 특유의 번들거리는 안광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침이 절로 삼켜졌다. 저 시선, 왠지 모르게 어제 종일 느꼈던 손일선의 시선과 오버랩 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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