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11)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11화 >
탁―!
바둑돌 내려놓는 소리가 요란하다.
“스승님, 지리산에는 다시 안 돌아가십니까?”
“예끼, 이놈아. 네가 완전히 제일그룹을 차지하는 걸 보고 돌아가야 마음이 편하지. 이렇게 있다가 또 허무맹랑하게 픽 하고 쓰러지면 또 하산을 하라고?”
“하하하. 아닙니다. 저야 스승님하고 함께 있는 것이 좋지요. 이렇게 바둑도 같이 둘 수 있고 말입니다.”
좌상귀를 접하는 흑의 본격적인 수에 의해 백의 고민이 깊어진다.
반상 위는 이미 긴장감이 가득하다.
백이 우상귀에서 다시 활로를 찾아보지만 흑은 단 한 점도 순순히 살려 보내지 않는다. 마치, 백의 수를 전부 읽고 움직이는 것 같지 않는가.
“바둑이 어찌 이렇게 늘었을꼬. 예전에는 네가 석 점을 깔아도 내가 손쉽게 승기를 잡았는데 말이다.”
“매번 바둑 귀신하고 같이 대국을 두다 보면 이렇게 실력이 늘지요.”
“바둑 귀신?”
“현이 말입니다. 고 녀석이 어찌나 바둑을 잘 두던지 제가 이렇게 용을 쓰고 덤벼도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프로기사가 되었어도 국수가 되었을 만큼 수읽기가 뛰어난 아이입니다.”
주름진 손가락으로 바둑돌을 집은 덕수 선생이 안광을 번들거리며 반상 위를 훑었다.
마치 바둑판을 반으로 쪼갤 듯이 강렬하게 바둑돌이 놓였다.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백은 결국 승부수를 띄웠지만 흑에 의해 가로막혔다. 지리산 국수라 불렸던 덕수 선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활로를 찾아봐도 이미 흑의 기세를 막기란 어려웠기에.
“에잉, 현이 고 녀석도 그렇고 네놈도 그렇고 바둑도 잘 두는 놈들이 한 수 양보를 안 해주는구나.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 진행할 참이냐?”
“스승님, 무엇을 말입니까?”
“듣자 하니 현이 녀석하고 네 손녀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던데?”
왕회장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덕수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모르는 것이 없지 않은가.
앉은 자리에서도 천 리 길을 보는 사람이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그때였다.
“빨리 식을 안 올리면 다른 놈이 현이를 채갈지도 모르겠더구나. 특히 김남천이 그 뱀 같은 놈이 현이를 분명 탐내고 있을 게야. 어찌 보면 자네보다 더 욕심이 그득한 놈이니까 말이야.”
“김남천이 말입니까?”
“그래, 그러니까 하루빨리 식을 올리도록 하는 게 어떻겠나. 이러다가 내가 관짝에 들어가고 나서야 제사상에서 국수 한 그릇 얻어먹게 생겼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저보다 더 정정하신데 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지리산에서 산삼 몇 뿌리는 먹은 것 같은 풍채였다. 그나저나.
‘김남천이라…….’
뱀을 닮은 김남천의 눈빛을 떠올리던 왕회장은 마른 입술을 쓸었다.
욕심이 많은 양반이다. 아무렴, 일제의 앞잡이 역할까지 했던 양반인데 더한 짓도 했으면 했지 못하지는 않으리라.
하지만 과연 강현이 김남천의 수에 넘어갈까.
‘어림도 없는 소리.’
왕회장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강현은 어찌 보면 김남천보다 더 노회했기에.
* * *
‘우와?’
만찬장이 따로 없었다. 기다란 식탁 위에는 각종 산해진미가 쌓여있지 않은가.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연회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음식의 구성이 다양하다.
하물며 구미를 당기는 향 또한 뛰어났으니. 누가 영국 음식이 쓰레기라고 했던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한 달에 한 번은 이렇게 풍성하게 저녁을 하지. 우리는 이걸 골든 디너라고 불러.”
토미는 가자미를 튀긴 피시 앤 칩스를 가리키며 부연했다.
그나저나 학생들의 시선이 따갑다. 특히 맞은편에 앉은 빨간 머리의 소녀가 나를 유독 뚫어지라 쳐다보고 있었으니.
음식을 먹다 체라도 하게 할 셈인가?
“조금 있으면 총장님께서 현 너를 호명할 거야.”
디너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기다란 식탁 위로 만찬이 전부 세팅되고 난 후 단상 위 상석에 앉은 새뮤얼 총장이 조그마한 티스푼을 들고는 자신의 와인잔을 두드렸다. 청명한 소리가 금세 아치형의 천장에 닿아 울려 퍼졌다.
“모두들 반갑습니다. 총장 새뮤얼입니다. 오늘은 우리 왕립음악학교 역사상 첫 교환 학생이 입학하는 날입니다. 뜻깊은 날이다 보니 평소보다 많은 음식을 준비했지요. 그럼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역사상 첫 교환 학생의 인사부터 들어볼까요?”
새뮤얼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봤다. 어째 삽시간 만에 웅성거리던 주변이 고요해지는 것이 아닌가. 하물며 단상 위로 올라오라고 손짓까지 하다니.
터벅.
주변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곧장 수백 개의 시선이 내 뒤를 쫓았다.
단상 위 기다란 식탁에 앉아 있던 교수들도 흥미로운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새뮤얼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가장 중앙에 위치하게 했다. 덕분에 수백 명의 시선을 정면에서 오롯이 받아내게 생겼다.
‘이거 원 참.’
떨리냐고?
아서라, 이미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강의를 한 적이 있지 않던가. 하물며 수천 명이 넘는 청중들 앞에서 지휘와 바이올린 켰던 경험도 있었으니.
더불어 지난 삶의 기억까지 더한다면 이렇게 대중들 앞에 서는 것은 셀 수도 없을 정도다.
“강현입니다.”
시작은 짧은 인사말로.
“왕립음악학교의 역사상 첫 교환 학생이 될 수 있어 정말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학우 여러분들뿐만 아니라 교수님들께서도 저에 대한 궁금증이 많으실 것이라 사료됩니다. 저에 대한 커리어를 소개하는 것보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분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져보고 싶습니다.”
아무렴, 나에 대한 커리어는 아마 나보다 이들이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건방을 떨려는 게 아니었다. 형식상 뻔한 자기소개를 하는 것보다는 대중들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주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저에 대해 묻고 싶은 것이 있으신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상세히 답변 드리겠습니다.”
뭐야?
말이 끝남과 동시에 웅성거리지 않는가. 하물며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난 여유롭게 상황을 관조했다. 원래 첫 타자가 힘든 법이니.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기느냐가 문제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종전 식탁 맞은편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붉은 머리의 소녀가 손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때였다.
차라라락!
마치, 부채가 펼쳐지듯 학생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기 시작했다.
* * *
“오랜만이다.”
여명을 머금은 스트라디바리우스 ‘환상’은 그 어느 때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지휘를 배우는 통에 오랫동안 관리만 받아오지 않았던가.
환상 또한 내 손길이 반가운지 은빛 현을 번들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레 환상을 어깨 위에 올려놓고는 활을 들어 올렸다.
지잉.
여명 사이로 청명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리에서 연주를 하고 싶었지만 기숙사 내에서 잠자고 있는 학생들을 깨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잠시 입맛을 다시고는 활 끝을 바닥으로 향하게 두었다.
똑똑.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토미?”
“역시 현 지금쯤이면 깨어 있을 줄 알았어! 바이올린 선율을 듣고 바로 노크를 했어. 설마 그 바이올린 스트라디야?”
“어.”
“우와―!”
토미가 눈을 빛내며 환상을 바라봤다. 저러다가 눈 밑에 붙은 주근깨가 떨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아침 일찍 웬일이야?”
“웬일이라니, 말했잖아. 내가 현의 학교 안내를 맡았다니까?”
“학교 안내를 이렇게 아침 일찍 한다고?”
“현, 왕립음악학교의 빛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다는 말이 있어. 학생들은 밤이고 낮이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연습하지. 물론 기숙사에서 악기를 켜서 연주하는 것은 금물이지만. 지금도 연습실에는 학생들이 많을걸? 이미 출근하신 교수님들도 많아.”
토미의 말처럼 왕립음악학교의 학생들은 농부의 아침만큼이나 부지런했다.
기숙사 건물을 벗어나 본관으로 들어서자 토미의 말처럼 악기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제 학생들 사이에서 현 네가 대스타가 된 거 알아?”
“대스타가 되었다니 무슨 말이야.”
“난 그렇게 질문공세를 받는 학생은 본 적이 없어. 종국에는 교수님들까지 손을 들어서 현한테 음악적인 질문을 했잖아. 그런데 현은 마치 교수님을 학생 대하듯 자상하게 지식을 가르쳐 주는데 소름이 돋았다니까. 난 교수님들이 그렇게 학생의 말을 경청하는 걸 살면서 본 적이 없어!”
토미는 과장스러운 표정을 하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어째 손깍지를 잡듯이 힘을 주는 것이, 어제도 생각했지만 이 녀석과는 거리를 둬야 했다. 외국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한국보다는 개방적이니 말이다.
“여기는?”
“악기를 연습할 수 있는 공간이야. 이미 내 첼로를 준비해 놨어! 사실 난 예전부터 현의 팬이었거든. 그래서 현이 한 번쯤은 내 연주를 들어봐 줬으면 좋겠어서 아침 일찍 찾아간 거야. 아무래도 오늘 오후부터는 현한테 악기 선율을 들려주고 싶어 하는 학생들이 많을 거 같아서 말이지. 흐흐.”
“난 첼로 전공이 아닌데 괜찮겠어?”
“아무렴 어때!”
토미는 연습실의 문을 열어 재꼈다.
어?
그런데 이미 선객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 * *
“알버트 교수님?”
스펜서의 젊은 모습이 이러했을까 싶을 정도로 꽤나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의 교수였다. 어제 만찬장에서 새뮤얼 왕세자 옆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헌데 활기차던 토미는 교수의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꿀 먹은 벙어리마냥 조용해졌다.
“이른 시각에 연습실에 첼로가 꺼내져 있기에 누구의 악기인가 싶었는데 설마 토미 네 것이었을 줄이야. 토미, 네가 아침 일찍 이렇게 연습실을 찾을 줄은 몰랐단다. 평소에는 점심 늦게나마 움직이는 녀석이 말이야. 옆에는 현이라고 했던가?”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강현이라고 합니다.
“그래, 반갑군. 토미 악기를 세팅해 놨으면 어서 앉아서 연주를 해야지? 이렇게 청중이 두 명이나 기다리고 있는데 말이야.”
토미는 긴장한 표정으로 첼로 앞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편 채 양다리로 첼로를 지탱한다. 손등을 평평하게 편 채로 기다란 활을 잡는 모습까지 교본에 나올 만큼 정석적인 자세다.
알버트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꼰 채 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토미는 긴장을 떨치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고는 현을 켰다.
감미로운 선율의 연속이었다. 웅장한 듯 무겁지만 섬세하게 울려 퍼지는 첼로의 소리는 그야말로 귀를 호강시켜 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아무렴, 토미 또한 말괄량이처럼 보이지만 왕립음악학교에 입학을 한 만큼 수재였으니.
현을 켜는 토미의 손가락이 마치 춤을 추듯 거칠게 움직였고 보잉 또한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하듯 토미는 정열적인 연주를 펼쳐나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콩쿠르의 결승 무대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찰나의 시간처럼 짧게 느껴질 정도로 아쉬운 연주가 끝난 뒤였다.
“여전히 아쉽군, 토미.”
토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알버트 교수는 나를 힐끔 돌아보고는 물었다.
“현, 무엇이 문제인지 알겠나?”
첼로에 있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나에게 무엇을 묻는 것일까.
하지만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 문제인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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