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8)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8화 >
“작곡가 현의 첫 인상이요?”
노천카페 테이블위로 선글라스가 놓아졌다.
“2년 전 이곳에서 그를 처음 만났죠. 카페 알롱제와 따뜻한 우유를 타먹으며 저를 맞아주더군요. 분명 나이도 어렸고 앳된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만큼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사람의 속을 읽는 것 같다고나 해야 할까요.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의 눈동자 말이에요.”
프로듀서 폴은 2년 전을 회상해나갔다. 음반업계에 몸담으면서 수많은 작곡가를 만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그날의 기억만큼 강렬했던 날이 있었을까.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영원히.
“작곡가와 작사가는 사이가 안 좋은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치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그 누가 현의 멜로디에 가사를 쓸 수가 있었을까요. 이미 완성된 곡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이리스의 모든 것을 한눈에 꿰뚫어본 것
만 같았어요. 오죽했으면 아이리스의 리더 매튜가 그렇게 말했겠습니까. 현의 영혼에는 모차르트가 살아 숨 쉰다며!”
2년 전 작곡가 현은 밴드 아이리스의 고질적인 문제들을 단숨에 파악해냈다. 하물며 작곡한 곡의 색깔조차도 아이리스의 성향과 너무 잘 맞아 떨어졌다. 오랫동안 아이리스의 음반을 들어왔던 사람처럼. 그날 프로듀서 폴은 현에게 프로듀싱을 제안했지만 돌아오는 대
답은 짧지만 완강했다.
“자신이 할 일은 거기까지라고 단호히 말하더군요. 아쉬웠어요. 정말 그를 놓치기 싫었습니다. 그날 우리는 모두 그에게 매료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요. 실제로 현이 작곡한 곡을 타이틀로 하자는 의견도 분분했었습니다. 결국 밴드의 아이덴티티를 살리기 위해 미뤄
두었지만요.”
아이리스의 첫 번째 앨범은 명반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그 중에서 팬들은 타이틀을 비롯해 특히나 작곡가 현이 만든 곡들을 항상 베스트로 손꼽고는 했다.
“붓다가 그랬다죠, 모든 흐름은 하나로 통일된다고 말이에요. 저는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하지만 현을 보니까 알겠더군요. 바이올린 하나로 천재라 불리며 클래식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그의 음악적 재능은 비단 클래식에만 치우쳐지지 않았어
요. 오히려 너무 광범위해서 한눈에 파악할 수 없을 정도였죠.”
오선위에 적어 내려간 수많음 음표가 그 방증이었다. 아직도 폴의 뇌리에는 그의 모습이 생생했다. 작은 등을 지닌 소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위대한 거장 같아 보였으니.
“아직도 아이리스는 작곡가 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수많은 음반 레이블에서도 마찬가지일 테죠. 그는 자신의 곡이 부족하다며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정말 아이러니 하죠. 살면서 그렇게 뛰어난 작곡가를 본적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2년이 지났
습니다. 과연.”
프로듀서 폴은 다시 선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그는 어떻게 변했을까요?”
*
휘릭―!
기다란 볼펜이 손가락 위에서 회전했다. 생각을 가다듬을 때면 작업실 소파에 눕듯이 앉아 볼펜을 돌리곤 했었지. 지난 삶에서부터 익숙해져온 버릇이었다. 초임검사로 발령을 받았을 때는 그야말로 살인적인 야근에 시달려야만 했었으니. 한때는 내가 검사실의 소파
와 결혼을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후우.”
볼펜을 내려놓고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고민하는 거냐고? 그럴리가, 오히려 너무 많이 떠올라서 문제였다. 클래식, 대중가요를 넘어서 재즈까지 작곡을 하고 싶을 정도니, 아직 국악까지는 그 영향이 안 미친 게 다행이려나. 하고 싶은
것은 많은데 항상 이 짧고 연약한 몸뚱이가 문제였다.
똑똑.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임혜라 이사장이 들어섰다.
“현아, 밤새도록 작업실에 있었니?”
“예, 아이디어가 마구마구 샘솟는 거 있죠.”
갤러리에 소속되고 나서부터는 이따금 주말마다 작업실에서 밤을 지새우곤 했다. 처음에는 걱정하시던 부모님도 작업실의 설비를 보고는 마음을 놓으셨다. 더군다나 제일재단 산하이지 않은가. 웬만한 호텔방 부럽지 않을 정도로 안락했으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쉬엄쉬엄 해. 아줌마가 너무 걱정되서 그래.”
임혜라의 목소리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것도 그럴 것이 작업실 한 켠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악보들 때문이었다. 마치 천재들이 왜 단명 하는지 알겠다는 표정이지 않은가.
“일단 간단하게 씻고 밥부터 먹자, 밥도 안 먹이고 집에 보내면 아줌마가 유회장님 얼굴을 어떻게 뵙겠니?”
어째 지난 삶에는 직속상관이었다면 이번 삶에서는 보호자 같았으니. 간단하게 세안을 끝마치고 임혜라 이사장과 함께 브런치를 즐겼다. 역시나 프랑스식 갈레트였다. 전생을 믿지 않는 나지만 임혜라 이사장의 일관된 취향을 보고 있자면 그 유무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될 정도다. 고소한 노른자가 입안을 감돌 즈음.
“참, 현아. 오늘도 아침부터 연락 온 곳들이 많단다.”
이번에는 어디일까. 미국, 프랑스, 영국, 수많은 나라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이번에는 협연제안이야.”
“협연이요?”
“피아니스트 백정훈 씨라고 알지?”
알다마다, 철혈의 마에스트로이지 않은가.
“해외에서 유학을 하고 온 모양이더라고, 이번에 귀국 공연을 하는데 현이 너와 꼭 협연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쳤어. 물론, 현이 네가 싫다고 하면 안 해도 되는데 그쪽에서 꼭 현이 너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했다더라. 하도 부탁하는 통에 미현씨가 많이 부담스러웠
나보더라고.”
백정훈은 피아니스트계에서 차세대 거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2년 전 현의 여왕 히로세 씨와의 협연을 끝으로 유학길에 올라 많은 사람들에게 아쉬움을 자아내기도 했었으니. 허나 나와의 일면식이라고 해봐야 일본과 현성그룹 결혼식장이 끝이었다. 당시를 떠
올려본다면 훗날 철혈의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었지. 과연 지금은 얼마나 변했을까. 입안에서 감도는 노른자의 고소함만큼이나 구미가 당겼다.
* * *
“아들, 이것도 한 번 입어봐.”
몇 시간째일까, 어머니가 골라주신 옷을 입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재벌가의 사람들이 모이는 연회라고 하니 어머니의 얼굴에는 부쩍이나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혹여나 자신의 남편과 아들이 가서 기라도 죽을까 걱정되시는 모양이었다. 자칫하면 콩쿠르용 턱
시도라도 입고가라고 할 기세이지 않은가. 그래도 어머니 말이니 하나도 빠짐없이 다 입어보았다. 2대 8가르마 따위는 하지 않아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아버지와 내가 한껏 차려입고 거실로 나서자 낯익은 불청객이 자리하고 있었다. 역시나 왜 안 보이나 했다. 그래도 집안의 웃어른이었으니 인사는 드려야겠지.
“안녕하세요, 큰삼촌.”
“형님, 오셨어요.”
큰삼촌은 아버지와 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흘겨보고는 고개를 팩하니 돌렸다. 잔뜩 성이 난 것 같은 모습이 사춘기 소년 못지않았다. 여태껏 빠짐없이 참석해오던 연회에 제 이름이 빠지게 생겼으니, 기분이 좋지는 않을 터였다. 그때였다.
할아버지가 서재에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은.
“아버지, 왜 저를 빼신 겁니까? 왜 제가 아니고 강서방을 데려가시는 거냐고요!”
대뜸 큰삼촌이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할아버지가 한번 바라보자 곧바로 꼬랑지를 말아내려야 했으니.
“범진아, 지난 2년간 네가 동주에서 무얼 했는지 말해 보거라.”
큰삼촌은 입술을 몇 번 들썩이고는 우물쭈물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난 할아버지가 일전 작은삼촌의 이마를 깨트린 것처럼 뭘 집어던지시지는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만찬 전에 피를 볼 수는 없지, 암.
“네가 만약 2년 동안 동주의 앞날에 빛이 될 만한 일을 해내었다면 난 누가 뭐래도 범진이 네 녀석을 데려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2년간 넌 동주에서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했어. 연회에 누가 참석하는지는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
야. 다음번이라고 다르지 않다. 노력하거라.”
할아버지는 큰삼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광경이었다. 수많은 산전수전을 겪은 눈동자였지 않는가. 눈빛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와 왕회장을 보고 깨달았다.
“그만가지, 강서방.”
할아버지가 걸음을 옮겨 밖으로 나가는 동안 큰삼촌은 망부석처럼 자리에 굳어있었다. 그저 이번 일을 통해 많은 것을 깨달았기를 바란다. 후회 많은 삶을 두 번이나 반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얼마나 달려갔을까,
“다 왔습니다, 회장님.”
김기사 아저씨의 말에 차창 밖으로 고개를 들었다. 2년 전처럼 실리호텔에서 열리는 대 연회였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종전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긴장감이 깔리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자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눈치 채신 것 같았으니. 난 말없이 아버지의 손을 꼭 잡
았다. 그러니 아버지의 안색도 한결 편해 보이시는 게 맘이 놓인다. 잘해내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
“유회장, 어서 오게나.”
연회장에 들어서자 모임의 주최자격인 왕회장과 손일선 사장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슬쩍 주변을 살폈는데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 순간 왕회장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욘석, 유하를 찾는 게냐?”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대꾸할 말도 없었다. 2년 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했으니 궁금할 만도 하지 않겠나.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유하가 말이다. 한국에서 이틀밖에 못 있어 오늘은 어미와 함께 있겠다고 하더구나. 현이 네가 연회에 온다고 하는데도 별 신통치 않아 보이기에 이 할애비도 무척이나 놀랐단다. 그러니 일전에 말하지 않았느냐, 있을 때 잘해야 한다고. 요즘은 그 최수종이 처럼 자상
한 남자가 인기가 많다지?” 언제 주말드라마라도 보신 것일까, 왕구렁이 영감님은 나를 놀리는 것에 아주 재미가 들리신 게 분명했다. 재벌삼대의 구성원은 2년 전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아직 풍파가 다가오지 않았으니 가능한 일이었지. 아버지는 TV속에서나 봤던 재벌인사들의 등장에 놀라신
듯했지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지난 2년 간 왕회장과 손일선 사장을 자주 만나왔던 것에 내성이 생기신 듯 했으니. 나는 마음을 한결 편하게 먹은 채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연회장속의 연회장,
지배인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에는 이름난 기업의 재벌3세들이 벌써 파벌이라도 형성한 건지 저들끼리 모여 앉아있었다. 일전에는 마냥 어리게만 보이던 놈들이 나이를 먹었다고 어깨와 목에 힘을 팍하고 주고 있지 않은가. 더불어 따가운 시선도 나를 향해 쏟아졌
다.
내가 나름 유명 인사이기는 했지만 개중에는 기분 나쁘게 흘겨보는 녀석도 있었다. 양반은 되지 못한다고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한 녀석이 나에게로 걸어왔다.
“너 이름이 강현이던가? 맞지?”
너?
얼굴에 여드름이 벌겋게 농익은 녀석이었다. 척 봐도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다짜고짜 반말을 하지 않는가. 그렇다고 여기서 민증을 까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이거 억울해서라도 빨리 크던지 해야겠다.
“나 대한철강의 김도민이야. 네가 그렇게 바이올린을 잘 켠다며? 우리 엄마가 네 이야기 하는 거들었어. 시간 괜찮으면 여기서 바이올린 한번 켜봐, 보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야.”
어째, 일전에는 손유하 때문에 접근도 못하던 녀석들이 스멀스멀 그 기세를 드러냈다. 어린아이들이라 순진무구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었다. 특히나 재벌가의 아이들은 영특하다 못해 영악했으니. 지난 삶에서도 익숙하게 봐온 모습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뭣 모르고 자
라 겁 대가리를 상실한 녀석들을. 더군다나 대한철강이라.
‘인마, 거기가 첫 빠따야.’
다가올 풍파를 하나도 모르고 있었으니 저토록 목이 빳빳할 수 있는 거겠지. 다른 녀석들은 마치 이 광경을 재미난 볼거리라도 된 것 마냥 구경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눈앞의 녀석을 한 대 쥐어박아주고 싶지만 어쩌겠는가.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나오려던 찰
나.
팍―!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김도민의 얼굴이 크게 앞으로 쏟아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벌겋게 익어버린 여드름이 곧 터질 것처럼 붉으락푸르락해져서는 곧장 고개를 팩하니 돌리는데 상대를 확인한 김도민의 얼굴이 붉다 못해 시퍼렇게 질려 들어갔다.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내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언젠가 본 적 있는 푸른 색 머리핀이었다. 길쭉길쭉하게 뻗은 팔다리와 순백의 원피스는 흰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고양이를 닮은 시원시원한 눈매와 길게 자란 머리카락은 그녀가 부쩍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백마 탄 얼음공주님의 등장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