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56
약먹는 천재마법사 456화
편람(2)
높이 솟아오른 거대한 제단 위를 휘감듯이 똬리를 틀어, 사방을 관조하는 편람의 자태.
나선을 그리며 꿈틀거리는 제단의 창공 위로 공간이 부서지듯 갈라지며 그 너머로 거대한 암흑의 바다가 엿보인다.
우물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오랜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불려 나온 위대한 승천자.
단순히 같은 시공 아래 존재하는 것만으로 항거할 수 없는 위압감이 온몸을 짓누르고 옭아맬 정도다.
계단 한복판에서 마력사를 조작하던 레녹조차 숨을 죽여야 할 정도로 충격적인 존재감.
가면 너머로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던 레녹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우물을 지키는 뱀이라…….”
그것이 단순히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편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가리키는 말이라고 누가 생각할 수 있을까.
그때 들었던 교주의 말을 단 하나도 가벼이 흘려듣지 않았다 생각했지만…… 그 생각 자체가 착각이었다.
승천자 편람은 인간이 아니라, 지성을 갖춘 거대한 뱀 그 자체였던 것이다.
“미친 새끼…….”
“기어이 승천자를 깨워버린 건가!!”
“저것이…… 밀림의 신이라 불리던 남대륙의 영사(靈蛇)라고……?”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한 채, 이를 악물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는 초인들.
레딩 혁명군, 이능개화전단, 헤드로 군벌. 방금 전까지 레녹을 죽일듯이 달려들던 이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거리를 벌린다.
포식자의 정점으로 승천에 도전하는 초월자.
그 앞에 선 인간의 육신이, 본능적으로 자신이 먹잇감이나 다름없음을 절실하게 호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나 그와 유사한 지성을 지닌 아인종조차 아닌, 순수한 영물 그 자체.
짐승의 몸으로 태어나 스스로를 갈고 닦아서 사명을 계승받고 승천에 준하는 자격을 손에 넣은 것인가.
인간이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 저 거대한 뱀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마 레녹은 직접 들어도 이해할 수 없겠지.
그렇기 때문에 레녹은 편람에 대한 정보가 어째서 그렇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9레벨에 도달했다는 것도 비현실적인 일인데, 아인종도 아닌 마물이 그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이 밀림에서 살아가던 마수들 중 하나가 천문학적인 확률을 뚫고 그 기적을 손에 넣었다는 이야기는, 말로 전해준다 하더라도 쉽게 믿기 어려울 뿐.
지금 이 자리에서 편람을 마주하고, 그 존재감을 인식한 자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거대한 밀림에서 가장 강력하고 위대한 포식자.
먹이사슬의 정점에 오르다 못해, 삶의 기본적인 약육강식의 법칙조차 초월해 버린 승천자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을.
편람은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다, 특유의 날카로운 동공을 천천히 아래로 기울였다.
“기억에 있는 풍경이로다…….”
뱀은 여느 초인들과는 달리 전성을 사용하지 않았다.
단지 파충류의 혓바닥을 꼬아서 내뱉는 거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선명한 인간의 언어를 구사했을 뿐.
레녹은 알지 못했지만 그것은 그녀가 한때나마 인간과 가까이 교감하고 어울리려 노력했다는 증거였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
승천자의 나직한 독백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이들은 겁을 먹었고, 그 말을 이해한 자들은 의문을 품었기에.
레녹 역시 편람의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귀를 기울였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고 있다. 시간선이 어긋난 건가?’
광대의 말에 따르면 이 거대한 고대 유적지와 제단은 승천자 편람에게 공양을 드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소.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 그 흔적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도, 광장의 형태와 목적은 기억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지금 좌중을 찍어누르는 압도적인 초월자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감을 잡지 못하는 것 같았다.
“끝나지 않는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 잠에서 깨어난 것인가……?”
자연스럽게 의문의 방향은, 여전히 그녀의 앞에 서 있던 광대를 향한다.
제단의 끝에서 우물을 개방한 것으로 보이는 장본인, 인간과는 한참 동떨어진 외견.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이질적인 마력.
처음으로 편람에게 인사를 건넨 존재. 다음의 질문이 광대에게 향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
하지만 이어지는 광대의 대답은 모두가 예상했던 것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어디가 꿈이고 현실인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여기가 어디인지. 무슨 일 때문에 편람을 깨웠는지. 어째서 우물을 열었는지.
광대는 어느 것도 편람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타오르는 안광을 줄줄 흘리며 능글거리는 어조로 속삭였을 뿐.
[꿈과 현실의 경계선, 어디에 설 것인지는 당신께서 직접 결정하실 일이 아닌지요.]“나를 호도하려 드는군…….”
거대한 뱀이 천천히 그 머리를 뉘며 눈을 감았다.
아주 오래되어 잊혀진 기억을 건져 올리려는 것처럼.
하지만 그것도 잠시, 편람은 아쉬운 기색으로 눈을 뜨고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말이 틀리지 않다. 많은 것들이 기억나지 않아……. 두 명이 자리를 비웠다는 것만은 알겠구나.”
[…….]“천견과 진둔……. 이 별의 어디에서도 냄새가 느껴지지 않는군. 마침내 우리가 바라고 두려워하던 그 순간이 도래한 것인가?”
두 귀로 듣고도 믿을 수 없는 초월적인 감지능력에 레녹이 내심 쓰게 웃었다.
밀림의 한복판에 앉아서 승천자의 생명반응을 모조리 확인했다는 말인가.
광대는 어딘가 허탈한 편람의 목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수인을 맺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의 순환 속에서 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승천자의 눈앞에서 술식을 영창한다는 실로 대담하기 그지없는 행동.
하지만 편람은 그 모습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가만히 광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꿈이라고?”
[키히힛, 그럼 현실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당신이 아끼고 사랑하던 도시와 문명이 망가져 버려진 이 형편없는 풍경이?]“…….”
침묵에 잠긴 편람의 머리 위로, 지금 이 순간에도 레야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광장 전체를 뒤흔들면서도, 반대로 조용히 가슴속에 스며드는 음색이 편람을 감싸안는다.
마치 지금까지 해왔던 노래는 예열과정에 불과했다는 것처럼, 소리가 줄어들고 그 밀도는 높아진다.
오직 단 한명의 승천자를 위해서만 준비했다는 듯이 울려 퍼지는 조용한 허밍.
마치 피리소리를 닮은 그 오묘한 음색에, 편람이 홀린것처럼 귀를 기울이고.
광대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속삭이며 수인을 완성시킨다.
쩌적……!!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모른척하고 싶어지죠. 악몽에서 빨리 깨어나고 싶은 마음은 저와 같은 미물이라도 다르지 않으니까요.]그 말과 함께 광대의 손끝에서 진녹색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다섯 손가락 사이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불꽃은 광대의 몸보다도 훨씬 큰 크기지만, 편람의 앞에서는 한낱 촛불처럼 아담하고 위태로울 뿐.
하지만 그 불꽃이 피어오른 순간부터 편람의 동공이 조금씩 그 불길을 따라 흔들리기 시작했다.
[편안한 잠에 들고 나면, 거짓말처럼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겠죠…….]“…….”
의도를 이해할 수 없는 광대의 행동.
숨죽인 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다른 초인들이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었다.
“완전히 미쳤군……. 도대체 무슨 생각이지?”
“승천자 앞에서 광대 노릇을 할 모양인가.”
“저러면 조금이라도 목숨을 오래 부지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는건가?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라고는 해도, 저만한 초월자 앞에서까지 장난질을 칠 생각인가.
광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 다른 이들이 혼란속에서 어지러운 욕설을 내뱉었지만.
뒤늦게 광대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은 레녹이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승천자를 속여서 환술을 걸 생각인가…… 제대로 미쳤다는 건 확실하군.”
어딘가 초연하면서도 담담하기 그지없는 광대의 언동. 사태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끊기는 일 없이 울려 퍼지는 레야의 목소리.
그리고 놀랍게도 그 일련의 과정에 흔들리는 듯한 승천자의 반응.
두 사람이 지닌 능력을 생각하면 도출되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광대는 편람에게 환술을 걸어서, 계백이 우물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까지 인식을 속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감히 8레벨의 위계로 승천에 도전하는 초월자를 속이겠다는 오만.
그 발상 자체가 광증에 뻗친 망상이 아니라 누가 감히 단언할 수 있을까.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 시도 자체가 마냥 헛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가만히 광대의 불꽃을 바라보던 뱀의 동공이, 어느 순간 느릿하게 회전하다 천천히 감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슈우우우……!
동시에 광장 일대를 찍어누르던 압도적인 존재감이 조금씩 희미해지고, 또 변질되어 숨통을 트이기 시작한다.
한낱 8위계의 환술사가 완성된 승천자를 상대로 환술을 성공시키고 있다는 기적.
두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결실이지만, 이러한 일이 아무런 이유 없이 일어나고 있을 리는 없다.
레녹은 내심 그 인과관계를 짐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편람의 기억이 온전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군. 저 정도라면 저주에 가까운 망각에 시달리고 있겠지.’
우물을 지키는 뱀이 제 사명을 잊었다는 교주의 말.
주어진 사명에 몰두하다 외려 그것을 잊었다던 혈령족의 이야기.
뱀의 시간이 뒤로 돌아가며 밀림의 모든 것이 의미를 잃었다던 전언.
일련의 정황이 모두 비슷한 정보를 가리키고 있다면 답은 분명했다.
편람이 단순히 건망증에 시달리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오랜 잠에 빠졌다면.
광대와 레야가 그 사실을 인지하고 적극적으로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승천자를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환술에 빠트린다는 망상을 현실로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레야의 노래를 통해서 편람의 정신을 강제로 진정상태로 유지시키고, 편람 스스로가 광대의 환술을 받아들이도록 호도한다.
막 잠에서 깨어나 기억이 불분명한 이 찰나의 순간이 아니라면 결코 시도할 수 없는 무모하기 그지없는 도박을.
광대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공시키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군……. 모든 것이 꿈이었나……”
8위계의 환술사가 온전히 영창해서 피워올린 환영의 불길.
광대의 비틀린 심상을 통채로 압축해서 물질화한 국소규모 권역의 일종이다.
현실을 속이고 비트는 정도를 넘어서, 광대 자신의 기아스로 한계까지 증폭시킨 술식은 원인과 결과를 농락하는 경지에 닿아 있을 정도.
진정한 환술은 상대에게 억지로 뒤집어씌우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환술을 원하고 있다고 받아들일 정도로 정교하게 완성된 모순의 극치.
환술에 대한 인식 자체를 뒤집어, 그것을 상대가 온전히 마음속으로 소망하게 만드는 것.
편람의 거대한 동공이 천천히 감기고, 그 거대한 머리가 제단 사이에 놓이기 시작한다.
“끔찍한 꿈이었어……. 두 번 다시 꾸고 싶지 않구나……. 빨리 깨어나 내 아이들에게로…… 아이들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겠지요.]광대가 부드럽게 속삭였다.
[꿈속에서 편안히 잠을 청하고 나면, 비로소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겁니다.]“그래, 그랬으면 좋겠군…….”
거대한 뱀의 동체가 제단을 휘감고 잠들듯이 가라앉는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정도로 고요해진 적막.
광대가 승천자를 속여 잠에 빠트리려 한다는 그 속셈을, 지금까지 이해하지 못했던 이들조차 억지로 이해시키는 기적.
편람의 머리가 제단의 거대한 고리 사이에 잠들듯이 비틀려 놓이는 듯한 바로 그 순간.
눈을 감은 채로 뱀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이야, 내가 꿈을 꾸지 않은 지 수백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단다.”
[……네?]그 순간, 편람의 꼬리가 그 자리에서 사라지더니 그대로 제단 위에 서 있던 광대의 몸을 후려갈겼다.
콰아아아아앙!!!!
길쭉하게 구부러진 광대의 몸이 음속의 속도를 뛰어넘어 제단 아래쪽 수십미터 저편에 처박혔다.
[카학…….!!]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지르며 바들바들 떠는 광대의 몸을 내려다보며, 편람이 눈을 떴다.
동시에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압력이 사방을 내리누르고, 대기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아쳤다.
쿠오오오오오오오!!!!
“흘러간 시간 속에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사랑했지.”
제단에 기대고 있던 고개를 치켜든 승천자가 중얼거렸다.
“기억의 모래 속에 파묻힌 아이들을. 잡지 못하고 놓쳐 버린 모든 것을.”
“실패했나……!!”
어떤 연유인지는 알 수 없지만, 편람이 광대의 환술을 거부하고 일어섰다.
그 사실을 깨달은 레녹이 곧바로 그 자리에서 벗어나 점멸 술식을 사용해 제단에서 거리를 벌렸다.
편람의 꼬리에 얻어맞고 잔해 사이에 처박힌 광대의 몸을 찾는다.
“이건…….”
길쭉하게 구부러진 악마와도 같은 형상은 그대로지만, 상반신과 하반신이 절단 나기 직전이다.
사실상 살아 있는지도 의심스러운 끔찍하기 그지없는 몰골.
[으게게게겍……!!]레녹이 멈칫거린 사이, 타오르는 안광을 들고 눈을 든 광대가 기괴한 비명을 내질렀다.
우두둑!!
동시에 그 길쭉한 몸뚱아리가 알아서 제 자리를 찾아가듯 접합되며 재생하기 시작한다.
“…….”
환술사가 아니라 괴물덩어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
광대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시간이 아슬아슬했는데, 실패했군요……. 역시 그냥 지원을 기다릴 걸 그랬나요?]“뭐?”
레녹이 재차 되물으려던 순간, 검게 물들던 밀림의 하늘이 완전히 새카맣게 변한다.
그와 동시에 무성한 수풀 저편에서 괴성과 굉음이 빠르게 거리를 좁혀오기 시작했다.
[하아아아아!!!]수만 명이 동시에 비명을 내지르는 듯한 끔찍한 감각.
이미 한번 경험했음에도 인내하기 어려울 정도다. 아니, 오히려 그 존재를 확실하게 실감하고 있기 때문일까.
레녹이 이러할진대 다른 초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계백이다……. 타락한 괴물이 도착했다……!!”
“안 돼, 안 돼……. 벌써……. 이건 아니야…….”
“계획과는 달라, 달라……. 이 소리는…… 나를…… 나를…….”
[부르고 있어어어어어어!!!!]견디지 못한 초인 몇명의 몸이 새카맣게 물드는 것과 동시에, 그 목에 사슬이 채워진 채로 수풀 저편으로 끌려들어간다.
그 직후 땅이 통째로 패여 지반이 꺼지는 듯한 충격이 일고, 거대한 흑색의 구체가 광장의 최외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아아아아아아악!!!]온 몸이 새카맣게 물든 수만명이 한데 뭉쳐서 양팔을 허우적대는 끔찍한 외견.
그 모습 어디에도 지성따위는 보이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원념과 증오를 뒤집어쓴 것처럼 처절한 비명만이 울려 퍼질 뿐.
편람의 우물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정확하게 방향을 잡고 수천미터 거리를 단번에 주파한다.
그 과정에서 밀림의 자연이 두번다시 수복되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고 부서지지만, 그것 역시 사소한 문제일 뿐.
힘겹게 눈을 뜬 거대한 뱀과, 살아 있는 기아스 덩어리가 되어버린 괴물이 서로를 마주본다.
수백 명이 자유롭게 뛰놀 때도 한없이 넓어 보이던 광장이, 두 승천자의 대면으로 순식간에 가득 차 좁아 보인다.
편람과 계백.
이제는 이 별에 열명도 남지 않은, 승천에 도전할 자격을 거머쥐었던 초월자들.
하나는 끝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제 사명을 잊었고, 하나는 저항할 수 없는 운명에 짓눌려 미쳐버렸다.
정점에 다다를 힘과 자격을 거머쥐었음에도 그들은 여전히 볼품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레녹조차 숨을 쉬는 것도 잊고 두 승천자의 대면을 뚫어져라 바라볼 뿐.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많은 이들이 고대하고 기다려왔을까.
얼마나 많은 이들이 몰래 숨죽이고 이 순간을 훔쳐보고 있을까.
외해의 풍경이 엿보이는 거대한 우물을 머리 위에 두고,
육체와 정신이 망가져 버린 두 초월자가 처음으로 서로를 대면하고 마주 섰다.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겠군요…….]광장 잔해 한쪽에 볼품없이 처박힌 광대가 부르르 떨면서 중얼거렸다.
[편람이 잠에 드는 걸 거부했습니다. 승천자들의 전쟁이 일어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