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67)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67화 >
“욘석, 실력이 늘었구나?”
탁, 바둑돌 놓는 소리가 경쾌하다.
“이번에는 할애비도 쉽게 지지 않으련다.”
흑과 백이 서로의 대마를 잡고 종반전에 들어서고 있었다. 남은 곳은 이제 우변뿐이었는데 왕회장의 눈매가 날카롭게 바둑판위를 훑었다. 어째 이 왕구렁이 영감님은 세월이 흐를수록 승부욕이 더 왕성해지시는 것 같지 않은가. 공허해져버린 평창동 대저택에 주말마
다 바둑을 두러온 것도 벌써 이 년째. 왕구렁이 영감님과 난 스스럼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으니. 물론 지난 삶을 떠올려 본다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임이 분명했다.
“크흠, 유하가 이번에는 아예 안 들어올 심산인가 보구나. 모진 녀석, 뭐가 그리 급한건지 작년에는 현이 네 얼굴도 안 보고 떠나더니.”
“생각보다 유학생활이 적성에 맞나보네요.”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하지 않았던가. 공항에서 나를 향해 꼭 돌아올 것이라 눈물 섞인 외침을 하던 아이는 이 년 동안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 어째 좀 섭섭한 마음도 들었지만 뭔가 사정이 있겠지 싶었다. 내가 먼저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였다.
“그러니까 있을 때 잘하지 그랬느냐?”
왕회장은 나를 향해 놀리듯이 흰 눈썹을 휘어보였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 이따금 오빠아―! 하며 나를 향해 뛰어오던 그 얼음울보가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물론, 성인이 된 얼음여왕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있지만.
“그나저나 저 바이올린은 도대체 언제 가지고 갈 셈이냐?”
스트라디바리우스 ‘환상’을 말하는 것이었다. 동주를 화학 산업 7위안에 입성시키면 왕회장이 내게 준다했던 그것. 일전 식사자리에서 5년도 짧다는 왕회장의 예상과 달리 이듬해 봄 동주는 그라이핀 개발에 성공하고 당당히 7위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하지만 난 그
럼에도 아직까지 환상을 찾아가지 않았다.
“보관은 평창동에서 하는 게 더 편하단 말이에요.”
“예끼, 이놈. 여기가 무슨 은행 금고라도 되는 줄 아느냐?”
“그래서 제가 이렇게 매주 금고 이용료 지불하러 오잖아요.”
어찌 보면 매주 왕회장과의 대화를 위해 환상을 놔둔 셈이었다. 왕구렁이 영감님 또한 내가 오는 것을 좋아하는 눈치셨으니. 아니면 매번 이렇게 특이한 숙제를 내 주실리가 없지.
“대한철강은 앞으로 어떨 것 같으냐?”
탁, 바둑돌을 놓는 소리와 함께 왕회장이 고개를 들었다.
“철강은 모든 산업의 기초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죠. 소재산업의 최종단계라고 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앞으로 오 년 동안은 주기적인 침체를 보일 시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고 있으니까요. 한국과 일본은 지금 박리다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철강을 싸게 수출하고 있어요. 유럽과 미국이 그 덤핑을 두고만 보고 있을까요. 결국 원가 싸움이라는 건데 서로 피부를 헐뜯는 격이죠. 결국 악성재고만 쌓여가는 불합리한 구조
가 지속되다 아마 오 년 뒤쯤이면 그 숨통이 좀 트일 거예요.”
“왜 오 년 뒤지?”
왕회장이 계속 말해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중국.”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단 두 글자였지만 왕회장은 내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머지않아 중국이 외국계 자본 유치를 적극 허용하며 시장의 문을 열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중국이 글로벌 무역1위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하물며 급격한 산업화는 막대한 철강의 수요를 요구한다.
톱니바퀴가 맞춰지듯 흘러가는 이야기에 왕회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러한 대화를 주말마다 나눈 지도 벌써 이 년째.
‘하지만 대한철강은 내년을 버티지 못하고 사그라들죠.’
난 뒷말을 삼켜내며 애써 미소 지어 보였다.
“바둑을 둘 때 보면 표정의 변화가 없는 것이 돌부처 이창호 같더니 또 어쩔 때보면 경제학 박사 같구나, 현이 네가 전략기획실의 웬만한 임원들보다도 나을 게야. 어떠냐. 월급을 솔찮게 줄 테니 할애비 회사에서 일 하는 게?”
“할아버지, 저 아직 열여섯 살이에요.”
“아무렴 나이가 문제겠느냐, 현이 네 속을 보자면 삼촌들하고 붙어도 문제가 없겠거늘.”
그때 왕회장이 바둑판을 내려다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끊임없는 격렬한 대국 끝에 흑이 승기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
“아무래도 이번에는 할애비가 이긴 것 같구나.” 겉으로만 보자면 흑이 완전히 실리를 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아니었다. 적진을 향해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거미줄에 걸린 모양새였으니. 하물며 모름지기 바둑 과외인데 접대 바둑을 할 수 있겠는가.
“아니에요, 할아버지.”
그 순간 백돌을 집은 내 손가락이 바둑판을 향해 거침없이 내려졌다.
탁―!
*
스피오 스피오 맴맴―!
녹음綠陰 속에서 정겨운 매미 울음소리가 선명히 울려 퍼진다.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는 것을 여실히 말해주고 있었지. 짧았던 팔다리는 세월이 흘러 조금 길어졌다. 허나 그래봐야 아직 뱁새나 다름없었으니. 교복을 입고 다님에도 내 나이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
도였다. 폭발적으로 키가 크는데 아직도 일 년이나 더 남았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다 왔어, 강현 학생.”
김기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갤러리에 도착했다. 학교를 끝나면 항상 들르는 곳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임혜라 이사장이 나를 위해 웬만한 녹음실은 상대도 안 될 작업실을 만들어 주었으니. 엄연히 따지면 난 임혜라 갤러리의 소속 아티스트가 된 것이다. 계약서에 독
소조항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제일재단 산하이지 않은가. 어찌 보면 국내 최고의 저력을 지닌 소속사였으니.
“어머, 현이 왔구나.”
“안녕하세요, 미현이 누나.”
일전 내게 도움을 받았던 여직원이었다. 앳되던 모습은 사라지고 이제는 커리어 우먼의 모습이 약간씩 보이기 시작했다. 첫 인상 때문인지 그녀는 나를 엄청 좋아했다.
“작가님이 현이 널 계속 기다리셨어, 아침부터 해외에서 계속 전화가 왔거든”
또 어디서 연락이 온 것일까, 머리를 긁적이며 집무실로 들어서자 임혜라 이사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저 환한 미소 속에 수많은 뜻이 담겨있다는 것을 남들은 알까. 그러고 보니 다짐이 무색하게 이번 삶에도 임혜라 이사장 밑에서 일을 하고 있지 않
은가.
“현아, 미국 측에서 연락이 또 왔어. 이유는 알고 있지? 아줌마는 현이가 어떻게 할지 궁금한데.”
“이번에도 역시나 죄송해요.”
임혜라는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2년 전 신인 밴드 ‘아이리스’의 앨범에 내가 작곡한 곡들이 수록되었다. 결과는 지난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아이리스는 일약 스타덤에 떠올랐으니. 헌데 타이틀곡을 비롯해 내가 작곡한 곡들이 대거 인기를 끌게 되고
‘라비안로제’가 개봉하면서 내가 연주한 테마곡 랑데부와 작곡한 아름다운 인생이 그 바통을 이어받으니, 길거리만 나가면 내가 작곡한 멜로디가 울려 퍼졌다.
그때부터였다. 밴드계는 물론 음반 레이블에서 작곡가 HYUN을 찾는 것이.
“참, 유하는 잘 지내죠?”
“현이가, 유하가 궁금해진 모양이네, 그렇게 궁금하면 이번 여름방학에 비행기타고 한번 가지 그러니. 유하가 엄청 좋아할 텐데 말이야. 흐음, 설마 이제 나이를 좀 먹었다고 취향이 변했으려나? 그래서 한국에 왔을 때도 현이 얼굴 한 번 안 보고 휙하고 가버린 건가?”
임혜라 이사장 또한 왕회장과 비슷하게 눈매를 휘어보였다. 이 사람들은 걸핏하면 나를 놀리는데 재미가 들린 게 분명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나서는 내 등을 향해 ‘이제는 유하가 더 클지도 모르겠다 현아.’ 하면서 비수를 꽂지 않는가. 어째, 저 말이 사실일 것
같아 마음이 시려온다.
갤러리 별관에 마련된 작업실로 걸음을 옮겼다. 방음작업이 잘 되어있을 뿐더러 작업 기기들 또한 최신식이었다. 메뉴얼을 익히느라 한 동안 진땀을 뺏던 기억이 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정작 신디사이저를 비롯한 기기들의 사용법을 익히고 난 뒤에는 사용하는 빈도
가 줄었다. 아무래도 이런 것은 예전 취향대로 아날로그적인 게 최고였다.
작업실에 오선위에 적어 내려간 음표들이 한 가득이다. 하지만 난 아직 내 음악들을 세상에 보일 생각이 없었다. 내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전에야 아무것도 모르는 천둥벌거숭이라 과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어찌 보면 임혜라 갤러리에 소속
된 것이 천재일우의 기회였다. 임혜라 이사장은 내 모든 편의를 봐줄뿐더러 내가 그 성정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였으니. 나는 미소 지으며 악보를 손에 쥐었다.
* * *
“현아, 준비 됐느냐?”
할아버지는 항상 나를 라운딩에 데려가셨다. 멤버는 항상 변함이 없었다. 왕회장과 할아버지, 그리고 나와 손일선 사장. 근래에는 아버지까지. 아버지는 할아버지는 물론이고 왕회장과 손일선 사장을 어려워했는데 그것도 일 년이 지나가니 익숙해질 정도였다. 속된 말
로 골프장에 가면 친하지 않던 이들도 친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하루 반나절을 붙어있다시피 했어야 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강서방은 점점 골프실력이 더 느는 것 같구만.”
왕회장이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보며 마른 입술을 쓸었다. 어째 늦깎이에 골프를 배운 아버지가 손일선 사장보다 잘 치지 않는가. 골프를 배운지 일 년만에 18홀을 80타에 끝냈을 정도였으니 비약적인 발전이었지. 오죽하면 할아버지가 아버지에게 늦기 전에 세미프로
테스트를 보라며 진담 섞인 농을 건넸겠는가.
“손 사장, 톈진 쪽은 마무리 단계일 테고 사내 자금줄은 어떠한가.”
“회장님, 자금유동성은 제일재단과 생명 쪽에서 숨통을 트이게 하고 있으니 한동안 걱정은 안 하셔도 될 듯합니다.”
“그래, 메마르지 않도록 계속 기름칠을 해줘야하네.”
왕회장은 사석에서도 이따금 손일선 사장에게 아들이라 칭하지 않고 손 사장이라 불렀는데 그때마다 손일선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머지않아 다가올 풍파를 왕회장은 분명 알고 있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었지. 수출이 주업인 나
라에서 경상수지가 계속해서 적자를 기록하고 있었으니. “강서방, 그라이핀 개발 쪽은 어떠한가.”
“상용화를 위해 개발을 계속해서 해나가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쉽지 않은 단계입니다.”
“그래, 걱정 말고 계속 하게나. 제일 큰 단추는 이미 꿰맞췄으니 말이야.”
골프 라운딩이 아니라 흡사 경영수업이나 다름없었다. 더군다나 왕회장이 직접 만든 가평CC는 조경을 위해 골프카트가 아니라 손수 걸어가며 라운딩을 즐겨야했으니 정말 걸어서 대한민국의 경제역사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지. 다가올 위기를 두고 누군가는 미제의
양털깎이라 했고 제일그룹과 마찬가지의 공룡기업들의 문제라고도 했다. 또 누군가는 불합리한 시장구조 때문이라고도 했었다.
“현이가 보기엔 현재 동아시아 국들의 상황은 어떠하냐?”
일순 왕회장이 나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할아버지는 물론 손일선 사장,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까지 나를 향했다. 왜 이 시간이 안 오나 했다. 왕회장은 항상 날 시험하듯 질문을 던졌으니.
“시대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요.”
단순한 대답, 하지만 왕회장은 흡족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일선도 마찬가지였지. 언제까지 3저 호황이 계속될 수 없는 노릇임에도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정책은 변화할 생각을 못했으니. 강대국의 지분이 상당한 기관에게 구제금융을 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자본주의란 무릇 가치관과 정의가 움직이는 세상이기보단 돈에 의해 움직이는 시장체계였으니. 어째 입이 그리 달지만은 않네. 고개를 털어내며 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참, 강서방 이번 연회에 자네도 함께 가지.”
그때 할아버지가 아버지를 향해 운을 띄웠다. 재벌 삼대가 모이는 연회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 년 전 모임을 끝으로 잠잠했다. 그러니 다시 열린 연회에 할아버지가 큰삼촌이 아닌 아버지를 데리고 가는 것에는 큰 의미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의미를 잘 모
르시는 것 같았으니. 그냥 간다고 하십쇼, 아버지!
“예, 장인어른.”
나이스! 내가 엷은 미소를 띠던 그 순간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현이 너도 올 거지?”
왕회장이 나에게 묻는 것이 아니겠는가. 내가 대답을 할 틈도 없이.
“이번에 유하가 올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유하가요?”
“왜 알고 싶으냐? 알고 싶으면 오늘 라운딩 끝나고 닭갈비는 현이가 사는 걸로 하지.”
“어허, 손가. 어디 뺏어먹을 게 없어서 코 묻은돈을 가져가려고 하나?”
그때 왕회장이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영감탱이, 현이 저작권료가 일 년에 얼마인지 알고 하는 소리인가?”
이 왕구렁이 영감님이?
“그러지 말고, 그러면 내기로 합세. 일전처럼 말이야. 저기 보이는 홀컵에 현이가 홀인원을 못 넣으면 내가 사지, 넣으면 자네가 사.”
두 할아버지들의 열띤 내기에 엉겁결에 내가 끼이게 되었다. 어느새 내 손에 주니어용 드라이버까지 쥐어주지 않았는가. 에라 모르겠다. 캐디가 놓아주는 공을 노려보다 냅다 후렸는데,
팟―!
지난 삶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아버지의 골프실력이 그대로 유전되었으니 잘 칠 수밖에. 날아가는 공의 궤적을 바라보던 왕회장의 얼굴에 일순 어떤 기억이 떠오른 듯 했다. 자신의 손녀딸이 홀인원을 할 뻔했던 그 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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