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ochrome Sovereign RAW novel - Chapter (1167)
1167화. 이중 간계(二重奸計) (7)
파아아아앙!
지소현은 기겁했다.
‘빠르다!’
느닷없이 자신을 둘러메고 달리는 사내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스승에게 듣기로 초절정고수와 무극수의 속도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고 하였다. 물론 초절정고수 중에서도 유독 신법의 경지가 뛰어나거나 무극을 코앞에 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었다.
‘나도 느리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무종을 넘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신법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 자부심, 자신감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속도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해.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들은 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물며 전쟁 중이야. 누구에게도 걸리지 않고 납치하기 위해서는 조직의 최고수 중 하나를 파견할 수밖에 없었을 거야.’
와중에 유독 신법에 조예가 깊은 자가 적임일 것이다. 이 사내의 속도가 놀랍도록 빠른 것은 당연했다.
‘그건 그렇고…….’
지소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뭐였지? 그 살기는?’
내공이 봉쇄당해 기감도 약해졌다. 하지만 오감은 멀쩡했다.
그녀의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조금 전, 저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왔던 폭발적인 살기는 초절정고수의 힘으로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하다는 걸.
‘무극수?!’
무극수의 살기다. 지소현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살기가 터지자마자 자신을 납치한 자가 달리고 있다.
‘누군가가 나를 구하러 왔구나!’
종남의 암어를 새겨 둔 것이 효과를 발휘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종남파에는 무극수가 없을 텐데? 설마 지원을 요청한 걸까?’
지소현은 두근거리는 마음을 애써 차분하게 내리눌렀다.
‘침착하자. 나는 도주할 수 없는 상태야. 누군지 모를 무극수가 나를 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세한 외기(外氣)만큼은 어떻게든 다룰 수 있다는 것.
만약 그 작은 한 방으로 납치범에게 빈틈을 만들 수 있다면, 그로 인해 도주의 기회가 생긴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하지만…… 대체 누굴까?’
억누를 수 없는 호기심.
잠시 후, 그녀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파라라라락!
납치범의 어깨에 매달린 지소현은 어느새 자신이 어두운 숲으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상대가 무극수라면 교란시킬 수 없을 텐데? 왜 굳이 숲길로?’
그때였다.
납치범의 소매 안에서 둥그런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지소현의 눈이 흔들렸다.
‘화탄?’
퍼엉!
화탄이 아니라 독탄이다.
폭발한 즉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기묘한 연기가 지소현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냄새도 맡지 않았지만, 보는 순간 극독 중의 극독임을 알 수 있었다.
‘아뿔싸! 화탄도 아니고 독이라니!’
차라리 화탄이라면 무극수의 괴물 같은 내공력으로 충격을 억누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은 달랐다. 무극수 정도 되면 어지간한 맹독도 쉽게 해독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독을 다 해독할 수는 없다고 들었다.
‘제길.’
지소현이 고운 입술을 꾹 깨물 때였다.
“재미있군.”
거리가 꽤 떨어졌는지 아직도 추격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지소현의 귀에도 생생하게 들렸다.
“황풍독탄(荒風毒彈)이라…… 금사철포로 쏘지 않고 벽력탄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나? 개량을 많이 했군.”
지소현의 눈이 커졌다.
꽤 익숙한 목소리였다. 동시에 상당히 낯설었다. 아주 오래전에 들어 본 목소리임이 분명했다.
콰아앙!
폭음이 터지며 시뻘건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나무들을 박살 내는 붉은 화기가 범람하는 강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지소현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틀었다. 거리가 그렇게 떨어졌는데도 얼굴 전체가 뜨거웠다.
‘열양공?!’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열양공을 쓸 수 있는 자가 중원에 있었던가?
‘엄청나구나! 대체 누구지?!’
그때였다.
촤르르르륵!
쇠 비늘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반원을 그렸다.
콰콰콰콰쾅!!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분쇄하는 시커먼 도끼.
밤의 어둠보다도 더 어두운 빛깔을 띠는 거대한 도끼는 마치 몸뚱이가 기형적으로 커진 박쥐를 보는 것 같았다. 날개를 활짝 편 박쥐가 좌우로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거목들을 깨부수고 있었다.
지소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부(大斧)?!’
이 무림에, 무극수 중에 저처럼 커다란 도끼를 쓰는 사람이 있었던가?
순간 그녀는 기억에 묻혔던 과거의 대화를 떠올렸다.
‘왜 자꾸 밥을 먹으라는 거죠?’
‘배고플 테니까.’
‘남을 생각해 준다는 사람이 타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 사람의 제자를 납치하나요?’
‘그러게나 말이오. 나도 이 상황이 참으로 개탄스럽소.’
지소현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연호정!’
벽산호장, 아니 근래에는 흑백무제라는 별호와 흑제성주라는 명칭으로 더 유명한 사람.
과거 스승을 끌어내기 위해 자신을 납치했던 사람이며, 수천 년 무림사를 통틀어 최고의 재능을 타고났다는 희대의 풍운아다. 세간에서는 천도(天道)의 도도한 흐름에서 벗어나 버린 불가해한 재능의 소유자라며, 차기 고금제일인으로 확정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소리까지 나왔다.
그 연호정이 자신을 찾으러 온 것이다.
“지 소저는 듣고 있소?”
크게 소리치지 않는데도 그 묵직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지소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왠지 모를 반가움에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지만, 섣불리 입을 열었다간 납치범이 위해를 가할 수도 있었다.
“기척에서 느껴지는 생기가 상당해. 기절한 것 같진 않군. 조금만 기다리시오. 구해 줄 테니까.”
지소현은 말하고 싶었다. 당신 때문에 내 운명이 납치 범죄로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며 농담이라도 건네고 싶었다.
‘제길, 엄청 반가워요!’
그때였다.
파바바박!
지소현의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납치범이 좌우로 역동적인 움직임을 발하며 나무 밑동들을 작살내고 있었다.
콰드드득! 쿠구궁!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다 부수고 전진하는 고수라도, 기울어지는 나무들 속에서 시야가 제한되면 자연스레 무공 구현도 느려지고, 뚫고 나오는 속도도 느려진다.
그런 것 상관없이 전방을 다 부수고 올 수도 없다. 납치범이 피해자를 업고 있기 때문이다.
상당히 지능적인 술수였다. 납치 경험은 처음이라도 추격을 뿌리치고 도주한 경험, 도주하는 자를 추격했던 경험은 꽤 많은 듯했다.
하지만 그 많은 경험도 연호정 앞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번쩍!
한 줄기 화기가 대붕의 날개와도 같은 형상을 취한 순간.
퍼어어어어엉!!
기울어지는 나무들 정중앙을 벼락처럼 뚫고 나타나니, 마치 폭발하는 궁전에서 솟구친 불기둥을 보는 듯하다.
지소현의 얼굴이 환해졌다.
황룡기를 있는 대로 쏟아부어 펼친 혈익휘천, 마침내 연호정의 모습이 그녀에게도 보이기 시작했다.
“여어.”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말투.
문득 지소현은 연호정의 안색이 무척 창백하다는 걸 깨달았지만, 벅찬 기분 때문에 그마저도 살짝 잊었다.
“당신 구하려고 음제 선배도 함께 왔소. 조금만 기다리시오.”
지소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말에도 대답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스, 스승님께서요?!”
“그렇소.”
그 순간, 달리는 납치범의 기도가 살짝 흐트러진 것을 연호정은 놓치지 않았다.
‘역시!’
사음교가 확실하다.
나아가 저 복장, 저 신법은 지극히 눈에 익었다. 영귀수들의 복장이 확실했으며, 신법 역시 사음교의 그것이었다.
지소현이 외쳤다.
“어떻게 스승님께서……!”
번쩍!
“아악!”
엄청난 속도로 쏘아진 백색의 지풍에 지소현은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연호정이 날린 백호공의 지풍이었다. 그 지풍은 그대로 납치범의 어깨 위를 스치고 지나가 저 앞의 바위 하나에 구멍을 뚫었다.
조금이라도 몸이 흔들렸다면 지소현의 몸이 뚫렸을 터.
지소현은 깨달았다. 이번 지풍이 자신을 노리고 쏘아진 것임을.
그리고 그것을 피한 것은 전적으로 납치범의 실력 덕분이었다.
‘왜?!’
의문에 대한 답은 곧장 튀어나왔다.
“놈들은 음제 선배를 이용했고 당신도 납치했소. 필시 당신들 사제지간은 사음교에 꼭 필요한 인재들인 듯하오.”
사아아악.
연호정의 몸에서 뿜어지는 살기는 질풍처럼 빠르고 폭풍처럼 거세었다.
“놈의 신법이 너무 빠르오. 이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을지도 모르고.”
“……!”
“음제 선배께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구할 수 없으면 차라리 죽이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오. 당신도 이해하리라 믿소.”
지소현은 연호정의 냉정한 말에 온몸이 굳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긴장은 납치범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이해 못 해요!”
지소현이 버럭 외쳤다.
“스승님께서 오셨다면서요! 스승님 얼굴도 못 뵌 채로 이렇게……!”
“어차피 놈들에게 끌려가면 앞으로도 선배를 볼 수 없을 거요.”
“……!”
“중원을 위해서, 그리고 당신 스승을 위해서라도 끌려가는 것보다는 이 자리에서 죽는 게 나을 것이오.”
연호정의 눈이 착 가라앉았다.
“더는 못 기다리겠군. 시간을 너무 지체했소.”
촤르르륵!
교룡쇄가 쫙 늘어났다.
“미안하오.”
“안 돼!”
그 순간, 연호정이 광룡부를 일직선으로 날렸다.
동시에 납치범과 지소현의 신형이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콰르르릉!
납치범이 솟구친 자리를 광룡부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 순간, 납치범은 깨달았다.
‘떨칠 수 없다.’
추격에 잡히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인질의 목숨을 지킬 자신은 없다.
저 작자가 작정하고 도끼를 날리거나 지풍을 쏘아 대기 시작하면 지소현이 위험하다. 단 한 방이라도 맞지 않게 할 자신이 없었다.
결국, 이곳에서 끝을 봐야 하는 것이다.
콰쾅!
광룡부를 회수함과 동시에 납치범의 뒤를 따라 날아오른 연호정의 신법 속도는 눈이 부셨다.
세 사람은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졌다.
먼저 땅에 발을 디딘 납치범이 몸을 돌려 일장(一掌)을 내쳤다.
연호정의 눈이 번뜩였다.
콰르르릉!
눈앞의 모든 것을 날려 버리는 강력한 장법. 하지만 연호정은 그 장력에 순응하며, 낙엽처럼 회전하여 안전하게 땅에 내려섰다.
청룡공, 청룡답운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펼치는 사신무였지만, 오히려 황룡에 오르기 전보다도 더 능숙해진 듯했다.
치리리링!
쇠사슬 부딪치는 소리가 유독 험하게 들린다.
연호정과 납치범, 두 사람이 서로를 노려보았다.
“도주는 포기했나?”
“……어쩔 수 없군.”
납치범의 어깨에 매달려 있던 지소현이 두둥실 떠오르더니, 뒤쪽 바위 위에 올려졌다.
지소현은 아무 저항도 하지 않은 채 차가운 눈으로 납치범을 노려보았다.
돌아보지 않았음에도 납치범은 깨달았다. 지소현의 그 말, 그 반응이 진짜가 아니었다는 걸.
그럴 필요가 있다면 서슴없이 목숨을 끊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그는 깨달았다.
‘이곳까지 오면서 용케도 참았군.’
만약 대륙을 벗어났다면 그때는 진짜로 목숨을 끊었으리라.
“별수 없지. 네놈을 죽인 연후에 다시 산으로 향하는 수밖에.”
“좋은 판단이지만 자신감이 과해.”
말을 하면서도 연호정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놈 뭐지?’
목소리가 왠지 익숙했다.
연호정이 광룡부를 까딱였다.
“너, 이름이 뭐냐?”
“알 것 없다.”
“영귀수의 일원이라기에는 너무 강한데?”
그 순간 납치범의 안광이 불을 뿜었다.
“영귀수를 알고 있느냐?”
착 가라앉는 목소리.
“……그래, 어차피 살려 둬선 안 될 놈이었군.”
스르릉.
연호정의 눈이 커졌다.
사내의 주먹 위에서 짐승의 발톱 같은 세 줄기 칼날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천귀마(飛天鬼魔) 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