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host-seeing actor RAW novel - Chapter 20
20화
독립영화 (2)
화려한 불빛들로 가득한 밤거리.
그중 한 클럽에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들어차 있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신참 티를 풍기는 소년, 팔광이 덜덜 떨고 있다.
“대금비를 받아오라고 하셨어요. 꼭 받아와야 한다고…….”
그런 소년을 보던 관계자들이 취한 고개를 까딱이며 킬킬거렸다.
“너희 대가리들은 도대체 뭔 생각이냐. 술값을 받으려면 더 높은 애를 보내든지, 아니면 대가리가 돌아가는 애를 보내든지 해야지, 엉!”
그때.
쾅!
커다란 굉음과 함께 권혁두가 부서질 듯 문을 세게 차고 들어왔다.
갑자기 들이닥친 사내에 모든 이가 긴장했다.
사내의 뒤에 숨은 소년만 빼고.
그 자리에 있던 관계자들이 일제히 칼을 꺼내 들었다.
“누군데 남의 영업장에 함부로 들어와서 깽판을 쳐?”
“어지간히 취해브렀구먼. 처리하기 쉽것어.”
휙-, 와장창
눈 깜짝할 새, 권혁두는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맞은편 거울에 던졌다.
주위에 있던 그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했다.
“어떻게 된 거야!”
파편이 이리저리 튀는 순간, 싸움이 시작된다.
품 안에서 또 다른 칼을 꺼내든 혁두.
양옆으로 달려드는 조직원들의 칼을 손쉽게 쳐낸다.
당황한 그들의 손이 날아들자 시퍼렇게 서 있는 날로 그들의 손등을 베어 버렸다.
“아아악!”
찢어질 듯한 비명과 함께 사람들이 나뒹굴었다.
온통 피범벅이 된 바닥.
권혁두가 벌벌 떠는 막내를 데리고 나가려는데, 발목을 잡은 남자가 신음 소리를 내며 물었다.
“끄윽. 도대체 너…… 누구냐. 누구길래 이딴 식으로…….”
혁두는 그의 머리를 콱 밟으며 으르렁댔다.
“너희 두목한테 전하랑께. 성문파에게 다음은 읎다고. 그러니 알아서 기어야 할거여. 엉!”
상대가 두려움에 헉헉대며 묻는다.
“설마……. 칼잡이 권혁두?”
그가 험악한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아따 이제야 알아보냐, 빙신아.”
* * *
뿌연 연기로 자욱한 건물 뒤편의 골목길.
권혁두의 발치에 수십의 꽁초들이 떨어져 있다.
그에게 다가온 팔광이 눈치를 보며 말했다.
“형님, 공도 세우셨는데 왜 그리 기분이 안 좋으십니까.”
“기분이 좋아야 허냐?”
“단도 하나로 상대 패거리 수십을 도륙하셨잖아요. 칼에서는 정말 형님만 한 분이 없습니다.”
권혁두는 씁쓸한 표정을 한 채 얼굴을 들었다.
“일평생 칼을 잡았응께. 그것이 식칼이든, 회칼이든, 단도든…….”
팔광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형님, 예전에 요리사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곳까지 오신 겁니까?”
혁두가 씁쓸한 입매를 뒤틀었다.
“사실, 이 바닥. 이번이 처음이 아녀. 머리에 피도 안 말랐을 때, 몸을 담근 적이 있었구만. 아부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엄니가 근근이 행상함시로 돈 버셨는디, 굶기가 일쑤였제. 철없던 애기 때는 가난한 집구석이 그렇게 싫었구만. 그래서 일부러 더 밖으로 나돌았는지도 모르제.”
과거에 잠긴 혁두는 씁쓸하게 말을 이었다.
“깡패짓하면서 엄니 속을 백번은 더 태워브렀어. 근디 어느 날, 엄니의 피눈물을 보고 정신이 팍 들어부렀제. 그래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이 바닥을 떴고, 정정당당하게 돈 벌려고 안 해본 게 없었당께. 결국, 다시 돌아와브렀지만.”
권혁두가 마지막 한 모금을 진하게 빨았다.
그러나 담배도 소용이 없었다.
가슴 속 가득 찬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효를 다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을 없애기에는.
어머니를 본 적이 까마득했지만 그만큼 보고 싶었다.
평생 일만 해서 조로한 어머니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올리고 싶어서.
* * *
[어렸을 때 주먹질함서 속 썩인 거, 성공해서 갚겠다고 결심하고는 요리를 쌔빠지게 열심히 했구만. 그래서 유명한 음식점 주방장까지 올라갔제.]태주는 조심스레 의문을 피력했다.
“손을 씻고 나와 요리사를 하셨는데 어쩌다가…….”
[왜 다시 이 바닥으로 빠졌브렀냐고?]권혁두가 이마에 새겨진 흉터를 만지작댔다.
[빌어먹게도 머리를 다쳐부러서 미각하고 후각을 동시에 잃어버렸지라. 제기랄, 병원에서도 그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당께.]“치료할 수는 없었나요?”
진지하게 얘기하던 그가 태주를 마주쳤다.
[그러다 이 바닥에 다시 발을 담갔구만. 칼만 잘 다룰 줄 알면 돈 좀 준다는 술집 주방이었지라. 깡패가 하는 곳이라 망설였는디, 급하게 돈을 벌어야 했쓴께 어쩔 수 없었제. 그러다 내 칼 솜씨가 두목 눈에 띄어 깡패의 길로 영영 빠지게 돼부렀당께.]이야기하던 혁두의 목이 점점 메어왔다.
[그렇게 손에 돈은 쥐었지만, 엄니를 보진 못했어. 당연한 거제, 나는 엄니한테 아들이 아니라 깡패 새끼였으니께. 두 번 다시 못된 짓, 안 하겠다는 약속도 어겼브렀고. 근디 조직에서 발을 뺄라고 해도 엄니한테까지 위협이 갈 것 같은께 그럴 수도 없었어. 처음부터 다 내 잘못이었제. 살아서도, 죽어서도 불효자 새끼여, 내가.]사연을 듣고 보니 권혁두가 조금 가여웠다.
잘못 발을 디딘 깡패의 길에서, 후회하는 그가.
[몸뚱아리 하나로 이제껏 살아왔는디, 빌어먹을. 병으로 이렇게 뒈질 줄 누가 알았것소.]권혁두는 바닥에서 끅끅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 주 화요일이 생신이오, 우리 엄니. 평생 내가 고생만 시킨 분이요. 못난 아들 새끼가 따뜻한 밥 한 끼라도 대접할 수 있게 도와주소.]잠시 침묵이 흘렀다.
처음에는 권혁두가 깡패여서 당황스러웠다.
그의 한이 사람을 해치는 거면 어쩌나, 복수하는 거면 어쩌나 걱정했다.
그러나 그가 들려준 사연이 태주를 흔들었다.
죽어서도 어머니를 위하는 그의 삶이 특히.
어머니는 태주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단어였다.
그래서 권혁두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뭐든 해드리고 싶던 그의 마음도.
도와주겠다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 직전.
불쑥 지나가는 생각 하나.
그가 재밌게 읽었던 영화 시나리오, ‘자유선언’.
권혁두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 같았다.
‘자유선언’은 깡패들 영화고, 권혁두는 실제로 깡패였으니까.
게다가 죽정은 극 중에서 초밥 요리사이니 예전에 요리사로 활동했던 혁두에게서 칼질을 배울 수도 있겠고.
“권혁두 씨. 일어나세요.”
태주의 말에 권혁두가 몸을 일으켰다.
“한 풀어드리는 거, 도와드릴게요.”
[참말이요?]희망찬 얼굴로 보던 권혁두가 싹 표정을 바꾸었다.
[나는 말은 안 믿어, 피를 믿제. 당장 혈서부터 써주랑께.] [이게 어디서! 우리 소중한 태주한테서 피를 보려고 그래, 나한테 먼저 피 보고 싶냐, 엉?]이중협이 권혁두의 머리에 딱밤을 때렸다.
태주는 그 둘을 진정시켰다.
“대신, 이건 계약이니까 저도 권혁두 씨도 절 위해서 뭘 좀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나 같은 깡패 새끼한테 뭘 원하는디?]태주는 옆에 있던 대본을 들어 흔들었다.
“대본 좀 맞춰 주시죠.”
* * *
며칠 후, 밤.
태주도, 권혁두도 눈 밑이 퀭했다.
그들은 공원에 앉아 ‘자유선언’ 대사를 맞춰보는 중이었다.
태주가 열심히 연기하면 권혁두가 대사의 톤이나 뉘앙스를 고쳐주는 형식.
“두목. 저 더는 안 되겠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나가겠습니다.”
[악센트가 너무 강해부러. 지금이 쌍팔년도인 줄 아나, 요새은 엘리트 깡패가 대세라고.]태주의 째림에 권혁두가 피식 웃었다.
[그래도, 말투나 걸음걸이는 많이 좋아졌당께. 전에는 뭔 샌님처럼 그라고 단정할 수가 없었지라.]‘연습한 만큼 인정받으니 다행이에요. 잠깐 쉬었다 해요.’
태주가 대본을 내려놓았다.
[아따, 테레비에서 연기하는 배우들 쉽게 돈 번다고 생각했는디, 완전히 잘못 생각했던 거랑께. 겁나게 힘들어부러!]‘제가 더 힘들어요, 아저씨. 이것 좀 보세요.’
태주가 상처 난 손을 내보였다.
매일같이 칼질을 연습하다 생긴 상처였다.
‘아저씨가 이상하게 코치를 하니까 그렇죠.’
권혁두가 고개를 흔들었다.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된당께. 예전에 주방에서 애들 가르칠 때도 그랬는디, 팍팍 이해를 못하드라고.]‘텅 빈 평원을 달리는 말처럼 팍팍 썰어라, 칼등의 힘을 느끼며 탁탁 내리쳐라, 칼날의 날카로움을 에너지 삼아 매끄럽게 잘라라. 이런 걸 어떻게 알아듣습니까?’
[아따, 거시기하구만. 그걸 왜 못 알아들으까잉? 쓱 하면 팍 되는걸! 칼이 보내는 메시지를 잘 들어보랑께. 칼이 가는 데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디 왜 그걸 못하는 거여?]‘이게 천재와 일반인의 차이인가.’
태주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권혁두는 칼에 있어서는 본능적인 천재였다.
어떻게 칼을 써야 하는지, 날을 어떻게 세워야 하는지 알고 있다.
깡패의 말투나 행동거지는 연습해서 어느 정도 따라 할 수 있었으나 칼 놀림은 연습만큼 성과가 나오지 않고 더뎠다.
‘자유 선언’에서 죽정은 초밥 요리사기도 했다.
작품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칼솜씨를 갈고 닦았지만 초조했다.
‘아저씨가 가르쳐 주는 걸 제가 30%라도 소화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아따, 자네랑 나랑 연습한 기간이 차이가 난디 당연하제. 나도 원하는 대로 칼을 놀리기까지 죽도록 연습했당께. 아마 흘린 땀으로 치자면 양동이 세 개는 채웠을 거여.]‘알아요, 고민할 시간에 노력하는 게 좋다는 거.’
태주는 딴생각을 접어두고 대본을 집어 들었다.
‘집에 들어가기 전에 이 부분, 한 번만 더 해봅시다.’
[연기에 있어서는 집요하당께. 50번은 훑은 것 같은디.]‘노력만이 답이니까요.’
* * *
대망의 화요일이 되었다.
밤 10시.
태주는 한 골목길의 허름한 밥집에 들어갔다.
잔반을 치우던 할머니가 고개를 들었다.
권혁두와 똑 닮은 얼굴이 주름살로 자글자글했다.
“오늘은 영업 끝나부렀소.”
“안녕하세요, 저는 한태주라고 합니다. 권혁두 씨 어머니 되시죠?”
“그런디요?”
그녀가 불안한 얼굴로 태주를 마주했다.
“권혁두 씨가 생전에 부탁하셨던 게 있어서요. 오늘이 할머님 생신이시라면서요? 그래서 생일상 차려드리러 왔습니다.”
“그 무슨 말을…… 우리 애는 죽었어. 학생, 우리 애하고 어떻게 아는 사이요? 생일상은 또 뭐고? 아니, 내 생일인 건 어떻게 알았디야?”
점점 격해지는 할머니의 발언.
태주는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말을 내뱉었다.
“예전에 권혁두 씨에게 도움받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 사례를 하려고 하니, 아저씨께서는 이 부탁을 들어달라 하셨습니다. 어머님의 생신 때 그동안 못 챙겨드린 생일상을 대신 차려달라고요. 그러니까 할머니.”
태주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밥 한 끼, 제가 해드려도 될까요?”
* * *
처음에는 경계하던 권혁두의 어머니.
이제는 부엌에서 요리하는 태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권혁두는 그런 어머니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마치 일 초라도 그녀를 놓치기 싫은 것처럼.
곧 태주가 요리를 마치고 나왔다.
“자, 다 됐습니다.”
따뜻한 밥 한 상이 푸짐하게 차려졌다.
펄펄 끓는 된장찌개, 넉넉하게 담은 쌀밥, 바싹하게 구워진 소고기 산적, 그리고 푸짐하게 담긴 나물들.
태주는 할머니 옆에 앉아 수저를 쥐여주었다.
할머니는 놀란 듯 이리저리 음식을 살폈다.
“어쭈고, 학생이 이리도 요리를 잘한당가.”
“혁두 아저씨가 일러주신 대로 만들었는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할머니가 한 술 크게 뜨기 시작하더니. 된장찌개, 소고기, 나물이 쉴새 없이 들어갔다.
“잘 만들었네잉.”
바쁘게 수저를 놀리던 손이 점점 느려졌다.
그러더니 동그란 눈에 점점 물기가 차올랐다.
“참말로 맛나네. 내 입에 딱 맞어부러. 이거 혁두가 말해준 대로 만들었다고 했지라?”
“네.”
“아따……. 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여.”
주름진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스르륵, 떨어졌다.
권혁두가 눈물을 쓱 훔치더니 태주를 바라본다.
태주는 주머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아, 그리고 아저씨가 할머니께 생일상 차려드리면서 꼭 전해달라는 말이 있으셨어요.”
태주가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았다.
굳은살이 배겨진 조그마한 손이었다.
“그동안 제가 엄니 속 많이 썩인 것 압니다. 그러나 엄니, 한 번만 용서해 주쇼. 호강시켜 드리겠다는 생각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칼을 쓰게 됐었는디, 엄니께 불효를 저지른 것 같아 죄송허요. 말을 해봤자 변명이겄지만, 그래도 엄니와 잘살아 보려던 내 어리석은 노력이었소.”
감정이 이입된 태주는 목이 메어왔다.
“이 험난한 세상, 엄니가 있어 열심히 살 수 있었소. 어려운 살림에도 키워줘서 정말 고맙구만요.”
편지를 듣던 할머님의 눈시울이 젖어갔다.
“글고…… 내가 엄니께 드린 돈. 마음에 안 드시겄지만, 그래도 엄니를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모은 거구만요. 근께로 이제 받아주쇼. 불충한 돈이지만 그래도 엄니가 그 돈으로 편히 사셨으면 하는 게 내 바람이여라.”
꼭 잡은 두 손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떨어졌다.
태주가 할머님을 힐끔 살폈다.
이미 그녀는 울음바다였다.
젖어버린 옷소매로 몇 번이고 눈물을 훔쳤다.
“대체 돈이 뭐라고, 혁두 이놈아. 나는 이런 돈보다 혁두 니가 곁에 있었으면 했제……. 이 미련한 자슥아.”
그때 권혁두가 훌쩍거리던 어머니를 와락 안았다.
펑펑 울던 그의 몸이 빛나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눈이 멀어버릴 듯 타오르는 빛이 식당을 가득 채웠다.
귀신 보는 배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