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d Idol Project: Hope RAW novel - Chapter 215
도전적으로
SBC 음악방송 세트장은 크기에 비해 객석이 상당히 넓은 걸로 유명했다. 다른 방송국 음방 세트장에 비하면 오래된 건물이라 구조 변경이 곤란하다는 얘기가 있었다.
어쨌거나 팬들에겐 이득이었다. 한 명이라도 음악방송을 방청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가 늘어나는 셈이니까.
“오늘 뭔 날이야? 유난히 사람이 바글댄다?”
“테오라 컴백 무대 있다던데.”
“아, 테오라.”
음방마다 개근상이라도 타려는 것처럼 출석하는 사람들이 저들끼리 잡담을 나눴다. 고인물 중에 썩은물이라 여러 번 방청해본 팬이라면 모를 수 없는 낯익은 이들이었다.
“테오라 리더가 남경욱 아들이라니. 아직도 안 믿김.”
“같은 남 씨이긴 해도 얼굴은 안 닮아서 주변에 알아챈 사람이 하나도 없더라. 엄마 판박이라던데?”
같이 있으면 분위기가 닮았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둘은 같은 화면 안에 잡힌 적이 없었다.
선 굵은 연기를 하는 부리부리한 인상의 중년 배우와 호리호리한 체격에 세련된 이목구비를 가진 아이돌에게서 공통점을 찾을 사람은 없었다.
“작년에 밝혀지기만 했어도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했을 텐데. 성과를 보인 후에 알려졌으니까 그건 아닌 것 같지?”
“이득보다 불이익이 더 크던데? 돌팬들한테 인지도는 충분히 올라왔던 상태라. 아빠 이름값? 도움 됐을까 싶다.”
“그니까. 엄빠 과거에 머리채 잡히는 거 보니까 불쌍하더라구. 근데 별 타격은 없나 봐? 바로 컴백하는 거 보면?”
“테오라 유명하잖아. 개미같이 부지런하게 일하는 걸로.”
“유명하지.”
옆에서 둘의 수다를 듣던 코티지는 몰래 한숨을 쉬었다.
남초록 건 때문에 팬덤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는 테오라 팬들만 알 일이었다. ‘국민 쓰레기’의 행각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코티지들이 먼저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테오라는 몇 번째야?”
“뒤에서 두 번째던데.”
“마이 컸네~. SBC는 대형 컴백 무대여도 두 번째까지 잘 안 주잖아? 설마 1위 후본가?”
“어, 그럴지도? 음원 플랫폼마다 지붕 킥했던데.”
지난 활동기와 달리 이번 활동기는 빈집 상태였다. ‘국민 쓰레기’로 뒤숭숭한 분위기라 몸을 움츠리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현직 배우이자, 전직 아이돌이었던 이의 일탈은 연예계 전반에 영향을 끼쳤다.
그가 유통한 마약은 배우, 아이돌, 개그맨, 연예인 지망생을 가리지 않았다. 어떤 그룹은 멤버가 수사선상에 들어가서 컴백 일정을 미뤘다는 썰도 들려왔다.
컴백했다가 경찰 조사라도 받게 되면 활동 전체에 제동이 걸릴 수도 있었다.
‘울 애기들은 깨끗하다는 방증이기도 하지!’
모두가 몸을 사리는 시기에 자신감 있게 컴백하는 패기를 보인 테오라라면 빈집을 털어도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그렇고말고!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뮤직비디오와 음원이 공개됐다. 곧바로 무한 반복 재생해서 뇌에 완전히 박아버린 상태라 이제는 거의 입에서 술술 나올 지경이 됐다. 타이틀은 물론 수록곡까지 전부 보석 같았다.
노래를 들으면 귀가 정화되고 애들 얼굴을 보면 눈이 정화됐다. 요즘처럼 각종 오염이 난무한 시대에 테오라는 한 줄기 서광이었다.
이번 앨범은 이별이 주제라고 했는데 전체적으로 무겁거나 느리지 않았다. 오히려 유쾌하고 유머러스한 부분이 포인트였다.
가사를 유심히 살피면 단순한 이별보다는 ‘전화위복’에 가까워서 그런가 싶었다. 헤어짐이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으니까.
뮤비 재생 수도 순조롭게 올라가고 있고 음원 차트 꼭대기에서 말뚝을 박아버렸으니 초동 음반 판매량도 기대할만했다.
하지만, 그런 눈에 보이는 숫자보다도 테오라의 무대가 고팠다. 대학 축제 시즌에 메뚜기처럼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본 걸로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콘서트으! 제발 콘서트! 얘들아 콘서트 하자!’
그때까지는 방청 무대로 참아야 했다. 온콘도 물론 좋았지만, 축제 무대를 보며 깨달았다. 테오라는 현장에서 빛나는 스타라는 걸.
응원봉을 두 손으로 꽉 쥐고 기도했다. 시간이 빨리 흘러서 얼른 테오라를 보게 해달라고.
* * *
1초가 1시간 같던 기다림을 끝내고 드디어 테오라의 등장이었다. 의상을 자유분방하게 갖춰 입은 멤버들은 우리를 발견했는지 밝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벙끗대는 입술로 ‘밥 먹었어?’하고 묻는 남초록을 보니 정말 괜찮구나 싶어서 안도했다.
상대의 끼니를 챙기면서 안부를 묻는 행위는 우리나라 특유의 문화지만, 남초록이 하니 감회가 달랐다.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 입맛이 없었다는 사실을 라방에서 주워들었던 탓이었다.
안무 동선에 맞춰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멤버들은 하나같이 신난 아이처럼 보였다. 엄청 오랜만에 컴백한 것도 아니고 꾸준히 여기저기서 무대에 섰으면서 그렇게나 신날까.
기분 좋은 모습을 보는 팬들까지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무대 조명이 바뀌고 밴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인트로에서 자유롭게 무대를 활보하는 멤버들은 날뛸 준비가 된 듯했다.
정규 1집의 타이틀 ‘Reversal’은 이전의 앨범 타이틀과 비교해서 절제를 배운 느낌이었다. 파워풀함 대신에 ‘있어 보이는 그루브함’을 장착하고 나왔다.
재밌지 않아?
돌아보면 이 세상 모든 일이 양면의 동전
익살맞은 표정을 지은 서혼이 핸드 마이크를 거꾸로 들고 허세 든 래퍼처럼 거들먹거렸다. 아역배우 출신답게 무대 위에서도 표정 연기가 빛을 발했다.
상아색으로 탈색한 서혼이 가죽 재킷을 입고 겉멋 든 날라리 연기를 했다.
‘연기로 컨셉 의상까지 잡아먹잖아!’
원래 성격을 생각하면 어색하게 느껴져도 이상하지 않건만, 예상 밖으로 너무 잘 어울렸다.
드넓은 가슴을 가진 서혼의 뒤로 오란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빨간 브릿지가 들어간 홍오란의 생머리는 춤을 출 때마다 붕 떴다가 몽실몽실 내려앉았다.
불행만 행복만 가득한 삶이 있을까
하나만 있는 삶은 재미없잖아?
희노애락 스릴 넘치게 살아볼래?
권유하듯 내민 손을 아묻따 잡고 싶었다. 홍오란은 볼우물을 한껏 만들더니 연기처럼 남초록과 교차했다.
길게 기른 머리를 반묶음 한 남초록은 가사의 당사자라도 되는 듯 다이나믹한 표정을 선보였다.
머리 긴 남자는 꼴불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듯했다.
너는 내게 헤어짐을 고했지
슬퍼서 죽는 줄만 알았어
그 후에야 알았지
멀리서 날 짝사랑해왔던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네 결혼식 통쾌하게 웃어주고 왔어
별 거 없더라 너희 (풉)
고마워 떠나줘서 고마워
‘풉’ 한 음절에 수많은 감정이 축약되어 있었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무슨 뜻이 담겼을지 직관적으로 이해됐다.
이번 앨범 타이틀은 가사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예전엔 시 같았다면, 이번 정규 타이틀은 편한 대화체라고 해야 할까.
작사에 새롭게 이름을 올린 나머지 멤버들의 영향력 같았다.
‘성격으로 유추해봤을 때 남초록이 큰 역할을 맡지 않았을까? 맨 앞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능글맞은 느낌이 딱 남초록 스타일이었다. 적절한 파트를 받기도 해서 마치 친구가 옆에서 자기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방청석에 앉은 타 팬들까지 순식간에 몰입했다. 짧은 가사에 담긴 이야기는 사랑싸움을 구경하는 관객이 된 것 같게도, 자신의 이야기 같게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나도 그러니까.’
다음은 기대하던 함이원 파트였다.
이번 정규 앨범도 당연히 함이원이 작곡한 곡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테오라 팬들이라면 예상한 바였다.
그렇지만 이런 분위기와 장르의 곡을 예상한 팬이 있기나 할까.
특히 함이원 파트는 본캐의 분위기와 노래 파트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컨셉에 맞춰 푸른 빛이 도는 검은 머리에 알 없는 뿔테 안경을 쓴 함이원에게선 너드미가 뿜어져 나왔다.
어느 현자가 그랬다. 진정한 너드미란 잘생겨야 가질 수 있는 거라고. 그 명언을 남긴 현자에게 깊게 공감하며 함이원의 미모와 음색에 빠져들었다.
이별이 나빠?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
천년만년 함께하자고 빈말을 하지
얼마나 지겹겠어?
리셋하려고 다시 만나려고
다음 생이 있는 거 아니겠니
첫 만남의 설렘을 다시 느끼라고
천년 뒤에 real 천년의 사랑
거의 기적에 가까운 변화였다. 순둥한 천재가 시니컬한 회의주의자처럼 보이다니.
입을 저절로 떡 벌리고 있을 때 오란으로 파트 체인지 됐다.
겁먹지 마
어린이집 졸업하는 아이들도 알아
separation 뒤에 오는 connection
개구쟁이 같은 오란이 마이크를 쥔 채 무대 앞쪽으로 나왔다. 순진하게 ‘정말 몰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단순한 표정 연기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데도 진심으로 놀림당하는 기분이었다.
‘퍼포먼스에 이를 갈았나? 무대 씹어 먹잖아?’
tiny 불운은 밋밋한 lunch에 첨가하는 MSG
요리에 한 끗 차이를 살리는 비밀 recipe
삶도 사랑도 맛있어질 거야 내 요리처럼
요리에 비유하는 게 딱 제톤이 작사한 부분 같았다. ‘내 요리’처럼 맛있어질 거라니.
음악 뉴튜브에서 이번 앨범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테오라스럽다’일 거라고 했다. 그 발언대로 곳곳에서 멤버들의 본캐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다른 활동기보다 짧게 자른 지온의 은색 머리엔 반항적인 스크래치가 들어가 있었다. 두상까지 잘생겼다고 감탄하면서 같이 리듬을 탔다.
한 발로 서서 점프하며 턴하는 고난도 동작으로 가볍게 소화하면서 박하가 튀어나왔다.
천연 머리 색 같은 카키 브라운으로 염색한 박하는 흰 셔츠에 넥타이를 하고 사원증까지 목에 건 채였다.
회사에서 던졌어 직선처럼 옳은 말
그랬더니 칼 해고 나 잘렸대
먼저 사직서 던지려고 했는데
잘 됐어 실업 급여는 mine
사원증을 팬들이 있는 쪽으로 휙 던지는 퍼포먼스에 숨을 집어삼켰다.
‘첫 정규 앨범 첫 공중파 음방 컴백 무대에서 걸었던 굿즈!’
손을 길게 뻗어봤지만, 아득히 멀었다. 재빨리 단념하고 무대에 집중했다. 저 사원증이 로또라면, 이 무대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건 평생의 손해다.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지. 그럴 거야, 그래야만 해.’
내 영혼엔 휴식이 필요해
원하는 것을 찾아 여행을 떠났지
평생의 꿈을 이룬 뒤에 알게 됐어
그 상사는 잘린 지 오래
치킨집은 쫄딱 망했다는 걸 (poop)
상상만으로도 사이다였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만 들어봐도 회사에서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만했다.
다들 가슴 속에 사직서 한 장은 품고 있다더니…. 가사로 대리 만족을 하게 될 줄이야.
막다른 길처럼 보여도 사실은 행복을 위한 디딤돌
like a blessing in disguise
반전 넘치는 게 삶이라는 진리를 어르신들은 알고 있다던데
가르쳐주실래요 인생의 선배님
빠르게 랩을 쏘아내다가 끝에 가서 템포를 확 낮춘 제톤이 고개를 까딱거렸다. 의식하지 않아도 멋드러진 동작과 플로우였다.
제톤은 분명 아이돌 래퍼. 그런데도 웬만한 아마추어 래퍼보다도 훨씬 소화하는 스펙트럼이 넓었다. 자기 개성을 절제하긴 해도 절대 없애진 않는 것도 대단했다.
‘다들 괴물이라니까.’
또 한 명의 괴물이 센터로 나왔다.
그때는 몰랐어도 아는 척
멋지게 한마디 해주는 거야
내가 그럴 줄 알았다
가다가 껌이나 밟아라 (풉)
그렇게 맺힌 아픔 풀어버려
최종적으로는 가사에 껌으로 결정했겠지만, 아마 다른 단어를 집어넣고 싶지 않았을까. 굳이 똥과 같은 발음인 ‘풉’을 괄호에 적은 걸 보면 말이다.
곱씹을수록 웃음이 나는 가사다. 새로운 시도가 보이는 도전적인 음악인데도 거부감은커녕 ‘힙’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이 곡이 올해의 대표곡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 곡의 주인이 테오라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