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13
기운이 좋은 날
초록 형은 바쁘게 입을 움직였다.
물타기를 하는 과정을 요약하자면 간단하지만, 거기에 의도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들켜선 안 된다나.
세부적인 사항을 조율하느라 그러는지 전화통에 불이 났다.
“시일이 촉박해서 힘드셨을 텐데 제 작전 따라주셔서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결과도 깔끔하네요. 앞으로 시뮬레이션대로 흘러가겠지만 혹시 변수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관찰 부탁드립니다. …네, 네. 보수는 매번 하던 대로. 네. 다음에 또 이용하죠.”
지시를 내리는 행동이 익숙해 보였다. 전화하는 상대방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사설탐정이나 음지의 해결사 같은 사람일까?
“…그거 대포폰이야?”
초록 형이 처음 보는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이름처럼 초록색 케이스를 씌운 본래 휴대폰이 아니라 몇 년 전에 나온 둥글둥글한 디자인의 스마트폰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불법과 편법을 오갈 땐 대포폰이 필수였다.
“이원아. 대포폰이라니. 이 형이 그런 무서운 물건을 쓸 리 없잖아.”
누가 뭘 무서워한다고…? 말도 안 되는 외계어를 들은 듯해서 귀를 만지작거렸다.
예민한 청각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품고 있었는데, 이제는 청각까지도 둔해지는 걸까.
다음에 이비인후과라도 가서….
“농담이야. 대포폰 구하려고 하면 못 구하진 않겠지만, 그러면 너무 범죄 전문가 냄새가 나잖아?”
지금도 충분히 무서운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속마음을 털어놨다간 더 무서운 진실이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직감에 얼렁뚱땅 맞장구만 쳤다.
“…어. 그렇겠지?”
“잠깐 선불폰 쓰는 중이야.”
선불폰도 사용자를 추적하기 어렵다는 점에선 명의가 다른 대포폰과 큰 차이가 없지 않나…? 의구심이 먹구름처럼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도덕의 잣대가 고장 나거나 자신한테만 후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 같다. 게다가 행동력은 또 왜 이렇게 좋은지.
보통 사람은 머리로 한번 떠올리기만 할 뿐 행동에 옮길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그런데 초록 형은 구체적으로 만들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실행해버렸다.
이번 일은 초록 형과 가족들이 연관돼서 뭐라 참견하긴 힘들지만, 앞으로 앞으론 초록 형이 자칫 삐끗하지 않도록 엄하게 감시해야겠다.
이러다 손쉬운 해결책에 익숙해져 버리면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다 끝났어?”
소파 한가운데 다리를 꼬고 앉아서 여유롭게 커피를 홀짝이는 초록 형이 얄미웠다. 누구는 이렇게 속이 타는데 혼자서만 천하태평이었다.
“어. 기사 확인했잖아? 그쪽에서 발버둥은 쳐보겠지만 고작 발버둥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지.”
초록 형 말대로 현재 시점의 인터넷 공간은 온통 경악하는 반응으로 넘쳤다. 믿었던 도끼에 발등이 찍혔다면서.
10여 년 전에 인기 아이돌로 활동하다가 연기자로 전향하고 배우가 된 이후에도 꽃길만 걸었던 남자 배우였다.
바른 청년의 이미지로 중년층의 인기를 얻어서 단숨에 주말 드라마 남주인공 역을 얻기도 했다. 그 드라마가 시청률 대박이 나면서 중국, 일본, 베트남 등에서도 한류 드라마 열풍을 일으키면서 단숨에 ‘한류 스타’가 됐다.
지금도 활발히 연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어서 이번 보도가 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촬영을 마치고 개봉을 준비 중인 영화도 있고 캐스팅을 끝내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드라마도 있다고 했다.
게다가 오랜 기간 유지해오던 큼직큼직한 광고까지 있어서 위약금이 천문학적일 거라는 예측이 있었다.
“진짜 안 믿어져! 우리 엄마도 이 배우 좋아했었는데…!”
박하는 엊그제부터 울상이었다. 어릴 때부터 TV에서 자주 보면서 내적 친밀감을 쌓았던 배우라 배신감을 크게 느끼는 듯했다.
“박하야, 다 그런 심정일 거야. 나만 해도 정말 놀랐으니까. 이게 다…. 탈세 한 가지로도 이미지 깎이는데 갑질 의혹, 도박, 임금 체불에 마약 판매, 중개까지…. 이 정도면 사회악 아닌가 싶네.”
서혼 형은 국민 쓰레기가 된 배우가 신인이던 어린 시절에 함께 촬영한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만 해도 친절하고 착하기만 한 형처럼 보였다고 덧붙이면서.
파도 파도 끝이 없는 범죄 행각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시작됐을 리 없었다. 유혹이 많은 연예계여도, 아무리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해도 다 불법을 저지르진 않았다.
익명의 제보자가 제보한 탈세 의혹으로 촉발된 사건은 하루하루 지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커져만 갔다.
연관된 죄명만 해도 한 손으로 모자랐다. 그중에 제일 커다란 건은 마약 건이었다. 이 외에도 많았지만, 피해자 수만 두 자릿수에 연관된 사람도 상당한 것으로 추정됐다.
“연예계에 떠도는 마약이란 마약은 전부 이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풍문도 있더라. 자기는 하지도 않고 팔기만 했다는데.”
“도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숨겨왔대? 죄목이 한둘이 아닌 데 걸렸어도 벌써 걸렸어야 했던 거 아니야?”
“바지사장을 뒀다던데. 일부러 찾기 힘들게 이중으로 대리자까지 뒀다는데 실질적인 책임자를 딱 지목해버린 거지. 우리 리더께서.”
“칭찬 고맙다, 오란아.”
경찰, 검찰의 수사 과정에 대해 아는 바는 없지만, 초록 형이 이 일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다는 게 확실해 보였다.
초록 형이 아니었더라면 지금도 작품 활동을 열심히 하면서 착한 척 연기로 대중을 기만하고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그 웃음에 속는 줄도 모르고 그에게 열광하고 있었겠지.
이런 범죄자의 민낯을 세상 밖에 끄집어냈다니. 결과를 보니 초록 형이 사회 정의를 구현한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열심히 변명하겠지만, 조만간 경찰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집행유예로 끝낼만한 죄질은 아니라 감옥에 가야 할 테고.
“개인이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았어…?”
박하는 지금 상황이 얼떨떨한지 눈만 껌뻑였다. 선명한 이목구비에 길고 짙은 속눈썹이 느리게 내려앉았다 올라가는 과정을 우리 팬들이 봤다면 분위기 미남이라고 찬양했겠지만, 우리 멤버들에겐 그래봤자 막둥이 박하였다.
“그 개인이 어떤 개인이냐에 따라 다르겠지.”
홍오란은 초록 형을 제일 높게 평하는 멤버다. 사고의 결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도대체 어떻게 알았어? 왜 지금까진 조용히 있었던 거야?”
“나름 특별한 비밀 네트워크가 있지. 그리고 방관이라면 방관이겠지만, 나한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일일이 확인해 가며 신고할 정도로 정의감 넘치진 않아서. 이번 건도 충분히 물타기가 될 만큼 큰일이고 증거가 확실해서 넘긴 것 뿐이야. 이득 없는 자원봉사는 사양이거든.”
무섭도록 냉정했지만, 현실적이기도 했다. 번거로운 일이 확실하고, 괜히 엮여서 피해를 볼 가능성도 있으니까.
“으음….”
“초록이 같은 개인이면 지구까지는 어려워도 나라 하나는 집어삼킬 수 있겠다.”
“그 뒤에 반란이 일어나서 처형당할지 몰라도?”
“지온아, 이왕이면 반란은 실패했다고 해줄래?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이는 기분이라.”
가상의 상황인데도 초록 형은 자기가 역사의 패배자가 된다는 가정을 싫어했다. 기분상의 문제인가?
“지온이 요즘도 어려운 단어 공부 열심히 하는구나. 반란도, 처형도 자주 쓰는 단어 아닌데.”
서혼 형은 초록 형의 칭얼거림을 가볍게 무시하고 섬세한 칭찬을 남겼다.
의미 없는 말장난보단 지온의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한 게 중요하지!
“랩 가사 써야 하니까. 솔로 곡도 내보고 싶고.”
아, 문득 떠올랐는데 예전에 내가 만들었다가 뼈대만 남기고 갈아엎어서 지온에게 준 ‘연습곡 No.5’는 지온이 가사를 붙여 완성한 지 좀 됐다. 여러 번의 수정을 거쳐서 완성도 있는 곡으로 탄생했다.
그 곡을 어떻게 할지 둘이서 고민했었다. Z-on 개인 데모 테이프를 제작할까 하다가 스케줄이 바빠져서 한동안 잊고 있다가 정규 앨범에 넣는 쪽으로 진행해봤다.
그 결과 A&R 팀은 물론 멤버들과 관계자분들의 인정을 받아서 수록곡 중 하나가 됐다. 매니악한 면이 있는 테오라의 첫 정규에 더없이 잘 어울린다나?
지온의 목소리가 메인이 된 곡이지만 팀 곡이었다. 목표가 솔로 곡을 내는 거였구나. 기억해뒀다가 지온에게 어울리는 힙하고 그루브한 비트가 떠오르면 줘야지.
“저기요? 저 여기 있는데요!”
“초록이를 너무 신경 썼더니 며칠은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싶네.”
“헉, 혼이 형! 형이 나한테 이럴, 이럴 리가 없어. 우리 착한 혼이 형 내놔!”
돌고 도는 먹이사슬에서 오늘은 서혼 형이 제일 꼭대기 자리를 차지했다. 웬만하지 않은 일에도 화내지 않는 사람이지만 절대로 유약하진 않았다.
섬세한 감성, 다정다감한 성품과 별개로 우유부단하거나 유약한 사람은 아니다. 폭신폭신한 껍데기 안에 부러뜨릴 수 없는 심지가 있었다.
한 마디로 외유내강. 아니, 혼이 형의 신체 능력을 고려하면 외강내강인가…?
“드디어 외부 상황에 신경 끄고 정규 앨범에 집중할 수 있겠네.”
일련의 상황이 컴백에 방해가 되는 게 못마땅했는지 홍오란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묻어있었다.
“히힛! 테오라 첫 정규 앨범!”
“날짜부터 다시 픽스해야 할걸. 난 역시 아이돌, 그것도 리더 체질인가.”
초록 형은 아이돌 리더보단 흑막이 체질 같지만, 본인이 그렇게 느낀다니 굳이 일깨워주지 않기로 했다.
성악설의 신봉자가 되어버리고 말 것 같았다. 교육을 통해 법과 규범을 지키는 사회의 일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여기 있으니까. 초록 형한테 너무한가 싶지만, 생각은 자유라고 했다.
“컴백이 가깝다고 생각하니까 두근거리네.”
“나두!”
백만 년 만에 새로운 앨범을 내는 느낌이었다. 첫 정규 앨범을 팬들에게 선보일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 * *
“테오라 여러분들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네요. 최근 참 다사다난했네요. 그렇죠?”
“심려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그게 어디 초록 씨 잘못일까요? 아, 컨디션 관리 못 한 건 초록 씨 잘못 맞아요.”
“다신 그런 일 없게 하겠습니다. 한 번만 봐주세요~.”
회의실에 모인 각 팀 관계자분들은 안부를 묻느라 바쁘셨다. 이번에 테오라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큰 이슈가 터졌으니 당연한 걱정이었다.
우리 멤버들이 직원분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 같았다. 그저 사무적으로 정규 앨범 발매 일자만 다시 잡은 후에 해산해도 절차상의 문제는 딱히 없으니까 말이다.
“자, 그럼 날짜를 다시 잡아볼까요?”
“어차피 6월 첫째 주 월요일에서 요일 그대로 날짜만 미루면 되는 거 아닌가요?”
“하하, 둘째 주냐 셋째 주냐 아니면 넷째 주냐! 상당히 고민되는 사안 아닙니까?”
밖엔 인기 배우의 스캔들로 혼란스럽기 그지없지만, 하눌 소속 연예인은 아니라 강 건너 불구경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반사 이익을 얻는다면 모를까.
대체할 배우가 하눌 소속 배우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제가 취미로 명리학 배우거든요? 재미 삼아서 사주나 궁합도 봐요.”
“그런 취미가 있었어요? 나중에 제 사주도 좀.”
갑자기 튀어나온 사주 궁합 이야기였지만, 대회의실에 있던 분들 대다수는 일단 들어보자는 태도였다. 마시던 물을 뿜는 분도 있었지만.
“흠흠, 제가 택일도 좀 합니다. 명리학책에 따르면 셋째 주 월요일이 좋습니다!”
“오우. 저렇게까지 확신한다는데 다들 셋째 주 월요일 어때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불확실한 연예계의 환경 때문인지 미신에 의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알려져 있다. 하눌 엔터에 다니는 직원분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물증 따위는 없는 발언인데도 다들 귀가 쫑긋하는 모습이었다.
멤버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기운이 좋다고 하니 괜히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이왕이면 다홍치마인 거겠지?
6월의 셋째 주 월요일.
원래 일정보다는 2주 말리게 됐지만, 오히려 예감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