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mer King RAW novel - Chapter 94
093 어긋나다(1)
“멈춰.”
강렬한 외침과 동시에 기습적인 청색의 검기가 나아가는 길목을 베어 냈다. 좌우가 검에 의해 분리되자,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사라졌다.
착!
검의 공간에서 음요행을 펼친 미안의 사내가 살짝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러다 흥미로운 듯 가로막은 자의 면면을 살폈다.
“어떻게 알았을까? 혹시 이거?”
“그녀를 내려놓고 죄를 청하라. 비루한 목숨만은 살려 주마.”
“남존무당의 협사께서 협상의 기본을 모르시는군요. 자, 이렇게 하는 게 어떻소? 길을 트시오. 그러면 계집의 목숨은 살려 드리리다.”
“수치를 모르는 놈이구나!”
청현은 당장 검을 쓰려다가 멈칫했다. 음적이 여인의 목을 움켜잡았다. 검을 쓰는 즉시 목을 부러뜨리려는 듯 위협했다.
“본인은 살고 싶소이다. 어서 길을 트시오. 잘못하면 아무 죄 없는 선량한 계집이 죽습니다. 참고로 이 정도면 미인이지 않소. 미인은 죽어선 안 되는 존재입니다. 아끼고, 사랑하고, 유린해야지요.”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청현은 음적과 타협할 마음이 없었다. 놈의 움직임은 범상치 않았다. 익히고 있는 검법 중에서도 빠른, 분광칠절검의 분광이영의 수를 펼쳤었다. 그런데도 놈의 환영을 자르는 데 그쳤다. 더욱이 놈은 여인을 안고 있었다.
‘보통 놈이 아니다.’
요사스러운 기운을 품고 있는 이놈은 음적의 우두머리가 분명했다. 음적들이 분산하여 도망칠 걸 예상하고 무리를 나누어서 방향을 예측하여 움직였다.
‘놓쳐선 안 된다.’
실적이 필요한 청현에겐 공을 세울 기회였다. 여인의 처지가 안타깝기는 하나, 음적을 놓치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길 것이다. 만인을 위한 희생은 당연했다.
“너희는 퇴로를 막아라.”
“사형, 그녀는 천의문주의 여식인 옥소향 소저예요.”
“불가피한 희생은 어쩔 수 없다.”
“시도는 해 봐야죠.”
“말을 듣지 않을 셈이더냐!”
청현의 강경한 태도에 백유화, 백유경은 상황이 안타까웠다. 사형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여기서 저자를 놓치면 더 큰 희생을 초래할 터. 순순히 내어 놓을 것 같지도 않고. 음적의 의도에 끌려다니는 것보다는 나았다.
“마구니가 낀 분들이군요. 이렇게 아리따운 여인을 희생하려고 하다니 말입니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라. 네놈은 도망칠 수 없다.”
태극천의공을 끌어 올린 청현은 검을 들어 올려 자세를 취했다. 놓치지 않겠다는 각오가 비쳤다.
백유화와 백유경은 음적이 도주할 방향을 차단하며 압박을 가했다. 유운검이 경지에 오르면서 상대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청현 사형이 알아봤듯, 그녀들도 음적의 보신경이 경지에 달했다는 걸 파악했다.
‘평범한 음적이 아냐.’
그리고 옥 소저의 팔목에 수궁사가 남아 있었다. 다른 목적이 없다면, 이 시간까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하다. 마치 다른 여인들을 미끼처럼 던져 버린 것 같기도 하고.
흠.
여인의 목을 쥔 백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마땅치 않았다.
“도저히 빠져나갈 혜안이 안 보이는군요. 항복하면 살려 준다고 무당의 이름을 걸고 약속해 주시겠소?”
“태극을 걸고 약속하지.”
태극은 무당의 상징이었다. 이를 부정한다면 도인의 명예를 실추하는 일이다.
스윽!
백안은 쥐고 있던 여인을 앞으로 밀어내더니 물러서면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수작 부릴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믿음이 부족하군요.”
백안은 옥소향과 거리를 벌리면서 저항할 의사가 없다는 표식으로 백유화, 백유경의 검격 안으로 들어섰다. 손을 쓴다면 그녀들이 먼저 검을 쓸 수 있었다.
“어째서 깨어나지 않는 거지?”
“수혈을 짚었소. 해제하려면 기해혈에 공력을 주입해야 합니다. 힘들다면 내가 해 줄 수도 있는데.”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기해혈은 여인의 은밀한 부위에 해당이 되었다.
옥소향은 천의문주가 아끼는 금지옥엽답게 아름다웠다. 청현은 그녀를 깨워야 하기에 수혈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여인의 몸은 여인이 풀어야 하지 않을까. 나중에 깨어나면 얼마나 수치스러울꼬. 쯧쯧쯧!”
막 손을 쓰려고 했던 청현은 멈칫했다.
빌어먹을 놈.
사매들이 보고 있지 않았다면 서둘러 손을 썼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따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놈이 말을 한 이상 의식하게 되었다.
“백 사매.”
청현이 사매를 불렀다.
그때.
의식을 잃고 있던 옥소향이 눈을 뜨며 숨겨 두었던 비수로 청현의 옆구리를 찔렀다.
푸욱!
무인의 감이 반응하여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청현의 옆구리가 붉게 물들었다. 다행히 급소는 피해 상처가 중하지는 않았다.
“무슨 짓을!”
벌떡 일어난 옥소향의 눈에 초점이 보이지 않았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을 당하는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자연히 백안에게 시선이 갔다.
“네놈이구나!”
“후후후후, 실전 경험이 부족하군요.”
옥소향의 실력이 대단치는 않았기에 청현은 간단히 제압했다. 그러나 옆구리에 생긴 상처가 쓰라릴수록 자존심이 상했다. 놈의 말대로 이런 식의 대처는 고려해 보지 않았다. 경험 미숙을 드러낸 것이다.
“사술을 쓴 대가를 치르게 해 주마.”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네요.”
백안의 동공이 회안(灰眼)으로 변하며 입맛을 다셨다. 계획에서 어긋나기는 했어도, 극상의 재료가 나타났다. 가까이서 보니 더더욱 짜릿하다.
음요공을 끌어 올린 백안의 회안이 청현과 그녀들을 향했다.
환희회안, 극락황홀.
번쩍!
회광이 번뜩였다.
아찔!
백유화와 백유경은 현기증을 느꼈다. 버티려고 해도 밀물처럼 파고들어 와 심기를 마구 흔들었다. 그녀들은 즉시 태청신공을 운기하여 사특한 기운에 저항했다.
우웅!
청현도 심상치 않은 놈의 사술에 대응하기 위해 태극천의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찌릿!
어?
공력을 주천하여 사기를 몰아내려고 할 때, 옆구리에서 번지는 음산한 기운이 있었다. 그것이 점차 내부로 파고들어 와 기맥과 혈맥을 막아섰다.
독이다.
범상치 않은 독이 공력을 방해하자, 청현은 백안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비겁한!”
“멍청하면 약도 없지요. 당장 해독하지 않으면 평생 공력을 쓰지 못할 겁니다. 그건 꽤 지독한 독이거든요.”
백안은 옥소향에게 사술을 걸어 놓은 후 혈루산을 바른 비수를 쥐여 주었다. 혹시나 해서 준비한 수로, 정파란 놈들, 특히 사내라면 빠져나가기 힘든 함정이었다.
혈루산은 그 자체로는 치명적이지 않지만, 공력을 운기하면 달라붙어서 말려 버리는 성향이 있었다. 내력이 마르지 않는 공령지체가 아닌 이상 당할 수밖에 없다.
“빠득,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심기를 다스리세요. 환술에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다 그녀를 유린하는 극락의 맛을 보게 될 겁니다.”
회안을 마주한 청현은 독기와 함께 욕정이 끓어올랐다. 놈의 사술에 대항하려면 운기를 해야 하는데, 운기를 할수록 공력의 순환이 막혀 왔다.
크윽!
가부좌를 틀고 상태를 살펴야 했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사형, 운기하세요.”
백유화, 백유경은 태청신공으로 사술에 대응하며 백안을 막아섰다. 놈이 순순히 항복할 때부터 미심쩍었다.
그러나 그녀들도 강호 경험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사술에 관해서는 경험 많은 무인도 당하기 일쑤였다.
“절 보내 준다면 해독제를 내줄 수는 있는데.”
“정말인가요?”
“그럼요.”
백안은 끝까지 상대를 희롱했다.
혈루산은 해독제가 없는 독이다. 독을 제거하려면 삼갑자 이상의 고수가 체내에 있는 독을 끄집어내는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산중에 삼갑자에 달하는 고수도 없을뿐더러, 그럴 시간도 주지 않았다.
쐐애애액!
해독제를 내어 주려고 품을 살피던 백안은 황급히 몸을 틀어 검의 궤적에서 회피했다. 수평으로 그어지는 백유경의 검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한순간 목이 잘릴 뻔했다. 그것으로 방심해선 안 되었다.
숨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정면으로 검을 베고, 바로 뒤로 날아오른 백유화의 검이 수직으로 내려찍었다. 체격이 비슷하기에 서로의 동선을 차단한 수였다. 상대에겐 한 명으로 보였을 것이다.
파아아앙!
베어진 지면에서 폭음이 일고 먼지가 일었다.
백유화의 검폭이 먼지를 피울 때, 백유경이 날아올라 구름의 분노, 유운진천을 펼쳤다.
바람 따라 흐르는 구름은 자유로웠다.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서 얼마든지 강력한 기운을 품었다. 검극에서 형성된 검기가 공간을 흔들었다.
퍼퍼퍼펑!
백유화와 백유경의 검공은 청현에 미치지 못하지만, 합격에선 달랐다. 용화천선검결과 융화한 유운검은 합격에 최적화를 이루었다. 그녀들을 위해 준비된 검결처럼 녹아들었다.
공수의 조화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렸다.
“멍청한 놈보다는 똑똑하군요.”
백안의 예상을 벗어나는 백유화와 백유경의 대응이었다. 해독제를 내어 주는 척하면서 환희회안을 걸려고 했거늘, 타협이 통하지 않았다.
“난처하군요.”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지만, 백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본색을 드러내며 장력을 쏟아 냈다.
퍼어어어엉!
공간을 거칠게 흔들어 대는 백안의 초절한 장력이었다. 숨겨 둔 절기, 음살장이 연거푸 펼쳐졌다. 음살장은 여인의 음기와 원한을 흡수할수록 강해진다.
큭!
백유화와 백유경이 검기를 펼칠 때마다 백안의 음험한 장력이 내부로 파고 들어와 내력의 순환을 방해했다.
“순순히 항복하는 게 좋을 겁니다.”
흥!
전력의 차이가 드러나고 있었다.
백안은 청현이 온전한 상태였다고 해도 어려운 상대였다. 그녀들에게는 승산이 높지 않았다.
버텨 봤자 결과는 정해졌다.
버텨?
백안의 눈매가 살짝 일그러졌다.
“확실히 보통이 아니군요.”
자매의 의도를 깨달은 백안은 방법을 바꾸었다. 직접 타격을 주기는 쉽지 않았다. 절묘한 합격으로 장력에 실린 음혈기를 필사적으로 막아 내고, 분산했다.
“그렇다면.”
백안은 목표를 바꾸어, 운기를 하는 청현과 쓰러진 옥소향을 노렸다.
“비겁한 악적!”
백안의 보법은 신묘했다. 그녀들이 잡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리를 두면서 청현과 옥소향을 노렸다.
일순 그녀들의 합격이 흔들렸다.
“아니죠, 저는 훨씬 비겁합니다.”
마치 그걸 노렸다는 듯, 방향을 선회한 백안은 백유경의 빈틈을 장력으로 후려쳤다.
꽈아아앙!
백유경이 충격을 받고 바닥을 굴렀지만, 백유화는 당황하지 않고 검을 출수했다. 그녀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휙휙.
백안이 신형을 좌우로 흔들어 대자, 검로가 방향을 잡지 못했다. 합격할 때와는 차이가 컸다.
타아아앙!
후려친 장력을 검으로 흩어 내야 하지만, 백유화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위험한 순간 백유경이 일어서서 검을 펼치지 않았다면 속절없이 당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