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vity 10000% Catastrophic Player RAW novel - Chapter 54
* * *
검은 폭풍이 다가와 이성우가 탄 배를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이성우야 그 정도로 힘든 건 없었지만,
옆에 있는 김병훈은 자세를 잡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이성우는 [거산]으로 배를 통째로 들어 올리는 한편,
본인도 [비행]을 발동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격류에서 벗어난 선원들과 김병훈이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걸 확인한 그가 자욱한 먹구름 소용돌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왔으면 모습이나 좀 드러내지, 그래?”
곧장 먹구름 소용돌이로부터 한 인영이 서서히 하강했다.
“포, 폭풍왕!”
선원들 가운데 누군가 외쳤고, 거기엔 단순한 감탄을 넘어 경외심까지 어려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뱃사람에게 폭풍은 가히 신의 분노라 해도 좋을 정도로 두려운 현상이니까.
세상 어떤 뱃사람에게 묻더라도, 백이면 백 가장 두려운 플레이어로 폭풍왕을 꼽을 터였다.
그러나 허공에서 서서히 내려와, 가까워진 폭풍왕을 바라보면서.
선원들은 고개를 갸웃하기 시작했다.
“저게······ 폭풍왕이라고?”
아니, 분명히 그가 몰고 온 건 폭풍.
그러니까 폭풍왕이 분명할 것이다. 분명해야 하는데······.
“저런 애송이가?”
누군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으나.
폭풍왕의 실물을 처음 보는 이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이 상상해왔던, 황금빛 비늘갑옷을 두르고 위협적인 삼지창을 든 중후한 중년인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었으니까.
일단 나이부터가 어렸다.
그와 마주한 이성우와 비슷해 보였으니까.
게다가 마치 물에 젖는 게 질색이라는 듯이, 투명한 우비에다 구멍이 송송 뚫린 크락스 샌들을 신었고.
드러난 살갗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타투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한마디로 ‘왕’이라는 별칭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격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은 건, 이전 회차에서 폭풍왕을 만난 적이 있는 이성우뿐이었다.
‘원래 플레이어들이라는 게, 상식으로 재단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그때, 이성우와 같은 높이에 이른 폭풍왕이 쓰고 있던 우비 모자를 벗었다.
귀에 주렁주렁 달린 피어싱이 햇빛을 받아 빛났다.
“저거, 네가 한 거냐? 아차, 가만있어보자. 영어로 해야 알아들으려나.”
무심코 노르웨이어로 운을 떼던 폭풍왕이 영어로 옮기기 위해 생각에 빠진 그때, 이성우가 답했다.
“상관없으니까 편하게 말해.”
“오호? 어떻게······ 하긴 그런 건 상관없지.”
폭풍왕이 뒤편의 우루프 섬을 가리켰다.
섬에 드러누운 아에기르의 사체 탓에, 섬의 실루엣은 종전보다 훨씬 커져 있었다.
“저거, 네가 한 거냐고.”
“그렇다면?”
이성우가 팔짱을 끼고 대답하자, 폭풍왕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전 회차에 T.S.C에 공략 물자를 구매하러 나타났을 땐, 훨씬 어둡고 진중한 분위기였는데, 이땐 좀 달랐군.’
그때 폭풍왕이 고객으로 나타났을 땐, 그가 활동하는 노르딕 5국이 멸망을 앞둔 시점이었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으니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물론 이탈리아가 균열에 잡아먹혀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 되긴 했으나, 인류는 아직 게이트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중이었다.
‘폭풍왕도 마찬가지일 테고.’
세상이 멸망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걸 알고,
절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건······ 이성우가 유일한 상황이다.
그렇기에 이성우는 여기까지 헛걸음했다는 이유로, 폭풍왕이 화를 낼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뭐야, 진짜네. 너, 강하구나? 특성이 뭐야? 저 커다란 놈을 어떻게 죽인 거지?”
폭풍왕은 눈을 빛내면서 질문 공세를 퍼부어댔다.
“아참, 참. 내 정신 좀 봐. 그런 걸 물으려면 내 소개부터 하는 게 맞겠지. 난 로크 브롬슨, 로크라고 불러. 특성이 폭풍왕이야. 보다시피, 폭풍을 제어할 수 있고.”
폭풍왕, 로크가 손바닥을 펼치자.
그 위에서 자그마한 먹구름이 회오리쳤다.
“나는 이성우. 중력을 제어한다.”
“중력? 저 거인을 눌러 죽이기라도 한 거야?”
“높은 곳에서 떨어뜨렸지.”
“호오, 재밌겠는데.”
흥미가 솟는 듯한 표정과 함께, 폭풍왕 로크에게서 투기(鬪氣)가 치솟았다.
이성우는 그 반응 하나로, 이 시점의 폭풍왕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피 끓는 호승심.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하며, 다른 강자와 맞붙어 제 위치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유형.
“너, 나랑 한 번 붙어보자.”
이어진 제안도 예상대로였다.
“서로 죽고 죽이자는 건 아니고, 실력이나 확인해 보자고. 하지만 그냥 맞붙은 건 재미가 없으니까. 내기를 하지. 어때?”
“내기?”
로크가 티셔츠의 늘어난 목을 당겨, 목걸이 하나를 꺼내 보였다.
“난 이걸 걸지.”
이성우는 그 물건을 한눈에 알아봤다.
‘[주신(主神)의 눈, 무닌]? 저걸 폭풍왕이 갖고 있었나?’
북유럽 신화의 최고신, 오딘과 얽힌 물건답게.
전설 등급에 특수한 효과까지 붙어 있는 아이템이었다.
‘저건 유용하겠는데.’
“자, 뭘 걸래? 내가 제안한 거니까, 넌 영웅급만 걸어도 인정해줄게.”
모양 빠지게 그럴 수는 없지.
이성우는 조금 전 바다거인 아에기르에게서 얻은 전설급 삼지창을 꺼냈다.
“난 이걸 걸지.”
“허, 세상에. 나한테 완전 딱 맞는 물건이잖아?”
폭풍왕은 역시 [아에기르의 삼지창]을 보자마자 눈이 돌아갔다.
“충고 하나만 하지. 이거 탐내지 말고, 다른 걸 알아봐. 더 잘 어울리는 물건이 있을 테니까.”
“그래? 어디에?”
“뭐, 가령 화룡의 둥지라든가.”
로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재밌는 친구네. 바다에서 힘을 발휘하는 나한테 웬 화룡?”
정말인데.
바이킹의 민족이라 그런가?
왜 ‘폭풍왕’이라는 특성을 들고서 바다에서만 싸울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고정관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힘을 키우고 아티팩트를 모았다면, 북유럽이 ‘영원한 겨울’을 맞이할 일도 없었을 터다.
“아무튼, 서로 베팅도 했겠다. 슬슬 맞붙어 볼까?”
목을 꺾고, 어깨를 돌리며 몸을 푸는 로크.
그에게 이성우가 물었다.
“규칙은?”
“항복하거나 전투가 불가한 상태가 되면 종료. 피차 목숨은 빼앗지 말자고.”
이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시―작!”
로크가 호기롭게 외치고서 폭풍을 불러일으켰다.
아니, 불러일으키려 했다.
“······뭐야?”
로크는 미간을 찡그리고 중얼거렸다.
이상했다.
그를 중심으로 회전해야 할 대기가 정상적으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바깥으로 튕겨 날아가듯 흩어지고 있었다.
“흐읍······!”
동시에 주변의 공기가 희박해지고 있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로크는 눈앞에 태연하게 떠 있는 이성우를 노려봤다.
“이것도 너야?”
이성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무중력.”
“하, 씨. 무중력에선 폭풍이 안 생겨?”
“뭐, 그렇지? 중력이 대기를 밀도 있게 붙잡아 줘야 힘있게 유동할 거 아냐.”
말을 마친 이성우가 손을 내밀었다.
“전투 불가, 맞지? 내놔.”
* * *
조금 뒤, 다시 배에 오른 이성우의 손엔 까마귀의 형상이 부조된 팬던트가 쥐어져 있었다.
『아이템 정보』
이름 : 주신의 눈, 무닌
등급 : 전설
효과 : 거짓 판별, 기억 판독(대상의 동의 필요)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든 정보와 지식을 수집하는 두 마리의 까마귀 중 하나. 무닌은 기억을 담당하며, 타인의 기억을 열람하거나 그 기억에 비추어 말의 진위를 가릴 수 있다.
‘기억 판독은 상대의 동의를 받아야 하지만, 거짓 판별만 해도 유용한 기능이다.’
협력을 약속하긴 했지만, 완전히 신뢰할 수는 없는 레라지에의 말을 걸러 듣는 데에도 요긴할 테고.
뭔가 다른 의도를 갖고 접근하는 인간이나 빌런을 걸러낼 때도 유용할 터.
“나, 참. 여태 이런 내기를 셀 수 없이 했고, 몇 번은 지기도 했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진 건 처음이야.”
의외로 순순히 패배를 인정한 로크가 허탈한 듯 말했고.
이성우는 손에 무닌을 쥔 채로 아이템이 지닌 능력을 사용했다.
『[무닌]의 [거짓 판별]이 해당 발언이 거짓임을 확인했습니다.』
“방금 그거, 거짓말이라는데?”
“벌써 써 본 거야? 이런······ 뭐, 그래. 각성 초반엔 몇 번 손도 못 써 보고 발린 적이 있어.”
『[무닌]의 [거짓 판별]이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좋아, 제대로 작동한다.
아이템이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이성우가 팬던트를 도로 로크에게 내밀었다.
“뭐야? 돌려주는 거야? 너, 진짜 좋은 녀석이구나?”
“아니, 잠깐 들어보라고.”
“······.”
로크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팬던트를 받아들자,
이성우가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가능하다면, 그리스 올림피아에 열려 있는 ‘제우스 신전 던전’을 공략해.”
“뭐? 갑자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설 아티팩트를 빼앗긴 사람에게 대뜸 던전을 공략하라니?
혹시 빼앗긴 게 아이템이 아니라 ‘자유’라도 되는 건가?
“네 특성이면, 아다만티움제 피뢰침을 충분히 만들어 가져가면 승산이 있을 거야.”
이성우는 로크가 들고 있는 팬던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무닌]의 [거짓 판별]이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뭐? 대체 무슨······.”
“그다음엔 베수비오 화산의 화룡 둥지를 공략해. 제우스의 번개를 폭풍에 실어서 죄다 튀겨버리라고. 거기서 얻을 아이템이 이 바다거인의 삼지창보다 네게 유용할 거다. 물론, 내 주관적 판단이지만.”
로크는 마른침을 꿀꺽 넘기고는,
다시 ‘거짓 판별’을 발동했다.
“······사실이라고? 아, 아니 그보다. 너는 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진짜 중요한 건, 너희 땅에 조만간 아주 춥고 긴 겨울이 닥칠 거라는 사실이지.”
『[무닌]의 [거짓 판별]이 해당 발언이 사실임을 확인했습니다.』
“······.”
“네가 그걸 막으려면 물질만 해선 답이 없어.”
이성우가 폭풍왕 로크에게 일러준 건, 뭐 그리 대단한 정보는 아니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이 언데드로 뒤덮인 영구 동토로 전락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본 로크 본인이,
화염계 공략 물자를 공수해가면서 털어놓은 회한의 내용을 일러준 것뿐이니까.
아직은 이성우 본인이 유라시아 대륙 저편까지 돌볼 여유가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기회의 단초를 건넨 것이다.
이전 회차와 같은 후회를 반복하지 않을 기회를.
어차피 제우스 던전이나, 화룡의 둥지에서 나올 아이템들은 자신에겐 필요하지 않으니 손해 볼 것도 없었고.
“너는 그런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미래를 보고 오기라도 한 거야?”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었겠지만,
그건 의외로 진실과 가까웠다.
“뭐, 비슷해.”
팬던트로 내려갔던 로크의 눈빛이 파르르 흔들렸다.
이성우는 손을 뻗어 팬던트를 도로 거둬들였다.
“큰 거 오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괜히 내기나 하고 다니다가 아이템이나 뜯기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배가 항구에 닿고 있었다.
“그럼, 기회 되면 나중에 또 보자고.”
풀쩍, 뛰어올라 부두로 내려서는 이성우를 좇아.
폭풍왕 로크가 허둥지둥 우현 난간으로 달라붙었다.
“이봐! 너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하지만 이성우는 대답하지 않고 멀어져갔다.
부두에서 탑승 계단을 대기를 기다리던 김병훈이 그 대답을 대신했다.
“그냥 한국에서 이성우, 그 이름만 대면 될 겁니다. 거기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한국?
그 이름을 들으니, 로크는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잠깐만, 저 사람이 혹시 그 측정 불가급······?”
“맞습니다.”
로크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같은 S급도 아니고, 측정 불가급 플레이어에게 전설급 아티팩트를 놓고 싸움을 걸다니.
이건 완전히 제발 제 것을 가져가 주십시오, 하고 두 손으로 바친 꼴 아닌가.
돌연, 로크가 머리를 긁던 손을 멈췄다.
아니다. 그걸로 얻은 게 있지 않은가.
전설급 아이템보다도 귀중한 ‘정보’ 말이다.
이성우의 말은 북유럽에 뭔가 일이 벌어질 거란 경고이자, 힌트였다.
‘제우스 신전과 화룡의 둥지를 공략해야 한다는 거고. 폭풍에 번개를 실으라고 했었지······.’
그 말은 곧 굳이 ‘바다’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는 뜻 아닌가.
‘그래, 폭풍이 대양에서 생긴다고, 물만 쓰라는 법은 없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 지어놓은 한계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가능성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던 로크는,
돌연 한가지 생각이 떠올라 미간을 구겼다.
“씨······ 그렇게 벼락을 몰아치고, 화염 폭풍을 일으킬 수 있게 된대도 저 자식이 무중력 쓰면 끝나는 거 아니야?”
분명 그럴 게 뻔해 보였지만, 로크는 마음을 다잡았다.
“나중에 꼭 다시 도전한다. 그 겨울인지 뭔지 오지 않기만 해 봐라.”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우현에서 좌현으로 달려가, 물로 뛰어든 그는.
다시 폭풍 날개를 불러내 바다를 건너기 시작했다.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가, ‘제우스 신전’ 던전의 공략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이때만 해도 이성우는 알지 못했다.
이날 로크에게 던져준 약간의 힌트가, 세계 정세를 이전 회차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빚어내는 계기가 되리라고는.
이전 회차에서 온 세상이 송두리째 재앙의 불구덩이로 떨어졌던 전개는, 중요한 분기점을 지나고 있었다.
* * *
이성우가 다시 한국 땅을 밟은 건,
단 13시간 만이었다.
비행기로 왕복 8시간, 배로 왕복 4시간이 걸린 걸 감안하면 실제 균열 공략에 투입한 시간은 1시간에 불과했다.
사할린 출발 전 연락을 받은 원승호는 공략 완수 보고를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더니.
착륙 즉시 별도 채널로 수속을 밟을 수 있도록 조치해주었다.
더불어 정부 마크가 붙은 으리으리한 리무진까지 보내주고.
끼익―
“이성우 플레이어님? 모시러 왔습니다.”
그런데 차 안엔 뜻하지 않은 동승자가 이성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혀, 형님!”
성요한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원승호가 보내준 관방부 리무진에 왜 성요한이?
뜻밖의 상황에 이성우는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반쯤 울먹거리고 있는 성요한의 상태를 보고 대강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성요한은 품에 웬 물건을 이불로 둘둘 싸맨 채 들고 있었는데, 이불자락 사이로 푸른 이파리가 언뜻언뜻 비쳤다.
그런데······ 그 크기가 심상치 않았다.
────────────────────────────────────
────────────────────────────────────
54. 신단수, 검은 물결(1)