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55)
> 음악천재를 위하여 – 155화 >
“여기 있었군, 마에스트로.”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스펜서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옆자리에 앉아도 되겠나?”
“좋을 대로 하게.”
영국의 왕세자 새뮤얼이 스펜서의 옆 객석에 천천히 앉았다.
평소에는 청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런던 심포니 콘서트홀이었다. 하지만 영국 전역이 축제로 들끓는 지금 콘서트홀은 휴가를 맞이했으니.
텅 빈 객석에는 스펜서와 새뮤얼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있는 지금 자네는 청승맞게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나?”
“추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었지. 그나저나 왕세자께서 이렇게 경호원도 없이 움직여도 되는 건가, 아니면 이제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서 더 이상 경호원이 필요하지 않은 게야?”
새뮤얼이 미소를 지으며 죽마고우를 바라봤다. 문밖에 경호원들이 대기 중이라는 것은 스펜서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허나 자신 앞에서 허울 없이 대하는 유일한 친구였으니. 스펜서와 함께 있을 때면 왕실의 격식을 잠시 동안은 잊어도 괜찮았다.
“스펜서, 몸이 젊었더라면 지금 자네 목에 헤드락을 걸었을 거야.”
“왕세자께서 너무 오랫동안 후계자 자리에 올라 있으셔서 그런지 잊으셨나 보군. 왕립학교 시절 나랑 화장실에서 싸웠던 거 기억나지 않나? 내 기억으로는 그때 자네가 코피를 흘렸던 것 같은데.”
“크흠. 끝까지 갔다면 내가 이겼겠지, 사감 선생이 자네를 살린 게야.”
그 순간 스펜서와 새뮤얼이 서로를 마주 보고는 왈칵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왕립학교 시절부터 중년을 넘어서는 지금까지 두 사람은 변한 것이 없었다.
“스펜서, 무엇을 추억하고 있었나?”
“런던 심포니에서 보냈던 세월들을 처음부터 돌이켜 보고 있었지. 처음 지휘봉을 들었을 때부터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어 내생에 다시는 없을 훌륭한 단원들을 만나기까지. 일생의 파노라마를 스쳐 보내고 있었네.”
“천하의 스펜서가 그런 감상에 젖을 줄이야! 누가 보면 내일 당장에라도 지휘를 그만둔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스펜서는 말없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만큼 자신의 어깨가 성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 주치의도 말하지 않았던가. 어깨 수술이 잘된다고 할지라도 더 이상은 지휘를 하기 힘들 수도 있다고.
“앞으로 길어봐야 고작 몇 년일 걸세. 그동안 내 어깨가 잘 버텨줘야겠지. 런던 심포니의 새로운 마에스트로가 자리 잡을 때까지 말이야.”
“현을 말하는 건가?”
“당연한 거 아니겠는가, 베를린의 사자가 현을 노리고 있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의 생각일 테지.”
어찌 보면 현과의 만남을 이어준 연결고리는 새뮤얼이나 다름없었다. 스펜서에게 처음 현을 보여준 것도 새뮤얼이지 않은가.
스펜서가 저토록 염려하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그만큼 강현의 성격이 어린아이답지 않게 종잡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걱정하지 말게나. 스펜서, 자네 말고도 아주 강력한 조력자가 생겼으니.”
“조력자?”
그 순간 영국의 왕세자 새뮤얼이 볼을 실룩였다.
“여왕님께서 현의 열렬한 팬이라네.”
* * *
진흙이 묻은 장화와 바짓단에는 흙탕물이 얼룩져 있었다. 수수한 옷차림 위로는 초록색의 앞치마와 챙이 넓은 밀짚모자가 영락없는 정원사라고 말해주고 있는 듯했다. 왕실공연에서 뵀던 여왕의 복장과는 상당히 괴리감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깊은 눈빛은 마치 속을 꿰뚫는 것 같지 않은가.
“잠깐 시간이 괜찮을까요?”
“괜찮습니다!”
흡사 직속 상관 앞에선 신입사원마냥 과도하게 톤을 올려 대답했다. 여왕이 그 모습을 보고는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왕은 모종삽을 내려놓은 채 온실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내뿜은 향기는 약과라는 듯이 한 발자국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풍부하고 진한 꽃잎 향이 기분을 고양시켰다.
가지각색의 화초들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색감을 뽐내고 있었으니. 예컨대 꽃의 천국이 있다면 바로 이러한 모습일 것이다.
“로즈퀸이라는 이름의 홍차랍니다. 부드럽고 진한 풍미가 입안에서 오래 맴돌아 좋은 기억을 남겨주지요. 현 씨의 교향곡처럼 말이에요.”
홍차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지는 모를 지경이었다. 아무렴, 살아생전 영국의 여왕과 나란히 마주 앉아 티타임을 즐기게 될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왕의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마치 속을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요?”
“물론입니다, 여왕님.”
“현 씨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이토록 젊은 나이에 그 정도 재능을 선보일 정도면 어떤 시선으로 음악을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지네요.”
어려운 질문이다. 음악을 두고 따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뚜렷한 가치관과 이념을 가지고 음악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마치 운명이 그렇게 나를 정한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었으니. 하지만 음악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더이상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행복, 이라고 생각합니다.”
애초에 실패했던 지난 삶을 복기하지 말자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권력과 물욕을 떨쳐버린 채 행복만을 추구했으니.
어찌 보면 행복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달려나가는 열차가 음악일지도 모르겠다. 여왕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엷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다소 젊은 나이에 버킹엄에 입성해 왕관을 썼지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극도로 떨렸습니다. 믿기지 않겠지만 여왕의 자리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원해서 올라간 자리가 아니었으니까요.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어느 순간 내가 가야 할 길이 바로 이 길이라는 것을 알겠더군요. 그런 점에서 역시 현 씨는 아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 같습니다. 벌써부터 이토록 확고한 가치관을 지닌 채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과찬이었다. 지난 삶 성공만을 바라고 살았기에 그 누구에게도 이러한 말을 듣지 못했다. 그때 여왕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를 바라봤다.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하겠습니다. 현씨는 영국으로 오실 생각이 있으세요?”
“네?”
“지금 당장 뭔가를 결정하라는 건 아니에요. 다만 현 씨가 성인이 되고 난 후 영국에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싶어요. 원한다면 시민권은 물론이고 이주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모든 편의를 보장하겠습니다. 저는 런던 심포니의 선율이 현 씨의 손에서 재탄생하길 바랍니다. 과거 마에스트로 스펜서가 그랬듯이 말이에요.”
사법고시 합격 소식을 듣고도 이만큼 놀라지는 않았다. 설마하니 영국의 여왕이 직접 이렇게 제안을 해올 줄이야.
하물며 지금 당장도 아니고 성인이 된 후를 기약하는 것이 아닌가.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여왕의 형형한 눈빛은 거짓을 말하고 있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제안에 내가 쉬이 대답을 하지 못하자 여왕이 고개를 짧게 끄덕여 보였다.
“천천히 생각해 봐도 좋습니다. 영국은 언제든 현 씨의 지휘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참, 이곳이 마법의 정원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요?”
“정원의 이름은 처음 알았습니다.”
“가지각색의 화초와 나무를 가꾸는 것이 제 소소한 취미랍니다. 저는 이곳을 어렸을 적부터 마법의 정원이라고 불렀지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순백의 머리카락이 출렁이며 정원을 가리켰다.
“원하는 건 모든 이루어지게 해주는 신비한 곳이에요.”
* * *
“여보,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강현의 아버지 강선우는 수화기 너머 아내를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평소에는 무슨 일이 생겨도 침착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지금은 마치 복권에라도 당첨된 사람 마냥 들껐다.
-여보, 영국에서 전화가 왔어요.
“현이가? 어제 통화했는데 그게 왜?”
-아니, 아들이 아니라 영국 왕실에서요―!
강선우는 수화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이야기에 얼굴이 시시각각 변했다. 맞은편 자리에 앉아있던 티호노프 박사가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일 정도였으니.
강선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진 이유는 여기 있었다. 바로 영국의 여왕이 직접 자신들을 초청해 왔다고 한다.
“잠, 잠깐만. 여보.”
수화기 너머로 아직도 방방 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면 강선우의 얼굴에는 기쁨과 함께 긴장이 서렸으니. 아무렴, 국가적인 행사의 초청이지 않은가.
하물며 영국 여왕이 직접 초청장을 보냈다고 하니 말도 나오지 않았다.
“장인어른도 알고 계시지?”
-당연히 알고 있죠. 아버지도 함께 초청받았어요. 영국 여왕님이 직접 전화를 주신 통에 어찌나 손이 떨리던지.
“뭐어? 여왕이 직접?”
강선우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맞은편에 앉은 티호노프 박사가 이제는 능숙한 한국어 발음으로 ‘여왕?’이라며 계속해서 의문 어린 시선을 보내는 것이었으니.
강선우는 자초지종은 나중에 설명하겠다는 시선을 보내고 난 후 수화기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통역을 통해 전화를 하긴 했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거 있죠. 선물이라도 사갈까 싶어 취미가 어떻게 되시냐고 무턱대고 질문해 버렸네요.”
“취미를 물어봤다고?”
-네, 그러니까 여왕님이 웃으시며 취미는 정원을 가꾸는 일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아무렴, 한 나라의 여왕이지 않던가. 선물을 준비할 수도 없을뿐더러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진대 아내는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재벌가에서 태어났지만 이런 밝고 다정한 면 때문에 자신과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이리라.
그때 수화기 너머 확신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여왕님이 정원을 가꾸시는 걸 좋아하시니 선물로 호미를 준비해 볼까요?
아차, 머리가 찬물에 끼얹어지는 기분이었으니. 아무래도 그건 영국에 없을 것 같다.
* * *
“일주일 남았네.”
어쩌다 보니 인기 연예인 못지않은 스케쥴을 영국에서 소화해 내고 있지 않은가. 왕실공연이 있은 직후 만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대부분이 음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음악가들이라 나로서는 만나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크리시, 오늘 저녁은 제가 준비해 볼까요?”
“현이 직접 준비를 한다면 기대가 되겠는데요.”
“저번처럼 매콤하게 끓인 찜닭에다가 후식으로는 식혜 어때요. 한인마트에 가니까 식혜를 팔더라고요.”
크리시는 이미 내 손맛에 중독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일전 영국을 방문했을 때부터 종종 간단한 한식을 만들어 먹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사양하던 크리시도 이제는 토종 한국인 못지않게 한식에 푹 빠져 있었다. 오죽하면 샤펠에서 때처럼 크리시도 레시피를 적어달라고 성화겠는가.
“현, 가만 보면 한 번씩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착각을 합니다.”
“제가요?”
“예, 어떨 때 보면 영락없는 그 나이대의 소년 같지만 저를 챙겨주는 다정한 모습을 보면 어린 나이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배려니까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현을 경호하겠습니다.”
어째 코끝이 찡해지는 멘트가 아닌가. 크리시는 말을 끝마치고는 쑥스러운 듯 곧장 선글라스를 껴 보였다. 이럴 때 보면 마초 감성이 가득한 근육인들이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설에 신빙성이 더해진다.
“크리시, 잠시 산책 다녀와도 되죠? 산책 다녀와서 곧장 저녁거리 준비하러 한인마트에 갈 거예요. 주방장 아저씨한테도 미리 말해줘요.”
크리시도 이제는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아무렴, 왕실소유의 대저택 이었으니.
며칠 전 여왕님을 만났던 마법의 정원을 거닐 때였다. 나도 모르게 가슴속 깊숙이 감정이 차올랐다.
향수병을 잊을 나이가 되었건만 아직 육체는 아닌가 보다. 한 번씩 부모님과 할아버지의 모습이 그리운 걸 보면.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지는 곳이라.’
여왕의 마지막 말이 떠올랐다. 마법의 정원에 어울리는 멘트이지 않은가. 꽃잎 향이 내 마음을 달래듯 풍겨왔으니. 그때였다.
어?
옷소매를 들어 눈을 몇 차례고 비볐다. 어째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헛것이 보이지 않는가. 정원 너머에서 그리운 사람들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으니. 하지만 인영이 선명해질수록 내 눈은 점점 부릅떠졌다.
“아들―!”
그 순간 어머니의 유쾌한 목소리가 신기루를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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