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457
약먹는 천재마법사 457화
편람(3)
계백의 등장과 함께 검게 물든 창공. 그 사이에서 부서지듯 갈라지며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공허.
새카맣게 물든 하늘 아래서 용오름치는 우물의 자태를 머리위에 두고, 수백미터 거체를 자랑하는 두 초월자가 동시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 마주 섰다.
키릭, 키릭……!!
한때는 이 세계에서 그 누구보다도 고결하고 준엄한 자격을 손에 넣었던 자들.
하지만 이제는 그 찰나의 영광조차 빛이 바랜채 흘러간 시간 속에 남아 몸부림치는 괴물들일 뿐.
그러나 고작 그것만으로도 그들에게는 능히 천지를 뒤집을 만한 거력이 남아 있었다.
쿠오오오……!!
두 승천자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여파만으로 일대의 중력이 거꾸로 뒤집혀 회전한다.
박살난 제단과 광장의 잔해물들이 지상을 박차올라 하늘 위에 열린 거대한 우물의 공간 밖으로 솟아올랐다.
일대의 물리법칙이 통째로 반전되어가는 마경의 중심.
얼어붙을 것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침묵 사이로, 편람이 느릿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우물에, 침입하려는 자인가……?”
[하아아아아…….]놀랍게도 편람의 질문에 계백은 더 이상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계백의 몸을 구성하는 인육 구체. 그 사이에 매달린 채 애처로운 비명을 내지르던 수만 명의 사람들이 괴성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올린다.
거대한 구체 사이로 솟아오른 수만 개의 머리통이 일제히 거대한 뱀을 응시하는 소름 끼치는 광경.
끈적거리는 새카만 점액질과 사슬에 묶인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와 광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파드메……키에……사…….]높고 낮은 남녀노소의 온갖 목소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지만 놀랍게도 그 음성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지성이라고는 일체 남아 있어 보이지 않던 괴물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기기묘묘한 전성의 울림.
놀랍게도 그 전성은 눈앞에 서 있는 거대한 뱀을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었다.
[오랜…… 약속…… 위대한…… 증명…… 추잡한…… 메시지…….]“…….”
계백이 본인의 의사를 지니고 말을 내뱉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몸에 매인 수만가지 기아스들 중 하나가 작동하여, 이 순간에 예비되었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뿐.
그것을 깨달은 편람의 날카로운 동공이 한순간 크게 꿈틀거리고.
[하아아아아악!!!!]일말의 의미조차 소실한 타락한 승천자가 그대로 온몸을 앞으로 굴리기 시작했다.
쿠과과과과과!!!!
광장의 돌바닥을 헤집고, 갉아먹으려 수만 갈래 팔을 앞으로 뻗는다.
앞으로 구르는 것이 아니라 그 거체를 그냥 기어가듯 옮겨내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이동.
하지만 그것으로 지상 암반 수백미터 반경이 그대로 깨지듯이 박살 나고 가라앉으며 거대한 운하를 그리고.
그저 눈앞의 거대한 뱀을 물어뜯고 잡아먹을 것처럼 달려든다.
딸깍, 딸깍.
초침이 흔들리는 듯한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광대의 환술이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직후 딸깍거리는 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린 레녹이 중얼거렸다.
“톱니바퀴…….”
“그래. 이제는 기억이 난다…….”
거대한 뱀의 머릿속에서 울려퍼지는 톱니바퀴 소리. 그 속도가 조금씩 빨라지며 간극이 짧아지는 것과 동시에 편람이 두 눈을 크게 뜬다.
“내가 사랑하던 동족들, 총애하던 아이들…….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 밀림의 주인이 누구였는지……!!!”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 아득하던 뱀의 두 눈의 동공이 급격하게 커지다, 순식간에 축소되며 눈 앞의 상대를 향해 초점을 맞춘다.
이제야 비로소 상대가 제대로 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망가진 태염을 되감듯이 순식간에 소실된 기억을 되새김질한 편람이 혀를 날름거리며, 포악하게 입을 쭉 늘렸다.
“아우렐 실포드……. 아직도 아르스노바의 망령 노릇을 하고 있는 게냐!!!”
후우우우우웅!!!
그 순간, 편람의 길쭉한 동체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파동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리 위에서 집약되어 거대한 빛의 기둥으로 변했다.
나선형의 드릴처럼 비스듬히 회전한 그것이 순식간에 하늘로 치솟았다, 이내 계백의 머리 위에서 내리찍힌다.
콰아아아아!!!
승천자의 의지만으로 가볍게 구현된 일격은, 타티아나를 비롯한 마탑의 마법사들이 쏟아붓던 폭격만큼이나 강렬했다.
계백 역시 머리 위에서 내리찍히는 열기에 발광하듯 울부짖으며 편람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아아아아악!!]지금까지 그가 이 밀림을 향해 기어들어왔던 것처럼, 처절하게 땅을 파고들면서 그 몸을 앞으로 굴린다.
사슬에 묶인 수만 명의 검게 물든 괴인들이 아우성치며 양손을 끊임없이 뱀의 비늘을 향해 뻗어내고.
편람은 뱀의 전성을 빌린 포효만으로 웅장한 충격파를 연달아 터트리며 그 존재감을 밖으로 떨쳐 울렸다.
시공의 저편에서 선명하게 배인 두갈래 의지가 격돌하는 그 순간, 시계가 크게 일그러지다 한없이 늘어지는 기분이 든다.
끼이익……!!
마치 녹슨 경첩이 끊임없이 닳아 없어지는 듯한 거슬리는 소음.
한계까지 집약된 힘과 존재감이 일정한 공간 사이에서 극한까지 중첩되며, 공간 내의 모든 시간을 잡아늘리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지……옥……도망…….”
무슨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는지 깨달은 이들이 뒤늦게 발을 빼기 위해 도망치다,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계백의 힘에 휩쓸려 정신을 잃는다.
마력과는 궤가 다른 계백의 존재력. 그 실체가 살아 있는 기아스라 대체 누가 예상하고 대응할 수 있을까.
제대로 대처도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그 몸과 정신을 빼앗기는 이들이 곳곳에서 속출했다.
[끼야아아아악!!!!]차르르르륵!!
온몸이 검게 물든 초인들이 쉴 새 없이 자리가 비어 있는 기아스의 사슬에 묶인 채 그 일부로 계백의 동력이 된다.
거대한 뱀의 비늘 곳곳이 꿈틀거리면서 온 몸이 눈부시게 빛나고, 그 사이로 수천 발이 넘는 레이저가 하늘을 뒤덮는다.
쿠과과과과과과과!!!
존재를 구성하는 수만명의 종속자들을 일일히 태워버릴 것처럼 쏘아대는 빛의 비를 모조리 맞아가며 끝없이 앞으로 전진할 뿐.
두 승천자가 서로를 온전히 자각하고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만으로 광장이 지옥에 가까운 풍경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레녹이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제정신이 아니군……. 한참 전에 미쳐 버린 채로 잠에 든 거야.”
사명을 지키기 위해 너무나 오랫동안 동면해 온 탓에 기억이 거의 모두 소실되어 있다.
그녀가 기억을 되찾는 순간은 우물을 지키는 사명을 수행하게 되는 그 순간뿐.
사명을 계승받을 존재를 찾지 못한 편람은 사실상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세계의 부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울려 퍼진 톱니바퀴 소리는 그런 그녀의 상태를 대변하는 일종의 트리거일 터.
그런 레녹의 발치에서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광대가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키히히힛, 이래서 계백과 조우하기 전에 일을 끝냈어야 했는데…… 쓸모없는 버러지들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군요.]“…….”
광대는 아마 편람이 기억을 되찾는 순간이 언제부터인지 알고 있었겠지.
그렇기 때문에 계백이 도착하기 전에 미리 우물을 열고 뱀을 깨워서 환술을 걸 생각이었겠지만, 편람이 환술을 거부하면서 모든 것이 헝클어지고 말았다.
기이하게 구부러진 등과, 얇고 길쭉하게 변한 팔다리를 휘적거리며 일어선다.
[한 번의 시도로 일을 끝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뭐든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법이니까요.]“시간이 많지 않다.”
이미 완전히 박살 나다 못해, 융해되고 증발하기 시작한 광장의 모습을 돌아보며 레녹이 말했다.
수천 미터 크기의 거대한 고대 유적지 광장 사이로 날뛰는 두 괴물의 충돌.
그 여파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한 광장의 지반이 통채로 녹아 무너지고, 사방으로 튕겨나간 충격파와 열선이 밀림을 헤집고 기울인다.
광장을 둘러싼 거대한 밀림의 풍경이 조금씩 주저앉다 못해 기울어진다.
지평선이 무너지고 하늘이 뒤집혔다. 오래 버틸 수 없다는 것은 누가 보아도 자명한 일이었다.
“한쪽을 선택해서 역량을 집중해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속행할 텐가?”
날뛰는 편람을 막을지, 아니면 계백을 우물에 처박는 일에 집중할지 결정하고 움직여야 한다.
광대는 그런 레녹을 보면서 킬킬 웃었다.
[키히힛…… 물론입니다. 일이 여기까지 온 이상 어떻게든 결론이 나기 마련이죠.]“…….”
레녹이 가면 안쪽으로 표정을 찌푸린 순간, 광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시작과 끝이 정해진 일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과정에 기름칠을 해주는 것뿐이에요.]편람의 꼬리에 얻어맞아 상반신이 절단된 추태를 손짓 한번으로 쓸어넘긴다.
순식간에 온몸을 수복한 광대가 길쭉하게 늘어진 손가락 사이로 주사위를 덜그럭거리며 걷기 시작했다.
[첫 번째 플랜이 실패로 돌아갔다는 걸 알았으니 지원이 올겁니다. 그때까지 버티면서 비행선이 도착하기를 기다리죠.]“지원이라…… 좋아.”
블레이버 마탑, 헤드로 군벌, 레딩 혁명군, 이능개화전단.
네 조직 모두 온갖 견제와 경쟁 속에서 이 험난한 밀림을 돌파해 광장에 도달할 정도로 수준 높은 초인들을 휘하 부대로 데리고 있음에도.
승천자들의 격돌 사이에서는 한낱 미물처럼 힘의 파도에 휩쓸리다 부러지고 무너질 뿐이다.
어지간히 미치지 않고서야 누가 밀림 안으로 들어와 지원을 보내준단 말인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이었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레녹은 시선을 돌리며 마력을 끌어올렸다.
“편람의 발을 묶지. 그쪽이 계백의 움직임을 견제해라.”
[좋습니다아!!]광대의 몸이 그 자리에서 뒤집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레녹도 마력사를 뻗어 무너져내리는 거대한 광장을 향해 다시 날아올랐다.
로브 안쪽에서 삼키는 멀미약을 하나 더 꺼내 가면 안쪽에 밀어넣고, 마력사를 수축해 그대로 충격파의 폭풍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밀림 밖에서 광장 안쪽으로 완전히 발을 들인 계백의 체구만으로 공간이 가득 찬다.
비행기 활주로가 생각날 정도로 광활했던 광장을 거대한 뱀과 계백의 인육구체가 뒤덮고 사방에서 몰아쳤다.
피라미드를 닮은 제단도 이제는 온데간데 없이, 상공에 떠오른 우물만을 두고 두 괴물이 정면에서 육탄전을 벌일 뿐.
그 여파만으로 군위술식에 버금가는 충격파와 폭풍이 사방에서 몰아치며, 인간이 장난감처럼 떠다니다 박살 난다.
콰아아아아앙!!
“으아아아악!!”
“흐아아학!! 아, 안 돼……!! 하아아아……!!”
괴이한 신음을 내지르며 계백과 하나가 되거나, 두 괴물이 쏟아붓는 힘의 투사에 짓밟혀 으스러지는 초인들의 모습.
이미 이 공간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남아 있는 점멸 술식은 13번.’
빠르게 파피루스 아르겐테우스에 기록해둔 점멸의 횟수를 헤아린 레녹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하군.’
승천자들의 격돌 사이에서 제 한몸을 건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횟수.
하지만 너무나 오랫동안 기동력과는 연이 없었던 레녹에게는 이것만으로도 차고도 넘쳤다.
두번의 점멸술식을 사용해 순식간에 편람의 거체에 접근, 마력사를 붙여 꿈틀거리는 비늘덩어리 위에 빠르게 올라탄다.
쿵!!
거대한 뱀의 몸을 뒤덮은 수천갈래 비늘이 숨을 쉬는 것처럼 들썩이며, 그 아래로 강력한 섬광과 주력을 쉴 새 없이 토해낸다.
주술을 통해 의지를 구현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몸을 움직이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의념이 주술을 구현하는 경지.
레녹이 자신의 등 위에 올라탔다는 것을 인지한 편람이 괴성을 내지르며 비늘을 회전시키고, 동시에 사방에서 터져 나온 섬광이 레녹의 몸을 수십 번 넘게 관통했다.
두두두두!!!
비늘 사이를 미끄러지며, 눈꺼풀 위로 그 모든 섬광을 스쳐 보낸다.
삐걱거리며 잘 움직이지 않는 몸의 동선은 마력사로 조정하고, 피할 수 없는 공격은 점멸을 사용해가며 순식간에 뱀의 거체를 역주행한다.
원시주술로 구현된 주력광이 스쳐지나간 자리에 남아있는 것은 허름하기 그지없는 로브조각뿐.
그 사이에서 나풀거리는 마력사 수백 가닥이 격렬하게 회전하면서 편람의 비늘 곳곳을 붙잡고 그 거체를 지반 곳곳에 묶어버리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놓아라!!”
거대한 뱀이 가볍게 몸을 뒤트는 것만으로 전력을 다해 구성한 마력사 덩어리가 끊겨 나가지만, 레녹은 멈추지 않았다.
처음 뻗어낸 마력사는 승천자의 신경을 분산시키기 위한 더미. 진짜는 오히려 다른 곳에 있었으니까.
조작계열 고유마법
마력투사 집중공명
레녹이 조작계 고유마법을 영창하는 것과 동시에, 비늘 사이에 붙은 채로 끊어진 마력사의 말단 부위가 새파랗게 빛나며 발광하기 시작한다.
하염없이 나풀거리던 마력사 수천가닥이 어느순간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 위로 솟구친다.
편람이 그 수작을 내버려 두지 않고 몸을 한 번 더 비틀려던 그 순간.
“……!!!”
거대한 뱀이 움직임을 멈추고 퍼뜩 고개를 들어올려 무너진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비늘에 단단히 묶인 마력사 더미가, 다른 반대쪽 끈을 저 하늘에 열린 거대한 우물의 고리 곳곳에 연결하고 있었던 것이다.
제단의 상공 위에 떠 올라 거대한 고리의 형상으로 변한 우물의 고리에, 직접 마력사를 연결해 붙들어두는 조작계열 고유마법.
마력사 자체를 염상의 형태로 풀어헤치는 의념해례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붙잡는 사견주박 모두 막대한 마력을 잡아먹는 고위마법이지만, 그 결과는 확실했다.
우물을 지켜야 한다는 승천자의 사명에 따라, 자신의 몸부림이 우물을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편람의 움직임이 뚝 멈춰버린 것이다.
“감히……!!!”
레녹을 바라보는 뱀의 눈동자가 선명한 분노로 물들었다.
승천자의 이목을 한눈에 받고 있는 기이하고도 소름 끼치는 상황.
하지만 레녹은 편람의 비늘 위를 미끄러지며 그녀의 원시주술을 피해내면서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오래는 못 버텨.’
예상치 못한 의표를 찔러서 잠깐 시간을 벌었을 뿐.
애초에 편람이 계백을 상대하는데 온 신경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불가능했던 일이다.
조작계통이라는 특질계 술식의 변칙성을 극한까지 이용해서 승천자조차 인지하지 못한 인식의 틈을 찌르는 것은 가능했지만, 언제까지고 저 뱀을 묶어둘 수는 없다.
지금도 우물과 편람의 비늘을 연결해둔 마력사가, 승천자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주력에 증발해 끊어지고 있었다.
“광대, 시간이 없다.”
[여깁니다, 여기!!]온몸이 불타오르는 채로 구부러진 채 변형된 기이한 광대만이, 날뛰는 계백의 사슬을 붙잡은 채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을 뿐.
아니, 붙잡히는 것만으로 인간을 살아 있는 기아스로 만들어버리는 사슬에 이리저리 끌려다니고 있을 뿐인가.
어찌됐든 이 난리통에 광대 혼자만이 처음과 같은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부터 계백을 우물에 처박을 준비를 시작할 겁니다!!]“고막 터지겠군. 잘 들리니까 조용히 지껄여라.”
[편람이 기억을 되찾기 전에 일을 끝내야 해요. 아직 기억이 전부 돌아오지 않아서 무식하게 육탄전을 하고 있을 뿐이지만, 주술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때는 막을 수 없을 겁니다!!]“……육탄전?”
레녹이 그 말을 듣고 멍하니 시선을 들어올렸다.
“저게 아무런 힘도 사용하지 않고 단지 몸으로 때우고 있는 것뿐이라고?”
은하를 비추는 듯한 새카만 우물의 구멍을 머리 위에 두고, 편람이 꼬리를 튕긴다.
그 순간 거대한 뱀의 비늘이 사방으로 바짝 곤두서는 것과 동시에 뱀의 하반신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파앙!!
초음속의 속도로 휘둘러진 꼬리가 무너진 광장 한복판을 양분하며 계백의 몸뚱어리에 정확하게 꽂혀 들어갔다.
그 한 번의 몸짓만으로 계백의 외면을 구성하는 검은 인간 수천 명이 짓뭉개 터져 나가고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하아아아악!!]주인을 잃은 사슬이 하릴없이 흔들리다 뱀의 꼬리를 붙잡으려 달려들지만, 잔뜩 곤두선 비늘이 회전하며 그대로 육신 안쪽을 갈가리 갈아 버린다.
카가가가가각!!!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라, 가히 전쟁병기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체급과 충격량.
그 육중한 몸으로 뿜어내는 일격의 속도가 진작에 음속을 돌파해 인간의 인지능력을 뛰어넘었을 정도다.
거대한 뱀의 육신을 거의 완벽하게 다루는 것처럼 느껴지는 저 장대한 일격이, 아직 본신주술을 기억해내지도 않은 상태라 이 말인가.
광대는 그런 레녹의 의문을 단 한 단어로 축약했다.
[9레벨 승천자 아닙니까.]“…….”
[편람은 계백과는 격이 다른 존재입니다. 승천에 실패해 미쳐버린 계백과는 달리, 완성된 사명을 계승하고 힘을 부여받은 초월자죠.]쉬이이이익!!
거대한 뱀의 동체가 꿈틀거리더니, 신묘하게 몸을 회전시켜 순식간에 계백의 몸을 뒤엉키고 짓누른다.
마치 아나콘다가 먹잇감을 짓눌러 질식시키는 듯한 자연스러운 움직임.
하지만 그 거체에서 뿜어져나오는 압력은 물체가 아니라 공간 자체를 짓눌러 터트려 버릴 수준에 가깝다.
[끼야아아아아악!!]검은 진액처럼 짓눌러 터져나가는 인육의 구체에 질질 끌려다니며 광대가 황급하게 소리쳤다.
[그녀가 온전한 승천자로서의 기억을 되찾으면 사명에 따라 저희 역시 죽은 목숨입니다. 당장 시작할 테니 준비……!!]콰아아앙!!
어디서 터져나온지도 알 수 없는 충격에 휩쓸려 광대의 신형이 그대로 수십 미터 넘게 튕겨져 나간다.
레녹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헛소리하지 말고 준비라는 거 시작하기나 해라. 수틀리면 계획이고 나발이고 바로 발을 뺄 거니까.”
[끄윽…… 거, 걱정하지 마시죠…….]구부정하게 비틀린 몸을 힘겹게 일으켜세운 광대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동시에 이곳저것 부서지고 으스러져 망가진 그의 육체가 순식간에 수복되기 시작했다.
8레벨 극위 수준에 다다른 환술로 자신의 부상조차 속여 넘기는 건가.
그 심상치 않는 술식 구성에 레녹이 희미하게 미간을 찌푸린 사이.
광대가 히죽 웃으면서 레녹의 등 뒤를 가리켰다.
[우릴 도와줄 친구들이 방금 막 도착했으니까요.]차르릉……!
조용한 종소리와 함께, 새하얀 옷을 입은 십수 명의 사람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이 혼란의 한복판에서도 겸허하게 두 손을 모은 채, 고개를 숙이고 행군하듯 앞으로 전진하고 있을 뿐.
어딘가 눈에 익은 사제복과 결코 잊을 수 없는 교단의 문장.
가장 앞에서 그들을 이끌던 젊은 여성이 고개를 휙 들어 올리고, 주위를 돌아보며 고아하게 웃었다.
“어머, 벌써 도착했군요.”
이 혼란 속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태평하기 그지없는 느긋한 목소리.
하지만 레녹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사제복과 그 사이에서 빛나는 귀도 교단의 문장을 확인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한 예상은 틀린 적이 없군…….”
광대가 말했던 새로운 지원이자, 이 밀림에 굳이 기어들어 와서 그들을 도와줄 만큼 미친 광신도들.
귀도 교단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전력을 파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