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the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99)
> 음악천재를 위하여 – 099화 >
“고얀 놈, 바둑기사라도 할 셈인 게냐?”
왕회장이 바둑판을 노려보며 미간을 좁혔다. 아무렴, 접대바둑을 둘 수는 없는 노릇. 그나저나 안 뵌 사이 왕구렁이 영감님의 바둑 실력이 꽤 늘었다.
“할아버지, 제가 없는 동안 바둑 과외라도 받으신 거예요?”
“왜 그리 생각하느냐?”
“기세가 바뀌셨어요.”
바둑은 흔히들 기세싸움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과거 호전적인 수를 두어오며 끊임없이 접전을 벌이는 형식이었다면 이제는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상대를 관망하는 것이었으니. 빈틈을 추궁하듯 속기전을 유도했음에도 왕회장의 기세는 변함없다. 흔들리지 않는 실리 위주의 두터운 바둑. 마치 태산 같은 기백으로 수를 읽는 것이 돌부처와 닮았다. 설마.
“이창호 구단한테 과외를 받으신 거예요?”
일순 왕회장의 눈썹이 화들짝 놀라며 들썩였다.
“크흠, 바이올린은 언제까지 할애비한테 맡겨둘 게냐. 한 대도 아니고 두 대씩이나.”
애써 말을 돌리려는 모습을 보니 정곡을 제대로 찌른 모양. 평창동의 금고는 온도와 습도가 완벽하다시피 했으니 관리가 어려운 올드바이올린을 보관할 장소로는 더할나위 없다.
“금고료라도 주는 게냐?”
“지금 대신 바둑을 둬 드리고 있잖아요.”
“매번 할애비를 이겨 먹으려 들면서 말은 잘하는구나.”
말은 저렇게 하셔도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떠나지 않는다. 왕회장은 평생을 재계의 일선에서 산전수전을 겪지 않았던가. 그래서인지 바둑 또한 호락호락하게 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내가 제격이었지.
탁―!
단 한 수에, 대마를 잡혀버린 흑돌이었다. 왕회장이 미간을 좁히다 이내 ‘에잉’하며 돌을 놓았다.
“어찌 된 것이 하루가 머다하고 실력이 느는게냐. 비법이 있다면 이 할애비한테 좀 알려다오. 어째 따라잡을 만하면 저 만치 걸어가 있으니.”
비법이라고 하면 나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지난 삶 바둑을 잘 두는 편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으니. 발달 된 소프트웨어 덕분일까, 예전보다 수읽기에 능해지지 않았던가. 과거 열 발자국 앞이 보이는 수준이었다면 지금은 과장을 더해 백미터 앞까지 훤히 내다보였다.
“현아, 저녁에 같이 식사라도 하고 가거라. 겸사겸사 찍은 사진도 같이 보고 말이다.”
“사진이요?”
무슨 사진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헌데 왕구렁이 영감님의 눈빛이 알게 모르게 묘한것이 내가 모르는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죄송하지만 오늘은 선약이 있어요.”
“선약? 이 늦은 시각에?”
“과외를 받으러 가야 할 시간이거든요.”
왕회장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으니.
“현이 네가 누구한테 무얼 배운단 말이냐?”
*
“지휘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유리의 눈빛은 진중하기 그지없다. 베를린필의 사자, 수많은 오케스트라 중에서도 으뜸이라 평가받는 곳이었으니. 수석 지휘자로서 그 명성은 상상도 할 수 없이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나의 악기라고 생각합니다, 마에스트로.”
틀린 답은 아니었다. 허나 유리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은 아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지휘란 거대한 울림입니다. 지휘자가 지휘대에 오를 때면 수많은 단원들의 시선이 손끝을 향하죠. 자존심이 강한 단원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지 못하면 손끝이 자신감을 잃고 결국에는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 지휘봉을 잡는 지휘자들이 무대에서 좌절감을 느끼며 종종 음악에서 손을 놓기도 하지요.”
“음악에서 손을 놓는다고요?”
“수많은 악기들의 선율이 한데 어우러져 시끄럽게 귀를 자극하죠. 이것은 바이올린, 저것은 첼로, 쿵하는 저 소리는 팀파니. 마치 전쟁터 한복판에 놓인 느낌일 것입니다. 지휘자들이 데뷔무대도 오르기 전에 그 중압감에 짓눌려 악단을 뛰쳐나가는 경우는 모차르트, 그 이전 시대부터 즐비했던 일입니다.”
상상할 수도 없는 압박감이 온몸을 덮쳤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음악가로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을 테니 그 상실감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유리의 말처럼 수많은 지휘자들이 무대에 오르기도 전에 도망쳤었다. 실력이 모자란 이가 지휘대에 오르면 어떻게 되냐고? 과거 유명 오케스트라에서는 단원들이 지휘자를 쫓아내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으니 더 말해서 무엇하랴.
“갑작스레 지휘를 배우려고 하는 현의 마음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대는 내가 보기엔 완벽한 바이올리니스트인데 말이에요. 바이올린에 정통하다고해서 지휘를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걸음마에 능숙한 아이가 뛰는 것을 어려워하는 것처럼요. 왜 어려운 길을 가려는 것입니까?”
강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꼭 연주해보고 싶거든요.”
유리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가라면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그 누구나 한 번쯤 연주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지휘대에 오르기 위해서는 수많은 검증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서 지휘대에 오른다면 수많은 단원의 선율이 단 한 번의 손길에 죽을 테니까.
“스펜서, 에덴 시므온, 그리고 저 유리 디아노프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이올리니스트 현.”
“각자의 색이 다른 지휘자들입니다.”
“색이 다르다?”
이번에도 강현은 망설임이 없었다. 마치 유리의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으니.
“세분의 지휘는 성격이 확연히 다릅니다. 같은 작곡가의 곡을 연주할 때에도 분명 악상기호는 안단테를 가리키고 있지만 마에스트로 스펜서의 마음속에는 아다지오가, 에덴 시므온의 손끝에서는 알레그레토가, 유리 디아노프의 눈빛에서는 알레그로가 나타납니다. 제가 오케스트라 공연 비디오를 빠짐없이 찾아봤거든요.”
유리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이라 생각합니까.”
“작곡가를 존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존중하는 마음?”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마에스트로를 포함한 나머지 두 분의 지휘자께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지휘하시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예컨대 평소라면 악상의 흐름을 자유자재로 손끝에서 표현했을 마에스트로들께서 베토벤의 곡만큼은 마치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총보를 따라갔습니다. 마에스트로 에덴 시므온께서는 2악장 부분에서 레가토를 요구하실 때 오른쪽 손을 과장되게 올리시는 경향이 있는데 베토벤의 곡만큼은 그렇지 않으시죠.”
유리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비디오로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확인이 가능합니까?”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보고 또 봤거든요.”
“허어.”
눈썰미는 지휘자로서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였으니. 유리는 눈앞의 소년이 양파껍질이 벗겨지듯 하나씩 숨겨뒀던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감탄을 숨기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기대되기도 했다. 아직 자신에게 보여줄 모습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 * *
유리는 마티니로 입을 축이며 여운을 달래고 있었다. 벌써 현을 가르친 지 한 달이 지났다. 하루하루가 감탄의 연속이었으니. 모차르트를 가르쳤던 선생들이 이러한 마음이었을까.
“악보를 전부 꿰뚫고 있다라.”
지휘자는 악보를 외우듯이 알고 있어야 했다. 어떠한 악기들이 쓰이는지 악상기호는 어떤지 하물며 작곡가가 어떠한 심정으로 교향곡을 작곡했는지까지. 그런 점에서 현은 믿기지 않는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아무렴, 샤펠에서 에덴의 수수께끼를 전부 풀어냈을 정도니.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2악장에서 이 부분은 아마 작곡가가 실수한 거라고 생각해요. 아마 감정의 과잉이 작용한 탓이겠죠. 청중들은 이 부분을 희열로 생각하겠지만 말이에요.
무명 이탈리아 음악가의 곡이었다. 그리 유명한 작곡가는 아니었기에 악보를 봤던 사람이 드물 정도. 허나 유리는 강현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놀람을 진정시키느라 애썼다. 저러한 말을 똑같이 했던 사람이 과거에도 있었기 때문에.
-지휘자들이 4분의 4박을 표현하는 방법은 대개 비슷해요.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왼쪽으로 그리고 위로, 박자를 정확히 전달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하지만 음악을 표현하는 방법은 전부 달라요. 누군가는 여린 부분에서 강하게 치고 나가길 원하고, 또 다른 이는 강조해야 될 부분을 여리게 연주하길 원하죠. 특히 모차르트의 곡이 가장 그래요.
모차르트의 곡은 베토벤과 달리 악상기호가 두루뭉술하게 되어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모차르트의 악보를 보며 연주자를 가장 배려한 작곡가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만큼 끊임없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악보란 뜻이다.
-전 교향곡들은 모차르트를 닮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죽은 작곡가를 생각하기보단 살아있는 지휘자의 손끝에서 음악이 재현되어야 한다고요. 아마 베토벤이 살아 돌아온다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죠. 왜 저 친구들은 전부 나를 따라 하려고 애를 쓰는 거지? 마에스트로께 실례가 되는 발언이었다면 죄송합니다.
급히 고개를 숙이는 강현의 모습을 떠올리며 유리는 엷은 미소를 지었다. 타고난 천재가 상상력 또한 풍부하지 않은가. 아무렴, 지휘자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 바로 담대함과 창의성이었으니. 청중들이 매번 같은 교향곡을 듣기 위해 콘서트홀을 찾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점에서 강현은 백 점을 줘도 모자라지 않았다.
“보드카 마티니, 젓지 않고 흔들어서.”
제임스본드를 연상케 하는 주문법으로 유리는 바텐더에게 마티니를 한잔 더 부탁했다. 오늘 밤은 아무래도 마티니로 밤을 지새워야만 할 것 같다. 이 깊은 여운을 떨쳐버리기 위해서는 여명이 찾아오지 않고서야 못 배길 것 같았기에.
‘내가 이토록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에 희열을 느꼈던 적이 있던가.’
유리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걸렸다.
*
“피아노―!”
아르페지오를 비롯한 기본 반주를 맡은 피아노가 내 외침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첼로와 바이올린, 콘트라베이스에 이르기까지. 실내악 수준의 구성이었다. 강당이 협소할뿐더러 오케스트라의 구성을 전부 채울 수 없으니 소규모로 진행할 수밖에.
“현선아, 반주를 맡아야 하는 네가 호흡이 너무 빨라져. 지금은 이렇게 큰소리로 내가 신호를 줄 수 있지만 졸업식 때는 안 돼. 다른 연주자의 선율을 따라가려 애 쓰지마. 오히려 조급하게 건반을 누를수록 실수가 생기는 법이니까.”
졸업식 때 선보일 소규모 오케스트라였다. 대부분이 청소년 콩쿠르에 나가봤을 정도로 독주에는 쓸만한 실력을 지녔지만 협연에는 다들 서툴렀다. 수많은 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경험이 처음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진호야, 넌 현악기군의 흐름을 담당해야 해. 그런데 악장의 서두부터 네가 긴장을 하면 어떻게 되겠니. 바이올린들은 내 손끝을 따라오지 못하면 너를 바라볼 텐데 말이야.”
어찌 보면 이 아이가 악장의 역할이었으니.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비장하기 그지없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던 아이들도 내가 하나씩 틀린 점을 다 짚어주자 입을 벌리고 쳐다보는 게 아니겠는가. 수많은 선율 속에서 각자 틀린 부분을 귀신같이 찾아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테지.
“잠깐 쉬었다 가자.”
몇 시간 째 연주를 계속하고 있었음에도 아이들의 얼굴에는 전혀 힘들어하는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휴식시간에도 쉬지 않고 서로 악보를 살펴보며 의견을 나누지 않는가.
“현아, 잠깐만 이 부분에 대해서 의견 좀 물어봐도 될까?”
악장 역할을 맡은 진호였다. 첫날부터 내게 질문을 끊임없이 해왔으며 수첩과 볼펜으로 내 조언을 빠짐없이 적을 정도로 섬세한 성격이었다. 지금도 그랬다. 수첩과 볼펜을 손에 꼬옥 쥔 채 날 찾아왔다.
‘그러고 보니.’
각진 얼굴과 짙은 이목구비가 누구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런던 심포니의 악장 드미트리 씨를 말이다. 나는 애써 웃음을 참아가며 악장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해주었다. 대부분이 연주의 흐름과 관련한 질문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아마 익숙지 않은 오케스트라 연주였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해결될 문제이리라.
짝―!
손뼉을 치는 소리에 아이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쉬는 시간이 끝나자마자 눈빛이 다시 진중하게 돌변하는 것이 아닌가. 마음에 들었다. 베를린 필의 사자에게 배운 노하우를 이곳에서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오케스트라라는 거대한 악기를 연주할 때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환호하듯 세차게.
“졸업식까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해보자.”
내 손끝이 창공을 향하자,
두두두둥―!
거대한 선율의 해일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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