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178
약먹는 천재마법사 178화
청사(1)
“아니, 그것보다는…….”
레녹은 축소마법으로 열쇠고리처럼 만들어놓은 세 개의 총기들을 점검하고는 말을 이었다.
“얼마나 이 일에 마음을 다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서 말이야. 솔직하게 말해서, 하늘이 열리네 마네 하는 소리는 너무 허황된 말이잖나.”
날카로운 시선이 그리샤를 향했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고. 그쪽이 원하는 일을 계속해 나가다 보면 결국에는 복마전과 부딪히게 될 텐데. 그렇게까지 해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뭐지?”
아무것도 모르던 햇병아리일 때와는 다르다.
레녹은 판데모니엄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저력을 지닌 조직인지 이제는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처음 크로켄을 마주친 순간, 어째서 딜런이 그렇게까지 절망했는지.
그리고 레녹의 말을 따라서 발버둥을 칠 생각을 한 것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까지.
전 대륙을 자유롭게 활보하는 범죄조직인데도, 그 이름과 몇몇 조직원 말고는 정작 제대로 드러난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대륙 동부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발달한 거대도시 발칸.
조직의 간부인 크로켄이 그 안쪽 구역을 제집처럼 헤집고 다니는데도 별다른 제지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거꾸로 그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크로켄 아실러스와, 흑마법사가 보여준 무위(武威)에는 그만 한 두려움과 존중을 보낼 가치가 있었다.
판데모니엄은 과연 누구의 편인가?
이 끝을 알 수 없는 세상에서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 걸까?
세상의 이념이 두 갈래로 갈라지고,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을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면.
그 순간을 피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레녹은 두 입장을 모두 들어둘 필요가 있었다.
레녹의 말이 핵심을 찔렀는지, 아주 잠깐 그리샤의 입매가 딱딱하게 변했다.
“나이도 어린 게 맹랑하게 굴기는.”
그녀는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가 말없이 물고 있던 곰방대를 손에 쥐었다.
“주술사는 그런 손익을 계산해가며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지 않거든. 난 그저, 내가 보고 겪은 것들을 마무리 짓기 위해 라피스를 돕는 것뿐이야.”
“보고 겪은 것들이라고?”
“판데모니엄과 얽힌 이들은 누구든지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없어.”
그리샤가 냉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립하고, 반목하거나, 희생당하고……. 끝내는 그들의 일원이 되는 경우도 있지.”
“그건…….”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나는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비슷한 일을 겪은 이들을 찾고 있다.”
“…….”
말하자면 그녀는 청의 눈에 가입할 이들을 선정하는 인사담당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레녹을 보자마자 다짜고짜 시비를 걸어온 것도, 그리고 그걸 라피스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않은 것이 약속된 행동이었던 것도 이 일환이었겠지.
“에반. 청의 눈에 들어와다오.”
“…….”
“흑마법사 크레이그 틸리언이 시도했던 ‘멸목 강령’ 사태 이후로 모든 것이 달라지고 있지. 세상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외해를 떠도는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열리고 지옥이 내려오기 전에 이 모든 반목을 부추기는 이들을 막아야 해.”
그리샤가 말했다.
“너와 비교해도 결코 뒤처지지 않는 실력자들이 하나의 기치 아래 모여들고 있다. 벨라하 가문의 어린 가주와 녹보석의 궁사, 아르벨로아의 사냥개…… 마탑과 연구소들 몇몇도 우리에게 협력을 약속했어.”
“청의 눈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일관된 의지로 힘을 불려 나갈 거고, 재능과 능력을 갖춘 자라면 누구도 거부하지 않을 거다. 너 역시 우리의 일원이 될 수 있어.”
그녀의 강렬한 눈빛. 하지만 그 시선에는 단순한 믿음 이상의 확신이 깃들어 있다.
자신이 행하는 일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없는 그 눈빛은, 여태껏 그녀가 보여주었던 시큰둥하고 나른한 태도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것이라 더 강하게 다가온다.
그제서야 레녹은 어째서 라피스가 그리샤를 이 임무에 동행시켰는지 깨닫고 픽 웃었다.
대륙을 돌아다니면서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고 했었던가.
그녀는 인사담당관으로서, 레녹을 조직에 들어오라고 회유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던 것이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당장 대답을 주기는 어렵군.”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면서 대답했다.
그리샤의 강렬하기 짝이 없는 믿음에는 일순 레녹도 혹했지만, 거기에 넘어갈 생각은 없었다.
“난 어디까지나 내가 직접 보고 느낀 걸로 이 상황을 판단하고 움직일 생각이다. 너희들의 말만 듣고 움직이기는 너무 일러.”
레녹은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었다.
“너희 수장이 그랬듯이, 복마전도 막상 너희와 크게 다를 바 없다면 어떨까?”
“……네가 보고 들은 것들이, 옳을 거라는 확신은 어디에 있지?”
“글쎄? 그런 걸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그리샤의 말에 대답하면서 거센 바람이 몰아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본다.
피부를 따갑게 만드는 강풍이 몰아치지만, 저 아래 자치령 정부 청사의 모습은 여전히 선명하게만 보였다.
레녹이 하려는 일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흔들릴지언정, 그는 단 한 번도 원하는 것을 잊어버린 적이 없었다.
“난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위해서 일하고 있을 뿐이야……. 너희들과 함께했던 거래가, 그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지켜봐야겠지.”
“쳇, 분위기 좀 타보려고 했는데 어지간히 줏대 있는 놈이었잖아.”
레녹의 단호한 대답에 글렀다고 생각했는지, 그리샤가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제기랄, 됐어. 지금 들어오면 진짜 괜찮은 자리 하나 만들어줄 수 있었는데, 어른의 충고를 무시하다니 두고 보라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거 나이를 얼마나 드셨길래 어른을 자처하시는지 모르겠군.”
“몰라. 백을 넘긴 뒤로는 센 적이 없으니까.”
“…….”
레녹은 황당한 표정으로 그리샤를 올려다보았다.
20대에서 30대 사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얼굴도 얼굴이지만, 그만큼 나이를 먹고도 이렇게 아이처럼 투덜거릴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웬만하면 노인들에게는 나름의 존중을 표하는 편이었지만, 그리샤에게는 그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한숨을 푹 내쉰 레녹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됐다. 슬슬 날이 어두워지고 있군. 달이 차오르면 출발하도록 하지.”
라피스의 말로는 유물 부서장과 미리 언질이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멀쩡하게 얼굴을 들이밀고 금고에 들어갔다 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상대적으로 경비가 적은 야간을 노려서 만나 빠르게 금고에서 물건만 가져오는 것이 현명했다.
그때까지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려는 레녹을 보며 그리샤가 궁시렁거렸다.
“세상 참 웃기게 돌아가는군. 너처럼 닳고 닳은 마법사가, 하필 그 아리스 리첼렌의 연구실에 들어가 있다니…….”
“……그러고 보니, 라피스의 입에서도 리첼렌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지. 무언가 알고 있는 사실이라도 있나?”
“호오?”
레녹의 말에 그리샤가 좋은 건수를 잡았다는 듯 히죽 웃었다.
“복마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면 입도 벙긋 안 하던 녀석이…… 왜, 알고 싶은 비밀이라도 있는 거냐?”
“알고 싶은 비밀?”
레녹은 피식 웃었다.
그녀가 어째서 레녹과 같은 마법의 재능을 타고나지 못한 이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싱클레어 마탑으로 돌아가지 않고 대학에 남아 있는지.
그 사정이 궁금하기는 하지만 큰 미련은 없다.
어차피 레녹이 그녀와 같은 자리에 설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샤 역시 레녹의 표정에서 대답을 읽었는지, 헛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뭐, 그리 대단한 사실도 아니니 말해주지. 우리 쪽에서도 그녀를 스카우트하려고 눈여겨본 적이 있었어. 싱클레어 마탑은 굉장히 콧대가 높은 걸로 유명하지만, 복귀를 거부하고 후학양성에 몰두하는 그녀라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 개인적으로 아리스 리첼렌의 재능이 탐나기도 했고.”
“그런데?”
“그래서 이쪽 커넥션을 통해 몇 번 연락을 넣었는데…… 굉장히 의미심장한 대답을 들려주더군. 개인적으로 아주 놀랐어. 그만큼 강단 있는 사람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거든…….”
“…….”
무표정하게 변한 레녹의 얼굴을 본 그리샤가 히죽 웃었다.
“여기서부터는 주시자 에반에게 들려주기 위해 남겨두도록 하지.”
“당신…… 사람을 약 올리는데 아주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군.”
“후후, 농담이다. 사실 그리 중요한 내용은 아니야. 그 교수님이 자기 사람을 얼마나 챙기는지 알았다는 것 정도? 그래서 더 흥미가 갔던 거기도 하고…….”
그리샤는 그렇게 말하면서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레녹을 쳐다보았다.
레녹은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말해두지만, 리첼렌 교수에게 입이라도 벙긋했다가는 복마전 앞으로 지도 한 통이 도착할 줄 알아.”
“이 녀석아, 내가 그런 비겁한 짓거리를 할 것 같냐? 아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기는 한 거야?”
그리샤는 황당하다는 듯 그렇게 대꾸하더니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흐흐……. 진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생각하는 것도 그렇고, 나랑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 같단 말이지.”
“그럼 서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시간을 기다리는 게 낫겠군. 근데 왜 자꾸 말을 붙이는 거지?”
낮은 웃음을 흘린 그리샤가 대꾸했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재밌거든. 너 같은 놈이랑 같이 일해보는 것도 참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나한테 반말을 찍찍 내뱉는 것도 그렇고, 아주 재밌어.”
레녹은 대답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서, 그 역시도 어느 정도 기대감을 가지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레녹 역시 이만 한 실력의 술사와 함께 현장에 나서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최소한 7레벨을 넘긴 주술사.
그것도 스스로의 자성 영역에 심상의 풍경을 각인시킨 완성자다.
그가 알고 지내는 강자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으로 상대했다면 모를까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같이 일을 해본 적은 없었다.
물론 그리샤가 레녹을 따라온 것은 어디까지나 그를 설득하기 위함이고, 이번 일에 한해서는 조용하게 끝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발을 잡지 않는 술사와 함께 일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시간이 지났다.
눈을 감고 있던 레녹은 손목시계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체내시계는 아주 오래전에 완성되어 있었다.
“내려가지.”
“좋아.”
두 술사가 동시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휘이이잉!!
지상에 도착하기 직전 역중력 마법을 걸어 몸을 띄우고, 동시에 닉스의 휘장을 발동시켜서 생명 반응을 가린다.
이제 이 근방에서 두 사람의 기척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겠지.
그리샤 역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력을 잠깐 끌어올려 얼굴에 덧대고는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 청사 주위를 순찰하던 경비병들은 두 사람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인식저해 주술이라도 건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기려던 그 순간.
청사 담벼락, 짙은 그림자가 진 그늘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께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
“잠깐이면 됩니다.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늘에서 걸어 나온 것은, 어두운 밤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짙은 적색의 머리칼을 가진 청년이었다.
주위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느낌의 무복을 차려입은 그는 굉장히 정갈한 분위기를 풍겼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조용하고 차분한 인상.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을 바라보던 청년이 가만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밤손님을 건드릴 생각은 없었으나, 두 분의 기휘를 보아하니 쉽사리 넘길 수는 없더군요.”
청년의 나직한 말소리에 레녹과 그리샤가 말없이 시선을 마주했다.
레녹이 사용한 닉스의 휘장과 그리샤의 인식저해 주술.
더불어 두 사람의 마력과 주력조작능력을 생각한다면 평범한 술사는 그 존재조차 확신하지 못해야 정상일 터.
이 순간에 청년이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는 것이, 역으로 그가 상당히 실력 있는 술사인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레녹은 그리샤와 시선을 마주치고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리샤의 경지를 눈치채지 못한 것을 보면, 레녹이나 그녀보다 강한 마법사일 가능성은 낮다.
그러나 그 태도 자체는 같은 마탑의 마법사인 바이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신중해 보였다.
레녹이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말씀하시죠. 저희가 아는 일이라면 대답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사실 제가 사람 하나를 찾고 있는데, 녀석이 워낙 어리숙하고 망나니 같아 쉽사리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더군요. 부끄럽게도 직접 수소문을 하고 있는 참입니다.”
청년이 천천히 미소를 거두면서 말했다.
“이름은 바이젠이라고 하는데……. 혹시 짐작이 가시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