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534
약먹는 천재마법사 534화
양지의 거인(1)
크로드 아즐란. 스스로를 결백이라 칭하는 남자의 인사.
레녹은 그 이름을 곧바로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휴대폰 너머로 대화를 듣고 있던 제니는 달랐던 모양이다.
[……!!]휴대폰 너머로도 동요를 숨기지 못하고 숨을 삼키는 그녀의 반응.
그것만으로 레녹은 지금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 괴물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 반대로 만난 적이 있는 마력. 음지쪽 사람은 아니다.’
음지에서 오래 활동한 레녹이 처음 보는 상대라면, 틀림없이 양지에서 기거하는 괴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레녹이 상대를 알아본 것은 결백이 자신을 소개한 방식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명하기 그지없는 투기와 마력. 그 고강한 백색의 광채가 기억 속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바이루츠에서 목격했던 백색의 기둥. 이 남자가 그 주인이었나.’
레녹과 이벨린이 벌인 전투와는 달리 위성도시 바이루츠에서 벌어졌던 또 다른 격전.
마이야 렌슬릿과 격돌한 것으로 추정되는 두 번째 외인전력의 존재.
바로 이 남자가 이벨린과 함께 이지스의 작전에 협조해서 힘을 빌려주었던 괴물 중 하나였던 것이다.
8레벨의 극위능력자. 한눈에 보기에도 전위에 특화되어 있는 무인.
그 고강함과 전투능력이 어느 정도일지 제대로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레녹의 시선.
결백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승산을 재고 있군. 내 그럴 줄 알았소.”
“…….”
“오니온을 상대해 봤다면 나를 상대로도 견적을 낼 수 있을 테니. 그래, 직접 보니까 어떻지?”
그렇게 말하는 결백의 새하얀 눈동자가 반짝반짝 빛났다.
“사생결단을 각오하고 싸운다면, 과연 몇 할 정도로 승부를 자신할 수 있겠소?”
“……그걸 내 입으로 듣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당신도 제정신은 아니군.”
레녹이 이내 피식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용건이 그것뿐이라면 대답할 생각은 없어. 가겠다.”
결백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상대와 오래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지금 레녹의 눈앞에 서 있는 남자는 평범한 인간의 상리와는 아득하게 동떨어진 광인이다.
심지어 다른 것에 미친 것도 아니고, 순전히 싸움의 유열과 승부의 쾌락에 잠식당한 괴물.
레녹을 질리게 만들 정도의 압도적인 투기와 그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내뱉는 모든 말과 언동이 일관된 전사.
하물며 그런 상태로 8레벨에 올라 위계를 초월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숨을 쉬며 살아 있기는 하지만, 이미 머리부터 골수 끝까지 투쟁의 희열에 미쳐 버린 존재.
이런 상대와 어울려봤자 얻을 수 있는 이득 따위는 없다. 그 열기에 휩쓸려 화를 입지만 않아도 다행이라 해야겠지.
외려 어떻게 지금까지 금제율령을 지키면서 얌전히 양지에 묶여 있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
도시 한복판에서 이런 괴물을 마주칠 줄은 몰랐지만, 레녹은 당황하지 않고 천천히 등을 돌렸다.
이 정도 괴물이 거리낌 없이 양지를 활보하고 있다면 필시 주변에서 지켜보는 시선도 상당할 터.
그걸 알면서도 굳이 상대의 의사에 어울려줄 이유는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레녹이 곧바로 제니의 술집으로 복귀하기 위해 지팡이를 짚은 그 순간.
크로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한마디를 더 보탰다.
“오니온에게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에 대한 언질을 들었다고 알고 있소.”
“…….”
레녹의 입장에서는 결코 흘려들을 수 없는 한마디.
천천히 시선을 돌린 레녹을 향해 결백이 웃었다.
“그쪽 일과 관련해서 협조를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지. 이야기라도 들어보지 않겠는가?”
* * *
거대도시 16번 구역.
내곽구역들 중에서도 광활한 평지 면적으로 유명한 16구역의 외곽 차선.
고속도로와 풀밭, 주유소만이 간간이 늘어선 공터를 등지고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길게 이어진 담장만이 지평선을 가리고 있다.
길이만 해도 수백 미터는 될 법한 담장의 정중앙에 세워진 장대한 관문의 형상.
고목나무로 조각된 온갖 악귀와 장군들의 형상이 에워싼 살벌하기 그지없는 관문의 위에 내걸린 간판의 모습까지.
문이 활짝 열리고 그 안에서 광대한 장원의 형상이 펼쳐졌다.
끼이익……!!
수백 명이 넘는 초인들이 거대한 장원 외곽에서 구보를 하고, 목각인형을 두들긴다.
서로를 마주한 채 대련에 열중하는 이들과 장원 안쪽 내각에서 무기를 쥔 채 경계를 서는 이들까지.
오직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일에만 매진하는 그 모든 무인들이 결백을 마주한 순간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다.
“아즐란 공, 오랜만의 바깥나들이는 어떠셨습니까?”
“문인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중앙의회에서 직접 연락이 온 듯 하오.”
자연스럽게 결백과 레녹을 수행하듯 따라붙으며 이런저런 말을 건네는 무인들의 모습.
결백은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용건을 꺼내 들었다.
“손님을 모실 장소를 안내하거라.”
“알겠습니다!”
궁궐처럼 세워진 본각을 향해 두 사람을 호위하듯 안내한다.
어떤 용건인지, 무슨 일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도 않았다.
[……반, 조심해야 해.]그런 레녹의 귓가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제니의 목소리.
[투련문의 결백. 금제율령에 묶여 있던 괴물들 중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행보를 이어오던 사람이야.]“…….”
마력의 골전도 현상을 사용해서 직접 목소리를 전달하기 때문에, 결백에게 들릴 일은 없다.
제니는 그것을 이해하고 레녹만이 전달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빠르게 결백에 대한 정보를 전달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다비의 데이터 해킹이나, 레녹의 마력감지만으로는 알 수 없는.
음지에서 아는 이들끼리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오던 비밀스러운 소문과 정보들을.
제니가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각에서는 정신적인 질환으로 인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까지-]“이해해 주시구려.”
“…….”
레녹을 향해 결백이 시선을 돌리고 웃었다.
“한동안 일이 있어서 본문을 떠나 있었더니, 맞이가 무척 부산스럽군.”
“상관없다.”
레녹이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결백이 말하는 일이라는 게 무슨 일이었는지 이미 대충 짐작하고 있는 입장에서, 굳이 그 사실을 캐물을 생각도 없었다.
묘하게 겹쳐 울린 결백의 말에 숨을 멈추고 있던 제니가, 이내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딥웹의 내 계정을 반 네 휴대폰에 잠깐 연동시켜 놓을게. 필요한 정보가 있다면 바로 찾아봐.]필요한 정보라.
제니의 걱정은 이해했지만 레녹은 당장 계정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결백을 따라나선 시점에서 굳이 말을 빙빙 돌릴 이유도 없다. 필요하다면 대화로 직접 캐내면 그만.
그의 언동에서 특기할 만한 부분을 찾아내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보다, 언제까지 그 우스꽝스러운 말투를 유지할 생각이지?”
“……말투 말이오?”
멈칫거린 결백을 보며 레녹이 웃었다.
“억지에 가까운 존중. 숨기지 못하는 호승심이 섞여서 튀어나오고 있잖나.”
“…….”
“사실 그럴 생각도 없으면서, 억지로 누르고 있을 뿐이야. 오히려 이쪽이 거슬릴 정도군.”
레녹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네는 그 태도가, 오히려 지나치게 어색하고 불분명해서 파악하기 쉽다.
아마 결백은 아랫사람에게 꼬박꼬박 존대를 하거나 신경 써서 존중을 해주는 성격은 아니겠지.
명확히 자신보다 어리고 위상이 낮은 레녹을 상대로 존대를 유지하려니 말투가 툭툭 튀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결백이 웃었다.
“본인은 나이나 명예, 지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소이다. 다만 상대의 실력, 업적과 고과에는 무척이나 관심이 많지.”
“…….”
“견뢰의 이름으로 쌓아 올린 위상, 오니온을 단신으로 쓰러뜨린 전공. 모두가 그대가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가리키고 있건만, 함부로 하대해서야 되겠소?”
그렇게 말한 결백이 자신의 입을 쥐고 쭉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며 껄껄댔다.
“못된 습관이 나오는 건 양해해 주시구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어려 보여, 타지에 두고 온 손녀가 겹쳐 보일 정도라 말실수를 했소이다, 하하하핫!!!”
자신의 실수로 너그럽게 덮고 넘어가려는 듯한 호탕한 반응.
하지만 레녹은 그런 결백을 보며 오히려 차갑게 웃을 뿐이었다.
“그렇게 말투를 다듬어가면서까지 스스로를 억제하지 않고서는, 이성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지경이겠지?”
“…….”
결백의 웃음이 뚝 멈췄다.
“위계를 초월한다는 것도 참 골치 아픈 일이야. 그렇지 않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말했다.
“정해진 길을 벗어나 도달한 미답의 영역이, 반드시 꼭 자신에게 이롭기만 한 것은 아니거든.”
일곱 가지 자기개변의 단계를 넘어, 기존의 위계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가지 않은 길을 더듬어 걷기 시작한다는 것은, 안정성을 버리고 승부수를 던졌다는 의미나 마찬가지.
8레벨에 도달한다는 것이 반드시 이롭기만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레녹은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손녀가 생각난다는 시답잖은 이유 따위로 오락가락하는 말투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억지로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의 말투를 고수하려 노력하지 않고서는, 전의를 참기 힘들 만큼 자제력이 거덜 난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정신머리로 금제율령을 고분고분하게 받아들이고 참을 수 있는지 궁금하기는 하군.”
침묵하는 결백의 등을 굽어보며 레녹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정도면 아예 팔다리를 묶고 골방에 처박혀 나오지 않는 편이 좋지 않겠나?”
“……후후.”
낮은 웃음소리. 흔들리는 백색의 도포 아래로 스산한 살기가 훅 배어나왔다.
사방을 옥죄는 살기의 흐름에, 가지런히 정돈된 백색의 머리를 묶은 끈이 끊어지며 산발로 변했다.
딸깍!
풀어헤친 머리칼 사이로 슬쩍 레녹을 돌아본 결백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충동을 억눌러야 했던 시절도 있었지.”
“…….”
“예전의 난 금제율령이라는 구속을 내심 반기고 있었소. 복잡한 정세 따위는 잊어버리고, 나 자신을 깊이 파고 들어갈 기회라 여겼거든.”
머리칼을 쓸어넘긴 결백이 날카로운 조소를 머금으며 자조했다.
“하지만 주체할 수 없이 높게 쌓아 올린 탑이, 통제를 벗어나 무너지기 쉬워졌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던 거요.”
뒷짐을 진 채로 걷고 있던 결백의 그림자가, 이내 새하얗게 탈색되며 은은한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다.
발 아래쪽이 환하게 물드는 듯한 착각과 함께, 결백을 안내하던 무인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즐란 공……!!”
“진정하십시오, 본각에서는 성위급 이상의 마력방출이 금지되어 있지 않습니까……!!”
파아아앗!!
결백의 마력이 주체할 줄 모르고 크게 부풀어 오른다.
다른 이들의 만류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높게 솟아오른 백색의 그림자가 선명한 형상을 취하기 시작했다.
결백의 몸을 둘러싸고도 남을 만큼 거대한 백귀(白鬼)의 형상.
성성한 백발을 온몸에 두르고, 해골에 가까울 만큼 흉악하고 비틀린 얼굴로 두 눈을 번들거리며 이쪽을 노려본다.
비쩍 마른 손에는 백색의 섬광을 창처럼 길게 늘여 잡은 그것은, 결백이라는 초인의 심상을 대변하는 화신체에 가까워 보였다.
“…….”
방금 전까지 어딘가 유쾌함을 가장하고 있던 태도와는 한결 다른 음습한 한기.
심상의 비틀림 끝에 태어나 그림자 속에 기거하는 괴물의 면모.
아마 이것이 결백이라는 괴물의 진면목에 가까운 본질이겠지.
무인으로서의 본질을 누구보다 강력하고 선명하게 추구하다, 그 이미지 말고는 아무것도 상상할 수 없게 된 인외의 괴물.
이벨린을 상대했을 때 희미하게 느꼈던 위화감과 다르지 않다.
8레벨의 극위능력자들은 이미 어느정도 인간의 도리와 성정을 벗어나 있고, 그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사아아악……!!
당장이라도 레녹을 잡아먹을 것처럼 두 눈을 번들거리는 귀신의 시선.
크로드 아즐란이 레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분명해 보인다.
아마 마이야 렌슬릿과 싸울때 역시 비슷한 힘을 사용해서 마력의 체급과 규모를 미친듯이 부풀린 것이겠지.
하지만 레녹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솟아오른 백귀의 형상에도 가만히 지팡이를 매만질 뿐이었다.
“심상의 비틀림에서 태어난 괴물을 화신처럼 부려먹는가. 흥미롭긴 하지만…….”
파아앗!!
레녹의 발밑에서 터져 나온 무채색의 파동이, 그 자리에서 백귀의 형상을 찍어누르기 시작했다.
“이런 자리에서 꺼내 들 물건은 아니군.”
자성영역을 전개하기 직전에 나타나는 징조 자체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의념.
파동에 실려있는 레녹의 심상에 담긴 무게감이 백귀의 형상 자체를 찍어누르고 무마한다.
황금빛의 영성이 터져 나와 백귀의 두 눈을 가감 없이 파고들었다.
후우웅……!!
결백 역시 레녹이 펼친 파동의 힘에 그리 오래 저항하지 않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너무나도 허무하게 사그라든 백귀의 형상.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다른 무인들이 제대로 말도 잇지 못한 채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한낱 마법사가 어찌 아즐란 공의 흉성을!!”
“본문에 들이기에는 지나치게 위험한 재능이 아닐런지……!!”
하지만 결백은 다른 무인들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빙긋 웃었다.
“역시, 할 수 있었군.”
“…….”
“그대가 아니면 안 돼. 이미 결정을 내렸다.”
어딘가 의미를 알 수 없는 혼잣말.
하지만 그 말을 어느정도 이해한 레녹은 굳이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결백은 방금 레녹의 도발에 구태여 반응하면서, 그가 자신의 힘을 정면에서 상쇄가능한 경지에 올랐는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침묵이 이어지는 것은 잠깐이었다.
“뭐, 그래도 요즘은 그만큼 정신수양에 많이 신경을 쓰고 있소이다.”
끊어진 머리끈을 주워들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백발을 가지런히 묶어 정리한 결백이 말했다.
빙긋 웃으며 다시금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가 씩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다른 무인들이 황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딘가 레녹을 본체만체하던 아까와는 달리, 그들의 시선은 여전히 지팡이를 짚은 마법사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강해지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보다는, 때론 잊고 살려고도 노력하오. 급할수록 돌아가라. 지금에 이르러서도 옛말이 틀리지 않음을 몸소 체감하고 있지.”
강해지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아야만 오히려 더 강해지는 경우도 있는 법일까.
레녹은 그런 전사들의 가치관이나 심상의 위태로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그런 모순이 인간의 내면을 구성하는 본질의 일부라는 것은 어느정도 공감하고 있었다.
“그리 유쾌한 이야기가 될 것 같지는 않으니, 이만 여기까지 할까?”
결백은 그렇게 말하며 거침없이 본각 장원 한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하등 쓸모없는 내 이야기는 접어두고, 슬슬 그대를 불러온 용건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을 것 같군.”
고급 양탄자로 도배된 고풍스러운 전각에 올라 거하게 차려진 술상 앞에 앉는다.
두 사람이 장원 사이를 내리 걸으며 대화를 나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손님을 위해 이렇게 화려한 술상을 차린 것일까.
뜨근한 김을 내뿜는 술잔을 들어 올린 결백이 그것을 레녹의 앞에 쭉 밀어내며 물었다.
“일단 한잔하고 시작하는 게 어떻겠소?”
* * *
“투련문이 이 도시에 자리잡은 지 5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소이다.”
거침없이 술잔을 쭉 들이킨 뒤 손가락을 까닥이는 것만으로 술병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솟아오른다.
잔을 쥔 채 눈짓하는 것만으로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술을 따르듯 굽이쳐 잔에 담겼다.
“프로젝트가 실패하고, 의회가 물갈이가 되고, 내전이 일어나 음지가 뒤집히고, 카이세의 손녀가 브로커가 될 때까지 우리는 이 자리에 있었지.”
“…….”
들은 걸까, 듣지 못한 걸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겠소?”
묘하기 그지없는 결백의 얼굴. 반응을 떠보고 싶다는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레녹은 그런 결백의 질문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고여서 썩은 물이라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나?”
“하하하핫!!”
레녹의 말에 웃음을 터트린 결백이 술잔을 들어 쭉 들이켰다.
“그만큼 이 도시의 암중에서 일어나는 일에, 다양한 방식으로 손을 거들어왔다는 말이지.”
“…….”
“금제율령에 묶인 뒤로 손을 놓고 있던 건 아니오. 오히려 모든 일을 관심 있게 지켜보려 노력했지.”
워낙 새하얀 복색에 피부라 그런지, 조금만 술에 취해도 얼굴이 금방 붉어진 것처럼 보인다.
술 몇 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살짝 붉어진 얼굴로 결백이 술병을 들었다.
“이를테면 그대가 직접 참가했던 방위군의 반역과 같은 사건처럼 말이오.”
“…….”
“에드머스 트레펜 중장. 이동요새 사령관의 배신에 대해 기억하고 있겠지?”
그제서야 결백이 본론을 꺼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레녹이, 잡고 있던 술잔을 말없이 내려놓았다.
결백은 그런 레녹의 몸짓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말했다.
“당시 트레펜 중장은 미개발지구에 버려진 군사시설들을 이용해서 의회와 거래하려 했고, 실제로 효과가 있었소.”
“그런데?”
“에이전트의 부국장, 팔라드 오콘이 그대와 같은 인재들을 모집해 이동요새를 막아내지 않았다면 의회는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을 테지.”
결백이 술잔을 기울이며 말을 이었다.
“금제율령의 허점이 발견되었음이 분명했기에 우리 역시 기존의 특혜를 그대로 유지한 채 손발이 풀려날 수 있었소. 그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보지 않은 조직이나 세력은 없다시피 하겠지.”
“…….”
“문제는 그 과정에서 팔라드 부국장이 몇몇 프리랜서들과 함께 폐쇄구역 일부를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이오.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군.”
“……폐쇄구역이라고?”
레녹은 결백이 어떤 사건을 언급하는지를 곧바로 기억해 냈다.
이동요새를 상대하기 위해 미개발지구로 향하기 전, 폐쇄구역으로 지정된 6번 구역에 잠입해 기밀문서들을 뒤져보지 않았던가.
그 과정에서 얻어낸 데이터를 이용해 이동요새의 진격 루트를 파악하고 전면전을 벌였던 작전.
크로드는 바로 6번 구역에 침입했던 당시의 일을 거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소. 사실상 이걸 확인하지 않는다면 대화가 진행되지 않겠지.”
술잔을 내려놓은 결백이 웃었다.
“우리는 지금부터 블랙컨슈머 프로젝트의 폐해를 수습하기 위해, 또 다른 폐쇄구역으로 들어가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