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427
426 사리가 생기는 이유(2)
일리가 있었다. 예전부터 의심스럽긴 했다. 안휘 상계를 차지하려고 할 때부터 막대한 자금력을 퍼부었다. 그런데도 대외적으론 드러나지 않았다. 돈이 비처럼 무한정으로 쏟아지지 않는다면 어떤 식으로든 지속적인 충당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마신교가 암흑상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암흑상회의 역사는 길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없다고 할 수 없는 지하세계로. 무림과 마찬가지로 동전의 양면처럼 상계도 빛과 어둠이 공존했다.
어쩌면 석가장은 흑상의 힘을 이용해서 자신들이 처리하지 못하는 상계와 연계하여 천하제일장을 유지했을 수도 있었다.
당장은 동반자 관계겠지만, 마신교의 힘을 알게 된다면 상하 관계는 명백해질 것이다. 차후, 흑상은 거래 내역을 통해 석가장을 압박하고, 회유한 세작을 이용해 천월로 통합할 수도 있었다.
“조만간 돌아갈 테니, 단단히 채비해 둬.”
“개방의 최정예로 선별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확실히 적의 역량을 몰랐을 때와 달리 개방의 태도가 분명했다. 미래에선 이 당연한 조치조차 이루어지지 않아 여러 차례 꼬였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무인들의 희생으로 치렀었다.
앞으로도 갑과 을은 명확해야 했다. 호구가 되어 끌려다니고 싶지 않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하네. 크크크!”
“저도 궁금합니다. 크크크!”
강호의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란 명목인데, 악당들의 작당 모의처럼 느껴지는 건 순전히 기분 탓이었다. 어떤 선택을 해도 고립무원이기에 즐거웠다.
“아참, 우리 장남은 어떠신가?”
“천란 공주가 먼저 접촉했다고 합니다. 벌써 어느 정도 협상의 진척이 있다고 했습니다.”
“흠, 그건 좀 안 좋은 소식인데.”
“어째서요?”
“공주가 뭐가 아쉬워서 먼저 나서겠어. 그만큼 황궁이 위태롭단 뜻이잖아. 자칫 계획이 꼬일 수도 있으니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천란과 잘 해 보라고 전해.”
“알겠습니다. 한데.”
“뭐?”
“저는 없습니까?”
“기다려 봐, 이번 일만 해결하면 남은 공주 중에 고를 수 있을 거야.”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짚신도 짝이 있다고 하는데, 육칠은 옆구리가 시렸었다. 강 대협의 지극한 아내 사랑이 눈꼴시긴 해도,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눈에 넣으면 아프겠지만 미주도 그렇고, 태진도 잘 큰 편이었다. 사내로 태어나 후대를 남기고 싶은 건 본능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공주를!’
대놓고 황실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한순간에 개방이 역적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가 퍽이나 공주를 주겠냐고요!
데리고 와도 문제겠다.
***
“생각해 봤나요?”
“선택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까.”
“마치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 같은데요.”
“공주마마, 낮은 자세로 임하겠습니다. 그러니 하대, 아니 천대해 주십시오.”
“싫어요.”
외통수에 걸려 버린 염산호였다. 설마 이처럼 직설적으로 찌르고 들어올 줄은 몰랐다. 공주의 성향을 파악했다고 생각했건만, 실제로는 명백한 착각이었다.
맹한 줄 알았더니, 집요하다.
‘왜?’
강예는 제국의 공주다. 지위, 명예, 자존심이 하늘을 찔러도 부족한 판국에, 대놓고 자신을 얻으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천란 공주에 대한 사전 조사와 철저한 준비는 무의미해진 상태였다.
“공주마마는 존귀한 분이십니다. 일개 학사가 감히 상대가 되겠습니까?”
“호호호, 그럼 여태까지 황실을 우롱하신 거네요.”
시작부터 뒤가 없다.
처음의 솔직함으로 공주를 혼란스럽게 했을 때 승기를 잡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오만한 행동이었는지를 염산호는 되짚어 보았다. 상대를 파악했다고 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공만큼이나 만만치 않으신 분이군요.”
“제가 익힌 무공을 아는 것처럼 말하네요.”
“황실의 비전절학이겠지요. 진이의 말로는 최소한 절정의 극에서 초절정의 초입이라고 하더군요.”
“저를 또 속였네요!”
강예는 순간 많이 놀랐다. 상대가 자신을 이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강 공자가 무인으로서 강기를 보였을 때도, 비전을 푼다면 상대할 수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자신의 내력을 손바닥처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건 상대의 눈썰미가 뛰어나거나, 최소 초절정을 넘어야 가능했다.
화경의 고수.
아찔한 충격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약관의 나이에 화경에 이르렀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무공의 성취가 나이를 뛰어넘는다고 해도 상식적인 수준을 벗어났다. 염 학사가 당황하면서도 자신감을 드러내는 연유를 깨달았다.
“화경이군요.”
“떠도는 소문도 있을 겁니다.”
“강 공자의 아버님도 화경이라고? 그게 사실이었나 보네요.”
“그렇습니다.”
그 이상 알면 까무러칠 겁니다.
강예는 염산호와 태진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송호문의 연혁을 살폈다. 십 년 내외로 송호문은 소문파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만에 화경급 고수가 최소 세 명이 넘는다. 육성의 일인인 천주신창을 더하면 송호문의 전력은 능히 구파와 오대세가를 능가했다.
원래 그런 문파였다면 이해가 가겠지만, 지나치게 빠른 성장이었다. 이게 과연 우연히 이루어졌을까? 차라리 망했던 대문파가 과거의 영광을 찾는 편이 쉬울 것 같다.
“한 문파에 최소 네 명의 화경급 고수라, 그 정도 전력이면 황궁도 전복시키겠네요.”
“적은 우리 문파보다 훨씬 강합니다.”
염산호의 대답에 강예의 안색이 굳었다. 화경급 고수를 보유하고 있으면 자부심을 느껴도 될 텐데, 오히려 적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그 정도는 되니 황궁의 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말한 세력을 해결하면 송호문은 대륙제일문 그 이상의 힘을 갖겠네요.”
“그렇습니다. 그러니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문파와 혈연을 맺는다면 굉장히 든든하겠네요.”
“후우, 역시 만만치 않으시군요.”
“당신이야말로 왜 자꾸 빠져나가려고 하죠. 이거 정말 기분 나쁘네!”
찰나간 변한 강예의 도끼눈에 염산호는 흠칫하며 고개를 돌릴 뻔했다.
‘사부의 말이 맞을지도.’
천란 공주를 조사할수록 사부의 말과는 반대라서 이상하기는 했다. 그녀는 서두르는 면이 있기는 해도, 직관적이며 날카로웠다.
-뒤 없는 미친년이야.
그럴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방금 굉장히 무서웠다. 미주와는 다른 유형이지만, 비슷하다고 하면 사부가 가만두지 않겠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미친년을 제자보고 꼬시라는 사부가 대체 어디 있냐고요!
다행이라면 사부가 말한 면이 있기는 해도, 전부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는 황실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줄 알았다. 이기적이었다면 외면했을 수도 있었다.
“승부욕이 대단하시군요.”
“지고는 못 살죠.”
“육탄전을 걸어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가더라도 같이 가야죠.”
공주가 아니라 물귀신이다!
염산호의 잘 돌아가는 머리로도 쉽지 않은 호적수였다. 순간 미주를 연상케 하는 이유가 있었다. 머리를 쓰면 쓸수록 골이 지끈거렸다. 한편으로 그만큼 절박하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주세요.”
“뭘요?”
“경쟁에서 이기라면서요, 답안지가 필요합니다.”
“하, 사기를 치겠다는 거예요?”
“예, 그렇습니다.”
부마가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굳이 어려운 길을 택할 이유가 있나.
‘공주에게 택할 시간을 주었다면 황제 폐하를 되돌릴 여지가 있다는 거겠지.’
하나, 황제가 아무나 만나 주지는 않을 터. 급제했을 때도 멀리 떨어져서 겨우 얼굴만 봤을 뿐이다. 부마 정도는 되어야 황제와 대면이 조금이나마 가능할 터.
“과거도 부정은 저지르지 않았는데, 삶이 참 순탄치 않습니다.”
“자꾸 다 죽어 가는 소리 할 거예요!”
이 인간이!
강예는 자신을 앞에 두고 한숨을 푹푹! 쉬는 염산호를 시원하게 패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꼈다.
합의가 이루어지는 동안, 태진은 정원에서 검예를 다듬고 있었다. 느릿하게 흐름을 이어 가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검의는 가볍지 않았다.
오싹!
기희선은 태진의 검로에 소름이 돋았다. 일전에 보여 준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때 검을 뽑았다면 어떤 사태가 벌어졌을지 암담할 따름이다.
“어때요?”
“뭐가요?”
“검공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가르침을 주겠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흥, 그런다고 제 맘을 얻진 못해요.”
“전 임자가 있으니 티끌만큼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령 매를 떠올린 태진은 오늘 밤도 설레게 생겼다. 전에 손만 잡고 있겠다고 했는데, 아버지가 사실을 알면 가만두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날이 떠오른 태진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자.
“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거예요?”
“령 매 생각 했습니다. 항상 제 마음속에 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이 좋은 걸, 왜 빨리 배우지 못했을까. 무공밖에 몰랐던 인생에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그때 이후로 무공의 참된 길을 찾았다.
죽여, 말아!
기희선은 이 음탕한 인간을 어떻게 죽여야 잘 죽였다고 소문이 날지 고민했다.
태진은 검로가 자신을 향하자.
“검로가 틀렸습니다.”
“맞거든요.”
***
서신은 사람을 쓰는 편이 정확하다. 그러나 정해진 시간 안에 전달하려면 전서구가 용이했다. 도중에 분실하거나, 방향을 잃을 수도 있으나 속도와 보안을 무시할 순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은 입을 통해 전달되어 새어 날 우려가 있다. 전서구를 통하면 정보의 전달에 있어서 비어를 숙지하지 않고서는 도중에 가로챈다고 해도 누설될 가능성은 희박했다. 설령 비어를 알아내 내용을 본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 무용지물일 수도 있다.
석가장쯤 되면 전서구의 사용은 당연했다. 모든 일이 사람을 통해서만 이루어지진 않는다. 여러 가지 수단을 지니고 있어야, 어떤 사태가 발생하더라도 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선 사람을 써도 괜찮으나, 잘 훈련된 전서구가 훨씬 빠르고 정확할 때가 있었다.
석가장의 비응은 저 먼 동이에서 사냥을 위해서 사용되었던 해동청이었다. 주인에 대한 충성도와 뛰어난 사냥술로 도중에 분실할 위험이 적었다.
드륵!
이른 저녁, 천금각주가 장주의 집무실을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석가장주가 탁자에 놓인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있었다. 한결 차분해진 모습으로 평소와 다름없었다.
“일정대로 진행하겠다고 합니다.”
“확실하게 끝을 내야 해.”
“저들도 벼르고 있는 눈치라,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만에 하나 실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가 연관되었단 사실이 밝혀져선 안 된다.”
“안타깝지만, 포기할 건 포기해야지요.”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을 가볍게 여기는 두 사람이었다. 가문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일처럼 생각되었다. 일전 단악도와의 일도 피해 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았기에 황명으로 덮어 버릴 수가 있었다. 또한, 그들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확인해 볼 기회였다.
“놈이 화경급 고수라는 걸 숙지했겠지.”
“자신하는 것으로 봐선 충분할 겁니다.”
이번 사태가 분수령이 될 것이다. 저들과 끝까지 함께 갈지, 아니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할지.
“아버지에게 연락해.”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겠습니까?”
“수틀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현실이다. 방심하지 말도록 해.”
“예, 장주님!”
평소와 달리 구할의 확신이 서진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작은 방심도 위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