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Mythic creator is a regressed player RAW novel - Chapter 77
계기 (3)
진법 밖에서 가휘가 나오길 기다리는 우희의 눈에 초조함이 깃들었다.
과연 잘한 짓일까?
그녀가 앉은 책상 위엔 진이 돌파되었음을 알리는 깃발 여러 개가 쓰러져 있었다.
헌데 마지막 깃발 하나가 아무리 기다려도 쓰러지지 않는다.
그가 쉽게 통과할 수 있도록 단서를 남겨놓은 그 단계에서 말이다.
평소였다면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그녀는 그의 능력을 신뢰했다. 그가 지닌 신비로운 능력과 다양한 지식들을 몇 번이나 견식해 왔으니.
하지만 그것도 몸이 정상일 때의 이야기이다.
그는 숨기려는 듯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언제나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속일 순 없었다.
그는 심각한 내상을 앓고 있다.
다른 수련생들의 실습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가휘만을 눈여겨보던 그녀는, 오늘따라 그의 몸 상태가 별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더구나 이번 실습에 사용된 진은 평소보다 고난이도로, 특히 마지막 단계의 경우 억지로 통과하려다가는 부상을 입을 가능성도 있다.
살상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진법이 아니니 목숨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내상은 더욱 깊어질 테지.
그렇게 걱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진법 안에 그를 위한 단서를 새긴 뒤였다.
수련생이 실습을 마칠 때마다 진을 짠 그녀가 일일이 내부를 점검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못된 행동임은 알았으나, 그녀에겐 가휘가 지닌 무인의 자존심보다 그의 건강과 안위가 우선이었다.
어차피 내상만 아니었으면 무리없이 통과했을 테니까.
그렇게 스스로의 행동을 정당화 했지만, 이제 와서 그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잠시 뒤 마지막 깃발이 툭 쓰러졌다.
우희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하지만 진법을 빠져나온 가휘의 굳은 얼굴을 발견한 그녀는,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단 걸 깨달았다.
“가가, 어디 다치진···?”
조심스레 말을 건 그녀에게 향한 그의 복잡하고도 무거운 시선.
난생 처음 보는 그의 눈빛에 우희가 당황하는 사이, 그의 발걸음이 곧장 교관을 향했다.
“이번 실습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얘기해보게.”
“수업이 끝난 뒤에 따로 찾아뵙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음···. 나도 별다른 일정이 없으니. 그럼 수업 끝나고 바로 교관실로 찾아오도록.”
“네.”
그는 돌아갈 때도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마치 의도적으로 시선을 회피하려는 듯.
“아! 가가···.”
급히 뒤쫓으려는 그녀를 당숙이자 교관인 제갈교가 붙잡았다.
“희아, 진법 점검 해야지, 어디 가느냐.”
“···네.”
그녀는 대기실로 돌아가는 가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생각보다 더 기분이 상한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애정에서 비롯된 오지랖이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어쩌지?
그러나 실습이 모두 끝난 뒤에도 오해를 풀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먼저 가보마. 뒷정리 마치고 오거라.”
“아···. 알았어요, 당숙.”
실습장에 홀로 남아 진을 해체하는데, 뒤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가가를 믿었어야 했다. 생문이 아니라 차라리 걱정하는 마음을 새겼어야 했어.
그랬다면 가가께서도 내 마음을 알아줬을 텐데.
후회를 곱씹으며 뒷정리마친 그녀는 서둘러 본관 3층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잠시 뒤, 교관실 앞에 도착하자 안쪽에서 대화가 들려왔다.
-···그러니 실격 처리를 부탁드립니다.
-진의 해법을 미리 알고 있었다?
실···격?
문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문을 열려던 우희의 몸이 얼어붙었다.
한편, 제갈교는 몇 안 되는 대화만으로 상황을 짐작한 듯 더 이상 자세한 사정은 묻지 않았다.
어차피 진법을 짜는 일에 관여한 것은 두 사람 뿐이니, 굳이 추궁할 필요도 없다고 여겼든가.
-모든 관문의 해법을 알고 있던 건 아니다?
-네. 마지막 관문만···.
-그 전까지 진을 통과한 속도는 수련생 중 자네가 제일 빨랐는데··· 어쨌든 알겠네. 평가할 때 고려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곧 문이 열리고 가휘가 밖으로 나왔다.
이윽고 문 앞에 선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
“가가!”
우희는 말 한 마디 없이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그를 황급히 붙들었다.
“가가, 잠시만···.”
그제야 그가 그녀를 돌아봤다.
그러나 평소 애정이 듬뿍 담겨있던 그의 눈빛은 예전에 본 적 없던 냉랭함만 머금고 있었다.
“오해예요, 가가. 난 그냥 가가 내상이 걱정돼서···.”
“나도 알아.”
변명하던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다정한 목소리와 달리 조심스레 올려다본 그의 얼굴은 여전히 굳어 있다.
“미안, 희야.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아···!”
평소의 매끄러운 언변도 그의 차가운 태도 앞에선 작동을 멈췄다.
머릿속이 새하얘진 그녀는 그의 손을 다시 붙잡을 생각도 못한 채, 떠나가는 그를 망연자실한 눈빛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휘 가가···.”
손이 빠져나간 자리를 멍하니 움켜쥐는 그녀에게, 언제 나왔는지 제갈교가 넌지시 위로를 건넸다.
“저 아이를 아끼는 건 안다만 이번엔 네가 과했던 거 같구나. 때로는 그저 믿고 응원해 줄 때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
“너도 충격이 큰 듯 하니 꾸짖는 건 뒤로 미루마. 나중에 보자꾸나.”
그녀는 떨군 고개를 좀처럼 들지 못했다.
***
우희가 남긴 힌트를 발견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처음엔 불신했다.
우희가 아무리 날 좋아하긴 해도 이런 부정행위를 벌일 리 없다고, 그저 평소의 짓궂은 장난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남긴 단서가 가리키는 방향과 카메라를 통해 발견한 생문의 위치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 순간만큼은 나도 화가 났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홀로서기를 각오한 마당에 이런 것을 발견하니 그녀의 마음 깊숙이 나의 능력을 염려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어 그 마음이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영특한 그녀가 갑자기 이런 일을 벌일 리 없다는 것을.
그녀가 감정적으로 행동할 때는, 언제나 그 뒤에 ‘나’라는 원인이 있었다는 것을.
“내상··· 눈치 챘구나.”
잘 속였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그녀의 배려였을 뿐.
그러나 아무리 날 위해서라고는 해도 그녀의 행동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그녀를 원망할 수 없었다.
더구나 조금 전 사과하는 그녀를 뿌리친 것은 단순한 화풀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서운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그 모든 것을 제공한 것은 결국 나의 부족함이었으니까.
그 화는 나 자신을 향한 것이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난 뒤, 달아나듯 강의실을 떠나던 그녀를 떠올리자 입안이 썼다.
“하···.”
한숨을 터뜨리다 문득 밤이 되었음을 안다.
내가 누운 침상 주위를 비롯해 방안은 어느새 어둠에 잠겨 있다.
뒤이어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안 먹었지.
내가 이런데 우희는 오죽할까.
분명 아무것도 안 먹고 쫄쫄 굶고 있으리라.
“람쥐야?”
“···쯋.”
책상 위에 웅크리고 있던 조그만 그림자가 내 부름에 쪼르르 달려왔다.
내 배 위에 오르자마자 다시 동그랗게 몸을 마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자고 있는 걸 깨웠나 보다.
그러고 보니 요 녀석도 요즘 부쩍 기운이 없다.
약빈이가 특훈을 떠나는 바람에 쌍둥이 자매와 헤어졌기 때문이겠지.
“오빠랑 산책 갈까?”
“쯋!”
귀를 쫑긋거리는 녀석을 품에 챙겨 방 나섰다.
별이 소금처럼 박힌 밤하늘 아래, 고요한 교정엔 일과를 마친 수련생들 몇몇이 산책 즐기고 있었다.
평소였으면 나와 우희도 저들 중 하나였을 텐데.
쓴웃음을 지으며 걸음 옮긴다.
얼마 뒤 봉황전 입구에 다다른 나는, 걸음을 멈추고 불 꺼진 우희의 방 창문을 바라봤다.
아직 남녀 출입이 통제되는 통금 시간엔 이르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여자 기숙사는 금남의 영역이다.
괜히 들어가자니 눈치 보이고, 그렇다고 다른 여자 동기를 통해 말을 전하자니 내일 오전에 학관에 어떤 소문이 돌지 뻔했다.
그렇잖아도 아까 존명이가 우리 둘 싸웠냐고 묻던데.
때문에 난 이야기를 전할 메신저로 고든람쥐를 택했다.
“우희 언니 좀 불러줄래?”
영물 다람쥐에겐 말 한 마디면 충분했다.
쪼르르르-.
눈 깜짝할 새 벽을 타고 올라간 다람쥐가 우희 방 창문으로 쏙 사라진지 얼마 되지 않아, 창이 활짝 열리며 섬섬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두 손에 고든람쥐를 부드럽게 감싼 우희는 기숙사 앞에서 기다리는 날 발견하곤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얘기할 시간 돼?
손짓과 함께 옅은 미소를 보내자, 그녀의 몸이 빠르게 방 안으로 사라졌다.
잠시 뒤, 여자 기숙사 현관이 열리며 경장을 입은 그녀가 밖으로 나왔다.
뻗친 머리칼이며 흐트러진 옷매무새가, 누가 봐도 침상에 누워있다 급히 달려나온 모양새다.
그러나 정작 현관을 나온 그녀가 내 앞에 도달하기까진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평소의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이는 어디 간 걸까.
머뭇거리며 다가오는 그녀의 눈이 많이 부어 있다.
“잠깐 걸을까?”
“으.”
순간 목이 메인 그녀가 침을 삼키며 답했다.
“응··· 가가.”
평소라면 얼른 팔짱을 꼈을 그녀가 지금은 내 뒤를 조용히 따라왔다.
우리는 관목이 우거진 중앙정원으로 향했다.
하얗고 노란 국화가 만발한 산책로를 말 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인적이 드문 장소에 이른 순간, 내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가가···.”
뒤에서 나를 끌어안은 우희가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잘못했어. 화 풀어요.”
“화 안 났어.”
“거짓말. 아까 나 실망한 눈으로 봤잖아요.”
그녀가 얼굴을 묻은 등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난 가늘게 떨리는 그녀의 손을 꼭 움켜쥔 채 몸을 돌렸다.
“그건··· 날 향한 실망이었어. 너한테 그런 배려를 하게 만들고 화풀이까지 하는 나에 대한 실망.”
“그렇게 속상해 할 줄 몰랐어. 미안해요. 차라리 생문 말고 걱정을 담은 글귀였으면 가가의 기분이 괜찮았을까?”
“아니.”
난 눈물이 그렁그렁한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고개를 저었다.
“희야, 난 네가 돌봐줘야 할 사람이 아니야.”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알아, 네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거.”
그녀를 품으로 당기며 속삭였다.
“네 힘이 되고 싶어서 학관에 왔어. 네가 생각보다 너무 강해서 당황했지만, 그 마음엔 변함이 없어.”
“응···.”
“아직도 가끔 꿈에 나와. 우리 납치당했던 때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잠에서 깨면 이런 생각을 해. 나도 이런데, 기억력이 좋은 너는 얼마나 힘들까.”
이어서 난 처음의 말을 반복했다.
“다신 그런 일을 겪게 하고 싶지 않아. 네 힘이 되어주고 싶어.”
“지금도 충분해요.”
“지금은. 하지만 앞으로는 아니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항상 네가 날 나서서 도와주면 이대로 답보할 거란 생각이 들어. 그리고 여긴 배움을 위한 곳이잖아. 내 말··· 이해하지?”
우희가 천천히 고개 끄덕였다.
“응.”
“아깐 퉁명스럽게 굴어서 미안해.”
난 사과와 동시에 다짐했다.
“앞으론 걱정 안 끼치게, 더 믿음을 줄 수 있게 노력할게. 그러니까 조금만 기다려줘. 네 마음은 나도 충분히 알고 있으니.”
“나도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난 희야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언제든 내 옆에 있는, 내 옆에 있어서 행복한 희야가 아니라. 제갈우희가 온전히 행복하기를 말이야.”
등에 이어 앞섶이 젖어들었다.
밑을 내려다보니 눈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주변에서 천재라고 치켜세워도 마음은 이처럼 여린 여인이다.
“밥은 먹었어?”
“으응.”
“배 고프지? 내 방에서 뭐 같이 먹을래?”
“응. 나 오늘은 가가 방에서 잘래.
“으휴···. 코나 닦고.”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코를 닦아주고 있으려니,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나 웃음이 났다.
그제야 그녀도 날 따라 웃었다.
이후 나와 우희의 관계에는 한 가지 변화가 생겼다.
이전까지는 나를 좋아하는 것을 넘어 집착을 보이던 그녀가, 어느새 내 사적인 영역을 존중해주기 시작한 것이다.
수업보다 꽁냥거리는 데 집중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이따금 카메라로 교정을 정찰할 때 가끔 볼 수 있던, 다른 여자 수련생을 빈 교실로 부른다든가 내 뒤를 몰래 미행하던 모습도 완전히 사라졌다.
여우같기만 하던 그녀에게서 때때로 현명함과 성숙함이 엿보였다.
나 역시 그녀의 배려에 부응하여 수련에 박차를 가했다.
대신 밤은 온전히 그녀의 차지였다.
우리는 낮에 각자 최선을 다한 만큼, 밤에는 한 방에 모여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
가끔은 그녀가 방에서 묵고 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은은한 꽃향기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자스민 같은, 바닐라 같은···.
예전에는 맡아보지 못한 향기다.
“이건···. 너 설마···?”
“치자꽃인데 마음에 들어요?”
“방학 때 문 닫고 뭐하나 했더니···.”
“그럼 내가 만들었는데 안 익혔을 줄 알았어? 더 가까이 와 봐요.”
앞에 한 말 중에 한 가지는 취소다.
여전히 그녀는 여우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