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GATE RAW novel - Chapter 408
화
*** 새로 시작하는 익숙한 이야기
박세진은 올해 스물일곱의 청년이다.
중산층의 외아들로 태어나서 그런대로 평탄한 삶은 살아온 인생이 박세진이다. 대학도 서울에 있는 4년제 대학을 나왔고, 학과도 전자공학이라 취직도 어렵지 않게 했다. 중견 인터넷 업체에서 영업 관리를 맡고 있는 회사 일은 그런대로 이제 익숙해져서 힘들지도 않고 아래로 부사수도 두어 명이나 있어서 시간을 쓰자면 여유로운 회사 생활도 가능하다. 스물일곱의 나이로 생각하면 그런대로 회사 생활도 꼬인 것은 아니다. 입사 2년차에 벌써 대리 딱지를 달고 있고 몇 년 내로 과장을 달 거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나름 인정도 받고 있다. 그런대로 성공한 인생인 것이다.
그는 오늘 퇴근길에 도깨비 시장에 들러서 벽조목으로 만들었다는 팔찌와 목걸이 세트를 사서 문구점에 들어가 포장까지 예쁘게 하고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나간 자리에서 이별 통보를 받았다.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냐고 따지지도 못했다.
“있잖아. 자긴 안정적이긴 하지만 더 볼 것이 없잖아. 결국 올라가 봐야 그 작은 회사에서 부장을 할 거야? 상무를 할 거야? 안 그래? 생각해 봤는데 자긴 미래가 너무 없는 것 같아. 그러니 우리 그만 만나자.”
이렇게 말하는 여자에게 회사가 커질 거라고 크게 성장을 할 거라고 그리고 그 회사에서 자신이 중추적인 역할을 할 거라고 말하지 못했다. 그래봐야 여자의 눈에는 회사 직원일 뿐일 테니까 말이다. 아마 여자는 회사 사장이나 후계자 정도는 되던가 아니면 개인 창업이라도 해서 뭔가 해 보려는 사람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하면서 어쩌다가 회식 자리에서 옆 테이블에 앉았던 여자와 얽혀서 애인 사이가 되었던 것인데 꼭 2년 만에 끝을 봤다.
스스로 만족했던 삶이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별 것도 아닌 것으로 보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게 하필이면 사귀던 여자였다는 것이 세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씨팔, 그냥 준다고 할 때 먹을 걸 그랬나? 더럽게 아깝네.”
세진은 그 동안 몇 번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잠자리를 하지 않은 것이 왜 그렇게 억울한지 몰랐다. 여자와 완전히 헤어졌다는, 그래서 다시 보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드는 생각이 따먹지 못했다는 아쉬움이라니, 세진 스스로 생각해봐도 그 여자를 별로 사랑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키키킥. 그러니까 여자가 그런 소리를 하지. 그 여자도 하고 싶었던 말은 그거였을 거야. 내가 자길 사랑하지 않는 것이 느껴져서 떠난다고 말이야. 암, 그랬을 거야. 그런데 낮 간지럽게 사랑이니 어쩌니 하는 말은 하기 싫으니까 미래가 어쩌고저쩌고 한 거지. 그래, 인정! 인정한다. 내가 널 안 사랑했나보다. 지금도 겨우 생각나는 것이 이따우니 말이다. 크크큭.”
실연당한 남자들이 꼭 해야 하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소주 몇 병을 혼자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세진은 혼잣말을 하고 고래고래 고함도 질렀다.
“씨이팔! 그래도 좋아 했잖아. 많이 아껴도 줬잖아. 그런데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내가 뭘? 뭐? 어쩌라고? 아냐 아냐, 그것이 내가 안 따 먹었다고 그런 걸지도 몰라. 은근히 주려고 하는데 안 먹으니까 그래서 그런 걸지도 모르지. 키키킥.”
한 손에 작은 쇼핑백을 들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세진의 걸음걸이는 의외로 많이 비틀거리진 않는다. 하지만 간혹 쇼핑백이 길에 서 있는 간판이나 자전거 같은 것에 부딪히며 신경을 거스른다.
“아 놔. 이건 왜 아까부터 지랄이야 지랄이.”
세진은 문 닫은 은행 앞 계단에 앉아서 쇼핑백에서 주섬주섬 물건을 꺼낸다. 그리고 포장지를 모두 벗겨 낸다.
벽조목으로 만들었다는 팔찌는 만 오천 원을 주고 산 것을 생각하면 좀 비싸다 싶지만 손가락 두 개 넓이에 새끼손가락 보다 조금 좁은 폭의 나무 판들을 이어 붙여서 만든 모습이 여간한 정성을 들인 것이 아닌 물건이다. 세진은 그것을 냉큼 팔목에 꼈다.
“좋네. 뭐, 버릴 거 없이 내가 쓰면 되겠고. 그럼 이 목걸이는 어쩌나?”
목걸이도 벽조목으로 만들었다고 하는 것인데 가운데에 엄지손톱 크기의 구슬 하나가 있고 좌우로 점점 작아지는 구슬들이 목걸이 띠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팔찌와 목걸이를 합쳐 3만원을 준 기억이 있으니 이놈도 만 오천 원짜리다. 둘 다 색이 짙은 갈색이라 남자가 한다고 해도 크게 웃긴 꼴은 아닐 것 같다.
여자친구에게 줄 선물로 산 것이지만 이젠 그 용도로는 쓸 수가 없는 물건이 된 거다.
세진은 목걸이도 목에 걸어 본다. 하지만 넥타이까지 하고 있는 세진의 목에 목걸이가 맞지를 않는다.
“에이 씨팔!”
술 먹은 놈들의 성격이 다 그렇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폭력적이 되는 거다. 하나에 만 오천 원이란 가격 따위는 생각도 나지 않는지 세진은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잡아서 후두둑 뜯어 버렸다.
나무 구슬들이 두르륵 떨어져서 세진의 허리와 사타구니로 쏟아진다.
그런 중에도 세진은 제일 굵은 구슬 하나는 용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잡아챘다. 술 취한 순발력으론 제법이라 할 일이다.
그런데 그 순간 세진은 발밑이 허전해 지면서 어디론가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어이쿠! 제엔장.”
세진은 전혀 상상치도 못하게 앉아 있던 바닥이 꺼지는 것과 함께 어디론가 떨어져서 처박히는 느낌을 받고는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
“씨팔, 개소리하고 있네. 내가 왜? 뭣 때문에? 지랄 마라. 난 그냥 나야. 세상이 망하건 말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라고. 망하는데 몇 백 년은 걸린다며? 그럼 그걸로 된 거 아냐? 어차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야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거면 된 거야. 나 죽은 후에 세상이 어떻게 되건 그건 나하고 상관없는 문제고.”
세진은 미친놈처럼 혼자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지금 상황에선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는 지금 지하 깊은 곳에 만들어진 공간에 와 있었다. 뭐 그럴 수도 있다. 어쩌다가 맨홀 뚜껑 열린 곳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하면 그래, 이해해 줄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세진이 와 있는 지하가 지구가 아닌 다른 행성의 지하라면 그건 이야기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세진은 팔목에 걸려 있는 아니 이제는 문신처럼 남은 팔찌를 노려봤다.
그것의 이름은 듀풀렉 게이트. 그것도 아주 최신 버전으로 만들어진 게이트 생성기란다. 듀풀렉 게이트의 원리는 아주 간단하다. 뭐 일단 마법이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로 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어처구니없는 작은 문제가 있지만 그래도 그것만 전제가 될 수 있다면 다음 이야기는 쉽다.
마법에는 차원의 틈 사이의 공간을 이용해서 창고로 사용하는 고차원적인 방법이 있다. 보통 그것을 아공간이라고 하는데 듀풀렉 게이트는 그 원리에서 시작된 돌발변수의 발명품이다. 마법으로 아공간을 만들려고 했는데 그렇게 열린 공간이 차원의 틈이 아니라 우주의 어느 한 지점이 된 것이다. 거기서 듀풀렉 게이트란 것이 생겨났다. 이쪽에서 아공간을 열었는데 저 멀리 있는 행성의 일정 공간을 창고처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으면 일순간에 이쪽 행성에서 저 쪽 행성으로 건너 뛸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원리로 탄생한 것이 듀풀렉 게이트라는 개념이란다.
그리고 세진이 팔에 차고 있는 팔찌는 벽조목 팔찌 따위가 아니라 아주 오래 전에 지구상에 누군가 던져 놓은 듀풀렉 게이트 생성기란 소리다.
문제는 그 생성기를 작동시키는 에너지가 지구엔 없다는 것이다. 아니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없었던 에너지가 생겨서 세진이 납치를 당하듯이 이름도 모르는 행성의 지하에 떨어진 것은 그 듀풀렉 게이트 생성기가 작동을 했다는 말이다.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술 마시고 집에 가는 길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