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94)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94화 >
프랑스의 한 시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베니스의 여명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석이라고. 어스름을 뚫고 불그스름하게 피어오른 한 줄기 빛이 수면 위를 달굴 때면 절로 눈이 현혹된다. 살루테 성당의 첨탑이 빛나고 곤돌리에의 아리아가 귓가를 건드리는 것 같았
으니. 널찍한 창가에 걸터앉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바이올린을 절로 꺼내 들고 싶게 했다. 분명 수백 년 전 물의 도시를 찾았던 파가니니도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현아, 아침 먹어라.”
호텔을 이용해도 되었겠지만 임혜라 이사장은 굳이 별장을 빌렸다. 귀족들의 휴양지답게 운하와 맞닿은 별장은 고전적인 풍미가 물씬 풍겼다. 목에 수건을 두른 채 일층으로 내려가니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다. 이미 임혜라 이사장의 비서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째 고학력으로 뭐 하는 짓인가 싶겠지만 상사를 잘못 만난 탓이니.
“이게 전부 뭐에요?”
“아, 민희 씨도 같이 먹을 거라서 넉넉히 했어. 현이 너도 오늘부터 현장 나갈텐데 한창 클 나이에 빵만 먹여서 어떻게 보내겠어. 아줌마가 실력 좀 부려봤지. 이래봬도 아줌마가 왕년에 미술유학이 아니라 요리유학을 다녀오려고 그랬어.”
김치찌개부터 시작해서 한식의 나열이었다. 구첩반상 뺨치는 화려한 구성에 누가 본다면 전라남도 백반집에 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순간 임혜라 이사장이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미소지으며 ‘사위 사랑은 장모라잖아.’라며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난 애써 못 들은 척하며 자리에 앉았다. 안 그래도 한국 밥이 고프던 참이었는데 이사장 덕분에 이렇게 타국에서 한국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하물며 이 정도 손맛이면 요리유학을 생각했다는 것이 거짓이 아닐 터였다. 밥그릇이 순식간에 비워질 즈음.
“현아, 일전에 가면 축제 때 말이야. 그 피아노 연주했던 소녀 기억나니?”
“글쎄요, 그때 너무 시끌벅적해서 기억이 잘 안 나요.”
“그때 피아노 연주했던 아이가 워낙 연주를 뛰어나게 해서 그날 대성당에 있던 베르디 음악원의 교수가 직접 그 아이를 찾아갔다지 뭐야.”
물잔을 들어 입을 축이다 사레가 들릴 뻔했다.
“그래서요?”
“아니, 글쎄. 그 아이가 결국에는 자신이 연주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알고 보니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자기 가면과 검은 망토를 두른 채 대신 연주를 했다지 뭐야. 너무 떨려서 그랬다는데. 경황이 없어서 얼굴이 기억도 안 난다고 하더라. 도대체 그 라캄파넬
라를 연주했던 피아니스트는 누구일까?”
그나마 다행이었다.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으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나를 찾을 수도 없으리라. 그때였다. 임혜라 이사장이 나를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현이, 너지?”
등 뒤로 굵은 땀방울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
베네치아는 라틴어로 ‘끊임없이 오라’라는 뜻이다. 그 말의 어원처럼 물의 도시에는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쳐나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촬영현장 주위로 사람들이 만원이지 않은가. 만약 실내가 아닌 실외 촬영이었다면 지장이 있을 정도. 특히나 젊은 여학생들이
즐비하게 서 있었는데 아마 헐리우드의 미남배우 알렉산드로 때문이리라.
“알렉산드로, 촬영 끝나고 밖에서 기다리는 여학생들과 함께 사진이라도 찍어줘야겠어. 조감독에게 들어보니 아침부터 기다렸다고 하던데?”
여배우 마르티나였다. 그녀는 내심 알렉산드로가 부러운 모양. 아무렴, 자신을 바라마지 않는 팬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배우들에겐 큰 위안이 되었으니. 음악가에게 청중이 필요한 까닭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알렉산드로 씨, 바이올린 연습을 도대체 얼마나 한 거예요?”
알렉산드로의 손끝을 보자마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불과 며칠 새에 굳은살이 가득 박혀있지 않은가. 활을 잡는 오른손의 아귀 또한 마찬가지다. 분명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습을 한 것이 분명했다. 내 반응에 알렉산드로가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콧잔등을 쓸어 보였다.
“평소라면 대본을 닳고 닳도록 읽었겠지만 이번에는 파가니니의 역을 맡은 만큼 바이올린을 닳고 닳도록 연습을 해야겠죠. 하물며 이렇게 걸출한 선생님이 계시는데 꾀를 부릴 수는 없잖아요?”
“그럼, 자세를 한 번 잡아보시겠어요?”
내가 누군가를 음악적으로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어색했지만, 알렉산드로는 분명 고질병만 아니었더라면 백정훈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날리는 음악가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가르쳐준 자세를 하루라도 빨리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으니.
“이번 촬영에서 연주할 곡은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1번입니다.”
알렉산드로의 목울대가 출렁이는 것이 보였다.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그이니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이 얼마나 큰 무대인지 알고 있으리라. 더군다나 파가니니의 유산 중 으뜸이라 알려진 협주곡 1번이 아닌가. 화려한 기교의 향연이며 아르페지오 주법과 스피카토, 더블
스톱이 끊임없이 이어지니 그야말로 기교의 정점이라 불릴 만했다. 오죽하면 벨기에의 바이올리니스트 앙리 비와탕이 단 한 번의 연주에 파가니니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겠는가.
“가면을 써야 해서 평소와는 다른 느낌일 거예요. 만약 제가 파가니니였다면 지휘자의 신호는 무시했을 겁니다.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들어가시면 됩니다. 악장과 지휘자가 당황하는 것도 그것대로 좋아요. 파가니니의 연주는 말 그대로 전설의 시작이었으니까요.”
니콜로 파가니니의 등장은 수백 년간 이어져 오던 음악계의 패러다임이 바뀐 사건이었다. 그의 등장으로 인해 수많은 청중이 환호했을 것이며 수많은 음악가가 좌절했을 것이다. 그때였다.
와아―! 바람결에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여학생들이 환호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알렉산드로가 더욱 바이올린을 움켜쥐며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은 착각일까.
지잉.
가면무도회에서 열린 파가니니의 연주였다. 붉은색 깃털이 흩날릴 정도로 몰아치듯 보잉을 하는 알렉산드로의 모습에서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대단해.’
지난 삶 독종이라 불렸던 나보다도 더 대단한 집념이지 않은가. 분명 알렉산드로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바이올린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게 남아있으리라. 땀에 흠뻑 젖은 그의 모습을 보고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내가 연주해야 할 차례이기 때문에.
“현―!”
모든 촬영을 끝마치고 나설 때였다. 그때까지 촬영현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학생들이 일순 내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으니. 사진을 찍어주려 했던 알렉산드로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지금 저를 부르신 겁니까?”
나 또한 어안이 벙벙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여학생들이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달려오는 것이었으니.
“저희는 베르디 음악원 학부생들입니다. 바이올리니스트 현이 베니스에 온다는 걸 알고 사진을 찍으러 왔어요. 브뤼셀에서부터 정말 열렬한 팬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인생 음반도 가지고 왔어요! 사인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어째 타국에서 나를 기다리는 팬이 있었을 줄이야. 그동안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활동도 거의 없었는데.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은 물론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것 같았다. 그때 알렉산드로가 내 등을 슬며시 밀어주었다.
“현, 이럴 때는 팬들과 함께 사진을 찍는 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어느새 필름 사진기를 들고 사진사처럼 자세를 잡는 알렉산드로였다.
* * *
“정말 기억이 안 납니까?”
간절함이 가득 깃든 목소리였다.
“몰라요, 정말.”
“아니에요, 세레나.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갑자기 얼굴이 기억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소녀가 끝내 고개를 저어 보이자 노교수가 두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노교수의 주름진 눈가에는 아쉬움이 역력히 남아있었다. 그날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들었던 라캄파넬라는 늙은 심장을 다시금 일깨웠다. 섬세하고 드라마틱한 연주는 눈과 귀를 의심케 하기
에 충분했다.
‘비르투오소.’
정석적인 연주가 아니었으니. 마치 파가니니를 닮기로 결심한 리스트처럼 정확한 템포가 아닌 변주적인 주법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닌가. 특히나 손가락 끝에서 미세하게 전달되는 감정의 물결은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으니.
“세레나, 그때 상황을 잘 좀 말씀해 보세요.”
“제, 제가 울고 있을 때 나타났어요. 마법처럼.”
“허어.”
노교수는 얕은 탄식을 터뜨렸다. 분명 덩치로 보아 성인은 아니리라. 헌데 그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리스트의 라캄파넬라를 완곡해 냈다. 난곡을 선택했음에도 오히려 위풍당당하며 좌중을 사로잡는 카리스마로 봐서는 웬만한 그릇이 아니었으니. 시끌벅적했던 이들이
단숨에 하나의 청중이 되는 광경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혹시 여자였습니까?”
오히려 그만한 기교와 담대함을 지닌 이라면 소년보다는 여성 피아니스트를 떠올리는 게 맞았으니. 하지만 소녀는 완강히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세레나, 천천히 생각해 보세요. 기억나는 것이 더 없겠습니까? 그날 붉은 색 깃털이 달린 가면을 쓴 이의 얼굴을 말이에요.”
노교수는 그 피아니스트를 다시금 만나보고 싶었다. 피아니스트로서 메말라 있던 자신의 심지에 다시 불을 붙인 것 같았기에. 그때 미간을 좁히던 소녀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참.”
“그래요! 무엇이 기억이 납니까?”
붉은 색 깃털이 달린 가면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던 사내였다. 펄럭이는 검은 망토가 마치 건반의 흑건처럼 느껴졌으며 슬며시 미소짓는 입가는 백건처럼 빛났으니. 그날의 라캄파넬라가 소녀에게 남긴 기억은 무엇이었을까.
“정말 깊고 맑았어요.”
그의 눈빛이.
* “베니스 시장의 초청이요?”
아무렴, 이탈리아의 저명한 음악가인 니콜로 파가니니의 전기를 그린 영화였다. 더욱이 베니스에서 촬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촬영이 관광지로서의 명성을 더욱 드높일 것은 자명했다. 덕분에 이렇게 시장이 직접 여는 연회에도 초청을 받을 수 있었고.
‘아마 필요한 건 알렉산드로와 마르티나쯤이겠군.’
만국을 불문하고 정치인들은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으니. 더욱이 두 사람은 헐리우드에서 이름난 배우였으니 오죽할까. 어째 들러리처럼 느껴졌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사람이 북적거렸으면 좋으련만. 기회를 봐서 샴페인이라도 한잔 홀짝거리게 말이다.
“반갑습니다, 베니스의 시장 살바토레 카사니입니다. 이렇게 파가니니의 촬영팀이 연회장에 와주셔서 영광입니다. 예부터 베니스는 귀빈들에게 아낌없이 물을 나눠주었지요. 이번에는 물이 아니라 술과 음식이지만 제가 준비한 연회가 마음에 드시길 바라겠습니다.”
베니스는 과거 물의 도시라는 명성과 달리 식수를 구하기가 어려운 곳이었다. 하물며 빗물을 정수해서 사용했으니 식수가 오죽 귀했을까. 덕분에 정수된 물을 나눠준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 그때였다.
어?
시장의 옆에 서 있는 소녀와 내 시선이 마주친 것은.
“참, 이 아이는 제 딸인 세레나입니다. 감독님과 배우분들께 인사드리렴, 세레나.”
소녀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숙이며 나를 힐끔힐끔 바라봤다. 아무래도 긴가민가한 눈치인 모양. 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은근슬쩍 고개를 돌렸다. 괜스레 내가 산마르코 대성당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이라는 것이 알려져봤자 귀찮아질 것이 자명했기에.
“세레나, 아무래도 착각을 한 것 같군요. 저분은 바이올리니스트입니다.”
소녀가 어느 노신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귀에 선명히 들려왔다. 노신사는 베르디 음악원의 교수라고 했는데 내 얼굴을 알아보고는 고개를 쓸쓸히 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날 보았던 사내와 바이올리니스트 현의 키가 비슷해서 착각한 것일 겁니다. 하나의 악기에만 치중해도 저토록 뛰어난 음악가로 성장하기는 힘들지요. 모차르트가 아닌 이상에야 말입니다. 그러지 마시고, 침착하게 조금 더 기억을 떠올려보세요.”
음악을 하다 보니 귀가 밝아져서 그럴까. 아니면 노신사의 목소리가 선명한 저음이라서 그런 것일까.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지만 어쩌겠는가 계속해서 모르는 척을 할 수밖에. 허나 이따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세레나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나저나.
‘쯧.’
이렇게 지켜보는 이가 있어서야 샴페인을 몰래 마실 수나 있겠는가. 아쉬운 대로 흰 우유로 마음을 달랠 수밖에. 그 순간 곤돌라를 모는 뱃사공의 아리아와 함께 노을 지는 운하의 풍경이 눈에 담겼다. 진실은 가면 속에 숨겨둔 채 베니스의 밤이 깊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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