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olution is also a business RAW novel - Chapter (407)
407화 외전 -7- 기욤 드 툴롱
[기욤 드 툴롱] [Guillaume De Toulon] [1771-1860] [프랑스2 선정 위대한 프랑스인]1위 – 기욤 드 툴롱
2위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3위 – 샤를 드골
4위 – 루이 파스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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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정치인 / 프랑스의 사업가 / 프랑스의 군인 / 프랑스 왕국 재무총감 / 프랑스 혁명 왕국 재무총감 / 프랑스 공화국 임시 통령 / 프랑스 공화국 통령 / 국제연합 최고의장 / 이삭 / 툴롱 출신 인물 / 사업가 출신 정치인 / 파리 중앙군사학교 출신 인물
1. 개요
프랑스의 정치인(재무총감 / 임시 통령 / 1대, 3대 통령 / 국제연합 초대 최고의장), 사업가(자세한 사항은 [이삭> 참조), 군인.
프랑스 대혁명 시기 프랑스의 핵심 정치인으로서 혁명을 주도ㆍ지휘했으며 혁명전쟁과 1차 세계대전, 동양해방전쟁 또한 주도ㆍ지휘하였다.
왕국ㆍ혁명왕국(입헌군주정)ㆍ공화국에서 모두 국가 수반급 지위를 역임한 유일한 인물.
국제연합의 초대 창설자이자 초대 의장이기도 하다.
2. 소년기.
기욤 드 툴롱은 프랑스 남부 항구 도시 툴롱 출생으로, 툴롱을 주름잡던 툴롱 가문의 방계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본처가 아닌데다가 평민이고 산후조리 중 사망한 탓에 어릴 적 가문 내 아웃사이더로 고초를 겪었으나, 이 때문에 같은 나이대 어린아이들보다 빠르게 자립심이 자라났고 끝내 평균보다 빨리 파리 중앙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사관학교 생도 재학시절 친우[우리가 생각하는 ‘그’ 나폴레옹이 맞다]의 아이디어를 시작으로 사업을 시작했으며, 수완이 대단한 나머지 졸업할 즈음엔 이미 파리 내에서 점포 여러 개를 운영하는 기업 수준의 부를 일구었다.
생도 재학 시절, 파리 출신들의 텃세에 반발하여 귀족 출신이든 평민 출신이든 어디 출신이든 간에 가입에 결격 사유가 없는 [평등클럽>을 창설했으며, 이 [평등클럽>은 이후 프랑스 대혁명 당시 육군 장교들이 단체로 탈영하는 등 엑소더스가 일어날 때, 굳건하게 혁명정부를 지지하였으며 선배 장교들의 탈영으로 인해 비어버린 자리들을 꿰차고 들어가 차후 프랑스 육군의 핵심 보직을 차지한다.
이때 클럽 내에서 가장 친했던 자들이 훗날 대육군의 전설이자 레전드가 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에마누엘 드 그루시, 프랑수아 마티유 등이다.
또한 생도 재학 시절, 이미 프랑스 내부에 만연한 부조리와 앙시앙 레짐이 무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으며 조금이라도 이를 방지하고자 사업으로 번 돈의 일부를 유용하여 동료들과 자선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군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는지 포병 소위 임관 이후, 바로 전역원을 제출했다.
(당시엔 사관학교가 곧 대학교 역할을 했고, 사회적으로도 남자라면 군복을 한 번쯤 입어봐야 한다는 시선이 있었기에 딱히 이상할 일은 아니다)
전역 이후, 이제는 전 세계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간편식사]를 시작으로 윤전기를 처음으로 상업적으로 개발하여 신문사와 잡지사를 차렸다.
윤전기 덕에 당시 파리에서 팔리던 신문, 잡지들을 모두 합친 것보다 기욤의 회사에서 만들어 내는 신문과 잡지 부수가 더 많았다고.
기욤 드 툴롱은 아마 이때의 경험으로 인해 기계 개발과 사용에 크나큰 관심을 가지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후로도 기존 사회에서 흔하지 않았던 새로운 판매방법이라던가 신제품이라던가를 줄줄이 내놓으면서 기욤 드 툴롱의 회사인 [이삭>은 급속도로 발전한다.
그런데.
3. 청년기.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20세도 되지 않았던, 그러나 개인의 부로는 프랑스 내에서 0.1퍼센트 안에 들던 그에게 찾아온 역사의 풍랑이었다.
폭정의 상징. 바스티유 감옥이 무너지며 시작된 프랑스 대혁명은 오늘날에도 많은 역사학자들이 연구주제로 삼는 단골 사건이다.
당시 파리 내에서는 기존 기득권에 부역하던 수많은 이들이 분노한 민중에 의해 폭행ㆍ고문을 당하고 심하면 사망에 이르렀는데 이때 기욤 드 툴롱은 친구들과 했던 자선 사업으로 인해 민중의 분노에서 비껴나갈 수 있었다.
심지어는 그걸 넘어서 일부 구에선 3신분 대표로 추대받기도 했는데, 기욤 드 툴롱은 자신의 사업체가 있는 구를 택해 정치인으로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4. 정치인.
3신분 대표로 처음 의회에 출석하게 된 기욤 드 툴롱은 굉장히 잘 대접 받은 1신분, 2신분 대표와는 달리 3신분 대표에게 주어지는 대우가 개차반인 것에 분노하고 이때부터 혁명파의 일원으로 일선에 나서게 된다.
[아잇 씻팔! 못 참겠다!] [- 기욤 드 툴롱, 1789년 -] [그것 참 슬픈 일 아닙니까?] [- 기욤 드 툴롱, 1789년 -]그는 라파예트, 로베스피에르, 기요탱, 시에예스와 함께 혁명파의 일원으로서 테니스코트의 서약, 루이 16세 축출, 오를레앙공 옹립, 그 이후 타락한 오를레앙(루이 17세)의 친위 쿠데타에 이르기까지 혁명정부의 최일선, 그것도 재무총감으로서 종횡무진하며 활약하게 된다.
일부는 이런 모습을 높게 사, 루이 17세의 친위 쿠데타 당시엔 친위 쿠데타 계획의 중심이었던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 장군은 혁명파로 전향하였으며, 쿠데타 계획을 폭로하여 당시 혁명파를 수렁에서 구해냈다.
*이후 뒤무리에 장군은 지역사령관 및 누벨 프랑스 총독으로 부임하는 등 혁명정부 아래서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여러모로 인생역전을 보여주는 예.
쿠데타 이후, 헌법이 제정되고 나라가 안정화되자 그는 신성로마제국에 가는 특사로 파견되는데 이는 당시 신성로마제국이 프랑스의 부채 중 상당 부분을 쥐고 있었던 채권자라서 그렇다.
그곳에서 기욤 드 툴롱은 신성로마제국 내에도 부조리와 구체제에 대한 분노가 팽배한 것을 확인하고는 각국의 전제군주들이 저 분노를 무력으로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프랑스를 공격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돌아온 이후,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인 라파예트와 더불어 프랑스군을 개혁하고 혁명정부에 충성하는 충성파 군인을 선별하는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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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혁명전쟁.
기욤의 우려는 현실로 나타났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틸지트 조약을 근거로 프랑스 혁명정부에 선전포고를 날렸으며 곧장 진격을 시작했다.
육군은 어느 정도 비벼볼만 했지만 문제는 해군.
이때 기욤은 영국으로 넘어가 당시 수상이었던 윌리엄 피트와 대면해 담판을 지어 해군 지원을 얻어낸다.
심지어는 어떻게 했는지 왕립해군을 상대로 군납매점을 열 권리까지 얻어냈는데, 이는 기욤 최면술사설의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현재 학계는 아마 둘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여하튼 이때를 기점으로 [이삭> 영국에도 영향력을 침투시키기 시작하는데, 이는 후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일어난 [검은 주식시장]과 맞물려 영국 경제에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힌다.
아울러 이때 러시아군과 코르시카에서 일전을 벌여 패퇴시킨 프랑스군 장성이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동기동창끼리 한 사람은 최연소 장성, 한 사람은 정부 수반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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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누벨 프랑스와 [이삭>의 다국적 기업화.
혁명전쟁 이후, 기욤 드 툴롱은 군수물자 생산과 그 생산품의 효과적인 운송, 그리고 산업기반시설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프랑스는 온 사방이 전제국가로 둘러싸인 가운데 유일하게 존재하는 입헌군주제 국가가 영국이라는 악몽과도 같은 상황에 놓였었는데.
만일 더 생산량으로 더 많은 총포로 더 많은 병력을 무장시키지 않는다면 저 나라들의 연합군에 의해 프랑스가 초토화되고 말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을 것이다.
기욤은 대서양을 건너 누벨 프랑스로 넘어가 토마스 제퍼슨 그리고 조지 워싱턴 등 미국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프랑스-미국 오대호 연합 철강사를 출범시켰고 기술개발을 통해 대형 고로를 발명,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철강 생산량을 가졌던 스웨덴을 재껴버리는 위엄을 달성하게 된다.
이로써 [이삭>은 대서양 건너에도 지사를 내게 된다.
[이거 설계도 쓴 사람이 누구라고? 당장 잡아 오세요. 얼마를 쓰든 상관없습니다.] [- 증기기관차 설계를 본 기욤 -]기욤은 오대호에서 바다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관차’를 도입해 획기적으로 운송 시간을 단축하고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이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미국-누벨 프랑스 횡단철도가 뺏기 전까지 세계 최대 단일 노선 철도라는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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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죽음의 상인인가?
기욤 드 툴롱은 혁명전쟁 이후, 군수산업에 어마어마한 투자와 R&D를 진행했는데 이 중 대다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자유연합군의 큰 힘이 되었다.
증기자동차, 병조림, 통조림, 증기군함, 퍼커션캡 소총 등등.
그러자 후세 학계에서는 기욤이 이 비대해진 군수산업을 이용하고자 전쟁을 획책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견 또한 나왔는데.
이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는 의견이 대세가 되었다.
군수산업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은 맞았지만 전쟁을 획책한 것은 기욤이 아니라 전제군주들이었다.
군수산업은 기욤이 대불포위망에서 어쩔 수 없이 치켜들어야 했던 방패라는 것이다.
기욤이 만약 전쟁을 획책하고자 했다면 선전포고를 기다릴 것이 아니라 먼저 침략전쟁을 하지 않았을까? 그 시대는 제국주의의 시대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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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세계대전, 그리고 그 후.
제 1차 세계대전은 누가 뭐래도 자유와 폭정이 맞서 싸운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전설을 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자세한 내용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문서로)는 민주주의로 세워진 민주정부에서 권한을 위임받았으나, 나머지 동맹군은 전부 전제군주의 왕명과 황명에 따르는 마리오네트들이었다.
과연 공화국 멸망의 날이 오는가, 아니면 온 세상에 자유ㆍ평등ㆍ박애를 퍼트리는가.
모 아니면 도의 상황.
기욤 드 툴롱은 통령에 다시 한번 올라 두 번째 전시 정부 수반을 맡았으며 자신이 키운 그 압도적인 산업능력과 생산능력, 그리고 행정력으로 무려 150만 대군을 양성해 전 유럽을 난타하기 시작했다.
[기적입니다. 그건 기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일이죠. 기욤 드 툴롱 이전과 비교해 프랑스의 철강 생산은 1600% 증가했고, 화약생산량도 5배에 가까이 증가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이 이런 능력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 제레드 다이아몬드, [총, 균, 쇠, 그리고 사상> 저자 -]기욤 드 툴롱이 바라보는 세계관은 정확했다.
그가 만들어 낸 물량의 파도는 온 동맹군을 익사시켰고 대육군의 장성들은 압도적인 물량과 화력, 기동력으로 적을 유린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전쟁 이후, 이 세상이 어떤 식으로 재편되어야 할지 명약관화하게 알아차렸고, 더 이상 강대국은 영토에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닌 시대정신을 선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그는 유럽 각국의 계몽주의자,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공화주의자를 만나 그들과 친교를 다졌으며 이들에게 막대한 물자와 현금을 투입해 지원하기도 했다.
이들은 고스란히 전쟁 후 각국 신정부를 꿰차며 친프랑스적인 태도를 유지했으며 기욤 드 툴롱 또한 이들을 보스가 부하를 대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앞서서 이끄는 리더의 모습을 보여주며 팍스 프란키아는 120년 동안 유지되었고 파시즘의 대두로 인해 잠시 끊겼다가 다시 이어져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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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욤 드 툴롱의 1820년대 이루어진 동양해방전쟁은 뭇 학자들의 의구심을 자아내는 일 중 하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의 ‘세계’는 유럽과 아메리카, 조금 더 해서 인도 정도까지였고 아시아는 그 논외였다.
그러나 극동의 한반도와 중국 대륙에서 일어난 참상을 들은 기욤 드 툴롱은 온 세상 사람을 압제에서 풀어내겠다는 신념으로 전쟁을 결의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반도에서의 전쟁이 불과 한달 여 만에 끝난 것과 달리 중국 대륙에서의 전쟁은 4년을 갔지만 병력 대신 물자를 지원했던 프랑스 자체만 본다면 별로 타격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기욤이 전쟁으로 국제연합 최고 의장 자리에 4년을 더 앉게 되었을 뿐이다.
어느 학자들은 우스갯소리로 기욤 드 툴롱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라고 부른다.
10. 평가.
기욤 드 툴롱은 명백히 21세기 현대 사회의 시초가 되는 자유주의, 공화주의, 민주주의의 거두이자 그 보호자였다.
그와 같은 이가 있었기에 현대인들은 자유롭고 평등하고 박애하는 삶을 이어받아 살 수 있게 되었고, 그와 함께 피 흘린 이들은 이 세상에 정의와 자유가 숨 쉴 수 있게 터전을 가꾸었다.
그는 우리 사회에서 자유와 평등과 박애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영원히 교과서에서, 때론 TV에서, 때론 영화관에서 우릴 맞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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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삭>
[이삭>은 기욤 드 툴롱이 설립한 프랑스의 회사로, 식품ㆍ철강ㆍ기계ㆍ자동차ㆍ미디어ㆍ전자제품 등 수십 개 계열사로 이루어진 초거대기업이다.모든 계열사가 전 세계에서 최소 22.4%, 최대 42.7%의 점유율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나 식품, 철강, 자동차 등 전통적으로 선도해온 제품 개발 기술력에 한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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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H그룹의 창립자인 정 모 회장이 [이삭>의 대한민국 지사에서 근무하며 경험을 쌓은 것으로 유명하다.
지배구조는 기욤 드 툴롱의 8대손인 올리비에 드 툴롱 씨와 자회사들이 도합 35%를 보유하고 있으며 나머지 65% 중 시장에 나와 있는 것은 49.9%이고 나머지 15.1%는 묘연하다.
문제는 15.1%에 달하는 지분이 어디에 있는지 기욤 드 툴롱 사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시장에서 관측된 지분에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에 따라 전문가들과 애널리스트들은 수백 년 동안 잠자고 있던 15.1%의 지분이 일어난 것이 아니냐, 일어났다면 도대체 무슨 계기인가, 또 누가 움직였는가 등 희대의 토픽으로 삼아 연신 입씨름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