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6)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16화 >
“심심해.”
손유하는 어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하고 혼자서 대저택을 누비고 있었다. 그 탓에 손유하를 맡은 비서만 땀을 뻘뻘 흘리며 안절부절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외국인 아저씨와 대화를 하느라 한참이다. 뭐가 그리 화기애애할까.
“나 심심해!”
한편 왕회장의 입가에는 미소가 가득했는데, 것도 그럴 것이 새뮤얼 가드너가 적극적인 협조 의사를 밝혔기 때문. 애초에 비즈니스의 일환으로 한국을 방문한 가드너였다. 왕족이라는 신분에 어울리지 않게 소탈한 성정은 그의 형과는 판이하게 달랐는데.
“영원한 왕세자라, 저는 이런 타이틀이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본래 차기 왕위 계승권은 형님에게 있었으니 말이에요. 이전처럼 새뮤얼이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본래 왕위 계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새뮤얼 가드너였다. 젊은 날 사건사고와 추문이 끊이지 않았던 본래의 왕세자가 국민들의 반감을 사 자리에서 내려온 것이 그 발단이었다. 그 때문에 본래 왕세제의 자리에 있던 새뮤얼이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는데 웬걸, 국민들의 환호와 지지는 엄청났다.
그때 왕회장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새뮤얼, 그대 덕분에 우리 호텔이 국제적인 비즈니스 호텔로 거듭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한 게 뭐가 있나요. 그저 얼굴마담을 했을 뿐인데요. 모두 제일그룹의 명성 때문이지요.”
백화점 산업은 물론이고, 호텔 산업의 발전 속도는 정말 눈부시다 할 정도로 빨랐다. 기업들의 마케팅은 치열하다 싶을 정도로 과도했는데 유명 연예인은 물론이고 은근슬쩍 정계의 인물까지 광고수단으로 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물론, 제일그룹은 그 명성만큼이나 엄청난 인물을 데려온 것이고.
“아니지요. 연일 신문광고에서 새뮤얼의 방한을 기사화 하고 있지 않습니까. 항상 그 뒤의 배경이 되어주는 호텔과 백화점이 저희 것이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요. 이 늙은 심장이 다시 세차게 뛰고 있다면 믿으시겠습니까.”
단순히 새뮤얼이 묵고, 친분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그 부가적인 효과는 엄청났다. 이런 건 돈이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을 주도하고 계획한 것이 바로 손일선 이었다. 손일선은 미소 짓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넌지시 보며 속으로 환희를 삼켰다.
“참, 미스터 손. 실례가 안 된다면 부탁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그때 새뮤얼이 손일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부탁이라?
무슨 부탁을 해와도 기꺼이 받아들일 요량이었다. 아버지에게 인정받은 가치를 금전으로 환산한다면 셈을 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연회장에서 그때 그 어린 신사가 바이올린을 연주했던 영상을 구할 수 있을까요? 그때 보니 촬영하던 것 같던데 말이죠.”
뜻밖의 부탁이었다.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모임이었지만, 자신의 딸아이를 위해 연주영상을 촬영하기는 했었지. 물론 하는 김에 강현의 연주도 함께 촬영을 지시했었다.
“새뮤얼, 혹 어디에 쓰시려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제 오래된 친구 중에 클래식을 하는 이가 있습니다. 그에게 꼭 어린 신사의 바이올린 연주를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죠. 복사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왕족의 일가로 태어난 새뮤얼 가드너였다. 유럽사교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클래식이었으니, 얼마나 많은 거장들을 알고 있을지 손일선조차도 가늠이 안 되었다. 손일선은 넌지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왕회장은 새뮤얼의 눈동자를 한참이나 들여다보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불편하지는 않더냐.”
할아버지는 애써 서먹한 모습을 지워내며 어머니에게 말을 걸었다. 서로가 십수 년 만의 해후. 하지만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어색한 공기가 감돌기 보단 따스한 정이 흘렀다. 두 분의 눈가가 붉게 물든 것만 봐도 그랬다.
“아버지가 보내주신 차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할아버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당장에라도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 같았지만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묵은 슬픔이 차오르는 것 같아 보였다. 항상 애지중지하며 키웠던 막내딸. 허나 얼마나 세월이 흘렀던 것일까, 자신의 주름진 눈가처럼 막내딸의 눈가에도 주름이 자리 잡았다.
저녁식사가 끝나고,
가정부 아주머니가 쟁반에 커피와 오렌지 주스, 그리고 잣이 동동 띄워진 수정과를 내오셨다. 어머니는 수정과를 받아들고는 감동한 표정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봤다.
“아주머니, 아직도 이걸 기억하셨던 거예요?”
“아유. 내가 우리 막내 아가씨 좋아했던 걸 어떻게 잊겠어요.”
오랫동안 할아버지 집에서 가정부 생활을 해왔던 아주머니였다. 어머니의 어린 시절을 봐온 만큼 입맛 또한 훤히 꿰뚫고 있었는데 집안에서 유일하게 수정과를 즐겨 마셨던 것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것이다. 아주머니의 얼굴에 진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그때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향해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강서방은 뭐하고, 함께 오지 그랬느냐.”
“네?”
어머니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칫했으면 찻잔을 떨어트렸을 정도로 놀란 기색이 얼굴에 역력했다. 일평생 자신의 남편을 사위로 인정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였기 때문. 결국에는 자식과 연을 끊을 정도였으니 그 감정의 골이 얼마나 깊었을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헌데.
“다음에는 함께 오너라.”
어머니는 말문을 잇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어머니의 모습에 할아버지의 굳어있던 마음에 금이 갔다. 이토록 보고 싶었던 막내딸을 왜 그렇게 먼 곳에 놔둔 것인지.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지만 당장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할아버지의 시선에 강현이 들어찼다.
“아들을 아주 잘 키웠더구나.”
자식을 보면 그 부모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지.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손주 강현은 저가 생각했던 모습보다 훨씬 올곧게 자랐다. 욕심 많고 철없는 삼촌들보다도 훨씬 어른으로 보일만큼. 어머니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손을 감싸 안았다.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어머니의 붉게 충혈 된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내 딸아.”
* * *
스피오 스피오 맴맴-!
“아버지, 저희 왔어요.”
강현의 이모, 유복자 여사가 아침 일찍부터 이촌동 저택을 찾았다. 손에는 뭘 그리 바리바리 싸들고 왔는지 보자기가 한 가득이었고 옆에는 이모부가 뻘줌한 표정으로 함께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의사였는데 할아버지 도움을 받아 개원을 하기는 했지만 실력이 도통 좋지 않아 속빈 강정이나 다름없었지.
“어머. 큰 아가씨 오셨어요?”
가정부 아주머니가 갑작스레 저택을 방문한 이모의 모습에 집안일을 하다말고 서둘러 뛰쳐 나왔다. 이 일전에는 아들을 앞세워 나타나더니만 이제는 남편까지 대동한 꼴이라니 참 우습다. 이해한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심정이겠지.
“아줌마, 이것 좀 받아줘요.”
이때다 싶어 가정부 아주머니에게 싸온 짐을 건네주던 이모는 계속해서 저택 안을 이리저리 살폈다.
“큰 아가씨, 뭘 이렇게 많이 했어요?”
“아버지 좋아하는 음식들로 장만 좀 했어요. 나중에 식사하실 때 꼭 잊지 말고 내오세요.”
이 많은 음식을 전부 이모가 해 왔다고? 아서라, 손에 물 한 번 안 묻혀 본 양반이다.
그때 거실로 들어서던 이모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너?”
이모는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목소리를 높였다. 거실 소파에 할아버지 뿐 아니라 나와 어머니가 함께 앉아있었기 때문.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어머니의 형제들을 보면 그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지난 삶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삼촌들과 이모는 유산 배분 문제로 대놓고 어머니를 견제했었으니.
뒤이어.
이모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아버지, 저희 왔습니다.”
큰삼촌 내외와 작은삼촌 내외가 함께 저택을 찾았다. 멀뚱히 서있는 이모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삼촌들이 소파에 앉아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숨을 집어 삼켰다.
어휴, 한숨밖에 안 나오잖아. 그러고 보니 일말의 정이라도 있는 양반들이었으면 십수 년 동안 막내 동생을 이리 등한시 하진 않았겠지. 나는 슬쩍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할아버지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말을 아끼고 계셨다. 역시.
‘할아버지가 다 부르신 거구나.’
어쩐지 아침댓바람부터 이촌동을 찾을 양반들이 아니었다.
“현자, 네가 여기 어떻게 있어?”
얼씨구, 작은삼촌이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나를 처음 봤을 때보다 훨씬 적대적인 모습. 가뜩이나 가문 내에서 입지가 좁아지고 있던 작은삼촌이었다. 골프회동조차 허락받지 못했던 자신에 비해 조카는 이미 재벌후계자들이 모이는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는가. 초조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 자리에 앉아라.”
할아버지가 눈을 반개하며 목소리를 높이자 모두가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다물었다.
“범경아.”
할아버지의 부름에 작은삼촌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덩달아 외숙모까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얼굴만 보고 있자면 구국의 결단을 건네받는 투사만큼이나 비장하기 그지없다.
“사내에 네 수족들을 늘리는 것은 좋다.”
능력이 안 되니 작은삼촌은 부하직원들을 자신의 인맥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업무능력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자신의 비위를 잘 맞추는 이들로.
“그런데 좀도둑 새끼를 키워!”
“아,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듯한 작은삼촌의 되물음에 할아버지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할아버지의 눈빛을 보니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실감이 난다.
“이 모자란 놈 같으니라고!”
할아버지의 불호령에 작은삼촌의 동공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 마냥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이미 범인 수색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렇듯 제 수족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역시 천치가 맞았다.
큰삼촌과 이모는 괜히 자신들에게 까지 불호령이 떨어지지 않을까 마른 입술을 쓸고 있었다.
“오늘 내가 너희들을 부른 까닭은 앞으로의 동주 때문이다.”
동주라는 말에 삼촌들과 이모의 눈빛이 일순 변했다. 동주가 무엇인가, 할아버지가 일평생 일궈낸 회사이자, 역작이지 않는가. 긴장했던 얼굴들에 하나같이 탐욕스러운 낯빛이 스쳐지나갔다. 어이구, 저렇게 물욕이 많다면 끝까지 회사를 잘 지켜내기라도 하던가. 지난 삶 외국계자본에 사분오열된 동주를 보며 통쾌하던 마음보단 씁쓸한 마음이 컸다.
“앞으로 동주의 앞날에 현자도 참여할 것이야.”
갑작스런 할아버지의 발언에 큰삼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작은삼촌과 이모도 마찬가지. 한껏 당황한 얼굴이다. 어머니도 또한 처음 듣는 이야기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지, 현자가 십수 년동안 연락이 없다가 지금 찾아와서 기업경영에 참여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하물며 세탁소 일이나 하던 현자가 경영을 알기는 얼마나 알겠습니까. 아버지가 현자를 오랜만에 봐서 마음이 싱숭생숭하신 것은 알겠지만 이건 다시 생각해보셔야합니다.”
할아버지는 큰삼촌을 빤히 바라봤다. 자리에서 일어나있던 큰삼촌이 할아버지의 시선에 침을 꼴깍 삼키며 도로 자리에 앉았다.
“현성그룹은 미망인이 회장직을 맡았다지. 남편이 죽고 집에서 전업을 하던 가정주부가 그 큰회사를 경영하고 있지 않느냐. 또 제일을 보거라, 기업경영에 능력이 우선이지 성별이 우선이더냐?”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큰삼촌은 그래도 못마땅하다는 표정이다. 장자라는 이유로 숱한 기회를 거머쥐었던 큰삼촌. 하지만 하나같이 할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주기만 했었지. 일순 할아버지의 눈이 매섭게 번뜩였다. 분명 지난 삶과는 확연히 다르다.
“내 너희들이라고 해서 기업경영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 의문이 드는구나.”
할아버지의 성향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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