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187
186 한통속(3)
휘이이잉!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태진은 벼랑과 절벽을 평지처럼 탔다.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지 않았는지 자동 반사적으로 안전한 길을 탐지했다. 밟았을 때 부서지지 않는 지점을 귀신처럼 밟았다.
‘이 정도면 평지나 다름없지.’
아버지의 훈련에 비하면 천 길 낭떠러지조차 꽃길이다. 속도도 적당하고, 매우 안전했다. 떨어진다 해도 다시 기어오를 자신이 있었다. 그뿐이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과 평정심을 얻었다.
‘아버지만 빼면 놀랄 일은 없겠지.’
태진은 짧은 생에서 아버지보다 당황스러운 존재는 만나 보지 못했다. 그 결과, 돌발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갖추었다.
착!
깎아지른 듯한 벼랑을 타고 올라 정점에 이르자, 내리막으로 이어지는 단애가 펼쳐졌다. 탁 트인 전망은 풍경이 좋았다.
단애는 지진으로 인해 벌어진 틈이었다. 풍화로 부식된 상태를 보아하니, 최근에 일어난 것 같았다.
‘아버지는 대체 어떻게 안 거지?’
만년석균을 찾으러 간다고 할 때부터 든 생각이었다. 영약이 찾고 싶다고 해서 찾을 수 있으면 개나 소나 다 찾지.
아버지는 영물, 영초, 영과를 찾는 데 귀신같았다. 어렸을 때야 멋모르고 주는 대로 받아먹었지만, 그때 먹은 약초를 상기하면 이런 공력을 가진 것도 당연했다. 단전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공력이 거저 생긴 게 아니다.
그럼에도 의구심이 드는 것은, 망설이지 않고 찾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개방이나 하오문같은 정보 조직을 통해 알아냈다면 금전적 대가만으론 턱도 없었다. 무인에게 있어 영약은 황금보다 귀한 가치를 지녔다. 영약 때문에 피바람이 부는 것은 대대로 예사였다.
태진으로선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의문이었으나, 묻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그렇다면 그런 거니까.
‘여기 맞지?’
-그렇다.
순전히 마왕의 기억에만 의지한 무진은 목적지를 향해 거침없이 내려갔다. 공간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산의 정상 부근에서 균열이 발생해 가라앉은 지대였다. 족히 천 장은 되어 보이는 단애로 깊이를 알기 어려웠다.
착!
반각을 내려가야 바닥에 닿았다. 앞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이 보였다.
동굴의 눅눅하고 습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습하지만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다. 오랫동안 습한 물기와 냉기를 머금어서 이끼가 자라기에는 최적화된 장소였다.
응?
동굴의 중반을 지나자 기척이 감지되었다.
만년석균이 영약이긴 해도 살아 있진 않았다. 인형설삼이 뿌리를 다리 삼아 뛰어다닌다는 설을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여하튼 만년석균이 살아서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이거 뭐냐?’
-이 몸이 사소한 일들까지 일일이 알 신분은 아니지 않나.
맞는 말이라 무진도 마왕을 추궁하진 않았다. 조금 있으면 앞에 나타날 것이다.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굶주린 짐승처럼 쏘아져 오고 있었다.
“어디 면상이나 봐 볼까?”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놀랍게도 주변을 태우지는 않았다. 불의 성질이 무조건 태우기만 한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영역의 한계를 규정하면 무공은 퇴보한다.
어찌 보면 무공도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다. 일정 경지를 넘어서게 되면 형태는 물론, 성질까지도 자유자재로 구현할 수 있었다.
‘와, 별게 다 되네.’
아직 그러한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태진은 마냥 놀랍기만 했다. 삼매진화에 대해서 다시 고민하게 되었다.
“뜨겁지 않아요.”
“절대경에 도달하면 삼매진화도 네가 원하는 성질이나 형태로 다룰 수 있을 게다.”
형태든 성질이든, 따지고 보면 사용자의 의지로 완성된 부산물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이 창출해 낸 기운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수련이 부족하단 뜻이었다.
단, 그와 같은 경지의 시발점은 최소 화경에는 이르러야 한다. 그 이전까지는 형을 파기도 바쁜 자들이 수두룩했다.
“아버지는 신화경에 든 겁니까?”
“절대의 경지 위로 신화경이 있다고 하는데, 딱히 구분할 필요는 없다고 봐야겠지. 절대경에 오르면 경지가 실력을 대변하진 않거든. 그쯤 되면 자기만의 영역을 구축했다고 봐야 해.”
신주이십일강 내에서도 절대경에 이르렀다 할 수 있는 자는 열 손가락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화경의 고수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다고 단정하긴 힘들다. 무공의 우열이란, 경지만으로 판단하기엔 힘든 영역이었다.
문득 태진은 궁금했다.
제 입으로 말하긴 민망하나, 자신의 성취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나이까지 고려하면 과했다.
어째서 이렇게까지 할까?
“아버지, 절대경에 들면 제가 뭘 해야 할까요?”
“뭘 하긴, 가족을 지켜야지.”
무진은 아들에게 세상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가족은 지키라고 했다. 가족조차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세상을 논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었다.
끼요요욧!
동굴 안의 포식자가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며 쇄도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의 동굴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환한 빛에도 먹잇감은 주저하지 않았다.
두두두두!
동굴 안에서는 무적이라는 만연한 안전 불감증이었다. 이해는 갔다. 동굴 내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최상위에 있는 포식자일 테니.
끼요요욧!
얼레!
괴상망측한 소리를 내는 것과 달리 사람의 얼굴이 달려 있었다. 안면이 창백하기는 해도 제법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럼에도 아름답기보다는 소름이 끼쳤다.
그도 그럴 것이, 몸통이 있고 다리가 여덟 개다. 사람의 얼굴에 거미의 몸통을 지닌 생명체를 아름답다고 할 사람이 어디 있겠나.
동굴 안의 포식자는 일반적인 거미가 아닌 인면지주였다. 마냥 세월이 흘렀다고 인면지주가 됐을 리는 없을 테고. 동굴 안에 영약이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였다.
“아휴, 징그러워.”
독각묵룡은 미끈해서 귀엽기라도 하지. 게다가 여름에 피부를 감싸면 아주 시원하다.
끼요요욧!
무진과 태진을 먹잇감으로 여긴 인면지주가 입을 벌렸다. 사람의 얼굴이었지만 입이 갈라지더니 두 배로 커졌다. 입안에 달린 날카로운 갈퀴가 흉측함을 더했다.
끼요요요요요욕!
듣고 싶지 않은 인면지주의 발성은 음공의 효력이 있었다. 심력이나 내력이 약한 자는 인면지주의 마성에 사로잡혀 저항도 못 하고 먹이로 전락할 수 있었다.
미혼술의 효과가 있어 죽는 순간까지 아름다운 여성과 운우지락을 나누다 뒈지는 줄 알겠지.
무덤덤한 무진과 태진의 반응에 인면지주가 열이 받았는지 무섭게 인상을 구겼다. 여태 자신의 매력이 통하지 않은 상대는 만나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런 먹잇감은 너희들이 처음이라는.
서걱!
무진은 오른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소매에 감추어져 있던 혈삭이 공간을 말끔하게 갈랐다.
솨아아아!
좌우로 갈린 공간의 예기에 태진은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무엇이 됐든 갈라내는 날카로움이 서려 있었다.
쩌어억!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 맹렬히 질주했던 인면지주는 반 토막이 되어 좌우로 미끄러지듯이 포개졌다. 제 죽음을 모르는 듯 회색이 되어 가는 두 눈엔 여전히 먹잇감에 대한 식욕이 담겨 있었다.
‘나쁘지 않은데.’
-천무자란 놈, 무력은 약해도 제법이긴 하군.
신화마정갑은 신병을 흡수하여 형태와 성질을 고스란히 재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이번에는 다른 쪽으로 살펴봐야 했다. 신병만이 아니라 영단에는 어떤 반응을 할지.
“내단이 있으려나?”
아버지의 나른한 말에 태진은 헛바람을 삼켰다.
절정에 이른 고수도 인면지주에게 잘못 걸리면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한다던데, 아버지에게 걸리는 순간 허망했다.
‘인면지주가 저렇게 잡기 쉬운 거였나?’
태진의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지주의 피에서 흘러나오는 독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동굴의 벽을 녹였다. 아버지라서 간단히 잡았을 뿐, 평범한 초절정 고수였다면 한 줌의 독수가 되기에 충분했다.
서걱, 서걱!
무진은 가죽, 뼈, 실을 살뜰히 분리해 자루에 담았다. 자루는 당문에서 제작해 피독 효과가 있었다. 일반 포대에 담지 못하는 독물, 독초를 채취할 때 쓰는 필수 도구였다. 천독사와 같은 영물의 가죽과 천잠사를 특별한 방법으로 엮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옜다.’
-내가 개냐!
으르렁거리면서, 그럼 아니냐?
무진은 인면지주의 내단을 마왕에게 맡겼다.
신화마정갑을 이용해서 내단을 흡수할 수 있는지를 확인했다. 가능하다면 신화마정갑을 운용할 때마다 독기를 사용할 수도 있을 거다.
‘어때?’
-가능하군.
일단 흡수는 가능하나, 활용성은 좀 더 연구해 봐야 할 것 같다.
독중지독으로 불리는 인면지주를 털어 낸 무진은 동굴 끝으로 가 만년석균을 박박 긁었다. 거미가 인면지주가 되려면 최소 천 년이 필요하지만, 특별한 경우에는 빠르게 영성을 가지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만년석균의 효능이다.
“아들, 하나 먹을래?”
“예.”
만년석균을 복용한 아들이 가부좌를 틀자, 무진은 진기도인을 도와주었다. 아들이 스스로 하는 부분까지는 내버려 두고, 막히는 부분을 뚫어 주었다.
우우우웅!
깨달음을 얻어 단숨에 화경에 이르면 좋겠지만, 아직 아들에겐 무리였다.
‘어서 강해지거라.’
그래야 엄마와 동생을 지키지.
무진은 마신교만 아니면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 외의 세력 따윈 혼자서도 일망타진이 가능했다. 하나, 한 손이 열 손을 당해 내긴 어렵다. 잃어버린 후에 하는 복수는, 어리석은 자들의 한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욕심이 과하군.
‘욕심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지.’
-그것이 네 원동력이었군.
‘내 주변을 건드리면 다 죽는 거야.’
-흠.
무진의 담담한 고백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결의를 마왕도 느낄 수 있었다.
***
은혜는 받은 대로, 원한은 백배로.
가문에서 나올 때만 해도 생각지 못한 사태였다. 하물며 목적을 이루지도 못하고 모욕을 당했다. 이대로 돌아간다면 가주의 질책은 불을 보듯 자명하다.
선택해야 했고, 결심을 굳혔다. 다행히 주제도 모르는 놈이 기행을 벌였다. 답이 나오지 않는 터무니 없는 기행이 아닐 수 없었다.
태산에서 황보세가로 돌아가는 길목 중 인적이 드문 장소를 찾았다. 여길 지나지 않으면 빙 둘러 가야 하기에 시간이 훨씬 더 걸린다.
“숙부, 놈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사적인 원한은 뒤로하거라. 실수는 용납할 수 없다.”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처리해야 했다. 황보세가에서 나와 가문으로 돌아갔다고 알려진 상태였다. 그러니 여기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하다. 혹, 잘못되기라도 하는 날엔 심각한 사태를 초래할 우려가 있었다.
악중필, 악효상은 황보세가에서 쫓기듯이 나왔지만, 돌아가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가주는 냉혹한 사람이다. 피를 나눈 형제나 자식이라고 해도 봐주지 않는다. 이대로 가문으로 돌아가면 낙오자로 찍혀 대접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들로서는 물러설 수도 없는 현실이었다.
해가 중천에 오른 시각.
그들은 치욕을 갚아 주기 위해서 무료함을 견뎌 냈다. 반드시 복수하고 말겠다는 의지의 피력이었다.
저벅, 저벅!
길목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해를 머리에 인 두 인형이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던 악중필, 악효상의 눈빛이 독하게 빛났다. 목표물이 아무런 의심도 없이 황천길의 입구로 들어서고 있었다.
준비한 복면을 썼다.
그들은 주저하지 않았다. 숲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창을 찔러 들어갔다.
악가창법 육식, 흑영천공(黑影穿孔).
검은 그림자로 시야를 가리고, 회전력을 극대화하여 관통력을 집중시킨 창법이었다. 정면에서 마주한다고 해도 막아 내기 힘든 절기였다. 하물며 기습적으로 펼친 이상, 목표물의 숨통을 끊어 내겠다는 살의를 천명한 것이다.
투아앙, 타앙!
병기의 부딪침으로 파생된 거친 굉음이 공간을 울렸다.
무방비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악중필과 악효상은 방향을 잃은 창극과 부르르 떠는 창대의 반진력에 기겁했다.
‘……막았어!’
예상치도 못한 대응이다. 창극이 지척에 올 때까지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 목표물에 닿으려는 찰나, 검광이 번쩍이더니 창극의 방향을 틀어 내고 그 앞을 완벽히 차단했다.
“아휴, 깜짝이야!”
놀라 주기로 작정했던 무진은 한 박자 쉬고, 두 박자 쉬고, 세 박자 느리게 화들짝 과잉된 몸동작을 보였다. 이건 뭐, 칼 맞고 한참 있다가 아프다고 소리 지르는 격이었다.
“대체 뭐 하는 놈들이야!”
“아버지! 저 창을 보니 황보세가에서 본 산동악가의 무인이 분명합니다.”
“아, 그 병신들.”
“그렇습니다.”
창을 막아 내고 아버지의 앞을 견고하게 막아선 태진은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나, 회의감이 잠깐 들었다. 보기에는 아버지를 지키는 아들의 필사적인 효심 같으나, 지켜야 할 대상이 잘못되었다.
‘누가 누굴 지키는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