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e become my concept character RAW novel - Chapter 416
414화 이곳에 있노라고 (9)
“악마기사? 어디서 많이 들어 봤는데…….”
“그, 키가 이만하고 머리색이 좌우 다른 양반이야. 분명 이 도시에 있을 거랬는데. 혹시 본 적 없어?”
슬랜드족 사내는 자신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키를 대충이나마 가늠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은 보통 사람과 구별되기 좋은, 그 사람의 가장 도드라지는 특징이다.
“머리색이 좌우 다르다? 그거 좀 신기─ 어.”
“좌우 다른 놈이면… 아까 걔 아냐?”
또한 크러셔와 호크아이 두 사람은 그러한 용모의 인물을 우연찮게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는 마주친 적 있다고 해야겠지만.
“오! 본 적 있어?”
“그래. 아까 신전에서 한 번, 거리에서 한 번 봤는데.”
“그럼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아?”
그들이 그렇게 대답하자, 사내가 흥분한 얼굴로 탁자를 짚으며 일어섰다. 들이댄 얼굴이 조금 부담스럽다가도, 그만큼 열심히 찾아다녔다는 열기가 느껴져서 그럭저럭 봐 줄 만했다.
“미안하지만, 위치까진 몰라. 그냥 오며 가며 얼굴 본 게 다야. 워낙 눈에 띄는 인상이잖아?”
“눈에 띄는 인상만큼 성격도 좋아 보였고 말이죠.”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 존재와의 연이 썩 깊지 못했다. 알려 주고 싶어도 알려 줄 만한 정보가 없단 소리다.
크러셔의 양손이 허공으로 올라오고 호크아이가 탁자에 쭈우욱 엎어졌다. 아쉬움이 여즉 묻어나는 모양새였다.
“아, 역시 그렇나. 그래도 여기 있다는 건 확실하단 거니까… 고마워! 이 술은 내가 사지. 아, 이건 순전히 정보에 대한 감사 표시니까 이상한 오해는 말아 달라고.”
“걱정 마. 네게 그런 의도가 없어 보인다는 건 이미 알고 있으니까.”
이걸로 술값은 덜었군. 크러셔가 그리 생각하며 맥주를 들이켜려던 차, 길쭉한 몸으로 테이블을 덮고 있던 호크아이가 팔짱을 끼듯 팔을 모아 얼굴을 베었다.
“근데 그 사람은 왜 찾는 거예요?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거면… 혹시 연인 사이?”
“응? 하하, 그럴 리가 있나. 그 양반은 연애 같은 거 할 성격 아니야.”
“엥, 그래요? 딱히 그래 보이진 않던데…….”
“얼굴만 본 우리가 알겠냐, 아는 사이가 더 잘 알겠냐? 로맨스 타령 좀 그만해.”
“그치만 재밌잖아.”
“하나도 재미없어!”
크러셔는 호크아이의 말에 소리를 한번 버럭 질러 준 후, 맥주를 마저 마셨다. 순식간에 커다란 잔이 비워졌다.
“그래서, 찾는 진짜 이유는?”
“별거 아닌데… 그냥 요즘 고생이 심하다는 소문을 들어서, 도와줄까 하고 찾아온 거야.”
“오…….”
북쪽에선 상상도 못 할 사고방식이군. 크러셔는 이게 바로 남쪽의 인간상인가 감탄하며 손을 들었다.
“야, 맥주 하나 더!”
“알아서 갖다 먹어.”
“하, 초심은 어디다 버린 거야? 서비스 정신 다 말아먹었네.”
“꼬우면 다른 데 가든가.”
단골이라고 대충 대우하는 것 봐라. 이러다 망하지.
크러셔는 혀를 차며 맥주를 알아서 따라 왔다. 특별히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찬 공기에 저절로 서늘해지는 맥주는 추워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보다, 괜찮으면 묵기 괜찮은 여관에 대해 좀 알려 주지 않을래?”
“아직 숙소를 못 구했나 보지?”
“그것도 있고, 그 양반도 최소한 여관에 머물긴 할 거 아니야? 거기서부터 찾아보려고.”
“흐음. 수준은?”
“돈이 적은 편은 아니니까, 싼 여관은 아마 안 쓸 거야. 최소한 독방을 보장해 주는… 아, 그리고 목욕탕이 구비돼 있어야 해. 여럿이서 쓰는 게 아닌, 개인 목욕탕이.”
“덩치 큰 놈이 깔끔깨나 떠나 본데.”
“왜, 깔끔 좀 떨 수 있지.”
크러셔는 호크아이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가, 끝내 동의했다. ‘깔끔 떠는 덩치 큰 놈’에는 호크아이도 포함되는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런 조건이란 말이지. 우리도 아는 여관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그런 조건이면 그래도 금방 찾긴 하겠네. 이 바닥에서 청결 신경 쓰는 놈은 별로 없거든.”
신경 쓰고 싶어도, 장작이 비싸다 보니 어지간하면 씻지 않고 버티는 편이다. 자연히 목욕탕, 그것도 개인목욕탕은 전멸하다시피 했고. 몇 번 발품 팔다 보면 바로 견적이 나올 것이다.
“아, 그래. 아까 그 사람, 사제랑 같이 있었잖아. 신전에 가지는 않았을까?”
“…사제랑 같이 있었다고? 진짜?”
“음?”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양 반문하는 상대의 모습에 크러셔는 눈을 깜빡였다.
“이단심문관이랑 같이 있던데.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니야.”
“……?”
“아무튼 신전도 가능성이 있긴 하겠네. 알려 줘서 고마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본인이 말할 생각이 없다면 됐다. 크러셔는 관심을 바로 끄며 자신이 아는 여관들을 떠올렸다.
“일단 우리가 머무는 여관도 네가 찾는 기준엔 부합해. 다만 우리는 머물면서 그런 사람이 손님으로 오는 걸 본 적이 딱히 없어.”
장기 투숙객이다 보니 어지간한 손님은 오며 가며 마주치게 되는 편이다. 함에도 그 인상적인 용모와 기척을 지금껏 목격하지 못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겠는가.
그가 오늘 숙박을 결정했거나, 다른 곳에 머무르고 있다는 뜻이리라.
“오케이, 오케이.”
“또 다른 여관이라면…….”
그들은 그렇게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후, 저녁 요리까지 해치운 후에야 일어섰다. 그들은 여관으로 돌아가기 위함이었고 슬랜드족 사내는 찾는 대상이 혹시라도 그곳에 머무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아, 가는 길에 신전이 있는데, 이왕 경로가 겹친 거 확인하고 가는 건 어때요?”
“오, 그럼 나야 편하지만. 댁들은 괜찮겠어?”
“이 정도야 뭐. 크러셔도 괜찮지?”
“뭐어, 밥값을 내 줬으니까.”
하여간 오지랖 넓은 놈. 크러셔는 북부에서 어쩌다 저런 놈이 나왔을까 하며 호크아이의 뒤를 따랐다.
“아, 그래. 같이 다녔다는 이단심문관의 외형 혹시 기억해?”
“기억하고말고. 이단처형자로 명성 높은 놈이 뒤에 떡하니 있었는데, 그걸 모를 리가.”
“…처형자?”
“메이스로 골을 깨 버린 악마숭배자의 숫자가 백을 넘기는 이단심문관이야. 소속이 다르다 보니 엮인 적은 딱히 없지만, 도시 내에선 제법 유명하지. 평상시엔 온순하다가, 이단사냥에만 들어가면 미친놈이 된다고.”
뭐, 그쪽 분야로 정말 이름 높은 놈은 따로 있지만. 크러셔의 시선이 호크아이를 일별했다.
“…그, 그 양반이 그런 인간이랑 같이 있었다고? 분, 분위기는?”
“괜찮던데?”
“화기애애하게 떠드는 게 꼭 친구 사이 같았죠.”
“…그럴 리가 없는데.”
그 인간이 신관과 친해졌다고? 진짜로? 아니, 애초에 신관이고 자시고 타인이랑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할 양반 자체가 아니었잖아.
슬랜드족이 당황한 얼굴로 꿍얼꿍얼 말을 읊조렸다. 그렇게 무심하거나 매정한, 혹은 까칠한 타입으론 보이지 않았건만, 무슨 오해라도 있나 싶었다.
“암튼 고마워. 나, 참. 시간이 흐른다고 성정이 무뎌질 위인은 아니라고 여겼는데… 결국 암초도 세월이 지나면 깎인단 거겠지.”
“암초라… 예전엔 한 성격 했나 보지?”
“뭐, 그랬지. 아주 폭군이 따로 없었어.”
“그런 폭군을 댁은 도우러 온 거고?”
“은인이니까.”
크러셔의 말에 상대는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내 생명뿐 아니라 내 가족, 내 고향을 구한 은인.”
그 순간 내비쳐진 감정에는 흔들림 없기로 유명한 북부인의 심금마저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감수성이 퍽 뛰어난 호크아이가 입을 막고 크러셔는 눈을 공연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니까 이번엔 내가 도우러 가야지. 당신들 말이 맞다면… 이미 어떻게 해결된 것 같긴 해도.”
“…뭐, 남부인이 은원에 치열하다는 건 알겠네.”
“뭐야, 여긴 은혜를 싹 다 잊는 놈밖에 없어?”
“그럴 리가 있나. 그렇지만 보통 은혜를 갚는다고 해도 이렇게까진 안 하지. 계산적으로 대가를 치르려 하는 일은 많아도.”
“으엑. 완전 매정하잖아. 낭만도 없어!”
“낭만은 무슨 얼어 죽을 낭만.”
“왜, 난 너무 좋아 보이는데. 남부는 정말 멋진 곳이구나!”
“넌… 하, 됐다.”
전장에서, 그것도 북부 전선에서 살 수밖에 없는 놈이 매번 남부 타령 하기는.
크러셔는 막 장사를 접으려는 상인에게서 꼬치구이를 강탈하듯 구매한 후 그대로 입에 집어넣었다. 무슨 고기로 만들었을지는 판매자 외 그 누구도 모를 테지만, 그런 건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전장에서 살 수밖에 없는 몸이 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끝나면 뭘 먹고 살아야 하나.”
“크러셔?”
“이런 생각이 드는 것도 정말 끝이 보이는 거니까 가능한 거겠지.”
“뭐야, 마왕을 잡을 방도가 생긴 거야?”
“못 들었… 아, 후방에서 왔댔지.”
후방에서 왔으면 소문은 아직일 수도 있나. 크러셔는 다 먹은 꼬치를 주먹으로 쥐어 가루로 만들었다.
“들려줘라, 호크아이.”
“날 시키는 거야?!”
끄응. 앓는 소리를 낸 호크아이가 결국 그녀를 갈음하여 입을 열었다.
“장벽을 확장할 거라고, 도시에서 모험가와 용병을 대대적으로 모집하고 있어요.”
“장벽을… 확장해?”
“전선을 아래로 더 밀고 내려가겠다, 이거죠.”
“그게 가능해?”
“모르죠, 저희야. 그렇지만 주작께서 아침에 합류하신 걸 보면 진심으로 시도하려는 건 분명해요.”
거기에 타 도시와의 연락을 담당하는 마탑으로부터 조심스럽게 퍼지는 소문이 있다. 대악마를 사냥하는 용사가 주작과 함께하고 있다는, 그 소문.
“거기에 식탐이 죽었다는 이야기도 파다해서…….”
“식탐? 대악마?”
“네. 일개 용병인지라 진위 여부까진 저도 잘 모르겠지만… 식량 제한이 자유롭게 풀린 걸 보면 마냥 뜬소문은 아닐 거예요.”
“그렇구만…….”
“전선이 아래로 좀 더 내려가면, 마왕의 낯짝을 구경하게 될지도 모르지. 대악마도 벌써 몇이나 용사에게 죽임당했다고 하니… 어쩌면 마왕까지 노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다들 아닌 척 들떠 있어요. 소문이 모두 진실이고… 정말 마왕에게까지 도달하면, 이 오래된 싸움이 끝날지도 모르는 거니까.”
“오오…….”
그들의 설명에 상대는 코를 찡긋거리며 감탄을 토해 냈다. 온전한 감탄은 아니었으나, 크게 신경 쓰이진 않았다. 이 모든 게 와닿지 못한 것이든, 다른 이유가 껴 있는 것이든 결국 그쪽 사정이지 그들이 알아야 할 건 아닐 테니까.
“아, 신전이다.”
“여긴가? 이야, 장난 아니게 크네.”
“사제 없으면 안 되는 땅이니까.”
“…하, 신전이랑은 별로 안 친한데.”
“왜, 이단에 엮인 적이라도 있나 보지?”
“그것보다는… 아니, 비슷한가. 아무튼 휩쓸려서 떼거리로 죽임당한 전적이 있어서.”
“오…….”
농담 삼아 한 말이 정곡을 찌를 줄이야. 크러셔는 이번만큼은 자신이 말실수한 것임을 인정했다. 물론 사과까진 하진 않았다.
“으, 그래도 바다 사나이로서 이깟 고난에 굴할 순 없지. 좋아, 다녀온다!”
“힘내세요!”
사내는 본인의 뺨을 짝짝 두드리고는 하얀 입김과 함께 신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근데, 호크아이.”
그리고 사내가 신전 안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 크러셔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쳤다.
“이 시간엔 방문 잘 안 받아 주지 않냐?”
“어… 깜빡했다.”
호크아이의 얼굴이 난감함으로 쫙 물들었다.
“지금이라도 말리러 가야 할까?!”
“아니, 이미 들어간 지 오래인데. 사제한테 한 소리 듣고 알아서 나오겠지.”
“더 죄책감 들잖아……!”
호크아이가 발을 동동 굴렀다. 키는 멀대같이 큰 놈이 그러니 참으로 수선스럽기 짝이 없었다. 크러셔의 표정이 구겨졌다.
“거슬리니까 그만해.”
“그래도…….”
“아, 나온다.”
“핫!”
다행히 크러셔의 성질이 완전히 긁히기 전, 사내가 꼬리를 달고 나왔다. 투덜거리는 소리가 안 들리는 걸 보면 쓴소리는 안 들은 모양인데, 꼬리는 왜 붙었는지 모르겠다.
“아까 그 꼬마네?”
“뭐?”
호크아이의 말에 크러셔는 눈을 찌푸리며 어둠 속 윤곽에 집중했다. 확실히, 사내 뒤에 따라붙은 인기척은 작고 가벼웠다. 십 대 초반 아이의 것처럼.
“여, 많이 기다렸지?”
“그다지… 그보다 그 꼬마는?”
이윽고 가까워지며 보인 얼굴도 호크아이의 말마따나 아는 낯이었다. 그들의 지갑을 훔쳐 간─화장실 다녀오는 동안 가방을 털어 간 쪽에 가까우려나─녀석이니 헷갈릴 일도 없었다.
“훈계가 끝나서 이제 보낼 참이라길래, 같이 걸어왔지.”
“흠.”
저녁 먹여서 보낸다더니, 변명거리도 확실히 줬군.
크러셔는 해가 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대까지 신전에 붙잡혀 있었다고 하면 소년이 속한 집단에서도 몇 마디 폭언을 가할지언정 집단 린치까지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냥 소년의 하루가 재수 없었겠거니 여기게 될 테니까.
“그래. 얻을 건 얻었고?”
“어. 놀랍게도 마탑에 머문다더라고.”
“마탑?”
“그래. 그래서 그런데, 마탑 방향이 어딘지 알 수 있을까?”
소년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던 사내가 헤프게 웃었다.
크러셔와 호크아이의 시선이 서로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우리 여관 가는 길목.”
“가는 길에 들르면 되겠네요!”
대단찮은 우연이었다.
“그러고 보니, 괜찮은 인재를 본 것 같다.”
또한 신묘하게도, 그들이 마탑으로 향하게 되었을 때 마탑에선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정말입니까?”
“그래. 두 사람이었는데… 느껴지는 기세가 심상치 않더군. 그쪽에 한번 접선해 봐도 좋을 것이다.”
이 역시, 대단찮은 우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