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25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258화 >
“바리에이션이 좋지 않군요, 더군다나 감정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프랑스의 거장 유고의 평가였다.
본선 무대가 막을 올리자 전 세계에서 선발된 이백 명의 신예 바이올리니스트가 브뤼셀로 향했다.
장장 보름 동안 펼쳐지는 무대였다. 하루에도 적게는 수십 명씩 무대 위에 올랐고 각국의 심사위원들이 평가와 점수를 내린다.
평가점수를 합산해 가장 상위 점수의 12명만이 샤펠로 향할 수 있었다.
“엉터리 연주군.”
빅토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더 볼 것도 없다는 듯이 시선을 돌렸다.
심사위원들의 냉혹한 평가를 알아서일까, 무대 위에 선 바이올리니스트는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무척이나 긴장을 한 탓에 평소의 실력이 안 나오는 것이리라.
‘쯧.’
강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7년 전 브뤼셀을 찾았을 때는 미처 몰랐던 중압감이었다.
한편으론 이해도 되었다. 심사위원석에 앉은 이들이 누군가. 하나같이 신예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바라마지 않는 각국의 거장들이었다. 조금이라도 떨리지 않는다면 분명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너무 기대를 한 탓일까, 연이어 나온 참가자들의 수준이 변변찮다.
수천 명의 지원자 중에서 선별한 이들이었다. 하지만 영상과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이 될 정도로 수준 이하의 연주를 선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렴, 테이프 오디션을 촬영할 당시에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 것은 물론이고 실수가 없을 때까지 몇 번이고 영상녹화를 반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무대는 실전이다.
징!
음정이 어긋났다. 현을 짚은 손가락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는 방증이었으니.
무대에서는 단 한 번의 실수라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심사위원석에 앉은 거장들은 참가자들의 조그마한 실수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벌써 며칠 동안 이렇게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실수를 마주한지 모르겠다.
“다음.”
무대 위에서 내려가는 바이올리니스트들의 표정을 한결같았다. 어깨는 한없이 움츠러들어 있고 얼굴에는 자책과 실망하는 기색이 영락없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어떻겠는가. 마치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것처럼 찝찝함의 연속이었다. 그때였다.
“71번 참가자입니다.”
백금발의 머릿결이 출렁이며 안나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그녀는 이미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이름난 수재였다. 더군다나 7년 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최후의 12인에 남았던 소녀가 아닌가. 당시 강현을 제외하고는 가장 나이가 어렸더랬다.
7년 전 심사위원을 맡았던 중국의 거장 등륜은 물론이고 히로세, 심지어 빅토르까지 자세를 앞당기며 안나의 무대를 기다렸다.
안나는 호흡을 가다듬고는 물 흐르듯 자세를 잡았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설마하니 이 곡을 선정했을 줄이야. 수많은 기교가 총망라된 곡이었다. 평소 안나의 성정을 생각한다면 꽤나 거리가 있는 곡이 아니던가.
하지만 곡이 시작되자 거짓말처럼 안나의 눈빛이 바뀌었다. 평행 옥타브, 아르페지오, 하이포지션, 속주, 피치카토 거침없는 테크닉의 연속.
32분음표의 악보를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매섭게 활이 보잉 했다. 현을 누르는 희고 긴 손가락은 마치 거미처럼 능수능란하게 현 위를 미끄러지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유고의 입에서 감탄이 터져 나왔다.
‘많이 성장했구나.’
강현의 눈가에는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흡사 장성한 자식을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과 비슷했다.
7년 전 퀸엘리자베스 때와는 차원이 다른 연주였다.
더 이상 수줍어하며 긴장에 떠는 어린 소녀는 없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백금발과 초록 눈동자가 당당히 자신의 존재감을 팽창시키고 있었다.
연주가 끝나고 활이 바닥을 향했지만 심사위원 중 누구 하나 먼저 말문을 여는 이가 없었다.
그만큼 모두가 깊은 여운에 사로잡혀 있다는 방증이었다. 안나는 여느 참가자들과는 다르게 당당한 모습으로 무대 위에서 퇴장했다.
“정말 훌륭한 연주였습니다.”
유고를 시작으로,
“모스크바 음악원장이 추천서를 썼을 정도이니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오랜만에 원석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올해는 이변이 없는 한 저 안나라는 참가자가 우승을 할지도 모르겠군.”
“과연 알렉세이 씨가 키워낸 제자답군요. 분명 다른 참가자들과는 수준이 다른 연주였습니다.”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이어졌다. 실수한 것을 찾아내기보다는 한 명의 청중이 되어 무대의 여운을 해소하는 자리 같았다. 지난 본선 무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드디어 눈을 씻어 내는 기분이군.”
빅토르마저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어 보이지 않는가. 때마침 강현과 눈이 마주친 빅토르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팩 돌렸다.
아무래도 강현과 빅토르가 함께 지내게 된 것을 강현 탓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실상은 심사위원 중 가장 나이가 적은 두 사람이 배정된 것뿐이었거늘.
그때였다.
“72번 참가자입니다.”
또 다른 참가자가 무대 위로 올라섰다. 대부분의 심사위원들은 안나의 다음 무대라 그런지 그다지 기대를 하지 않는 듯했다. 아무렴, 아직도 안나의 무대에서 느꼈던 여운을 쫓아내기란 짧은 시간이었기에.
하지만 그때 히로세가 눈을 빛내며 자세를 앞당겼다. 강현은 무대 위의 존재를 보고는 그제야 깨달을 수가 있었다.
사브리나.
백발을 지닌 사브리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다른 참가자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흡사 긴장이라는 단어를 꿀꺽 삼켜 버린 것처럼 얼굴에는 여유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강현은 그녀의 모습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직감했다. 사브리나의 연주가 시작되면 심사위원들은 또다시 깊은 여운에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 * *
장장 보름 동안 이어진 본선 무대가 끝났다. 안나는 자신의 손에 박힌 굳은살을 내려다봤다. 지난 칠 년이란 세월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이었다.
“여긴 여전히 똑같구나.”
안나는 선율의 여명이라 불리는 샤펠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칠 년 전과 다름없는 샤펠은 여전히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가득 머금고 있었다.
아직 자신을 제외한 열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와는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 안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샤펠을 둘러보았다.
“맞다, 여기서 그때.”
안나는 부엌에서 걸음을 멈춰섰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한밤중에 배가 고파 부엌을 향했던 때였다. 토스트에 버터를 발라 먹을 생각이었던 안나의 눈앞에 보인 것은 희끄무레한 두 명의 인영이었다. 냉장고에서 나오는 은은한 불빛을 조명 삼아 두 남녀가 서로 껴안고 있었더랬다.
“풉.”
그때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당시 키가 작았던 안나의 시선과 똑바로 시선이 마주쳤던 이는 다름 아닌 강현이었으니.
그러고 보니 월리엄은 잘 지내고 있으려나? 들리는 소문에는 유럽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열고 있다고 했었다.
한껏 과거의 기억에 젖어 걸음을 옮길 때였다.
지잉.
뜻밖의 선율에 안나의 고개가 돌아갔다. 샤펠의 정원에서 나는 선율이었다. 아직 열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가 전부 모이기도 전이었다. 헌데 누가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일까.
안나는 홀린 듯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들려오는 벌레 소리와 바람을 벗 삼아 누군가 연주하고 있었다.
지잉.
그 소리가 어찌나 감미롭던지 안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따사로운 샤펠의 햇살 아래 누군가 신발을 벗은 채 맨발로 잔디를 밟고 있었다.
바이올린을 켜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안나는 넋을 잃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말했다.
“현?”
과거 여명 아래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던 현을 마주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기에.
하지만 활을 늘어뜨리고 고개를 돌린 이는 다름 아닌 백발의 소녀였다.
* * *
“현 씨, 최연소 심사위원으로 초청되었는데 기분이 어떠십니까?”
벨기에 국영방송에서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다. 피디는 직접 샤펠의 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심사위원들과도 인터뷰를 진행한다.
이번에는 강현의 차례였다. 강현은 엷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과분한 자리에 앉은 것 같아 처음에는 얼떨떨했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씀이신가요?”
“심사위원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앉았으니 더 이상 떨고만 있을 수는 없겠죠. 참가자들과 다른 심사위원분들에 누가 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목구비가 짙은 생김새의 피디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현 씨, 칠 년 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를 최연소로 우승하고 칠 년 후 최연소 심사위원이 되셨습니다. 당시와 지금의 퀸엘리자베스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당시에도 실력이 뛰어난 바이올리니스트들이 대거 콩쿠르에 참가했습니다. 금년도에도 물론 실력이 뛰어난 참가자들이 많이 있고 말입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저는 아쉽게도 칠 년 전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이유가 있을까요?”
“이번 년도의 참가자로는 제가 없지 않습니까?”
강현의 우스갯소리에 피디가 미소를 지었다. 역시 다른 심사위원들과 강현은 달랐다. 고리타분한 인터뷰에도 여유롭게 응대할 뿐만 아니라 방송감이 확실히 있었다. 이미 엘넌쇼에서 수많은 미국인들을 입담 하나로 홀린 장본인이 아닌가.
“현 씨가 생각하기에 금년도의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를 점친다면 누구일까요?”
“선율의 여명이라 불리는 샤펠로 선발된 열두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은 하나같이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들입니다. 누구 하나를 찍어 특출 나다고 말하기 힘들 정도로 말이에요.”
“만약 그 열두 명에 현 씨가 참가자로 포함되어 있었다면요?”
강현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때 피디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아, 듣기로는 심사위원분들 또한 8일 동안 참가자들과 마주한 저택에서 함께 생활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소문에는 심사위원분들 중 두 분이 같은 방에서 룸메이트로 지내게 될 거라는데 사실인가요?”
도대체 이런 정보는 어디서 듣는 것일까.
“맞습니다.”
“소문에는 러시아의 거장 빅토르 씨와 현 씨가 함께 룸메이트로 지내게 된다는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피디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려 보였다. 아무래도 8일 동안 샤펠에서의 일정 또한 다큐멘터리로 촬영되기에 꽤나 흡족한 장면을 찾았다는 모습 같았다.
피디 또한 이미 러시아의 거장 빅토르가 얼마나 까다로운 성격인지 알고 있었기에.
“빅토르 씨와 함께 지내다 보면 트러블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그걸 감안하고도 같이 지내도 될 정도로 친해지신 건가요?”
이걸 친해졌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 따지자면 친하지 않기에 같은 방을 사용한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피디의 입맛대로 움직여줄 수는 없었다. 강현은 이번에도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만약 빅토르 씨 말고 다른 심사위원분과 룸메이트가 될 기회를 얻는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래도 빅토르 씨와 룸메이트를 하고 싶습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여기서 빅토르가 싫다고 말해봐야 좋을게 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알았을까. 훗날 한국의 매스컴에서 강현과 가장 친한 심사위원으로 러시아의 거장 빅토르를 손꼽았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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