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270
약먹는 천재마법사 270화
시작은 화려하게(1)
[말씀하신 대로 나머지 네 가문에는 어떤 접촉도 없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그렇군.”
[오히려 육령 쪽은 자신들의 대리인이 모습을 감춘 것에 억울함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절대로 자신들의 의사가 아니라고…….]“뭐, 거기까지는 이해하겠다.”
목소리 역시 바깥에서 이름난 프리랜서들에 대해서는 정보를 주워듣고 있다.
매드 맨슨이라는 프리랜서가 어지간히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유명한 데다 견뢰라 불리는 마법사 반과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다는 사실은 이해하고 있다.
맨슨이 반과 접촉하자마자 자취를 감춘 것 자체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만약 두 사람의 관계가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친분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철저한 상하관계였다면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만약 목소리의 추측이 맞다면, 반이라는 마법사에 대해 한층 더 경계할 필요가 있겠지.
“반이라…… 반, 반…….”
[…….]“까다로운 놈이야. 처음부터 이렇게 될 걸 알고 움직이고 있는 걸까?”
카르텔과 정면으로 대치한 것도 모자라서 사실상의 승리를 거둔 마법사에 대한 정보를 긁어모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사외이사로 취임한 이후에도, 반이 카르텔에게 패배했다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그 마법사의 실력과 위상을 증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
그에 대한 환상, 경외와 두려움이 뒤섞여 무수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목소리가 끌어모은 정보들 중에서 반에 대한 진실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원과 출신, 과거와 내막. 단 하나도 제대로 알려진 사실은 없고, 허무맹랑한 소문만이 가득하다.
공식적으로 확정된 정보는 철저하게 반이 자신을 드러내길 원했던 순간에 대한 것들뿐.
온갖 정보통과 재주꾼이 널려 있는 이 바닥에서 반이 얼마나 교묘하고 철저하게 자신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지, 그 솜씨는 목소리조차도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 시기에 성채에 발을 내디딘 이유가 따로 있지는 않을 텐데, 그 와중에 자신의 목적지를 교묘하게 숨겼어.”
[명분이야 어떻게든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만…….]“억지를 부릴 상대가 따로 있는 법이지.”
목소리가 딱 잘라서 말했다.
“카르텔의 사외이사를 홀대해서 내쫓았다는 소문이 돌았다가는 바깥의 분위기가 어떻게 되겠느냐? 놈도 그걸 잘 알고 있으니까 이렇게 대놓고 성채 안으로 들어온 거야.”
[그건…….]“밑바닥에서 기어 올라온 놈이라 들었는데, 자신의 위치와 권한을 잘 이용할 줄 아는 것 같구나.”
스산하게 변한 음색.
목소리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판은 이미 거의 다 짜여 졌어. 혼자서 물을 흐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 어디까지 교만을 부릴 수 있는지, 내 직접 지켜보지.”
* * *
결정을 내렸으니 오래 망설일 필요는 없었다.
첸의 이복누나에게 티켓을 구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짙은 남색의 머리칼을 묶어 내린 여자는 한참 동안 그 티켓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다.”
그녀의 입에 허탈한 미소가 걸리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욕망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가 가문의 대리인을 정할 수 있는 권한까지 팔아치웠다고 말이지. 설마 이런 방식으로 돌아오게 될 줄이야.”
“…….”
레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일어나 등을 돌렸다.
“먼 걸음을 하게 한 것은 미안하지만 없던 일로 하지.”
“수, 수련 누님……!!”
첸이 놀란 표정으로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이건 사실상 기적이나 마찬가지예요.”
“…….”
“무슨 연유로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는 아예 종이 다른 사람입니다. 틀림없이 이 판을 깨트릴 수 있을 겁니다……!”
“종이라니…….”
레녹의 말을 듣고 들뜬 것은 이해하지만,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그건 좀 심한 올려치기가 아닌가.
낯짝을 뜨겁게 만드는 칭찬에 레녹이 미간을 찌푸리고, 맨슨이 킬킬 웃었다.
“첸,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지만 수련이라 불린 여자는 얼굴을 찌푸리며 첸의 손을 쳐냈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기에 저 남자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저자에 대한 이야기는 나도 들어 알고 있다. 카르텔에서도 한 자리를 차지할 만큼 실력 좋고 수완 있는 마법사가 도대체 뭐가 아쉬워서 우리를 도우려 한단 말이냐?”
수련의 시선이 날카롭게 변했다.
“아버지가 죽은 뒤 가문의 식솔들마저 뿔뿔이 흩어진 지금, 내 손에 남아 있는 것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돌아가신 어머니께 면목이 없구나.”
“…….”
서슬 퍼런 수련의 말에 첸은 섣불리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그녀의 반박이 단순히 자존심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 입장에서 최선의 현실을 선택한 결과이기 때문이겠지.
레녹 역시 그녀의 입장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반에 대해 잘 모르는 그녀가 그를 섣불리 신뢰하기는 어려울뿐더러, 이렇게 도움이 간절한 상황에서 보란 듯이 나타나기에는 타이밍이 너무 좋았으니.
레녹은 잠깐 해야 할 말을 고르고 입을 열었다.
“내 목표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않지.”
“그건……!”
“하지만 대리인의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거야.”
레녹의 나직한 말 한마디에 주위가 차분하게 변했다.
“내 이름을 들어보았다면 내가 밖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대충 알고 있겠지.”
“…….”
“프리랜서의 신뢰를 담보할 수 있는 건 항상 의뢰와 계약뿐이다.”
레녹이 수련을 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서로 원하는 것을 명확하게 한다면, 좀 더 건설적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겠나?”
어디까지나 신뢰의 문제다.
귀도 교단의 흔적을 쫓고 있는 레녹으로서는 오륜가가 교단과 연결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있지만,
반대로 수련은 레녹에게 그런 신뢰를 품기 어려울 테니.
다만 해결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다.
반의 얼굴을 대놓고 드러내며 성채 안으로 들어온 만큼, 그간의 행적을 수련에게 입증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으니.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반은 시공간 계열의 술식이나 아티팩트를 찾아 헤매는 수상할 정도로 유능한 프리랜서일 뿐이다.
서로의 신분을 보증할 수만 있다면, 레녹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누구보다 적합한 대리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
“누님.”
첸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수련의 옷자락을 쥐었다.
“이건 어쩌면 정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
“우리를 죽이거나 배신할 생각이었다면 이렇게 번거로운 방식을 선택하지 않을 사람이에요.”
“내 평판이…….”
그렇게까지 험악한 편인가.
떨떠름하게 중얼거리는 레녹의 옆에서 맨슨의 웃음소리가 조금씩 커져 간다.
약간 이상하게 변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첸이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책임지고 반의 신분과 능력을 보증하겠습니다. 누님께서 원하신다면 각서를 쓰죠.”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줄이야…….”
크게 흔들리는 표정으로 중얼거린 수련이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뭐가?”
레녹이 오륜의 대리인 직위를 받아들인 뒤로, 수련은 작정한 사람처럼 가문의 식솔들을 다시 불러모으기 시작했다.
이미 무너져 버린 가문에 매달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재건을 결심한 조직이라면 능히 사람과 재물이 필요할 터.
고풍스러운 목재 저택의 옥상 전망대에 걸터앉은 레녹은 하나둘씩 저택에 나타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질적으로 저 사람들이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잖아.”
“현실적이군.”
태생이 사업가라 그런지, 확실히 첸이 바라보는 시각과 결론은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르다.
가문으로서 명분과 조직력을 갖추기 위한 식솔들의 집합.
수련이 대리인을 구하자마자 전력을 다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첸은 이미 별다른 의미가 없는 행동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명분의 중요성이나 조직의 위세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철저하게 현 상황에 이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발언.
그리고 그 판단을 굳이 수련에게 말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첸은 훌륭한 사업가의 자질을 지니고 있었다.
레녹은 대꾸하기에 앞서 품 안에서 연초를 한 대 꺼내 내밀었다.
“한대 피겠나?”
“……그러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연초를 받아들자 레녹이 손가락을 튕겨서 불을 붙여주었다.
입에 물지고 숨을 당기지도 않았는데 불이 붙어버리는 기이한 광경에 첸의 얼굴도 이상하게 변했지만, 그는 그래도 얌전히 연초를 물고 연기를 들이마셨다.
“쿨럭!!”
“……담배를 안 피면 굳이 받을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 원래 가끔은 피는 편이다.”
첸이 연달아 기침을 내뱉으면서 대답했다.
“사업을 할 때는 흡연의 유무도 꽤 중요한 편이라, 같이 어울려주는 일도 꽤 있거든.”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니까.”
첸이 복잡한 시선으로 성채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누구다 다 그렇지……. 단지 그 사실을 얼마나 인정하고 순응하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문을 뛰쳐나왔다. 누님은 그러지 않았지. 혹자는 태생의 유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누님 역시 나만큼이나 성채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는 것을……”
레녹은 말없이 첸의 혼잣말을 들어주었다.
그가 수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던 것이다.
“향락에 취한 아버지가 내팽개친 가문 비전의 창술을 혼자서 익혀 그만한 경지에 오르셨지. 이 낡아빠진 가문에 묶여 썩어가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
확실히, 처음 만난 순간 보여주었던 수련의 창술은 잠깐이지만 그 맨슨과 대등하게 보일 정도였다.
구체적인 수준을 파악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정도라면 마력의 성질변화가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을 터.
그 수준까지 독학으로 올라섰다면 첸이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그렇기에 반 네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누님 역시 다른 대답을 내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가?”
“그래.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
첸의 시선이 레녹을 향했다.
“넌 내가 알고 있는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니까.”
“…….”
“단 한 번도 줄타기에서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것이 아니었나?”
첸의 말투는 덤덤했지만, 정작 그 내용은 더없이 신랄했다.
“난 그 마법사가 이번에도 줄에서 떨어지지 않다는 데 걸었을 뿐이야.”
“사람을 잘못 봤군.”
레녹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비틀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넌 마법사가 아니라 광대를 보고 있는 거겠지.”
“…….”
할 말을 잃은 첸을 뒤로 하고 레녹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래도 좋아.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줄을 탈 수 있는지 구경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코트를 고쳐입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부와 명성을 거머쥘수록, 지닌 자리와 위상이 높아져 갈수록.
레녹에게 걸리는 기대와 책임감은 그 무게를 한껏 더해간다.
이 남자라면 실패하지 않겠지, 이 마법사라면 승리하겠지, 이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해결해 주겠지.
아무리 불리한 상황도, 터무니없는 부조리도, 이길 수 없는 역학관계도 극복해 내겠지.
착각이다.
레녹은 자신이 그렇게 위대하고 잘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당장 자신의 미래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매 순간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을 뿐.
그리고 그것을 절절하게 깨닫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기대와 시선이 두렵지 않다.
해야 할 일은 언제나 정해져 있었다.
가슴속에 품은 각오는 단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비틀거리고 헤맬 수는 있어도, 결코 주저앉아 멈추지는 않겠다.
그것만이 레녹이 스스로에게 대답할 수 있는 전부였다.
“자, 잠깐만.”
뒤늦게 그를 쫓아서 내려온 첸이 다급하게 레녹을 불러세웠다.
“그래서 어딜 가려는 거야?”
“채주를 결정하는 대리전도 숫자가 맞아야 해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레녹이 대답했다.
“일원가에 붙은 다섯 가문 중 육령의 대리인은 이미 우리 편이다. 그렇다면 팔둔과 삼영을 포섭하면 균형을 맞출 수 있겠지.”
오륜가의 대리인이 되었다고 일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아무리 레녹이 본신의 힘에 자신이 있다고 해도, 단신으로 다른 일곱가문의 대리인을 상대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고 무모한 짓거리.
다행히 일원은 다섯 가문을 과반수로 포섭한 시점에서 판이 끝났다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레녹이 생각하기에 아직 얼마든지 기회는 남아 있었다.
첸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팔둔과 삼영은 우리랑은 사정이 완전히 달라. 팔둔은 성채 내부에서 민심이 좋지 않고, 삼영은 반대로 그 위세가 너무 위력적이라 포섭을 꺼려 했을 뿐 가문 자체의 힘은 충분한 자들이다.”
“상관없다.”
레녹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의 왼쪽 눈동자가 회전하면서 선명한 자색의 빛을 내뿜었다.
“직접 찾아가 보는 것만으로도 견적이 나올 테니까.”
* * *
팔굉성채의 여덟 가문은 제각기 각 가문의 이름에 숫자를 새기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단순히 알아보기 쉬운 식별번호가 아닌가 싶지만, 이것은 성채를 다스리는 지도층에 가문이 들어온 순서를 나타내기 위한 명칭.
그중에서 가장 늦게 편입된 팔둔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그 상대적으로 낮은 위상조차, 오륜의 처지에 비교도 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었지만.
“으리으리하군.”
두블록 떨어진 거리에서 스코프로 팔둔의 저택을 살피던 레녹이 중얼거렸다.
오륜의 저택과 그 크기는 비슷하지만, 사람의 밀집도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다.
족히 수십 명이 넘는 마력사용자들. 그 전원이 강도 높은 훈련을 거듭한 전사들이며, 이들을 보조하기 위한 술사가 두어 명 정도 있을 뿐.
저택의 최상층에 위치한 노회한 마력 둘과 유달리 강한 생기를 뿜어내는 마력 하나.
아마 팔둔의 가주와 직계혈족,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이 틀림없겠지.
“할 수 있겠어?”
긴장한 기색의 첸과 어슬렁거리며 레녹을 따라온 맨슨이 따분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정 안 되면 대리인의 권한만 가져와도 상관없겠지만…… 그러려면 일단 팔둔의 전력을 깡그리 때려눕혀야 할 텐데.]가문의 대리인은 말 그대로 가문의 의사를 대행하는 존재.
하지만 대리인 간의 결투를 통해서 그 자격을 빼앗아오는 것은 가능하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대리인의 존재가 성채 내부의 정쟁을 좀 더 매끄럽게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이기 때문.
8가문의 직계혈족이 괜히 다툼에 휘말려 죽는 것을 피하고, 대리인을 통해서 이득을 나눠 가지는 공생관계를 구축한 결과다.
레녹이 맨슨과 만난 뒤로 육령에게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이유 역시, 한번 대리인을 정하고 난 뒤에는 한달동안 결정을 번복할 수 없기 때문.
채주 결정전이 보름 뒤에 열린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실상 육령은 좋든 싫은 이쪽의 머릿수를 채워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맨슨이라는 유능한 프리랜서를 내세워 가문의 위세를 높이려던 육령의 패착.
저쪽에서도 설마 반이 맨슨의 목줄을 쥐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겠지.
레녹은 맨슨의 말을 듣자마자 돌담 위쪽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 정도 조건이라면 차고도 남는다.”
위이이이이잉!!!
다섯 손가락 사이로 급격하게 모여드는 마력의 흐름.
뒤늦게 그 저의를 알아차린 첸과 맨슨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자, 잠깐……?”
“맨슨이 내게 붙은 시점에서 일은 시작된거나 마찬가지다. 판을 벌일 거라면 작정하고 크게 손을 대는 게 맞겠지.”
레녹이 대답했다.
동시에 손아귀 안쪽에서 압축된 채 날뛰던 마력의 파동을 그대로 앞으로 튕겨낸다.
충격계열 공용마법
[쇼크버스터]콰아아아앙!!
팔둔의 묵직한 철문 앞에서 터져나간 강렬한 충격파.
평범한 물리력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선공에 순식간에 두터운 강철이 우그러지면서 그대로 문이 뜯겨 나갔다.
우지지지직!!
“대, 대문이!!”
“어떤 개자식이냐!”
난리가 난 팔둔의 앞마당. 뛰쳐나오는 전사들.
그리고 입을 쩍 벌린 첸과 맨슨의 표정까지.
레녹이 씩 웃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인사가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군.”
대리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