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30)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30화 >
“마에스트로께서 평소보다 더 열정적이시군.”
런던 심포니의 수석 첼리스트 에마누엘은 활을 쥐었던 손을 풀고 있었다. 어찌나 오랫동안 연습을 했던지 팔이 옅게 떨릴 정도였다. 아직 아시아 내연까지는 시일이 꽤 남아있는 편이었지만 완벽한 스펜서의 지휘아래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습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드미트리, 마에스트로께 기분 좋은 일이라도 생긴건가?”
에마누엘이 악장 드미트리를 향해 넌지시 물었다. 오케스트라 내에서 마에스트로와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유일무이하게도 악장뿐이었으니. 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그의 차가운 눈동자만큼이나 냉담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평소와 다르시잖는가? 음정이 틀린 단원에게 불호령은커녕 오히려 기회를 주시다니 말이야. 다른 단원들을 보게, 대부분 적응이 안 되는 눈치야.”
드미트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마누엘의 말처럼 마에스트로의 모습이 자못 달라져 있었다. 과거에는 한없이 날카로워 자칫 베일 것 같았다면 지금은 솜털처럼 부드러웠으니. 하물며 매섭게 박자를 가로지르던 지휘봉이 들떠 보이기까지 했다.
“마에스트로께서 아무래도 아시아 내연을 기대하시는 모양이시네.”
“아시아 내연을?”
에마누엘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시아는 클래식을 주로 접하는 지역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한국은 클래식의 불모지라고까지 알려진 곳. 오히려 마에스트로께서 일본이 아닌 한국이란 나라를 선택했다는 것에 단원들은 의아함을 머금었었다.
그 순간.
“마에스트로의 뮤즈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일이지.”
드미트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쳐 지나가듯 뱉은 말이었지만 단원들은 흘려듣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을 부릅뜰 정도로 경악한 이도 있었다. 선율의 끝을 보려는 듯 집요하며, 철저하게 완벽주의자인 마에스트로에게 뮤즈라니? 것도 아시아에?
말도 되지 않았다.
그 시각.
스펜서는 지휘실에서 홀로 비디오를 감상하고 있었다. 런던 공연의 실황이 녹화된 테이프였다. 화면을 지켜보던 스펜서의 눈이 번들거렸다. 마치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단원들의 모습을 이잡듯 살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런던 심포니의 오래된 경비원이 그를 찾았다.
“죄송합니다, 마에스트로. 방에서 휴식중이시라 하기에…”
경비원이 스펜서의 번뜩이는 눈을 보고는 곧장 고개를 숙여 보였으나 스펜서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초에 쉰다며 방에 들어간 그였다, 결국 말과는 달리 되어버렸지만.
“괜찮네, 조셉. 용건이 뭔가?”
“마에스트로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라고?”
흰색 봉투에 담긴 작은 편지였다.
그때였다.
편지의 발신지를 확인하던 스펜서의 표정이 변한 것은.
“마에스트로?”
런던 심포니의 오래된 경비원 조셉의 눈이 커졌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스펜서를 마주했지만 이런 적은 없었다. 저토록 환하게 웃는 마에스트로의 모습이라니, 다들 마에스트로가 변했다더니 정말이었다.
*
“도착했겠지?”
장마가 걷힌 창공은 청명하다시피 맑았다. 특송으로 보냈으니 일본은 물론, 지금쯤이면 영국에까지 우편이 도착했으리라. 세안을 끝마치고 목에 수건을 두른 채 화장실에서 나올 때였다.
“강현 학생.”
가정부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나를 불러세웠다.
“아주머니, 이게 다 뭐에요?”
척 봐도 값비싸 보이는 재질의 양복.
“어르신께서 강현 학생 옷을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할아버지는 식사가 끝날 즈음 조간신문을 펼쳐 보였다. 활자신문의 글귀가 이따금 시선을 끄는 와중 이내 신문 일면을 장식한 큼직한 헤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재벌가의 결혼식. 십대 재벌그룹이 서로 사돈을 맺는 날이었으니, 시사면을 장식하고 있어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어찌 보면 거대 기업의 합병만큼이나 의미 있었으니.
“오늘 중요한 결혼식이 있다, 현이도 슬슬 나갈 채비를 하거라.”
켁, 오렌지 주스가 콧구멍으로 역류할 뻔했다.
설마.
내가 조간신문에 시선을 주자 할아버지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현성그룹에 대해서 잘 아느냐?”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오늘 결혼하는 새신랑하고는 지난 삶 마주한 적도 있었다. 현성그룹의 막둥이는 재계에서 유명했다. 물론 나쁜 쪽으로, 속된 말로는 물에 빠져도 거기만 둥둥 떠다닐 거라며 우스갯소리도 돌았었다. 그만큼 방탕한 삶을 즐기는 양반이었으니 사건사고가 오죽했을까. 어디서 봤냐고?
“아니요, 할아버지.”
온갖 놈들이 모이는 곳, 바로 검찰청에서다.
“아버지, 현이도 데려가시려고요?”
큰삼촌이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는 나를 보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얼굴에는 부쩍이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이제는 아주 질린다, 아무렴 내가 지금 당장 자기 자리를 뺏을까 봐서? 할아버지가 대꾸 없이 걸음을 옮기자 큰삼촌이 힐끔 나를 바라봤다.
“큼큼, 오늘은 어른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니 각별히 행동에 유의하거라.”
“예, 큰삼촌.”
얼씨구, 내가 설마하니 본인보다 앞가림을 못하겠는가. 작은삼촌의 이마가 깨진 뒤로 큰삼촌은 더욱 초조해진 느낌이었다.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완전히 선을 그어버릴 줄은 차마 예상조차 못했을 테니.
내가 차에 오를 때였다.
“김기사, 출발하지.”
할아버지가 뒷좌석을 잠그며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김기사 아저씨는 백미러로 힐끔 할아버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차창 밖에는 큰삼촌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
“아, 아버지!”
차창 밖에서 큰삼촌의 절규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내 자동차가 출발했다. 사이드미러 속 멀어지는 큰삼촌의 모습에 할아버지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제 놈은 부르지도 않았거늘.”
* * *
-그라모폰에는 세 명의 악마가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클래식 음반지인 그라모폰에 전해 내려져 오는 이야기. 그라모폰의 수석 편집장 애덤 위쇼는 유명한 음악평론가이자 바이올린 수집광이었다. 그가 아시아까지 날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현의 여왕을 만나기 위해서였으니. 바이올리니스트들의 선율에 혹독한 비평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가 히로세의 선율을 듣고 눈물을 흘렸던 사실은 이미 유명한 일화.
“퀸,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애덤 위쇼가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히로세를 맞이했다. 무겁기로 유명한 그의 엉덩이를 안다면 꽤나 놀라운 장면.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재회하듯 반갑게 포옹을 해 보였다.
“퀸의 30번째 음반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그라모폰상을 수상할 것입니다.”
“애덤, 너무 편파적인 거 아닌가요?”
“아시잖습니까, 퀸. 그라모폰은 편집장들의 일방적인 의견을 수렴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을요.”
애덤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곤 물었다.
“퀸, 헌데 왜 심사위원직에서 물러난 것입니까?”
세계 삼대 콩쿠르였다. 현의 여왕 히로세가 심사위원을 맡았다고 해서 한때 바이올린계가 떠들썩 했을 정도. 그럴 만도 했다. 여태껏 콩쿠르에는 얼굴 한 번 비춘 적 없는 여왕이었으니. 하지만 얼마안가 히로세가 돌연 심사위원직에서 물러났고 덕분에 뜬구름 같은 소문만 무성했었다.
“공정한 평가를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이죠.”
그때 믿을 수 없는 말이 애덤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퀸, 그 말이 무슨 뜻이죠?”
“애덤, 전 이미 한 사람의 선율에 매료되었습니다. 만약 그가 콩쿠르에 나온다면 다른 선율에는 집중하지 못할거에요.”
애덤의 눈가에 당황감이 가득 서렸다. 이게 다 무슨 말인가? 모차르트라도 살아 돌아온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도대체 그 누가 현의 여왕을 선율로 매료시킬 수가 있을까?
*
오빠아―!
어디서 이명이 들리는 것만 같네. 멀리서 손유하의 실루엣만 봤을 뿐인데 저절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나저나 유명한 점쟁이에게 길일을 점지받은 것인지 장마가 왔다고는 생각지 못할 만큼 창공이 푸르다. 빛나는 첨탑 아래로 무수히도 많은 재벌가의 일원들이 모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고?
명동성당.
물론, 두 재벌가문 모두 독실한 천주교인은 아니다. 가뜩이나 재벌가끼리 정략결혼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는 시기. 연애결혼으로 포장하여 백년가약을 맺기에 이보다 더 적합한 장소가 있을까.
“오빠, 감기는 다 나았어?”
어느새 바짝 다가온 손유하가 걱정스레 나를 바라봤는데 왕회장과 할아버지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계셨다. 다만 뒤통수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이, 손일선이 레이저빔을 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일전 연회장에서 봤던 삼대들이 자주 보였다. 재벌가의 결혼식이다보니 아무래도 각그룹의 후계들은 빠짐없이 얼굴을 비추는 모양새. 대부분이 한복을 갖춰입은 양가 어른과 인사를 나눈 후 곧장 왕회장을 찾는 것이 마치 코스처럼 느껴졌다. 겉으로만 보면 누구 결혼식인지 모를 정도.
“오빠, 진짜 이쁘고 멋있다아. 그치.”
손유하가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은 신랑 신부를 바라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어린 아이의 시선에는 저만큼 멋져 보이는 게 있을까. 하지만 저 두 사람이 수십 년 뒤 재산을 놓고 피튀기는 소송을 벌인다는 것을 알랑가 몰라. 대한민국에 황혼이혼을 처음 유행시킨 사람이 바로 저 둘이었으니.
결혼식은 진중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고리타분한 90년대이기도 했지만, 재벌가의 어른들이 모인 자리니 만큼 보이는 것이 중요할 터였다. 오늘 주례를 맡은 노신부도 긴장이 되기는 마찬가지인지 이마에 비지땀이 가득하다.
‘어?’
식이 한창 진행될 즈음이었다. 축가를 위해 누군가 피아노 앞으로 걸어가는데 낯익은 인물이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이미 시선을 보내고 있잖아.
‘철혈의 마에스트로?’
그제야 기억이 났다.
백정훈이 현성그룹의 방계였다는 사실이. 훗날에는 철혈의 마에스트로라는 이명이 더욱 유명해져 재벌가의 방계였다는 사실이 사장되다시피 했었지. 물론 그의 까칠하고 냉정한 성격은 자신이 재벌가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나저나 결혼식 축하 연주로 차세대 거장이 올라설 줄이야.
*
콰득.
백정훈은 마른 입술을 질끈 깨물어 보였다. 쇼팽 콩쿠르를 나갔을 때 이러한 심정이었을까, 아니 그보다 더 떨린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했다. 가문의 일원들이 전부 자신을 직시하고 있었으니. 만약 피아노로 이만큼 대성하지 못했다면 결혼식은커녕 얼굴도 마주하지 못했을 이들.
‘후.’
속으로 숨을 가다듬고는 기다란 손가락이 건반 위를 향했다.
두웅.
무거운 선율을 시작으로,
백정훈의 손가락이 끊임없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곡의 전체 흐름을 따라 셈여림이 달라지는 것이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이윽고 천상의 목소리가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선율이 명동성당의 첨탑에 닿았다. 단순한 피아노 연주가 아니었다. 이미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거듭나고 있는 차세대 거장. 클래식에 문외한이라고 할지라도 백정훈의 연주가 얼마나 뛰어난지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허.’
너무 긴장 한 탓이었을까.
백정훈이 저도 모르게 실수를 해버렸다. 물론 재벌가의 사람들이 그걸 알아볼 리는 만무했다. 굵은 선위에 아주 작은 점 하나를 찍은 것에 불과했으니. 그 순간 백정훈은 좌석에 앉아있는 한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제대로 안해?
백정훈의 시선에 소년이 그렇게 말을 하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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