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ld Finger RAW novel - Chapter 171
171. 백석파의 대혈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우문한도를 불렀다.
“우문선생!”
“무슨 일이오?”
“또 다른 일이 있는데 말씀 드려도 괜찮겠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생각에는 어떠십니까? 나에게 알려 주어도 좋을 것 같소?”
“제 생각을 알려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오빠가 아무에게나 말하지 말라는 것이에
요.”
우문한도는 눈을 빛냈다.
“아가씨! 어느 쪽의 이야기요?”
“저 오빠에 관한 이야기예요. 오빠는 내일 싸움에 자신이 없나 봐요. 그래서…”
백리빙은 그 다음 말이 차마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오빠가 말하지 말란 것인데…”
우문한도는 숙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 일은 매우 중요하니 숨김 없이 이야기하시오. 소대협이 말하지 말라 하였지만 우리에겐 운
명이 걸린 문제요.”
“그러나 안심하셔도 돼요. 오빠는 뒷일을 준비해 놓았으니까요.”
우문한도는 깊은 관심을 갖고 다그쳐 물었다.
“무슨 준비요?”
“오빠는 나에게 무공비록을 맡겼어요. 만약 내일 싸움에서 오빠에게 무슨 화라도 있으면 즉시
악언니를 찾으래요. 그래서 그 무공비록을 그녀에게 주고 복수를 부탁해 달라고 했어요.”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소대협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소. 만약 소대협이 죽은 다음에는 그의 복수를 할 수 있는 사
람은 오직 악낭자뿐이오. 그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준다는 것은 매우 잘한 일이오.”
백리빙은 금방 울상이 되었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요?”
우문한도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쓴 입맛을 몇 번 다시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이것은 너무나도 큰 일이라서 저도 얼른 생각이 안 나는구려. 소대협이 내일 싸움에서 패한다
면 강호는 영영 무너지고 마오. 악의 무리에게 짓밟히는 것이란 말이오. 그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
것이오. 이 늙은이 도 불사신은 아니오. 내 늙은 목숨을 아깝게 생각지 않고 소대협을 돕겠소.”
백리빙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선생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럼 선생께서는 빨리 오빠를 도와야 되잖아요. 오빠를 구할 수 있는
좋은 방안을 생각해 보세요. 네?”
그녀가 다급해 하는 것과는 달리 우문한도의 말은 느릿느릿했다.
“글쎄요. 저는 한 가지 묘안을 생각했습니다만… 심목풍은 만만 치 않은 상대이기 때문에 마음
이 놓이지 않소이다. 그도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을 것이오. 그러므로 이번 싸움은 무공을 겨
루는 것보다 지혜의 대결이 될 것이오.”
그는 백리빙을 힐끗 쳐다보고 다음 말을 이어갔다.
“소대협이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준다는 것도 모두 깊은 뜻이 있기 때문이오. 악낭자가 그 무
공비록을 넘겨 받는다면, 그녀가 강호의 앞날을 책임지게 되는 것이오. 그러나 악낭자는 편지 한
통을 남기고 훌쩍 떠나 버렸으니…”
우문한도의 이야기는 쉽게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소대협은 무공비록을 악낭자에게 줌으로써 다시 그녀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뜻이오. 악낭자 혼
자 달리는 것을 막는다는 것이오.”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이제 보니 숨은 뜻이 있었군요.”
우문한도는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나쁜 뜻은 없을 것이오. 아가씨의 말대로 만약에 대비하여 그 이록을 맡겼
을 뿐이오.”
백리빙은 얼굴을 붉혔다.
“우문선생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조금은 안심이 됩니다.”
“아가씨는 편히 쉬시오.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합시다. 우리는 적의 행동을 살피고 우리의 행동
을 결정할 수밖에 없소. 그리고 우리의 세력이 결코 심목풍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소.”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이고 정실로 들어갔다.
소영은 여전히 운기조식의 상태로 눈을 감고 있었다.
백리빙은 살그머니 그의 곁을 지나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영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소영의 모습은 매우 숙연했다.
그는 백리빙이 들어온 것도 모르는 듯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영의 얼굴은 차츰 변했다. 먼저 안색이 변하였고 이어 미간이 찡그려졌다.
‘오빠는 무엇인가 신중하게 생각하고 있구나.’
백리빙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렇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얼마의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아니, 하루가 지나 버렸다.
다음 날은 먹구름이 해를 가리고 아침부터 비를 뿌렸다.
소영이 정실을 나와 대청으로 나갔을 때는 우문한도를 비롯하여 몇몇 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
러나 어젯밤과는 두드러지게 한산하였다.
우문한도는 묻지도 않은 말을 꺼내어 삭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오늘 노대협이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무림 동도들이 무려 오백 명이나 모였소이다.”
소영은 다소. 마음이 안정되었다.
“그래요? 그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습니까?”
손불사가 대답했다.
“이미 우문선생의 지시를 받고 약속 장소로 떠났소. 그들은 십 조로 나뉘었는데 매조마다 오십
명의 무사가 지키고 있소.”
소영은 대뜸 이마를 찌푸렸다.
“심목풍의 수작이 악랄하거늘 어찌 그들을 먼저 보냈소? 만약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공격을 받
으면 어떡하려고…”
이번에는 무위도장이 말을 받았다.
“염려 마시오. 그들 십 개조는 서로 지원할 수 있으며, 매조마다 다시 다섯 명씩 패가 있소. 그
들은 모두 훌륭한 무공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리 쉽게 당하지는 않을 것이오. 더군다나 본파의 몇
제자들을 뽑아 소대협의 친구로 변장시켰소. 중주이고, 종남이협, 전엽청, 사마건, 초곤산, 당문기,
육혼장 등 비교적 무공이 고강한 사람으로 변장시켜 항시 앞뒤로 순시하도록 하였소. 그러니 심
목풍이 선뜻 손을 쓰지 못할 것이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별로 큰 피해는 없을 것이오.”
우문한도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심목풍은 소대협과 싸우기 전에는 자기의 체력을 소모하지 않을 것이오.”
연이어 손불사가 긴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소대협, 나는 소대협에게 탄복하고 있소.”
“무엇 때문입니까 ”
“소대협이 우문선생을 꼽은 것 말이오. 그 고명한 판단으로 우문선생을 알아봤다는 것만도 오늘
의 승리를 약속한 것이오. 심목풍에 비해 우문선생의 지혜는 결코 뒤지지 않으므로 소대협께서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소.”
소영은 얼굴을 약간 붉혔다.
손불사는 천천히 다음 말을 꺼냈다.
“전에는 심목풍에게 별 관심을 쏟지 않았었소. 그리고 그의 지혜에도 탄복하지 않았소. 그러나
이번에 그가 교묘한 수단으로 무림의 동도를 포섭하는 것을 보고는 크게 감탄하였소. 그는 정말
로 지혜가 하늘 같은 인물이오. 그가 악인이 아니고 다같은 동도라면 무림은 놀랄만큼 번창될 것
인데 아깝게도… 만약 우리에게 우문선생이 없었더라면 우린 꼼짝없이 상대의 간계에 빠졌을 것
이오.”
우문한도는 가볍게 허리를 굽혔다.
“그것은 노선배님의 과분하신 칭찬이시오.”
손불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절대로 과장된 말이 아니오. 우문선생은 우리를 지혜로써 살리고 있는 것이오.”
우문한도는 무안한 생각을 가지고 곧 화제를 바꾸었다.
“자, 시간도 거의 다 되어가니 이젠 가봅시다.”
일동은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섰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그리 많은 비는 아니지만 꾸준하게 오니 조금씩 물이 괴인 곳도 있
었다.
오늘의 대결은 선과 악의 운명을 판가름하는 중대한 싸움이었다.
다섯 사람은 비를 맞으면서 바삐 길을 재촉했다. 모두가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
었다.
손불사, 무위도장 그리고 백리빙은 무어라 입을 열어 소영을 위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너무도 숙
연한 분위기에 말려들어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길을 가면서도 정신을 통일시켰다. 머릿속에는 수많은 검초가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싸워 적을 물리쳐야 된다. 그래야만 강호 무림
이 쓰러지는 것을 다시 세울 수 있다.’
다섯 사람의 빠른 걸음은 순식간에 삼십여 리를 달려 대결 장소에 도착하였다.
평시에는 황량하기만 하던 백석파(白石坡)가 오늘은 크게 변해 있었다. 주위는 비를 맞고 서 있
는 군호들로 입추의 여지도 없었다.
백석파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그 이름 그대로 흰돌이 무수히 많이 깔려 있었다. 그 흰돌이 빽빽
하게 들어찬 군호들로 인해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많은 군호들은 대부분이 경장을 하고 제각기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소영이 들어서자 누군가가 우렁찬 소리로 여러 사람에게 알렸다.
“소대협께서 당도하셨소.”
그 소리에 맞추어 구름같은 군중들의 시선이 모두 소영에게 쏠렸다. 그들은 모두 정중한 예를
표하였다.
소영도 일일이 예로 답하며 그들에게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분! 고맙소이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무림의 장래를 염려하는 뜻에서 모이신 여
러분께 재삼 감사를 드립니다. 저에게 예의를 올리지 마십시오. 여러분들께서 그러시면 소생은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 때 군호들 틈에서 싸늘한 광채가 번쩍이더니 소영에게 뻗어왔다. 소영은 악수하던 손을 재빠
르게 풀고 날아 오는 암기를 잡았다. 그것은 기독이 묻혀 있는 유엽비도(柳葉飛刀)였다.
“자객이다!”
누군가가 소리치자 군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여라!”
“그놈이 누군지 돌로 찧어 죽여라!”
군호들은 일제히 열 개조로 나누어졌다.
그들은 심목풍의 공격이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백여 군호들이 움직이는 것은 일사분란했다.
손불사와 소영 그리고 무위도장은 내심 탄복하였다.
‘아, 우문선생은 과연 비범한 재질을 지녔구나. 불과 하룻만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데 뭉쳐
놓았으니… 마치 수년간 훈련받은 군사 같구나.’
소영은 수중에 쥐고 있던 암기를 땅에다 버리고 주위를 훑어 보았다.
암기가 날아온 방향에서 한 인물을 찾아 내었다.
그는 경장차림이었지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당황하는 눈치였다.
소영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소이다. 소생은 항상 암기를 당하는 몸이라 이제는 익숙해졌소. 이번에 실패하였다고 너무
실망하지는 마시오.”
그리고는 몸을 돌려 가운데로 나갔다.
사방의 군호들은 소영의 여유있는 태도와 말에 더욱 용기를 가졌다.
소영이 앞으로 십여 보쯤 걸었을 때였다. 등 뒤에서 날카로운 외침이 들렸다.
“소대협! 멈추시오.”
소영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소리를 지른 사람은 조금전에 소영에게 암습을 했던 경장 차림의 장한이었다. 그는 어느새 날카
로운 검을 들고 있었다.
“당신은 과연 일대의 기협이오. 분명히 내가 암기를 날린 것을 알면서도 몇 마디 말만 하였을
뿐 손을 쓰지 않는구려. 나는 심목풍의 제자요. 그러나 지금 당신을 보고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
소.”
그는 이십 사, 오 세 정도의 젊은이였다.
장한은 말을 끝마치자마자 들고 있던 비수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붉은 피
가 쉴새없이 쏟아졌다.
그는 그대로 잠시 서서 피를 흘리다가 이내 힘없이 쓰러져 버렸다.
소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운 사람이로군.’
소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중앙으로 나갔다.
중앙에는 나무를 세워 만든 커다란 원이 있었다.
그것은 천정도 없이 대강 울타리만 띄엄띄엄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곳이 대결 장소인가?’
소영은 뒤따르고 있던 우문한도에게 물었다.
“이것은 누가 만든 것입니까?”
“우리가 만들었소.”
“그럼 왜 주위에다 울타리를 만들었소?”
“그것은 심목풍이 암수를 못 쓰게 만든 것이오. 그 나무들이 있기 때문에 소대협의 눈을 속이지
못한다는 것이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기도 하군요.”
소영이 그 주위를 한 바퀴 돌고 나자 입구 쪽에서 군호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왔구나.’
소영이 눈길을 돌려 보니 과연 수십 필의 준마가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백리빙에게 입을 열었다.
“빙아야, 내 부탁을 절대로 잊지 말아라.”
백리빙은 고개를 끄덕였다.
“잊지 않겠어요. 오빠! 몸조심 하세요.”
소영은 우문한도에게 눈길을 던졌다.
“우문선생, 내가 불행히도 이 싸움에서 패한다 해도 우선은 복수할 생각을 마십시오. 빙동생을
데리고 이곳을 빠져 나가기 바랍니다.”
“안심하시고 싸우시오. 심목풍은 소대협의 적이 못 되오. 오늘 이 싸움에선 틀림없이 심목풍의
목을 벨 수 있을 것이오. 조금도 뒷일은 걱정 말고 힘껏 싸워 주시오. 이 많은 사람들이 소대협의
승리를 빌고 있소이다.”
소영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글쎄요. 저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만…”
그는 주위를 훑어 보았다.
심목풍과 그 일행이 백석파에 당도하고 있었다.
심목풍이 제일 앞에 있었고 바로 그 뒤를 따라 붉은 가사를 걸친 중이 보였다. 그 중은 무엇이
좋은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소영은 대뜸 그를 알 수 있었다.
‘삼성곡에서 의부에게 무공을 배울 때 방해를 놓던 화상이로군.’
그 중의 왼쪽손에는 세 개의 손가락만 보였다.
‘의부인 남일공은 무공이 심후하였는데도 그를 물리치지 못했었다. 의부께선 마지막 수법으로
어검술(馭劍術)을 펼쳐 그의 손가락 두 개를 잘랐다. 그 동안 그도 많은 무공의 진전이 있었을 터
인데… 내가 상대키는 매우 어렵겠구나. 심목풍이 이번 제의에 선뜻 응낙한 것도 모두 이 중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구나.’
소영은 그를 당할 사람은 이곳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기를 생각하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심목풍의 일행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붉은 가사를 입은 중의 뒤를 따라 무공자가 보였고 금화
부인도 보였다.
그리고 조금 사이를 두고 산골짜기에서 소영과 장풍을 겨루었던 등륜(鄧倫)이 따르고 있었다.
백화산장의 정예가 모두 나온 것 같았다.
심목풍이 먼저 말에서 내리자 뒤따르던 군호들도 말에서 내렸다.
그들은 한결같이 심목풍의 뒤만 따르고 있었다.
심목풍은 항상 거만한 표정이었지만 홍의화상에게는 매우 공손하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화상에게 입을 열었다.
“대사께서 먼저…”
홍의화상은 가볍게 웃음을 띠었다.
“오늘은 당신이 주인 아니오? 그런데 내 어찌 그 영광된 자리를 빼앗겠소.”
당신이 소영을 죽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오. 만약 당신이 그를 당해 내지 못하면 빈
도가 나서겠소.”
홍의화상은 별로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장내의 모든 군호들이 그의 무
공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손불사만은 그를 알고 있는 듯 흥의화상을 보자마자 대뜸 안색을 바꾸었다.
손불사는 소영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다 그만 두었다.
‘안 된다. 지금 그에게 말하면 사기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것이다.’
심목풍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소영에게 입을 열었다.
“자네와의 약속대로 이렇게 당도하였네.”
소영은 묵묵부답으로 결투 장소로 걸어갔다. 심목풍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라 둥근 원 안으로
들어섰다.
소영은 정중하게 포권을 하고 입을 열었다.
“오늘의 대결은 서로의 생사를 결정 짓는 것이오? 그러니 절대로 상대에게 뻗는 공격을 멈추지
마시오. 자, 당신이 먼저 공격하시오.”
심목풍은 냉소를 띠며 주위를 다시 훑어보았다. 그는 주위에 모여 있는 수많은 군호들을 보고
내심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십여 년 동안 온갖 수단을 써서 동도를 모았지만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으지는 못했다.
그러나 소영은 강호에 나온 지 불과 이 년뿐인데 어떻게 해서…’
그는 품속에서 길이가 두 자 정도 되는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먹처럼 검은 색을 띠
고 있었으며 단검과도 비슷했으나 비수는 아니었다.
심목풍은 그것을 오른손에 움켜 잡았다.
“흥!”
소영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심목풍은 쓴웃음을 입가에 흘리며 다시 품속에서 금빛이 번쩍이는 단검을 꺼내 왼손에 움켜 잡
았다.
그는 소영을 빤히 쳐다보고는 냉랭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미 십여 년 동안 무기를 잡아 보지 않았다네. 오늘 생사를 판가름하는 결전이라니 부득
이…”
“그러시오?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하오이다.”
소영은 품속에서 금빛이 찬란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심목풍은 소영이 뽑아든 단검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냉랭하게 말을 꺼냈다.
“복마금검(伏魔金劍)이로군.”
“그렇소. 당신은 이 단검을 알고 있나 보구려…”
심목풍은 긴장된 신색으로 한참 동안 복마금검을 바라보았다.
“그 검은 오랫 동안 강호에 나타나지 않던 것인데…”
“당신은 이 검을 두려워하오?”
“그것은 비록 날카롭고 신비한 위용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을 쓰는 사람에게 달려 있지!”
심목풍은 왼손을 휘둘러 단검으로 소영의 가슴을 찔러 갔다.
소영은 그 자리에서 금도를 내리쳐 상대의 일초를 막은 후 재빠르게 역습을 하였다. 그는 상대
의 검초가 변하기도 전에 복마금검을 곧장 뻗어 역시 상대의 가슴을 노렸다.
심목풍도 자리를 뜨지 않았다.
서 있는 그대로 오른손에 들었던 검은 물체로 복마금검을 가볍게 막았다.
복마금검과 검은 물체가 서로 부딪치자,
“쨍!”
하는 날카로운 금속성이 울렸다.
심목풍은 오른손에 힘을 주고 힘껏 앞으로 밀쳤다.
소영은 뒤로 몇 발 물러서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저것은, 저것은 자석이로구나!’
천하고수들의 싸움에는 티끌만한 틈도 있어서는 안 되었다.
소영이 뒤로 물러서며 놀라는 기색을 알아차린 심목풍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심목풍은 단검으로 날쌔게 공격을 가했다.
그 단검은 금빛을 번쩍이며 소영의 왼쪽 어깨를 향했다. 그 초식은 매우 날카로왔고 살기를 지
니고 있었다.
우문한도와 그의 모든 군호들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을 했다.
‘아, 소대협이 화를 당하는구나.’
그러나 소영은 뒤로 물러서서 웃기만 하고 있었다.
장내의 모든 사람은 소영이 어떻게 해서 심목풍의 일 초를 피했는지를 몰랐다. 그것은 다만 일
순간의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소를 띠고 있는 소영의 왼쪽 어깨는 붉게 선혈이 물들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 큰 상처는 아닌
듯싶었다.
두 사람은 잠시 마주보며 대치했다.
“이얏!”
갑자기 날카로운 기합소리와 함께 소영의 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는 공중에서 검세를 회전
시키며 두 차례 싸늘한 검광을 흩뿌렸다.
심목풍도 육중한 몸을 솟구치며 일갈하였다.
“받아라!”
그는 외침과 함께 단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두 줄기의 섬광이 번쩍이더니,
“쨍그랑!”
금속성이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은 누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땅으로 내려섰다.
소영은 검날같은 눈썹을 곤두세우고 한 자리에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의 표정은 심각하였다. 그
러나 건너 쪽에 내려선 심목풍의 안색은 창백하였다. 그는 눈빛을 빛내고 있었지만 어딘가 모르
게 불안한 기색이 보였다.
‘어떻게 됐을까?’
두 사람의 승부는 아무도 몰랐다.
그들이 공중에서 휘두른 검광 때문에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두 사람은 이 장
정도의 사이를 두고 심각한 대치를 하였다.
잠시 서로를 노려보는 가운데 소영이 먼저 손을 썼다.
그는 복마금검으로 날카로운 검초를 전개시켰다.
심목풍도 이에 맞서 왼손의 단검으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짓쳐나갔다.
소영의 검초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기괴하여 무수한 검영을 내뿜고 있었다. 화산의 담운청 검
법과 각대문파의 장점만 곁들인 검초였던 것이다.
심목풍은 그 날카로운 공격에 점차 수세로 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수중의 검은 자석은 용도가 매우 넓었다. 소영의 단검이 매번 빗나가는 이유도 바로 그
것에 있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검초는 백여 초를 넘었다.
서로 백여 초를 나누자 아무리 심목풍이 자석에 의용이 넓다 해도 복 마금검을 당해 내지 못했
다.
심목풍이 계속 수세로 몰리자 홍의화상이 앞으로 나섰다.
“심대장주! 멈추시오.”
그리고는 소영을 바라보며 냉랭하게 말을 이었다.
“이 늙은이가 나서 보리다.”
심목풍은 때마침 지탱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도달했었다.
‘옳지 이 기회에…’
그는 소영이 잠깐 주춤하는 사이에 단검을 휘두르며 거세게 덮쳐 왔다.
심목풍은 거센 일격을 보낸 후 소영이 주춤하는 사이에 밖으로 나가 휴식을 취하려 하였다. 그
러나 이번만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피하든가 뒤로 물러설 것으로 생각했던 소영은 그 자리
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소영은 오히려 호통을 쳤다.
“심목풍! 도망갈 생각이냐?”
소영은 계속 삼 초를 반격했다. 그의 반격은 복마금검을 휘두르는 것만이 아니다.
삼 초를 날리는 동시에 왼손을 뻗어 탄지신공을 전개했다.
심목풍은 적잖이 당황하여 검은 자석으로 금검을 막으려 하였다.
‘네가 감히 나를!’
그러나 그의 건방진 생각은 일시에 스러지고 말았다.
소영의 복마금검을 막으려고 검은 자석을 휘두르는데 돌연 어깨가 뻐근해짐을 느꼈다.
‘당했구나!’
그는 오른손에 힘이 쑥지며 자신도 모르게 자석을 떨어뜨렸다.
소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죽어라!”
외침과 함께 금검을 날쌔게 내리쳤다.
금빛 검광이 한 줄기 직선을 긋는 듯싶자, 심목풍의 오른쪽 팔이 절단되어 버렸다.
“으악!”
심목풍의 안색이 금방 새파랗게 질렸다. 잘려진 팔에서는 순식간에 선혈이 솟아 나왔다.
소영은 내심 쾌재를 불렀다.
‘흥! 너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리고는 연이어 금검을 휘둘러 상대의 심장을 겨누었다.
심목풍은 이제 사경에 처하게 되었다.
소영의 금검이 거의 심목풍 가슴께로 닿으려는 순간, 돌연 한 줄기의 거센 장력이 뻘어 왔다.
그것은 소영의 허리를 향하고 있었다. 소영은 최후의 일격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우선 그 장력
부터 피해야 했다.
심목풍의 마지막 목숨은 아슬아슬하게 부지한 것이다.
소영에게 장력을 보낸 사람은 바로 홍의화상이었다. 그는 몸을 솟구쳐 올리더니 이내 소영과 심
목풍 사이로 내려섰다.
“소대협! 빈도가 맞서 보겠소.”
홍의화상은 무작정 공격을 시작하려 했다.
이 때 손불사의 우뢰 같은 고함소리가 들렸다.
“적(賊)화상! 이제는 차륜전법으로 나오겠다는 것이냐?”
그는 말을 끝내자마자 몸을 날려 안으로 들어왔다.
홍의화상은 냉랭한 코웃음과 함께 손불사에게 일장을 날렸다.
손불사도 그와 정면으로 장풍을 뻗쳐내었다.
“펑!”
두 사람의 장풍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 여파로 생긴 회 오리 바람이 주위의 먼지를
쓸고 지나갔다.
손불사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뒤로 세 발짝을 물러났다.
홍의화상은 소영에게 눈길을 돌리고 냉랭히 입을 열었다.
“너는 장산패의 제자이지, 그렇지?”
“그렇소! 나도 당신을 본 적이 있소.”
홍의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참 잘 됐군. 내 만약 너를 죽이더라도 그 이유를 모르지는 않겠지?”
소영은 냉소를 지었다.
“흥!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아는 법, 대사와 내가 싸운다면 누가 죽을지 모르오. 너무 자신을
갖지 마시오.”
홍의화상은 한 발 앞으로 내디디며 말을 받았다.
“흥, 매우 당돌한 말이로군. 장산패가 나와 맞섰어도 그런 말은 못했는데…”
소영은 그 이상은 말하지 않고 온 정신을 검신에다 모았다.
‘상대는 무서운 적이다. 잘못하면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싸움이다. 내 이제까지 배우고 닦
은 무공을 힘껏 발휘하여 생사를 결정지으리라.’
홍의차상은 그 모양을 보더니 대뜸 안색이 변했다.
“옳지! 네가 벌써 장산패의 어검술(馭劍術)을 터득했구나.”
이번에도 소영은 침묵을 지켰다.
이럴 즈음 심목풍과 손불사는 밖으로 나가 각자 동도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손불사는 홍의화상과 장력을 나눌 때 약간의 내상을 받았던 것이다.
밖은 양쪽 동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틈예서 우문한도가 군호들에게 무엇을 지시하고 있었다.
소영은 그런 것들을 볼 정신이 없었다. 정신과 진기를 모두 복마금검에 모으고 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노려만 보며 심각한 대치를 하였다.
얼마가 그렇게 지났을까.
돌연 한 가닥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홍의화상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가 몸을 솟구치는 순간, 소영도 삼장이나 높게 공중으로 솟았다. 그리고 나서 금빛의 검초와
붉은 그림자가 허공에서 무엇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검광과 붉은 그림자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동안의 대결 후 먼저 소영이 땅으로 내려섰다.
홍의화상은 뒤따라 내려서더니 곧장 동쪽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가 도망가는 길에는 붉은 피가 떨어졌다.
흰 돌 위에 뿌려진 피는 유독 선명하게 보였다.
그 모양을 보던 소영은 자신도 모르게 무릎이 꺾여 버렸다.
‘아, 나도 다쳤구나.’
그의 희미한 시야에 두 사람이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두 사람은 우문한도와 백리빙이었다.
소영은 두 사람에게 들리는 것을 느끼며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가 지났는지 수군거리는 인기척을 느끼고 번쩍 눈을 떴다.
소영은 제일 먼저 본 것은 화려하게 수놓아진 천정이었다.
‘내가 왜 이런 곳에…’
그는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는 백석파의 싸움터인 줄로 알고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리니 시야에 우문한도, 백리빙, 상팔, 두구, 남옥당이 숙연한 표정으로 자기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아, 상형과 두형도…’
소영은 중주이고가 보이자 자신도 모르게 반가운 웃음을 띠었다.
중주이고는 숙연했던 표정을 바뀌며 활짝 표정이 밝아졌다.
소영이 정신을 차린 것을 보고 제일 기뻐한 것은 백리빙이었다.
“천지 신명께 감사드립니다. 오빠를 다시 살려 주셨으니…”
소영은 그 소리를 들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자 우문한도가 손을 저으며 만류했
다.
“소대협, 움직이지 마시오. 소대협의 내상은 좀 큰 편이오.”
소영은 다시 누우며 물었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소?”
백리빙이 긴 한숨과 함께 대답했다.
“꼬박 칠 일 동안이에요.”
소영은 깜짝 놀랐다.
“꼬박 칠 일 동안이나?”
우문한도가 말을 받았다.
“그렇소. 소대협의 내상을 독수약왕이 고쳐 주었소.”
“독수약왕도 왔었소?”
우문한도는 고개를 끄덕였다.
“왔었소. 이것은 무림 이래 처음 있었던 경사였소. 독수약왕뿐만이 아니라 강호의 각대문파의 장
문인과 각 방의 방주 등 백여 명의 영웅들이 문병을 왔었소. 물론 소림, 화산, 아미 등 구대문파
의 장문인도 왔었소. 특히 개방의 신(申)방주도…”
소영은 마음이 흐뭇해짐을 느꼈다.
‘나를 위해 온 강호가 나서는구나. 나는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그는 눈앞에 손불사가 보이지 않음을 이상히 여겼다.
“손노선배는 어떻게 되셨소?”
우문한도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막 대답을 하려는데 등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렸다.
“그 늙은이 말인가? 죽지 않았네.”
소영과 주위의 군호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손불사가 왼쪽 어깨 밑에 목발을 짚고 서 있었다. 그는 천천히 걸어오며 소영에게 말
했다.
“소대협은 좀 어떤가?”
소영은 반가운 마음에 호탕한 웃음이 터졌다.
“하하… 아마 죽지 않으려는 모양이오이다.”
손불사는 침상 곁으로 바싹 다가왔다.
“당시 소대협의 상처는 너무나 커서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랐네. 모두가 쩔쩔매며
비통에 잠겼을 뿐이었네. 그 때 나도 거의 정신을 잃어가고 있었지, 그러나 나는 소대협이 절대
죽지 않을 것이라 믿었었네. 나는 죽어도 소대협만은 살 것이라고 말이네.”
옆에서 백리빙이 말을 이었다.
“만약 독수약왕께서 때를 맞추어 오시지 않았다면… 그는 오빠이내상을 보더니, 조금만 늦었더
라면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 하였어요. 오빠는 그가 아니었으면 이렇게 빨리 깨어나지도 못했을
거예요.”
소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감사를 드려야지. 빙아야, 어서 나 좀 부축해 다오.”
여러 사람이 말리는데 또다시 냉랭한 음성이 들려왔다.
“감사할 것까지는 없네.”
바로 독수약왕이었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소영의 침상 곁으로 다가서더니 품속에서 조그만 옥병을 하나 꺼
냈다.
“이 병속에는 일곱 개의 영단이 있네. 이것은 하루에 한 알씩 복용하여야 되네. 만약 욕심을 부
려 조금이라도 더 먹으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말 걸세. 이 약을 칠 일 동안에 다 먹고 나면 거
의 완쾌될 것이니 과히 염려하지 말게.”
그는 소영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몸이 완쾌되면 내 부탁을 한 가지 들어 주어야 되네.”
소영은 누운 채 고개를 끄덕였다.
“노선배님, 아무 분부라도 좋습니다. 제 생명의 은인이시니 제 힘이 닿는 데까지 이행하겠습니
다.”
“그렇다면 나도 조금 안심이 되네. 내 부탁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니 안심하게. 몸이 완쾌되면
구궁산으로 가서 내 딸을 만나주게.”
소영은 의아한 표정으로 다그쳐 물었다.
“그녀는 왜 이곳에 오지 않았습니까?”
독수약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오게 되었네. 그녀는 구궁산에서 무공을 연마하다가 조금 다쳤다네. 노부는 더 권하지 않겠
네. 소대협이 가든 안 가든 더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일세.”
그는 수중에 들고 있온 옥병을 놓고 방을 나가 버렸다.
소영은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장탄식을 했다.
우문한도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소대협, 마음을 쓰지 말고 편히 쉬시오. 이제는 강호의 평화도 바로 눈앞의 일이오. 강호의 구
대 문파와 각 방이 분기했소. 그들은 남은 잔당을 소탕하기 위하여 지금쯤 백화산장을 공격하고
있을 것이오.”
소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럼 심목풍은 어찌 되었소?”
“그의 일행 수십 명은 악을 저주하는 신이 내린 벼락을 맞고 모두 죽었소.”
소영은 갑자기 어두운 신색을 하며 다그쳐 물었다.
“금화부인도 죽었단 말이오?”
우문한도는 잠시 사이를 두더니 힘없이 대답했다.
“죽었을 것이오. 당시 정세가 너무나 긴박하여 그녀에게 알려 줄 틈도 없었소이다.”
소영은 눈살을 잔뜩 찌푸렸다.
“그녀의 시체를 확인하였소?”
상팔이 말을 받았다.
“그 때의 상황은 처참했었소. 상대의 살과 뼈가 풍지박산되어 조금의 형태도 알아볼 수 없게 되
었소. 그런 정세로 보아 심목풍이나 금화부인은 절대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오.”
이번에는 백리빙이 입을 열었다.
“그 심목풍은 간악 무도하여 그런 죽음도 마땅해요. 그러나 금화부인은 엉뚱한 피해를 입은 것
같아서…”
소영은 홍의화상도 궁금하였다.
“그는 나에게 깊은 상처를 받았을 것인데…”
우문한도가 가벼운 기침을 하고 대꾸했다.
“그는 소대협의 일검을 맞고 많은 피를 흘리며 도망갔소. 아마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병신
이 될 것이오. 그가 목숨을 건진 것만도 천운이라고 생각해야 될 것이오.”
그는 신이 난 듯 조금 전에 한 말을 다시 꺼냈다.
“구대 문파와 개방에서는 제각기 십여 명의 고수를 내어 심목풍의 남은 잔당을 치고 있소. 그리
고 도망간 홍의화상도 찾고 있으니 곧 자세한 소식을 알게 될 것이오.”
손불사가 굵직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나무가 쓰러지면 그 위에 있던 원숭이들도 모두 흩어지게 마련일세. 그러니 백화산장도 이제는
그 운이 다하였네. 그리고 또하나 기쁜 것은 강호 무림들이 소대협께 삼면비룡패를 주기로 하였
네.”
소영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곧이 듣지 않았다.
‘설마…’
그는 삼면비룡패의 위용을 알고 있었다. 그 비룡패만 있으면 강호 어디를 가든지 무림을 다스릴
수 있었다.
아무리 천하 영웅들이라 해도 그 비룡패를 소지한 사람의 명령을 따라야 되는 것이다.
소영은 너무나 벅찬 일이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을 못하였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겠소이다. 우선 몸이나 완쾌하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부터 소리 지르며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그형, 소형! 이제 정신을 차렸소?”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마문비였다.
“사마건, 당원기, 육혼장이 소영의 영존, 영당을 모시러 갔소. 아마 삼 일 안으로 이곳에 도착할
것이오.”
소영은 부모님을 뵈올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부터 나왔다. 그는 여러 군호들에게 헛된 눈
물을 보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군호들은 누가 먼저 자리를 비켰는지도 모르게 모두 밖으로 나갔다.
백리빙은 열려진 창문을 닫고 소영의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오빠! 약을 드셔야죠.”
방 안에는 이제 소영과 백리빙 두 사람뿐이었다.
백리빙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빠, 약을 잡수시고 한잠 주무세요.”
소영은 그녀의 눈동자 속에 담겨 있는 정을 느끼며 부드럽게 백리빙을 불렀다.
“빙아야!”
백리빙은 섬섬옥수를 내밀어 소영의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
“말하지 마세요.”
소영은 그녀의 손을 꼭 부여 잡았다. 그녀의 손은 불덩이 같이 뜨거웠다. 얼굴까지도 붉게 물들
어 더욱 보기가 좋았다.
“빙아야, 고맙다. 독수약왕이 언제 이곳에 왔었느냐?”
“오빠가 부상당하고 꼭 삼 일 후예요.”
소영은 그녀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았다.
“네가 고생하였겠구나. 내 한 목숨이 무엇이라고…”
백리빙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예요. 오빠는 강호무림을 구한 거예요. 그날 심목풍이 다치지 않았더라면 강호의 각대문파
는 그의 독수에 피를 흘렸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