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nius Wizard Takes Medicine RAW novel - Chapter 949
약먹는 천재마법사 949화
금제(4)
달칵.
널찍한 원목 테이블 위에 김이 나는 커피가 놓였다.
푹신한 카펫 위로 오가는 발소리가 조금씩 조용해지고, 이내 뚝 끊겼다.
긴 밤이 지나고 활기가 돌아오는 늦은 아침. 거리 밖에서 사람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49구역. 견뢰의 마탑. 살짝 열린 창틀 사이로 나른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최상층 개인 집무실.
레녹은 분주하게 집무실 사이를 오가며 필요한 일을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취하고 있었다.
복도 주변과 집무실 근처의 모든 출입구와 환기구는 마법으로 보안처리를 해둔 지 오래.
회담에서 벌어진 아나타메의 변절이 발칸 전역에 알려지고 나면 일이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다.
올리비에라와 논의했던 거래를 편하게 끝내려면 조금 서둘러야 했다.
책상 서랍 사이 오랫동안 방치해 둔 금고를 뒤지던 레녹이 침묵을 참지 못하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따로 필요한 게 있다면-”
“됐어.”
팔짱을 낀 제니가 말했다.
“어차피 금방 끝낼 거니까.”
“…….”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제니와 페이샤의 모습.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를 홀짝이는 제니와, 양 팔이 사슬로 묶인 채 고개를 숙인 페이샤.
레녹이 의도하기는 했지만, 막상 판을 깔아놓고 보니 꽤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데드라이즈의 장성, 페이샤 그리스번.
내전 당시 카이세와 함께 싸우던 초인이자, 이제는 에단의 군단에서 움직이는 고위계 창사.
그리고 카이세 바쥬르의 손녀이자, 에단 바쥬르의 유일한 혈육인 제니시아 바쥬르.
페이샤의 신변을 손에 넣은 지금, 레녹은 올리비에라를 만나기 전 두 사람을 조우케 했던 것이다.
‘귀희를 상대로 지금만큼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순간은 다시 없겠지.’
위계가 망가진 페이샤가 아나테마와의 전투로 모든 기력을 소모해 버린 지금이라면.
설령 그녀가 제니를 상대로 살의를 드러낸다 해도 절대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
카이세를 배신하고 독립했던 PMC 데드라이즈.
발칸의 음지에서 삼두령의 일각으로 군림하던 그들이 중앙전선에 진출하며 세력을 키우기까지.
군단의 일원들이 원수에게 바치는 충성과는 별개로, 바쥬르의 혈육인 제니를 어째서 지금까지 내버려 두었던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제니의 존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역시, 지금이라면 확인할 수 있겠지.
“…….”
하지만, 레녹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페이샤가 아닌 제니의 반응이었다.
본인의 출생에 대해 인지하고, 내막을 짐작하면서도 모른 척해오던 제니의 태도.
애써 신경쓰지 않는 척했지만, 그건 결국 제니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보일 수 있는 반응이라는 사실을 레녹은 짐작하고 있던 것이다.
데드라이즈의 관계자를 상대하는 일이 지나치게 위험한지라, 지금까지는 제니에게 데려가기는커녕 모조리 다 죽여 버리기 바빴지만.
페이샤의 마력이 모두 고갈된 지금, 마탑의 권역 안에서라면 모든 상황을 레녹의 손안에 넣고 주무를 수 있다.
“…….”
하지만 제니와 페이샤 모두, 서로의 존재를 인지하고도 먼저 말을 꺼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장 이 상황에 대해 고민하듯 눈을 감은 제니와, 그런 제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페이샤의 모습.
아이러니하게도, 레녹에게는 페이샤의 그런 반응이 마치 제니의 눈치를 살피는 것처럼 보였다.
탁. 커피잔을 내려놓은 제니가 침묵을 깨고 말했다.
“악질이지.”
팔짱을 낀 제니가, 불퉁한 표정으로 레녹이 선 방향을 향해 고갯짓했다.
“자기가 먼저 이 상황을 만들어놓고 의도하지 않았다는 척하고 있잖아.”
“…….”
“아닌 척 할거면 시늉이라도 하던가, 집무실에서 나가지도 않고 대놓고 구경하는 건 또 뭐야?”
마치 오랫동안 페이샤를 보아온 것처럼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제니의 태도.
하지만 페이샤는 그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않았다.
“당신도 반한테 그렇게 당했겠지.”
제니가 그런 페이샤를 이해한다는 듯 말했다.
“매사 원하는 대로 상황을 만드는 걸 즐기는 성격이니까. 당신이 한 짓을 생각하면 더 심하게 굴렀을 테고.”
“반이라.”
그 순간, 페이샤가 입을 열었다.
감정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시선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빤히 제니를 응시한다.
“견뢰에 대해 잘 알고 있나 보군.”
“…….”
처음 제니를 바쥬르 님이라 불렀던 것과는 달리, 생각보다 평이한 어조.
지켜보는 레녹조차 순간 페이샤의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미묘한 반응.
오로지 순수하게 제니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하는 듯하다.
“……아는 만큼은 알고 있지. 알아야 한다고도 생각하고.”
그런 페이샤의 반응에 제니 역시 불편한 낌새를 내비치면서도 대답했다.
“이제는 단순히 브로커와 프리랜서는 아니니까. 탑이라는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서로 불편하더라도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그런가.”
“굳이 시간을 내서 당신과 이렇게 앉아 있는 것도 그 일환이지.”
페이샤를 바라보는 제니의 시선이 싸늘하게 빛났다.
“반이 하는 일에는 대부분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정말 위험하거나 불쾌한 일이라면 내게는 아예 말조차 하지 않았을 거야.”
“…….”
“지금 이 상황 자체가, 감당 가능한 일이라 생각하니까 만들어진 셈이지. 당신도 그렇잖아?”
차가운 미소를 지은 제니가 물었다.
“당신 역시 반에게는 언제든지 감당 가능한…… 그런 존재가 되어버린 것 아니었어?”
페이샤가 여기 와 있는 것이 자신의 의사가 아니지 않냐는 제니의 직설적인 질문.
사실상 그녀의 처지와 패배를 정면에서 지적하는 도발에 가까운 말이다.
평소의 그녀라면 이런 말을 듣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내며 욕설을 마구 내뱉었겠지.
하지만 페이샤는 제니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곱씹고 분노하며, 끊임없이 부정해 왔던 자신의 패배에 대해.
그 사실을 인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
“……그는 뛰어난 마법사야.”
페이샤가 조용히 말했다.
“그만한 힘을 갖고도 이성적이고, 인격적이며, 타인과 교류하는 법을 알고 있지.”
“…….”
지금까지 레녹이 보아온 페이샤라곤 믿을 수 없을만큼 조용하고, 차분하기 그지없는 대답.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페이샤의 입에서 레녹을 칭찬하는 말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레녹이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페이샤는 스스럼없이 제니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본 마법사들 중에서는 누구보다 축복받은 재능을 가졌어.”
페이샤가 고요한 시선으로 제니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계속 그의 옆에 있도록 해. 견뢰라면 언제까지나 너를 지켜줄 수 있을 테니까.”
“…….”
설마 페이샤에게 이런 말을 들을 줄은 몰랐던 건 제니 역시 마찬가지였을까.
“당신이 살아온 행적을 조사한 적이 있어. 귀희라는 이름으로 무고한 이들을 여럿 죽여왔었지.”
불편한 기색으로 테이블을 두들기던 제니가 말했다.
“페이샤 레모닉 그리스번. 카바힘 출생의 전쟁고아. 여러 용병단을 전전하다 발칸에 정착. 중부 지구에서 활동하며 명성을 알렸고, 대부분이 수십에서 수백 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회전이었지.”
“…….”
“데드라이즈에 있던 시기에는 제자를 두기도 했지만 모두 방치. 내전에서 무수한 전공을 올렸지만 안타레스와의 교전에서 패퇴. 프로젝트의 실패 후 도주. 중앙전선에서 8레벨의 살인귀가 되었다는 괴담까지…….”
대답하지 않는 페이샤를 바라보는 제니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이제 와서 나를 걱정해 주는 척 하는 거지? 무슨 생각이야?”
“글쎄…… 무슨 생각일까.”
페이샤가 조용히 미소지었다.
제니의 말을 듣고도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오래된 그리움을 느끼는 듯한 모습.
“항상 하고 싶은 대로 살아온지라. 딱히 이유를 찾은 적은 없어. 지금도 그렇지. 네 앞에서 이런 말을 하는 건……”
고요한 적막 속에서 페이샤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바쥬르 님과 닮아서 그런 걸지도.”
“…….”
광증과 살기가 거짓말처럼 씻겨나간 듯한 페이샤의 대답.
그렇기에 레녹은 그 사실을 이해하는 대신, 오히려 궁금해졌다.
대체 카이세와 에단은 페이샤를 어떻게 대했길래, 제니가 그들과 닮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렇게 얌전해질 수 있는 건지.
그 용인술의 비결이 있다면 오히려 레녹이 그들에게서 한수 배워야 하지 않을까.
“정작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나를 본 적이 없을 텐데.”
제니가 말없이 커피잔을 들어 올렸다.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그녀의 손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난…… 알아. 내겐 아버지가 없었어. 어머니뿐이었지.”
“…….”
“평생 한 번도 나를 보러 온 적이 없어. 기억하는 거라곤, 내 이름 때문에 날 죽이려고 했던-”
“아니. 에단 님은 널 잊지 않았을 거다.”
페이샤가 말했다.
“그분은 네 이름을 기억하고 계셨으니까.”
“…….”
“시간이 날 때마다 보내야 할 약을 고민하셨지. 선친께서 그러하듯, 건강할 수 없는 혈통이니 예방해야 한다며-”
“거짓말하지 마!”
제니가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쨍그랑!
커피잔을 강하게 내려놓자 손잡이가 깨지며 뜨거운 커피가 흘러내렸다.
손등이 달아오르는 고통이 오히려 감정을 차갑게 식혀주었을까.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던 제니가 조용히 말했다.
“찾아오는 암살자 때문에 어머니의 묘비조차 세우지 못했어.”
“…….”
“조든이 아니었다면 나도 어머니 옆에 있었겠지. 브로커 일을 할 수 있던 것도, 조든이 한 거래 때문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
눈을 감은 제니가 중얼거렸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 생각했지. 모든 순간이 내 능력이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라 생각했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왔던 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귀가 멎을 듯한 침묵 속에서 천천히 눈을 뜬 제니가 물었다.
“데드라이즈의 진짜 목적은 뭐지?”
“…….”
자신의 손을 벗어난 과거와 마주하고, 감정에 휩쓸려 동요하는 와중에도 판단을 잃지 않는다.
페이샤와 마주하고 있는 이 순간이 오직 자신을 위해 마련된 상황임을 알면서도.
외려 그렇기에 그녀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에단, 바쥬르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거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주저하는 제니의 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보던 페이샤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멀리서 두 사람을 지켜보는 레녹과 잠시 눈을 마주친 그녀가, 이내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이제서야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이해한 것처럼.
그리고 그걸 알면서도 레녹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생각이 들었다는 듯.
“카이세 님께서는 프로젝트가 실패할 때마다 조금씩 변하셨다.”
페이샤가 조용히 대답했다.
“처음과는 달라졌다는 건 모두가 알고 있었지. 하지만 그럼에도 마지막까지 함께했던 건…….”
그녀의 투명한 시선이 제니의 얼굴을 담았다.
“프로젝트의 본질이 무엇인지,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야.”
“…….”
“에단 님은 프로젝트가 끝나기 전에 서거하셨지만, 그분께서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루려던 것은-”
뚜둑!!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 끈이 툭 끊어지는 소리.
직후 페이샤의 코에서 새카만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것이 페이샤의 머리에서 울려퍼진 소음이라는 사실을 눈치챈 제니의 안색이 싹 변했다.
“잠깐, 당신……!!”
프로젝트에 대해 잠시 언급하는 것만으로, 금제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지직, 지지직……!!!
새카만 전류가 페이샤의 눈과 코를 타고 새어 나오자, 페이샤의 안색이 시체처럼 창백하게 변하고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끅…… 쿨럭!!”
아나테마와 생사를 건 사투 와중에도 드러낸 적 없던 격렬한 발작증세.
하지만 페이샤는 그 와중에도 입술을 덜덜 떨며 힘겹게 목소리를 짜냈다.
처음부터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한번 시작한 말을 끝마치려 더듬댄다.
“바, 바……”
“멈춰. 죽고 싶은 거야?!!”
처음 한 번의 경고. 두 번째 기회는 없다.
금제를 어기는 대가는 승천자들조차 피해갈 수 없는 반동.
신진대사와 사고의 연속성을 끊고 두번 다시 어떠한 생명기능조차 해내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겠지.
이대로 가면 죽는다.
하지만 페이샤는 제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는 것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빠르게 다가오는 제니의 모습을 아련하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오래된 기억을 돌아보듯 그리운 표정을 짓다가.
“바쥬르의 피를 타고 내려오는 역천의 재능을, 자신의 대에서 끊어버리기 위해서였지.”
눈을 감고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블랙컨슈머 프로젝트는 그런 기적이었으니까.”
빠직!!
반응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제니가 소리치고, 레녹이 앞으로 걸어 나오기도 전에.
페이샤가 피를 흩뿌리며 뒤로 튕겨 나가듯이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