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 RAW novel - Chapter 251
제250화 여태 시작도 못했잖소?
내가 은신해 있던 광장 북편의 석탑에서 나와 허공을 가로질러 날아가자 군중이 얼어붙었다.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 공중에서 순간이동을 연속으로 발한 나는 순식간에 내 관이 놓인 곳의 상공에 이르러서는 유유히 수직 낙하했다.
일만 군중의 마비는 내가 돌바닥에 착지하고서야 풀렸다. 기실 그들을 풀어준 건 괴선의 외침이었다.
“야, 이놈아! 정말로 너냐?”
나는 절름거리며 질주해오는 괴선에게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제길, 보자마자 이놈 저놈이오?”
불편한 다리로 한달음에 나에게 달려온 괴선이 어미에게 매달리는 아이처럼 내 허리에 팔을 감았다. 나는 차마 그를 뿌리치지 못하고 포옹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가 양물을 만지려고 하자 질겁하고는 밀어냈다.
“징그럽게 뭐하는 짓이오?”
“가만있어 봐라, 이놈아. 그놈을 봐야 진짜 네놈인지……, 헉!”
말을 하다말고 괴선이 경악성을 터뜨렸다. 뒤늦게 관을 들여다본 것이었다. 그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했다.
“이, 이,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저, 저, 저 물건은 대체…….”
나는 괴선의 말을 끊었다.
“물건이 아니고 이번에 서방에 갔다가 새로 사귄 내 친구요.”
마침 내가 사전에 일렀던 대로 숭무전 지붕에 숨어있던 나나가 날아왔다. 그녀가 ‘끼끼끼’거리며 자기 일족의 언어로 말하자 관 속에 누워있던 이안이 참았던 숨을 크게 들이켜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가 변신을 풀고 본모습으로 돌아오자 다들 입을 쩍 벌렸다.
이안은 변신술의 대가였다. 그의 변신술은 축골공이나 변용술과는 차원이 다른 이능(異能)이었다.
그는 인간만이 아니라 짐승으로도 바뀔 수 있었다. 심지어는 책상이나 도자기 같은 사물로의 변형도 가능했다. 그에 따르면 유일한 단점은 크기에 제한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상체의 역할만 하면 되었기에 큰 문제는 아니었다. 비록 그러고도 총 부피가 모자라 왼팔은 통째로 빼고 배꼽 아래가 아니라 명치 어림까지만 복제했으나 오히려 그래서 더욱 효과적이었다.
너무나 생생한 시체였기에 관을 들여다 본 이들은 속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더라도 오대세가의 가주들이나 광객과 소면통달이 보다 주의 깊게 살폈더라면 알아차릴 수 있었을 터였다. 이안이 호흡은 일각가량 닫을 수 있었지만 심장박동까지 은폐하지는 못하기 때문이었다. 지나친 흥분으로 인해 그 결정적인 단서를 놓친 것은 오대세가 가주들의 실착이자 불운이었다.
충격을 추스른 괴선이 땅딸보 사내로 돌아온 이안을 사납게 노려보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게 다 어찌 된 영문이냐?”
“심심해서 장난 좀 쳐 봤소.”
“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아! 이게 장난 칠 일이냐? 정말로 네놈이 변을 당한 줄 알고 얼마나 상심했는지 알아? 네놈 때문에 간이 녹고 심장이 찢어지는…….”
“미안하오, 노인장. 내가 경솔했소. 근데 의외구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노인장은 내 주검을 보고서 생사는 하늘의 주관입네 어쩌네 하며 태연하게 굴 줄 알았는데.”
“이놈이 뚫린 입이라고, 말은. 그래, 이놈아. 사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즉 네놈 장난인 줄 꿰뚫어보고 장단을 맞춰졌을 뿐이니라. 네깟 놈이 뒈지든 말든 코털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게다.”
“흥, 그러시겠지. 그나저나 이제 좀 비키쇼. 다른 분들하고도 얘기 좀 합시다.”
독점을 고집할 줄 알았는데 넋이 나간 채 굳어버린 오대세가 가주들을 흘낏 쳐다본 괴선이 싹싹하게 물러섰다. 그러자 광객과 소면통달이 내게로 다가왔다. 멀리 있던 나현과 남천은군 등도 부리나케 내 쪽으로 뛰어왔다. 관 외곽을 에워쌌던 정맹의 무인들은 감히 그들을 가로막지 못하고 부랴부랴 길을 터주었다.
나는 친인들에게 일일이 알은체를 했다. 그러는 동안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포함한 정맹의 원로들은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꼼짝도 않고 서있었다. 엄벌의 선고를 앞둔 죄수들 같은 낯짝들을 하고서.
느긋하게 친인들과 재회인사를 나눈 나는 그동안 은근슬쩍 뒷걸음질 쳐 나로부터 이십여 보 멀어진 오대세가 가주들에게 눈길을 보냈다. 보이지 않는 벽이 부딪친 듯 그들의 퇴보가 멎었다. 나는 자령검군에게 시선을 맞췄다.
“원흉이라……. 검군이 나를 그렇게 생각하는지 미처 몰랐소. 게다가 생색? 하아, 이것 참.”
달달달 떨면서 사시나무 흉내를 내고 있던 자령검군이 이번엔 개구리 꼴을 했다.
“죽을죄를 졌소, 무황. 제발 살려주오.”
바닥에 바짝 엎드린 자령검군의 등짝에 다른 가주들이 경쟁하듯 성토를 쏟아냈다.
“그런 망발을 떨고도 용서를 빌다니. 괴선의 말마따나 심히 염치가 없구려, 검군.”
“백 가주의 폭언을 듣고 있다가 내가 다 분했소. 오랜 정을 봐서 꾹 참았으나 무황이 조금만 늦게 왔어도 내 손으로 백 가주를 징치할 참이었소.”
“나도 마찬가지요. 같은 오대세가에 속한 탓에 어쩔 수 없이 묵과했으나 검군의 언동은 불쾌하기 이를 데 없었소. 검군은 정맹의 수치요. 우리까지 덤터기로 넘어가게 생겼으니 이를 어떻게 책임질 거요?”
“조금이라도 가문과 정맹을 생각한다면 구명이 아니라 처벌을 청해야 마땅하지 않겠소, 백 형? 그게 대장부의 자세 같소만.”
나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오대세가의 수장들을 무시하고 괴선에게 물었다.
“내가 언제 정맹에 온지 아오, 노인장?”
“몰라, 이놈아. 언제 왔는데?”
“열이틀 전에 왔소.”
“그래서?”
“그렇다고요. 근데 그 동안 어디에 있었을까요?”
“나하고 스무고개하자는 게냐?”
“아, 그냥 대답이나 하쇼.”
“이놈아, 네놈이 어디 처박혀 있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태평전 지붕 처마 밑에 있었소. 까마득히 먼 서방에서 도후보다 두 배는 강한 난적의 머리통을 깨부수고 오느라 심신이 지쳐 모처럼 푹 쉴까 했는데 별의별 잡소리가 휴식을 방해하더이다.”
말귀를 알아들은 오대세가 가주들의 안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러고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령검군처럼 바닥에 이마를 박으며 관용을 간청했다. 그들의 행동을 본 정맹의 무인들이 일제히 오체투지 했다. 너른 광장에 서있는 이들은 나와 내 친인들밖에 없었다.
* * *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렀다.
이렇게 말하면 한 오십 년쯤 지났을 거라 여길 지도 모르겠지만 실은 뇌신의 화신을 처치하고 중원에 복귀한 후 고작 칠 년하고도 반이 지났을 뿐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세상은 상전벽해란 표현으로도 모자랄 만큼 급변했다. 한마디로 온 천하가 진소월이 살아생전 품었던 꿈을 실현하는 거대한 장이 되었다.
내가 장난을 침묵으로 마무리한 이후 정맹, 아니 오대세가는 철저하게 알아서 기었다. 그들은 사마 무림이 장악했던 지역에 일부 보장받았던 이권을 스스로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진소월이 구상한 정책을 누구보다 열심히 실행하며 내 비위를 맞추려 들었다.
기실 나는 세상사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일 년의 반은 진소월과 함께 머물던 와옥에서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한우경과 이모의 무덤이 있는 비처에서 보냈다. 이따금 친인들이 나를 찾았지만 그들에게도 최소한의 시간만 할애하고 수련에 몰두했다.
실은 난쟁이를 꺾은 이후 나는 오랫동안 무기력의 늪에서 허우적거렸다. 필생의 숙원이던 지상최강자가 되었으나 환희에 겹기는커녕 허탈할 따름이었다. 나를 늪에서 끄집어낸 이는 나나였다.
이안과 함께 서방으로 돌아갔다가 열 달 만에 되돌아온 그녀는 그곳에서 내가 불사신으로 불리며 주신(主神)으로 추앙받게 되었다고 전했다. 그럼에도 내가 별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얼빠진 사람처럼 굴자 하늘 위의 무한한 세계에 난쟁이에 필적하거나 능가할 강자들이 존재할 가능성이 상당함을 주지시켰다.
자극이 되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바짝 정신이 든 나는 그날부터 수련에 돌입했다. 나나는 괜히 얘기했다며 후회막심이었다. 내가 그녀를 장애물로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전날 진소월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일단 난쟁이와 정면승부를 벌여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는 무위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넉넉잡고 이십 년쯤 걸릴 듯싶었다. 그보다 늦어질 수도 있지만 상관없었다. 내게 남은 건 시간뿐이었다.
* * *
자기와 어울려주지 않는다며 심통을 부리는 나나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수련에 여념이 없던 내가 외출을 결심한 건 이광의 비무를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십 년 전 내가 강호초출을 알렸던 안평 무림대회는 나를 기려 천하제일의 등용문으로 격상되어 있었다. 성주 무림만이 아니라 온 대륙에서, 심지어는 서역과 남방, 그리고 몇 년 전 화친 조약을 맺은 해왕도에서도 최고의 신예들을 선발해 보냈다. 하여 본선에 드는 것 자체만으로도 천하를 아우르는 특급 신성으로 인정받았다.
성주 무림과 의주 무림을 통합한 예선에서 우승한 이광은 당당하게 삼십이강의 한 자리를 차지했다. 내년이면 약관이었지만 내 눈엔 여전히 열두어 살 소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이 년 전에 절정의 벽을 넘은 고수였다. 본 대회 우승까지는 어렵겠지만 사강에는 들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다.
이광의 무재는 나에게 한참 못 미치지만 노력만큼은 능히 나와 비견할 만했다. 사실 무재도 꽤 출중한 편이었다. 도중에 한 눈을 팔지 않는다면 훗날 초절정 상(上)에는 이를 수 있을 터였다.
이광을 응원하러 온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그를 공동제자로 삼았던 친인들이 모두 안평으로 몰려와 있었다. 그들 중 검황자와 그의 연인이 단연 눈에 띄었다. 참고로 그는 빙궁의 공주와는 진즉 헤어지고 나나의 초청을 받아 서방을 여행하다 만난 절세미녀와 연분을 나누고 있었다. 공주와의 이별은 쌍방 합의에 의한 것이라고 들었다. 공주 또한 검황자와 갈라서자마자 서역의 왕족과 정분이 났다고 들었다.
검황자는 놀랍게도 발전이 없었다. 그의 무위는 구 년 전 나와 진소월을 두고 겨루었던 결정전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때보다 퇴보한 느낌이었다. 수련을 등한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이른바 일찍 피웠다가 빨리 시드는 꽃이었다. 나는 그가 저러다 절대지경의 초입에도 들지 못할까 봐 우려스러웠다.
특히 반가운 얼굴들도 있었다. 무영 아저씨와 강태수였다. 그들은 오 년 전 명교에서 혼례를 치르고 부부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경사를 축하하러 기꺼이 은천까지 갔다. 이번 외출을 제외하면 내가 세상의 모습을 보였던 유일한 경우였다.
본의는 아니었으나 어쩔 수 없이 나는 만인의 주목을 독차지했다.
다들 관전은 뒷전이고 나에게 눈도장을 받느라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칠 년여 전의 사태 이후 전격적으로 물갈이 된 오대세가의 새 가주들은 내 시종들인 양 뒤를 따라다녔다. 그러면서 틈이 날 때마다 내 뜻을 받들기 위해 자신들이 얼마나 열과 성을 다해 분투하는지 전하려고 애썼다. 대충 흘려듣고 있는데 기다리던 괴선이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군중이 터 준 길을 거들먹거리며 걸어오는 그에게 투덜거렸다.
“아, 제길. 왜 이렇게 늑장을 부렸소?”
“야, 이놈아. 네놈에게는 오천이백 리도 지척이나 다름없을 테지만 나한텐 얼마나 먼 길인 줄 아느냐? 스무 날이나 딱딱한 마차 의자에 앉아있으려니 엉덩이에 알이 박히고 똥구멍이 헐 지경이다. 네놈이 내 노고를…….”
“아, 됐소. 잡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꼬마 녀석 솜씨나 봅시다. 노인네 때문에 다른 데는 다 끝났는데 여태 시작도 못했잖소?”
내 재촉에 괴선은 나와 더 회포를 풀지 못하고 비무대 가장자리의 특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를 위해 마련한 의자에 앉으며 구시렁거렸다.
“백화루 꼭대기가 최고 명당자린데.”
옆에 착석하는 내게 고개를 돌리며 괴선이 감회에 젖은 음성을 흘려냈다.
“거기서 너를 지켜보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이나 지났구나. 그 곰탱이, 아니 올챙이가 이런 거물이 되다니. 그날의 나는 상상도 못했을 터, 역시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여기서부터 시작되어 서방의 바위산에서 끝난 이 년 반 동안의 서사가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그 가운데 하나가 유독 두드러졌다.
진소월.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웠다. 부모님만큼이나. 솔직히 말하자면 부모님보다도 더.
나는 내세라는 게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래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기를.
공식판정관이 비무 개시를 알렸지만 나는 비무대가 아니라 천공으로 시선을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가을 하늘에 사랑하는 이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를 매혹시켰던 쓴웃음이 아니라 한없이 따뜻하고 밝은 웃음을.
까닭 모를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내렸다. 이런 제길.
* 작가의 말: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